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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지막 편지
마르셀 소바죠 지음, 백윤미 그림, 김문영 옮김 / 샘터사 / 2004년 6월
평점 :
절판
배반을 당하는 것은 정말 쓰다. 말로 표현할 수 없는 억울한 심정에, 겉으로는 정의를 부르짖지만 사실 마음 속으로는 무언가 아주 중요한 것이 무너져내려서 다시는 일어설 수 없을 것 같은, 거의 물리적인 쇠약함을 느낀다. 그리고 여러가지가 찾아온다. 분노, 무력감, 열등감, 복수심, 갈등, 체념, 미련... 이루 다 열거할 수 없는 온갖 더럽고 괴로운 감정들에 휩싸여 한동안 정신을 차릴 수 없다. 혼자 울기도 하고, 낯선 곳으로 여행을 떠나기도 하고, 상처를 달래려고 안간힘을 쓴다. 그리고 무엇보다도 정말 창피한 자기연민이 찾아와 사람을 가만 놔두질 않는다.
그러나 한 달이 가고, 반 년이 가고, 길어야 1년이 지나면 상처는 아물고 눈물도 마른다. 그럼 우리는 또 일상으로 돌아가 다시는 사랑을 하지 않겠다는 자신과의 약속을 깨고 다른 사람을 만나기 시작한다.
그러나 만약 생명이 얼마 남지 않았다면. 시원하게 복수를 할 시간도 없이 치유할 수 없는 병을 이겨내지 못하고 사형선고를 받은 채 죽어가야 한다면. 그 쓰라린 배반도 다른 모습으로 다가올 것이다.
마르셀 소바죠는 이렇게 말한다.
"버림받은 사람들은 분노하고, 저주하고 복수를 꿈꾼다. 하지만 복수의 기회는 끝내 오지 않거나, 모든 것을 잊어버린 다음에야 뒤늦게 찾아오곤 한다. 복수를 하려면 지금 해야 할 것이다. 아직 내게 남아있는 사랑이, 그에게 내 자신을 바칠 수 있는 힘을 주고, 어쩌면 그를 다시 찾을 수 있을 수 있으리란 헛된 희망을 품게 해주니까. 하지만 이제 나의 사랑은 그의 가슴에 아무런 힘도 발휘할 수 없다."
병에 걸린 여자를 요양소로 보내고, 남자는 파리에서 새로운 여자를 만나 결혼을 예정한다. 그리고 홀로 요양소에서 투병하고 있는 여자에게 '친구로 남자'고 제의한다. 가장 악랄한, 가장 비열한 제안이다.
여자는 죽음의 문턱에 설 때까지, 사랑과 배반에 대해서, 여자와 남자에 대해서, 그리고 행복에 대해서 생각한다. 자신의 몸을 직접 해부하는 냉정한 외과의처럼 조금의 자기연민도 없이 고통에 몸부림치는 자신을 내려다보고 진단하고 수술한다. 그 의연하고 당당한 모습에서, 서문을 쓴 샤를르 뒤보스는 '아우구스티누스적 명상'의 고결한 품위와 깊이를 발견한다.
사랑하는 사람이라면, 배반의 그 더러운 감정을 경험해 본 사람이라면, 죽는 순간까지 인간으로서의 존엄을 꾿꾿이 지킨 이 투쟁의 기록을 읽어볼 일이다. 슬픔 속에서도 소름 돋는 의연한 감동을 느낄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