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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년의 철학 - 희망 없는 시대, 반항하는 철학
장현정 지음 / 호밀밭 / 2009년 7월
평점 :
절판
기원전 12세기경, 그리스 연합군이 트로이를 멸망시킴으로써 문명의 중심이 동방에서 서방으로 이동하며 그리스의 찬란한 문화가 꽃피우는 듯했다. 하지만 철기 문명을 장착하고 침입한 도리아족에 의해, 그리스는 기원전 8세기까지 암흑기를 맞이해야만 했다. 그 어떤 역사적 기록이나 흔적들도 없이 모조리 사라진 것이다. 하지만 단 두 편의 시로 이러한 암흑기를 깬 시인이 등장한다. 바로 호메로스였다. 그가 노래한 두 작품을 통해 다시금 그리스 문명이 시작되고, 이는 서양문화의 토대가 된다.
이 중 한 작품인 '오디세이아'는 트로이 전쟁의 영웅 오디세우스가 약 10년간 지중해를 표류하며 겪는 다양한 경험에 대한 이야기인데, 현대의 관점에서 그리 짜임새 있는 구성도 아니고 기승전결의 구조에서도 한참은 벗어나 있다. 결말을 보더라도 '권선징악'이라는 식상한 교훈을 생각해 볼 수 있긴 하지만, 그런 이야기들이야 얼마든지 많다. 어째서 이 작품은 '일리아스'와 더불어 서양문화의 토대가 될 수 있었던 걸까. 이 작품에는 도대체 어떤 의미와 어떤 정신이 깃들어 있는 걸까. 이러한 의문을 품던 차에 「소년의 철학」이라는 작품을 만나게 되었다.
「소년의 철학」은 부조리한 현실에 반항하며 투쟁을 계속하는 저자의 사유로 가득 차 있는 책이다. 저자는 이러한 태도가 철학에서 나오는 것이라 하며, 비슷한 생각을 가지고 함께 맞서 싸우려는 그 집단을 '소년'이라 칭했다. 하지만 알다시피 '소년'은 아직 힘이 있는 나이가 아니다. 어른들이 정해놓은 틀에, 부조리한 사회의 모습에 당당하게 투쟁의 한 걸음을 딛지만, 대부분 실패로 돌아가고 만다. 저자의 말대로 치기 어린 소년의 운명은 '백전백패'일 수밖에 없다.
실제로 우리를 둘러싸고 있는 이 현실은 모순과 부조리 그 자체이다. 인간이 살아남기 위해 집단을 만들었고, 집단이 모여 사회가 되었는데, 인간은 어느새 '사회적인 동물'로서의 그 의무로 인해 개인의 삶이 희생당하고 있다. 힘든 현실을 버티기 위해 종교를 만들었는데, 오히려 종교로 인해 인간이 서로 갈라지고 전쟁을 하는 사태에 이르게 되었다. 미시적 관점에서 보더라도 마찬가지다. 좋은 대학교만 입학하면 마치 인생의 성공이 보장될 것이라는 잘못된 믿음은 오늘도 수없이 많은 청춘들을 오로지 시험 문제만 푸는 기계로 만들고 있다. 대학은 어느새 학문적 탐구를 위한 공간이 아닌 취업을 준비하는 학원쯤으로 전락해버렸으며, 대부분의 청년이 오로지 높은 연봉과 안정성만을 따지며 자신의 젊음을 돈에 팔릴 수 있도록 이리저리 꾸며대기 바쁘다. 철저하게 자신을 죽일수록, 타자의 욕망에 충실할수록 흔히 말하는 '성공'에 가까워질 수 있다고 믿고 있다.
이렇게 복잡하고 어려운 문제를 오로지 한 가지 처방만으로 해결할 순 없다. 하지만 '해결'이 아닌 '진단'에 초점을 맞춘다면, 지금 우리에게 결핍된 게 무엇인지에 대해 어렴풋이 예상해 볼 수 있다. 바로 '생각'이다. 철저하게 자신을 죽여야만 간신히 버틸 수 있는 현실 속에서 우리는 '생각' 자체를 거부하고 있다. 한편으론 이것이 우리가 스스로를 잃어버린 까닭이기도 하고, 이 부조리한 현실 속에서 다시금 우리 자신을 찾기 위해 가장 우선시 돼야 하는 작업이기도 하다. '생각'이 시작되면 '철학'이 만들어진다. 나의 머릿속에 철학이 자리 잡기 시작하는 그 순간, 사회와의 싸움은 불가피 할 수밖에 없다. 타자의 욕망이 아닌 나의 욕망에 충실하게 되고, 저자의 표현대로 '우리 안의 모든 굳은 체념들을 되살리고 피를 돌게' 한다. 사회를 향한 반항과 투쟁. 현실이 아닌 이상을 추구하고 자신의 욕망에 충실한 모습은 '소년'과 닮아있다. 우리는 그렇게 철학을 시작하고, 소년이 되는 것이다.
하지만 이러한 치기 어린 싸움이 아무래도 불안하다. 저자 역시 사회에 적응해 살아가는 죽어있는 인간을 향해, 오로지 질서만을 강조하는 사회를 향해, 오로지 효율만을 따지는 자본을 향해 소년다운 철학적 사유를 바탕으로 일침을 가하지만, 이들은 꼼짝도 하지 않는다. 오히려 이러한 부류들이 잘 되는 모습을 볼 때면, 무엇이 옳은가에 대한 근본적인 의문을 품게 된다. 우리는 정녕 이길 수 없는 싸움 속에서 그저 발버둥만 치다가 결국은 굴복하고 마는, 그런 운명일 수밖에 없는가. 정녕 우리 철학적인 소년들은 '백전백패' 일 수밖에 없는가. 자신의 복부로, 자신의 온몸으로 상처 입고 피 흘리며 뒹굴고 쓸리면서 조금씩 나아가는 우리들은, 단박에 어디론가 뛰어넘는 이들의 모습을 그저 지켜볼 수밖에 없는가.
어렴풋이 오디세우스의 모습이 보인다. 신이 인간을 지배하던 그 시절, '너는 절대 고향으로 돌아갈 수 없다'라는 신의 말에도 보란 듯이 당당하게 돛을 올리는 그의 모습이 보인다. 절대자의 뜻에 거역하고 온갖 고난과 역경을 겪으며 마침내 자신의 목표를 성취한다. 단테에 의해 지옥으로 떨어졌음에도 '태양의 뒤를 쫓아 사람이 없는 세계를 찾아가려는 용기 있는 마음을 거역하지 말아달라'며 중세의 그 칠흑 같은 어둠을 걷어내고 르네상스를 일으킨다. 그리고 마침내 영국 시인 알프레드 테니슨에 의해 되살아난다. '숨 쉬는 것이 사는 것인가'라며 똑같은 일상에 지친 그는 '비록 잃은 것은 많아도, 아직 남은 것도 많다'며 다시금 옛 동료들을 모아 어딘지 모를 장소를 향해 돛을 올린다.
그의 모습 속에서 소년이 보인다. 백전백패의 운명 속에서도 기꺼이 앞을 향해 한 걸음 내딛는 그는 분명 소년이었다. 기원전 8세기경, 호메로스가 '오디세이아'를 노래했던 바로 그 순간, 철학이 시작되었고, 소년의 역사가 시작되었다. 그리고 3000년에 가까운 시간이 흘러, 오디세우스와 소년과 철학은 다시금 되살아난다. '결코, 닿을 수 없고, 품을 수 없음을 알면서도 기필코 나아가는 무모함이야말로 소년의 철학이며 희망 없는 시대 우리에게 주어진 운명이기 때문'이라는 저자의 말 속에서 오디세우스의 그 당찬 기운이 느껴진다. 세상과 맞서 싸운 이들은 '오디세우스적' 일 수밖에 없을 테다. 우리의 삶은 어쩌면 '오디세우스적'이냐 아니냐로 나뉘어 질 지도.
철학이 필요한 시대, 이러한 소년들이 무수히 나타나길 고대해본다. 아니, 그 전에 저자와 마찬가지로 나 역시 소년을 사랑하며, 더 나아가 소년으로 살아가길 꿈꿔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