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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 영 ZERO 零 소설, 향
김사과 지음 / 작가정신 / 2019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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구판절판


한 남자애가 생각났다. 이유 없이 나를 사냥하던 그 남자애. 교활하고 영악하고 친절하던 그 애. 메스꺼웠다. 주인공이 그 남자애 같아서. 한편으로는 아팠다. 나도 누군가에게 그 남자애가 아니었을까 하고. 우리는 가해자이면서 피해자이다. 정체성이 저글링된다.
주인공은 소시오패스다. 솔직하게, 그리고 유려하게 고백해서 헷갈리지만, 확실히 미쳤다. 좀 더 약하지만 비슷한 버전을 우리 주변에서도 찾을 수 있다. 피 튀기는 것 없이 잔인하다. 내 주변에 이런 사람이 있다면... 이라는 생각을 시작하면 무서워진다. 소설 속 인물 묘사가 정말 자세하다. 인간이 가질 수 있는 악에 대해 잘 설명한다. 못된 심리의 밑바닥까지 해석한다. 표현법도 내가 감당하기 버거운 과감함이었다.

문장이 아름다운 것도 아니고, 엄청난 힘을 주거나 통찰이 있는 것도 아니다. 그럼에도 통쾌하고, 그럼에도 독자를 끌고 간다. 어디서 나온 힘이지? 우선 이야기의 구성이 탄탄하고, 자연스럽다. 비유법도 특이하다. 기존의 소설가들이 잘 비유하지 않는 것에 비유한다. 비주류라기보다는 잊혀진 것들에 비유하는데, 이해는 쏙쏙 된다. 그럼에도 교훈적인 이유는, “잡아먹히지 않으려면 부지런히 머리를 굴리고, 몸을 굴려야 한다.”는, 이 소설의 문장이자 전체적인 메시지 때문이다.

음침하고 축축한 비 오는 날의 지하주차장 같은 소설이다. 한 번 들어가면 텍스트를 모두 경험하기 전까지 빠져나올 수 없어진다. 텍스트가 아니라 퀘스트 같다. 궁금하게 하고 승부욕을 자극한다. 무엇보다 다 안 읽으면 찝찝할 것 같다. 1부를 어젯밤 자기 전에 읽었다. 잠들기 전부터 깨어있는 동안 궁금해 미치는 줄 알았다. 오늘 일과를 마치자마자 소설을 펼쳤다. 미친 듯이 읽었다. 내게 이런 소설이 여태 딱 두 권 있었다. 한강의 <채식주의자>와 조남주의 <82년생 김지영>. 조금 다른 방식이지만, 짜증 나게 좋았다. 작가의 앞으로가 궁금해진다.

책 속의 문장
✔️내 말은, 아돌프 히틀러가 되라는 것이 아니다. 엄청난 부자나 카사노바가 되라는 뜻도 아니다. 그저 아주 평범한 수준에서, 아주, 소박한 수준에서의 삶의 안락함과 편리함, 매일매일의 안전과 기쁨에 대해서 나는 말하고 있다. 알다시피 나는 많은 것을 바라지 않는다. 별다른 큰 욕심도, 대단한 야심도 없다. 나는 오직 지금과 같은 수준의 안락함, 지극히 평범한 수준의 삶, 그 안의 행복을 바란다. 그것이 나쁜 바람인가? 왜? 지극히 상식적인 수준의 요구다. 바로 그런 상식적인 수준의 인생을 위해서 이따금 타인들을 사용하는 것을 겁내지 말라는 것이 지금 내가 말하고자 하는 바다. 알아듣겠나?

✔️이렇게 크고 작은 실망들이 내 보잘것없는 인생 여기저기 놓여져 있다. 하지만 다음이 있겠지. 더 밝은 미래가 있겠지. 어딘가에, 강철 같은 영혼의 이데아가…… 있겠지?

✔️약속 시간이 5분 지난 시점 언제나처럼 나밖에 도착한 사람이 없다. 카톡으로 늦는다, 미안하다, 핑계들이 줄줄 쏟아지고, 30분쯤 뒤에야 하나둘씩 칙칙한 얼굴을 들이대기 시작할 것이다. 그것을 알면서도 나는 언제나처럼 정시에 도착하여 이렇게 쓸데없는 생각들을 늘어놓고 있다, 약속 시간에 딱 맞춰 오고 마는 이 바보 같은 습관은 전혀 고쳐지지가 않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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굿바이, 편집장
고경태 지음 / 한겨레출판 / 2019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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솔직하다. 이 책에 가장 어울리는 수식어는 ‘솔직함’이다. 진솔하다, 대범하다, 정직하다도 아닌 솔직하다, 라는 감상평을 가장 먼저 둔 것은 기자님의 태도나 문체가 그러하다. 그래서 말에 오해할 수도 있고, 말이 정확해서 찔릴 때가 있지만 말에 날이 서 있진 않았다. 민감한 문제에 대해서 말할 때도 거침 없었고 자신의 실수를 회고하기도 하며, 동료의 몫을 깔끔히 인정하고 자신의 몫을 정확히 아는 기자님의 태도가 색다르고 남달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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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자님이 편집장의 위치에서 스스로 던지는 질문들이 우리 사회에 던지는 질문이기도 하고, 언론인, 출판인, 저자 등 글을 다루는 직업군에 속한 사람들이 자기 점검을 할 수 있는 물음이기도 했다. 또한, 자신이 편집장으로서 한 경험을 가감없이 밝히기 때문에 앞서 말한 사람들이 어떻게 일을 할 것인가에 관한 지침서 같기도 했고, 조직 생활을 하는 사람들, 신입사원에게는 앞으로의 삶에 있어서, 퇴직을 앞둔 사람들에게는 지난 삶에 있어 도움이 될 책이 분명했다. 특히 취준생인 나에게 기자님이 사회는 이런 곳이라고 알려주는 것 같아 정신이 바짝 들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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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목의 배열방식이 아쉽다. 여백을 많이 두어 가독성을 높이고, 파트를 나누거나 제목을 부여하는 방식 모두 매력적이었다. 하지만, 두 제목을 같은 열에 두면 더 깔끔하여 좋았을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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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속의 한줄
‘언제’라는 대명사가 앞에 붙는 ‘차나 한잔’의 시제는 머나먼 미래다. “언제 차나 한잔.” 차를 마시자는 것인가 말자는 것인가. 이 말은 “차나 한잔. 언제?”와는 명백히 다르다. “언제 차나 한잔”은 ‘언제’를 묻지 않는다. 그것은 기약 없는 기다림이다. (중략) 나는 그러지는 않았는지 되돌아본다. 언제 밥이나 한번, 언제 점심이나 한번... 이것은 회색빛 도시의 따뜻한 비극이 아니라, 미지근한 비극이다. 찬물도 아니고 더운물도 아니어서 느낌표가 붙지 않는 비극이다. 동양적이고 한국적인 미담이 아니라, 침묵이 어색한 자들의 무의미한 미끼일 따름이다. 불확실, 불투명, 시점을 알 수 없는 공허한 약속. (p.133-13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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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전을 사는 이에게 오후도 미래다 - 삶을 버티게 하는 가치들, 2019 12월 국립중앙도서관 사서추천도서, 2020 원북원부산 선정도서
이국환 지음 / 산지니 / 2019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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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이 책을 독서에세이라고만 분류하기에는 아쉬움이 컸다. 독서를 통해서 얻은 깨달음이 이 책에서는 주를 이뤘지만, 작가의 삶의 경험이 뒷받침되지 않았다면, 작가의 관찰이 세심하지 않았다면 이러한 결과물이 나오지 않았을 것 같다. 앞서 이 책을 독서에세이 장르로만 말하기에 아쉽다고 한 것은, 이 책이 인간의 마음에 대해 너무나 잘 통찰하고 있기 때문이었다.

두고두고 읽기 위해 좋았던 부분은 포스트잇으로 표시해두는데 다 읽고 보니 이미 너무나 많은 포스트잇들이 붙여져 있었다. 이 책에서 가장 좋았던 점은, 마음에 대한 고민을 담았기 때문이었다. ‘외로움은 견디는 것이고 고독은 누리는 것’, ‘두려움은 자신의 입장에서, 연민은 타인의 입장에서 고통을 느끼는 것이다.’ , ‘자존심이 타인에게 인정받고 싶은 욕구라면, 자존감은 있는 그대로의 자신을 존중하고 사랑하는 마음이다.’ 등과 같이 깊은 통찰이 느껴지는 문장들이 너무나 많았다.

하지만 무엇보다도 이 책에서 가장 궁금했던 점은, 왜 제목을 오전을 사는 이에게 오후도 미래다.’라고 지었을까, 였다. 그래서 좋았던 많고 많은 글 중 나는 이 책의 제목이 왜 오전을 사는 이에게 오후도 미래다인지 설명해주는, ‘불안은 영혼을 잠식하는가를 가장 인상 깊은 글로 꼽아보았다.

살아보면 인생은 결국 불안한 자유와 안정된 구속 중에 하나를 택할 수밖에 없는 듯하다. 세상에 안정된 자유는 없다. 모든 자유는 불안하며 모든 안정은 곧 구속이다.” (p.130)

 

자신의 시간을 마음대로 조율 가능하다는 점에서, 그리고 글 쓰는 직업은 상당 부분 프리랜서가 많다는 점에서 나는 안정된 구속보다는 불안한 자유가 있는 삶을 동경해왔었다. 하지만 4학년이 되고서 취업 준비생의 길로 들어서 보니 자유가 없는 불안만이 나에게 덩그러니 남겨져 있었고 불안이 잠식한 나의 뇌는 논리적인 생각이 불가능해졌다. 그로 인해 14년간 간직해왔던 내 꿈이 맞는 건지 자꾸 세상의 잣대에 나를 끼워 맞추려고 하며 내가 하고 싶은 것보다 남들의 시선이나 기준에 나를 끊임없이 비교·분석했다. 나의 꿈을 진정으로 응원해주는 주변 사람들이 없었다면 나는 아마 안정된 구속을 향해서 속력은 빠를지 몰라도 방향은 명확하지 않은 상태로 어떤 시험을 준비하고 있었을 것이다. 지금은 나에게 의미 있는 일을 찾아서 하고 있지만, 하루에도 마음이 몇 번씩 바뀌던 나라 평정심을 되찾기란 무척이나 어려웠다.

 

그러던 와중 이 책의 위 구절을 만났다. 책을 읽기 전, 불안을 잠재우는 정도였다면 읽은 후엔 내가 가진 불안이 실은 누구나 겪는 과정이며 선택이라는 사실이 나를 위로했다. 불안이라는 감정은 이기는 것이 아니라 공존하는 것임을 깨달았으며, 내가 가진 불안은 괜찮지만, 불안이 가진 나는 괜찮지 않다는 사실을 나름대로 확립했다. 그동안에 불안에 대해 알고 싶어서 읽었던 몇 권의 뇌과학책보다 독서 에세이 한 권, 그것도 그 중 한 편의 글로 인해 내 마음이 나아질 거란 기대는 솔직히 못 했었는데 말이다. 과거로부터 비롯된 나의 불안이, 나의 현재를 바꿀 뻔한 경험을 떠올리며 이 책의 의미를 확실히 공감하게 됨은 물론이고, 오후를 사는 이에게 그저 오전은 과거일 뿐이라는 생각을 하며 지나간 일에 지나치게 신경쓰지 않기로 마음 먹었다.

 

책에서 편집이라는 것의 비중과 그 중요성을 어렴풋이 알게 된 후로, 책을 읽을 때마다 나름의 편집 방향을 혼자 생각해 보게 되었다. 부족하지만 이 책에도 보완했으면 좋겠다고 생각하는 편집들이 있었다. 우선, 이 책의 표지 컬러인 민트색은 심장 박동 수를 느리게 해서 진정해주는 효과가 있다. 저자의 차분한 문체에 차분함을 또 더한 것이 아닌가 싶었다. 차라리 소설이었다면 전체적 분위기를 대변해주는 역할을 했겠지만 에세이라는 장르적 특성에서 봤을 때, 민트보다는 책의 내용이나 저자의 에토스와 어울리는 핑크 계열이나 리빙코랄이 표지색이었으면 어땠을까 싶었다. 이 책의 부제 삶을 버티게 하는 가치들또한 따뜻한 컬러가 더 어울린다.

또한, 맨 앞에 여는 글이 있는데 그보다는 닫는 글이 존재했으면 어땠을까 싶다. 이 책을 읽기 전보다 읽고 나서 아쉬움이 더 크기 때문이다. 궁금해서 빨리 읽고 싶기 위함도 있지만, 한 장 한 장 넘기기 아쉬운 책을 다 읽고 난 독자에 대한 배려랄까. 그도 아니면 중간에 엽서의 형식으로 작가의 글이 따로 존재했어도 좋았을 것 같다. 책을 읽는 내내 떨쳐버릴 수 없었던 생각은 이 책이 꼭, 작가의 주변 사람에게 알려주고픈 삶의 지혜나 깨달음을 전해주는 느낌이 강했다. 논리적이면서도 온도가 높은 문체 때문이었을 것이다. 끝으로 카드 뉴스 형식으로 책 속의 문장을 소개한다면 마케팅에 도움이 되지 않을까 싶었다. 이 책에는 너무나 탐나는 문장들이 많았기에 아쉬움에 독자로서 이런저런 생각들을 끄적여보았다.

"살아보면 인생은 결국 불안한 자유와 안정된 구속 중에 하나를 택할 수밖에 없는 듯하다. 세상에 안정된 자유는 없다. 모든 자유는 불안하며 모든 안정은 곧 구속이다." (p.13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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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전을 사는 이에게 오후도 미래다 - 삶을 버티게 하는 가치들, 2019 12월 국립중앙도서관 사서추천도서, 2020 원북원부산 선정도서
이국환 지음 / 산지니 / 2019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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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랜만에 만난 따뜻한 문장, 온도 높은 문체와 수필가였다. 책 읽는 동안 후회 없는 시간이 될 거라 믿어 의심치 않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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