손잡고 허밍 호밀밭 소설선 소설의 바다 1
이정임 지음 / 호밀밭 / 2016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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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간은 자연이 일부라고 흔히들 말하곤 하지만, 우리가 살아가고 있는 현실을 보면 대부분의 인간은 딱히 그렇게 생각하지 않는 듯하다. 인간의 역사는 곧 정복의 역사였다. 이 정복의 대상은 같은 인간일 때도 있었지만, 대개는 자연이 그 대상이었다. 다른 동물들에 비교해 신체적으로 그다지 유리한 조건이 아니었던 인류의 조상들이 냉혹한 자연에 맞서 살아남기 위한 끊임없는 발버둥을 쳤기에 지금의 우리가 지금 존재할 수 있긴 하겠지만, 어쨌든 그 발버둥은 그다지 우아하지 않았다. 그리고 이러한 우아하지 않은 발버둥은 지금까지도 이어지고 있다.

인간은 살아남기 위해 늘 자연과 맞섰고, 그 결과 표면적으로 보면 당당히 승리했다고 할 수 있겠다. 주위를 둘러보면 죄다 인간이 만든 건물이다. 모든 것이 인간의 욕망에 맞게, 편의에 맞춰서 변화되었다. 인간을 위해서라면 그 어떤 생명에 대해서도 자비가 없다. 일단 인간의 욕망이 우선이고 모든 것은 그다음이다. 이것을 함부로 '이기심'이라고 말할 순 없다. 수십억 년 지구의 역사에서 주인은 늘 바뀌었다. 인간은 그저 지금의 시대에 권력의 정점에 있을 뿐이다. 하지만 그럼에도 우리는 생각을 해야 한다. 그 어떤 존재보다 폭력적인 존재가 되어버린 지금의 현실에서, 우리가 잃고 있는 게 무엇인가에 대해서 말이다.

'손잡고 허밍'은 꽤 암울해 보이는 미래를 배경으로 하고 있다. '둠스데이(doomsday), 지구 최후의 날'을 대비하기 위한 계획도시는 '둠스데이 프레퍼스'라고 인류 멸망을 준비하는 사람들이 모여 사는 곳이다. 남들이 여가생활을 즐기는 동안 그들은 닥쳐올 비상 상황에 대비해 개인 벙커를 짓고 비상식량을 갖추고 있다. 일종의 '생존 도시'라고 할 수 있는데, 이곳에 주인공인 '나'가 입주민으로 들어와 '구남씨'를 만나면서 이야기가 시작된다.

이러한 도시 속에서 살아가는 소설의 주인공들은 각자 아픈 기억을 가지고 있다. 구제역으로 수백만 마리가 생매장당하는 모습을 보고 더는 글을 쓰지 못하고 있는 그녀와, 사라져가는 대나무 숲의 소리를 녹음하며 꺼이꺼이 울고 있는 그의 모습이 묘하게 겹쳐진다. 시장의 피해를 줄이기 위한 사회로 인해, 좀 더 많은 건물을 짓고 땅을 개발하려는 사회로 인해, 이들은 좀처럼 회복할 수 없는 깊은 상처를 받은 것이다. 아니, 정확히 말하면 '사회'가 아니라 인간의 무한한 '욕망'이다. 돼지와 소를 오로지 인간이 먹을 고기를 얻기 위한 수단으로만 사육하다가 문제가 생기가 가차 없이 모두 생매장시켜버리면서 시장을 지키기 위한 욕망, 자신들의 활동반경을 보다 넓히고, 건물을 지어 보다 많은 돈을 벌고, 좀 더 좋은 집에서 살고 싶다는 욕망. 이러한 욕망의 희생양은 일차적으로는 자연이었고, 이차적으로는 인간이었다. 인간의 욕망이 결국 인간 그 자신을 향하기 시작한 셈이다.

숲의 소리를 듣고 싶으면 숲속에 가면 된다. 하지만 인간의 욕망으로 인해 숲은 사라져 버렸고, 여기에 위기의식을 느꼈던 한 사람의 노력으로 인해 그 소리만이 녹음되었다. 숲을 파괴하고 지은 건물 안에서 불면증에 시달리면서 잠이 들기 위해 녹음된 그 소리를 듣게 되는 것. 이것을 과연 진보라고 할 수 있을까. 우리들의 삶의 질이 더 나아졌다고 할 수 있을 것인가.

하지만 그럼에도 인간에게는 파괴의 욕망, 정복의 욕망만 있는 것은 아니다. 인간의 파괴적인 욕망에 맞서 싸우겠다는 욕망도, 자신이 소중히 생각하는 걸 지키겠다는 욕망도 존재한다. 그녀가 예전부터 글쓰기와 관련된 일을 하다가, 돼지들이 생매장당하는 모습을 보고 더는 글을 쓰지 않은 것은 일종의 저항이었다. 그가 사라지는 대나무 숲의 소리를 녹음한 것 역시 하나의 저항이었다. 인간의 그 무한한 욕망을 완전히 막을 순 없지만, 세상을 바꿀 순 없지만, 자신의 방식대로 당당히 맞선 것이다.

인류의 역사가 곧 정복의 역사, 파괴의 역사라고 하지만 이러한 저항 역시 늘 존재해왔다. 대표적으로 데이비드 소로의 '월든'은 한창 자연을 개척하고 물질문명으로 나아가던 미국을 배경으로, 한 호숫가에서 자연을 벗 삼아 홀로 살아가면서 물질문명과 인간의 탐욕에 대해 지적을 했던 작품이다. 결과적으로 미국은 지금 물질문명의 중심 그 자체가 되었기에 이 작품이 커다란 흐름을 막지는 못했다. 하지만 그럼에도 '월든'이 있었기에 문명은 조금은 더 인간적인 방향으로 나아갈 수 있었다. 인간 자체가 불완전하기에 인간이 만들어낸 사회, 법, 사상, 욕망 역시 불완전할 수밖에 없다. 그렇기에 계속해서 다듬어져야 한다. 결국은 큰 흐름대로 흘러갈 수밖에 없지만, 그 흐름에 맞서는 노력은 반드시 있어야 한다. 아니, 이 또한 인간의 본능이자 욕망이다. 저항의 욕망, 투쟁의 욕망이 바로 그것이다.

대부분의 사람은 파괴의 욕망, 정복의 욕망에 동조하거나, 아니면 무관심하거나 자신이 어쩔 수 없다며 무기력에 빠지곤 한다. 이 소설의 주인공인 '나' 역시 처음에는 무기력의 늪에서 빠져나오지 못하고 있었다. 하지만 '구남씨'를 만나 그의 손을 잡고 무기력에서 헤어나와, 함께 한 걸음 나아가는 모습 속에서 '공동체' 혹은 '연대'의 힘을 실감할 수 있다. 혼자서 투쟁하는 건 힘들지만, 누군가에게 손을 내밀고, 손을 잡고 함께 투쟁하는 그 순간이 바로, 변화의 시작이다.

"이 씨앗이 지금은 작지만요. 제 땅이 손바닥만 하지만요. 얼마든지 클 수 있으니까요."

개발로 인해 파괴되어버린 숲속에 씨앗 하나를 심는다. 씨앗은 곧 투쟁의 시작이다. 이 씨앗에서 얼마나 예쁜 열매가 자랄지 궁금하다. 언젠가는 폐허가 되어버린 이곳도 다시 아름다운 숲으로 변할 수 있다는 생각에 무척 설렌다. 절로 콧노래가 흘러나온다.

손잡고 투쟁, 그리고 손잡고 허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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