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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가 있는 등대이야기
동길산 지음, 박정화 사진 / 호밀밭 / 2013년 9월
평점 :
구판절판
지난달, 고령에도 불구하고 왕성하게 가이드 일을 하는 선생님 한 분을 인터뷰할 기회가 있었다. 마침 시간이 있어 가이드 투어 시간에 맞춰 갔다. 장소는 영도의 흰여울문화마을이었다. 육지와 짧은 다리 하나로 연결되어 있으면서도 섬 특유의 느낌을 잃지 않고, 자기만의 독특한 분위기를 만들어내는 영도는 특별한 인상을 안겨주었다. 그리고 이 속에 있는 자그마한 마을, 흰여울문화마을 역시 마치 동화 속에 나오는 색감과 아름다운 풍경이 어우러져 그야말로 절경을 만들어내고 있었다.
"이 곳은 한국의 산토리니라고 불려요. 참 이쁘죠?"
그냥 고개를 끄덕여도 되는 가이드님의 말씀이, 왠지 다르게 와닿았다. 산토리니는 그리스의 섬이자 절경이 아름답기로 유명한 관광도시이다. 직접 가보진 않았지만, 마치 물감으로 칠한 듯 새하얀 건물들이 옹기종기 모여 있는 모습이 지중해만의 그 독특한 풍경과 잘 어우러져 무척 예쁘다고 한다. 하지만 뭔가 아쉬웠다. 영도 흰여울문화마을은 어째서 그 자체로 불리기보다, '한국의 산토리니'라 불리는 걸까. 아니, 그렇게 불려야만 하는 걸까. 제각기 느끼는 게 다를 수밖에 없는 '아름다움'의 정도를 비교하려는 마음은 없지만, 아름다움의 기준이나 척도가 너무 외국의 것들에만 초점이 맞춰진 게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들었다. 그러던 차에 「시가 있는 등대 이야기」라는 책을 만나게 되었다.
「시가 있는 등대 이야기」는 등단을 한 지 20년이 넘은 동길산 시인이 부산·경남 일대의 등대들을 찾아 바라보며 쓴 글을 묶은 책이다. 오륙도등대부터 시작해 제뢰등대까지, 총 30여 개의 등대가 소개되고 그 속에 담긴 이야기와 저자의 감상 등이 이어진다. 단순히 등대를 예찬하기만 하거나 지나치게 감성적인 글로만 빠지진 않는다. 늘 곁에 있지만, 자세히 알지 못하는 '등대'에 관한 정확한 정보와 사실들을 전달해주면서도, 딱딱하지 않게 재미있는 이야기들을 들려준다. 저자와 함께 등대를 하나하나씩 만나다 보면, 당장이고 카메라를 들고 나가고 싶어진다. 어려운 일도 아니다. 이 책 속에 나오는 등대들은 내가 사는 곳 가까이 있으니 말이다.
'새로운 것에 대한 선의, 익숙하지 않은 것에 대한 호의를 가져라'라는 니체의 말을 떠올리면 내가 사는 곳이 아닌 새로운 곳, 낯선 곳을 끊임없이 찾아다니고 싶어 지지만, 생각해보면 '낯선 곳'은 꼭 물리적으로 먼 거리에만 존재하는 것은 아니었다. 지금 내가 사는 이곳, 지금 내가 하는 행위들 속에서도 얼마든지 '낯섦'을 찾아보고 더 나아가 느낄 수 있다. 내 주변에 있는 것들도 제대로 보지 못하면서 저 멀리 있는 화려해 보이는 것들에만 열광한다면, 제아무리 여행을 많이 다니고 유명한 것들을 많이 보더라도 '여행을 위한 여행'이 될 가능성이 높다. 이러한 점에서 가까운 것을 좀 더 세밀하게 '들여다보는' 행위는 꽤 중요한 일일지도 모른다.
어쩌면 우리는 '들여다보는' 것에 익숙하지 않기 때문에 해외여행을 자주 가고, 그 화려한 건축물이나 광활한 자연 풍경에 감동하려 하는 것일지도 모르겠다. 당장 우리가 사는 곳 근처에 있는 등대에는 별 관심을 가지지 않고, 기어코 그리스나 이탈리아까지 가서 그곳의 등대를 보며 감명받으려 한다. 진정으로 아름다워서 감명을 받는 것인지, 아니면 세계적으로 유명하고 남들이 다 예쁘다고 하니까 감명을 받는 '척'을 하는 건지, 한 번쯤은 생각해 볼 필요가 있는 문제가 아닐까 싶다. 세계적으로 유명한 곳이 아닌 우리가 사는 곳 근처에 있는 등대에 대해 이야기를 하는 저자의 모습은 우리들의 이러한 모습과 무척 대조적이다. 담담하면서도 아름다운 글로 등대를 노래하고 있지만, 그 노랫소리는 우리에게 일침으로 다가온다. 해외여행을 다니기 바쁜 우리에게 이렇게 묻고 있는 듯하다. 너는 지금 네가 사는 곳을 한 번이라도 제대로 들여다보았냐고 말이다.
나를 둘러싸고 있는 이곳. 내가 평소 만나는 사람. 내가 하는 일. 이러한 것들을 조금 더 섬세한 시선으로 바라보고 싶다. 낯선 곳으로 여행을 가더라도 내 주위에 있는 것들에 충실해질 수 있도록 들여다보는 연습을 충분히 한 후에 떠나고 싶다. 내 주변의 것들에 충실히 하게 되는 것이 곧 내가 스스로 주인이 되는 길이기도 하다. 누구를 흉내 내는 것이 아닌 나 자신으로서 당당히 설 수 있게 되는 것. 이러한 개인들이 모이면 영도의 흰여울문화마을도 더 이상 '한국의 산토리니'가 아닌 흰여울문화마을 자체만으로 바라볼 수 있게 되지 않을까.
"불교가 조선에 들어오면 <조선의 불교>여야하지 어째서 <불교의 조선>인가"
故 신채호 선생님의 사자후가 유난히도 크게 울려 퍼진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