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년의 철학 - 희망 없는 시대, 반항하는 철학
장현정 지음 / 호밀밭 / 2009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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절판


부조리한 현실에 반항하며 투쟁을 계속하는 저자의 사유로 가득 차 있는 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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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년의 철학 - 희망 없는 시대, 반항하는 철학
장현정 지음 / 호밀밭 / 2009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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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원전 12세기경, 그리스 연합군이 트로이를 멸망시킴으로써 문명의 중심이 동방에서 서방으로 이동하며 그리스의 찬란한 문화가 꽃피우는 듯했다. 하지만 철기 문명을 장착하고 침입한 도리아족에 의해, 그리스는 기원전 8세기까지 암흑기를 맞이해야만 했다. 그 어떤 역사적 기록이나 흔적들도 없이 모조리 사라진 것이다. 하지만 단 두 편의 시로 이러한 암흑기를 깬 시인이 등장한다. 바로 호메로스였다. 그가 노래한 두 작품을 통해 다시금 그리스 문명이 시작되고, 이는 서양문화의 토대가 된다.

  

이 중 한 작품인 '오디세이아'는 트로이 전쟁의 영웅 오디세우스가 약 10년간 지중해를 표류하며 겪는 다양한 경험에 대한 이야기인데, 현대의 관점에서 그리 짜임새 있는 구성도 아니고 기승전결의 구조에서도 한참은 벗어나 있다. 결말을 보더라도 '권선징악'이라는 식상한 교훈을 생각해 볼 수 있긴 하지만, 그런 이야기들이야 얼마든지 많다. 어째서 이 작품은 '일리아스'와 더불어 서양문화의 토대가 될 수 있었던 걸까. 이 작품에는 도대체 어떤 의미와 어떤 정신이 깃들어 있는 걸까. 이러한 의문을 품던 차에 「소년의 철학」이라는 작품을 만나게 되었다.

  

「소년의 철학」은 부조리한 현실에 반항하며 투쟁을 계속하는 저자의 사유로 가득 차 있는 책이다. 저자는 이러한 태도가 철학에서 나오는 것이라 하며, 비슷한 생각을 가지고 함께 맞서 싸우려는 그 집단을 '소년'이라 칭했다. 하지만 알다시피 '소년'은 아직 힘이 있는 나이가 아니다. 어른들이 정해놓은 틀에, 부조리한 사회의 모습에 당당하게 투쟁의 한 걸음을 딛지만, 대부분 실패로 돌아가고 만다. 저자의 말대로 치기 어린 소년의 운명은 '백전백패'일 수밖에 없다.

  

실제로 우리를 둘러싸고 있는 이 현실은 모순과 부조리 그 자체이다. 인간이 살아남기 위해 집단을 만들었고, 집단이 모여 사회가 되었는데, 인간은 어느새 '사회적인 동물'로서의 그 의무로 인해 개인의 삶이 희생당하고 있다. 힘든 현실을 버티기 위해 종교를 만들었는데, 오히려 종교로 인해 인간이 서로 갈라지고 전쟁을 하는 사태에 이르게 되었다. 미시적 관점에서 보더라도 마찬가지다. 좋은 대학교만 입학하면 마치 인생의 성공이 보장될 것이라는 잘못된 믿음은 오늘도 수없이 많은 청춘들을 오로지 시험 문제만 푸는 기계로 만들고 있다. 대학은 어느새 학문적 탐구를 위한 공간이 아닌 취업을 준비하는 학원쯤으로 전락해버렸으며, 대부분의 청년이 오로지 높은 연봉과 안정성만을 따지며 자신의 젊음을 돈에 팔릴 수 있도록 이리저리 꾸며대기 바쁘다. 철저하게 자신을 죽일수록, 타자의 욕망에 충실할수록 흔히 말하는 '성공'에 가까워질 수 있다고 믿고 있다.

  

이렇게 복잡하고 어려운 문제를 오로지 한 가지 처방만으로 해결할 순 없다. 하지만 '해결'이 아닌 '진단'에 초점을 맞춘다면, 지금 우리에게 결핍된 게 무엇인지에 대해 어렴풋이 예상해 볼 수 있다. 바로 '생각'이다. 철저하게 자신을 죽여야만 간신히 버틸 수 있는 현실 속에서 우리는 '생각' 자체를 거부하고 있다. 한편으론 이것이 우리가 스스로를 잃어버린 까닭이기도 하고, 이 부조리한 현실 속에서 다시금 우리 자신을 찾기 위해 가장 우선시 돼야 하는 작업이기도 하다. '생각'이 시작되면 '철학'이 만들어진다. 나의 머릿속에 철학이 자리 잡기 시작하는 그 순간, 사회와의 싸움은 불가피 할 수밖에 없다. 타자의 욕망이 아닌 나의 욕망에 충실하게 되고, 저자의 표현대로 '우리 안의 모든 굳은 체념들을 되살리고 피를 돌게' 한다. 사회를 향한 반항과 투쟁. 현실이 아닌 이상을 추구하고 자신의 욕망에 충실한 모습은 '소년'과 닮아있다. 우리는 그렇게 철학을 시작하고, 소년이 되는 것이다.

  

하지만 이러한 치기 어린 싸움이 아무래도 불안하다. 저자 역시 사회에 적응해 살아가는 죽어있는 인간을 향해, 오로지 질서만을 강조하는 사회를 향해, 오로지 효율만을 따지는 자본을 향해 소년다운 철학적 사유를 바탕으로 일침을 가하지만, 이들은 꼼짝도 하지 않는다. 오히려 이러한 부류들이 잘 되는 모습을 볼 때면, 무엇이 옳은가에 대한 근본적인 의문을 품게 된다. 우리는 정녕 이길 수 없는 싸움 속에서 그저 발버둥만 치다가 결국은 굴복하고 마는, 그런 운명일 수밖에 없는가. 정녕 우리 철학적인 소년들은 '백전백패' 일 수밖에 없는가. 자신의 복부로, 자신의 온몸으로 상처 입고 피 흘리며 뒹굴고 쓸리면서 조금씩 나아가는 우리들은, 단박에 어디론가 뛰어넘는 이들의 모습을 그저 지켜볼 수밖에 없는가.

  

어렴풋이 오디세우스의 모습이 보인다. 신이 인간을 지배하던 그 시절, '너는 절대 고향으로 돌아갈 수 없다'라는 신의 말에도 보란 듯이 당당하게 돛을 올리는 그의 모습이 보인다. 절대자의 뜻에 거역하고 온갖 고난과 역경을 겪으며 마침내 자신의 목표를 성취한다. 단테에 의해 지옥으로 떨어졌음에도 '태양의 뒤를 쫓아 사람이 없는 세계를 찾아가려는 용기 있는 마음을 거역하지 말아달라'며 중세의 그 칠흑 같은 어둠을 걷어내고 르네상스를 일으킨다. 그리고 마침내 영국 시인 알프레드 테니슨에 의해 되살아난다. '숨 쉬는 것이 사는 것인가'라며 똑같은 일상에 지친 그는 '비록 잃은 것은 많아도, 아직 남은 것도 많다'며 다시금 옛 동료들을 모아 어딘지 모를 장소를 향해 돛을 올린다.

  

그의 모습 속에서 소년이 보인다. 백전백패의 운명 속에서도 기꺼이 앞을 향해 한 걸음 내딛는 그는 분명 소년이었다. 기원전 8세기경, 호메로스가 '오디세이아'를 노래했던 바로 그 순간, 철학이 시작되었고, 소년의 역사가 시작되었다. 그리고 3000년에 가까운 시간이 흘러, 오디세우스와 소년과 철학은 다시금 되살아난다. '결코, 닿을 수 없고, 품을 수 없음을 알면서도 기필코 나아가는 무모함이야말로 소년의 철학이며 희망 없는 시대 우리에게 주어진 운명이기 때문'이라는 저자의 말 속에서 오디세우스의 그 당찬 기운이 느껴진다. 세상과 맞서 싸운 이들은 '오디세우스적' 일 수밖에 없을 테다. 우리의 삶은 어쩌면 '오디세우스적'이냐 아니냐로 나뉘어 질 지도.

  

철학이 필요한 시대, 이러한 소년들이 무수히 나타나길 고대해본다. 아니, 그 전에 저자와 마찬가지로 나 역시 소년을 사랑하며, 더 나아가 소년으로 살아가길 꿈꿔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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손잡고 허밍 호밀밭 소설선 소설의 바다 1
이정임 지음 / 호밀밭 / 2016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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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간은 자연이 일부라고 흔히들 말하곤 하지만, 우리가 살아가고 있는 현실을 보면 대부분의 인간은 딱히 그렇게 생각하지 않는 듯하다. 인간의 역사는 곧 정복의 역사였다. 이 정복의 대상은 같은 인간일 때도 있었지만, 대개는 자연이 그 대상이었다. 다른 동물들에 비교해 신체적으로 그다지 유리한 조건이 아니었던 인류의 조상들이 냉혹한 자연에 맞서 살아남기 위한 끊임없는 발버둥을 쳤기에 지금의 우리가 지금 존재할 수 있긴 하겠지만, 어쨌든 그 발버둥은 그다지 우아하지 않았다. 그리고 이러한 우아하지 않은 발버둥은 지금까지도 이어지고 있다.

인간은 살아남기 위해 늘 자연과 맞섰고, 그 결과 표면적으로 보면 당당히 승리했다고 할 수 있겠다. 주위를 둘러보면 죄다 인간이 만든 건물이다. 모든 것이 인간의 욕망에 맞게, 편의에 맞춰서 변화되었다. 인간을 위해서라면 그 어떤 생명에 대해서도 자비가 없다. 일단 인간의 욕망이 우선이고 모든 것은 그다음이다. 이것을 함부로 '이기심'이라고 말할 순 없다. 수십억 년 지구의 역사에서 주인은 늘 바뀌었다. 인간은 그저 지금의 시대에 권력의 정점에 있을 뿐이다. 하지만 그럼에도 우리는 생각을 해야 한다. 그 어떤 존재보다 폭력적인 존재가 되어버린 지금의 현실에서, 우리가 잃고 있는 게 무엇인가에 대해서 말이다.

'손잡고 허밍'은 꽤 암울해 보이는 미래를 배경으로 하고 있다. '둠스데이(doomsday), 지구 최후의 날'을 대비하기 위한 계획도시는 '둠스데이 프레퍼스'라고 인류 멸망을 준비하는 사람들이 모여 사는 곳이다. 남들이 여가생활을 즐기는 동안 그들은 닥쳐올 비상 상황에 대비해 개인 벙커를 짓고 비상식량을 갖추고 있다. 일종의 '생존 도시'라고 할 수 있는데, 이곳에 주인공인 '나'가 입주민으로 들어와 '구남씨'를 만나면서 이야기가 시작된다.

이러한 도시 속에서 살아가는 소설의 주인공들은 각자 아픈 기억을 가지고 있다. 구제역으로 수백만 마리가 생매장당하는 모습을 보고 더는 글을 쓰지 못하고 있는 그녀와, 사라져가는 대나무 숲의 소리를 녹음하며 꺼이꺼이 울고 있는 그의 모습이 묘하게 겹쳐진다. 시장의 피해를 줄이기 위한 사회로 인해, 좀 더 많은 건물을 짓고 땅을 개발하려는 사회로 인해, 이들은 좀처럼 회복할 수 없는 깊은 상처를 받은 것이다. 아니, 정확히 말하면 '사회'가 아니라 인간의 무한한 '욕망'이다. 돼지와 소를 오로지 인간이 먹을 고기를 얻기 위한 수단으로만 사육하다가 문제가 생기가 가차 없이 모두 생매장시켜버리면서 시장을 지키기 위한 욕망, 자신들의 활동반경을 보다 넓히고, 건물을 지어 보다 많은 돈을 벌고, 좀 더 좋은 집에서 살고 싶다는 욕망. 이러한 욕망의 희생양은 일차적으로는 자연이었고, 이차적으로는 인간이었다. 인간의 욕망이 결국 인간 그 자신을 향하기 시작한 셈이다.

숲의 소리를 듣고 싶으면 숲속에 가면 된다. 하지만 인간의 욕망으로 인해 숲은 사라져 버렸고, 여기에 위기의식을 느꼈던 한 사람의 노력으로 인해 그 소리만이 녹음되었다. 숲을 파괴하고 지은 건물 안에서 불면증에 시달리면서 잠이 들기 위해 녹음된 그 소리를 듣게 되는 것. 이것을 과연 진보라고 할 수 있을까. 우리들의 삶의 질이 더 나아졌다고 할 수 있을 것인가.

하지만 그럼에도 인간에게는 파괴의 욕망, 정복의 욕망만 있는 것은 아니다. 인간의 파괴적인 욕망에 맞서 싸우겠다는 욕망도, 자신이 소중히 생각하는 걸 지키겠다는 욕망도 존재한다. 그녀가 예전부터 글쓰기와 관련된 일을 하다가, 돼지들이 생매장당하는 모습을 보고 더는 글을 쓰지 않은 것은 일종의 저항이었다. 그가 사라지는 대나무 숲의 소리를 녹음한 것 역시 하나의 저항이었다. 인간의 그 무한한 욕망을 완전히 막을 순 없지만, 세상을 바꿀 순 없지만, 자신의 방식대로 당당히 맞선 것이다.

인류의 역사가 곧 정복의 역사, 파괴의 역사라고 하지만 이러한 저항 역시 늘 존재해왔다. 대표적으로 데이비드 소로의 '월든'은 한창 자연을 개척하고 물질문명으로 나아가던 미국을 배경으로, 한 호숫가에서 자연을 벗 삼아 홀로 살아가면서 물질문명과 인간의 탐욕에 대해 지적을 했던 작품이다. 결과적으로 미국은 지금 물질문명의 중심 그 자체가 되었기에 이 작품이 커다란 흐름을 막지는 못했다. 하지만 그럼에도 '월든'이 있었기에 문명은 조금은 더 인간적인 방향으로 나아갈 수 있었다. 인간 자체가 불완전하기에 인간이 만들어낸 사회, 법, 사상, 욕망 역시 불완전할 수밖에 없다. 그렇기에 계속해서 다듬어져야 한다. 결국은 큰 흐름대로 흘러갈 수밖에 없지만, 그 흐름에 맞서는 노력은 반드시 있어야 한다. 아니, 이 또한 인간의 본능이자 욕망이다. 저항의 욕망, 투쟁의 욕망이 바로 그것이다.

대부분의 사람은 파괴의 욕망, 정복의 욕망에 동조하거나, 아니면 무관심하거나 자신이 어쩔 수 없다며 무기력에 빠지곤 한다. 이 소설의 주인공인 '나' 역시 처음에는 무기력의 늪에서 빠져나오지 못하고 있었다. 하지만 '구남씨'를 만나 그의 손을 잡고 무기력에서 헤어나와, 함께 한 걸음 나아가는 모습 속에서 '공동체' 혹은 '연대'의 힘을 실감할 수 있다. 혼자서 투쟁하는 건 힘들지만, 누군가에게 손을 내밀고, 손을 잡고 함께 투쟁하는 그 순간이 바로, 변화의 시작이다.

"이 씨앗이 지금은 작지만요. 제 땅이 손바닥만 하지만요. 얼마든지 클 수 있으니까요."

개발로 인해 파괴되어버린 숲속에 씨앗 하나를 심는다. 씨앗은 곧 투쟁의 시작이다. 이 씨앗에서 얼마나 예쁜 열매가 자랄지 궁금하다. 언젠가는 폐허가 되어버린 이곳도 다시 아름다운 숲으로 변할 수 있다는 생각에 무척 설렌다. 절로 콧노래가 흘러나온다.

손잡고 투쟁, 그리고 손잡고 허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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록킹 소사이어티 - 록음악으로 듣는, ‘나’를 위한 사회학이야기
장현정 지음 / 호밀밭 / 2012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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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 2011일본에서 인기가 많던 만화 한 편이 우리나라로 넘어왔다이사야마 하지메가 쓴 '진격의 거인'이라는 작품인데어느 날 갑자기 거인이 나타나 무자비하게 인간을 잡아먹는다인간은 이에 맞서 성을 쌓고 거인과 사투를 벌이는 내용인데여기에서 흥미로운 점이 하나 있다바로 이 세계관 속 인간들이 '거인학(巨人學)'을 연구한다는 것이다도저히 정체를 알 수 없는 거인들과 맞서기 위해서인간들은 이들에 대해 철저히 공부하고탐구한다그 과정에서 거인의 약점도 알아내고거인을 무찌를 수 있는 무기도 개발하고말을 타고 달리면서 보다 효율적으로 싸울 수 있는 전술도 만들어낸다.
  
인간이 모여서 사회를 만들었지만어느새 사회가 인간을 지배하기 시작했다이것에 대해 함부로 '잘못되었다'라고 말하긴 어렵다어쨌든 다른 동물들에 비교해 신체적으로 그다지 유리한 조건이 없었던 인간이 자신보다 훨씬 크거나 강한 동물들에 맞설 수 있었던 것은 집단을 이루었기 때문이다집단은 사회의 원초적인 형태이다집단을 이루면서 인간이라는 종족 자체는 지구상에서 가장 커다란 힘을 가질 수 있었지만한편으론 사회적 존재라는 틀에 갇혀야만 했다지금까지도 끝나지 않은 싸움은 바로 이때부터 시작되었는지도 모른다. '사회'라는 커다란 거인과 작은 개인들의 그 치열한 분투가 말이다.
  
'록킹소사이어티'는 역사적인 록 음악들과 함께 현대사회가 직면하고 있는 다양한 문제들을 진단하고 있는 책이다그 문제들은 무척 광범위하다종교과학합리성민족독재자본주의언론문화군중에로티시즘예술 등아무리 사회문제에 관심이 없는 사람이라도 결코 낯설지는 않은 주제들이자 우리들의 일상생활에서도 항상 접하고 또 한 번쯤은 고민하고 생각하게 되는 것들이다그리고 겉보기에는 이렇게 흩어져 있는 소재들을 관통하는 게 존재한다사회에 맞서는 개인의 이야기가 바로 그것이다그러기 위해 사회에 대해 치열하게 연구하고 분석한다이게 바로 '사회학'이었다.
  
사회가 아주 커다란 거인이라면 종교나 과학민족자본주의언론에로티시즘 등은 사회보다는 작지만 그럼에도 인간과는 비교도 되지 않을 정도로 큰 거인들이다이 큼지막한 덩어리들모두 인간이 힘든 현실에 맞서기 위해살아남기 위해편의를 위해행복해지기 위해 만들었음에도 우리들은 이로 인해 얼마나 갈라지고싸우고억압당하고또 무수히 죽어 나갔는가하지만 그럼에도 우리들은 여전히 이러한 덩어리들을이러한 거인들을 그저 찬양하거나 아니면 어쩔 수 없다며 무기력함만을 보인다.
  
'진격의 거인속 주인공들이 거인에 맞서기 위해 '입체기동장치'라는 특별한 장비를 개발한 것처럼우리들 역시 이 거인들에 맞서기 위한 강력한 무기들이 필요하다이 책에서도 이러한 무기들에 대해 자세히 설명하고 있다늘 사회에 맞서 치열하게 노력해왔던 사람들의 목소리가 바로 그것이다성인이든 사상가든 철학자든 작가든 지식인이든이들은 지극히나 자신들만의 방식으로 사회와 싸웠고그렇게 사회를 바꿔나갔다우리가 일반적으로 '천재혹은 '위인'이라고 부르는 사람들이다지금으로부터 3000년 전에도, 2000년 전에도, 1000년 전에도, 500년 전에도, 100년 전에도인간은 늘 거인과 맞서 싸웠다그러면서 그 노하우들을 계속해서 전수해줬는데 이게 바로 '천재혹은 '위인'들이 남긴 기록들이다그렇다면 우리가 해야 하는 것들은 이러한 기록들을 치열하게 배우면서 이들이 겪었던 시행착오를 줄여나가는 것이다뉴턴의 말대로 그렇게 우리는 거인의 어깨 위에 올라서야 한다거인 대 거인이라면그래도 제법 해볼만한 싸움이 아니겠는가.
  
거인에 맞서기 위해서 '거인학'이 필요한 것처럼사회에 맞서기 위해선 '사회학'이 필요하다우리가 싸우고자 하는 대상이 있다면 그에 대한 철저한 분석과 치열한 노력은 반드시 필요하다이것이 바로 우리가 사회에 대해 끊임없이 관심을 가지고, '사회학'이라는 학문을 탐구해야 하는 이유이다우리는 강해서 싸우는 게 아니라 이 싸움을 통해서 강해져야 한다사회의 욕망이 아닌 ''의 욕망을 욕망할 수 있도록사회적인 틀에 얽매이기보단 자유를 사랑하는 한 인간으로서 존재할 수 있도록억압을 당하기보단 투쟁을 하는 존재가 될 수 있도록, '우리'보다는 ''를 더 소중히 여길 수 있도록자신만의 무늬를 그리고 정말 스스로 주인이 될 수 있도록 말이다이 책에서 궁극적으로 말하고자 하는 것도 결국 이와 비슷하지 않을까.
  
개인적으로 철학과 인문학에 관심이 많아 책도 많이 읽고 강연도 자주 듣고 글쓰기도 하면서 공부를 해나가고 있긴 했지만이렇게 '사회학'이라는 학문에 직접 대면하는 건 이번이 처음이었다그래서 낯설기도 했고 어려운 부분도 있긴 했지만생각해보면 내가 이제까지 늘 고민하고 생각했던 것과 그리 다른 내용은 아니었다그러다 보니 막막하고 어렵다는 느낌보다는다시금 새로운 학문을 접하게 된다는 그 설렘이 더 강했다나 역시 '사회학'을 공부하고 싶어졌다그래서 '사회'라는 이 커다란 거인과 당당히 맞서 싸우고 싶어졌다.
  
지금의 이러한 자극이앞으로의 내 삶에 어떤 영향을 줄지 궁금하다다만 진격의 거인 속 주인공이 그 어떤 어려운 상황 속에서도 결코 희망을 잃지 않고 자신보다 수십 배는 큰 거인과 당당히 맞서는 것처럼사회학을 통해 사회와 맞서 싸우는 나의 모습도 훗날 조금은 멋있으면 하는 바람이 있다지금 이 순간이 그 험난하면서도 설레는 긴 여정의 시작이었으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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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가 있는 등대이야기
동길산 지음, 박정화 사진 / 호밀밭 / 2013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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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달, 고령에도 불구하고 왕성하게 가이드 일을 하는 선생님 한 분을 인터뷰할 기회가 있었다. 마침 시간이 있어 가이드 투어 시간에 맞춰 갔다. 장소는 영도의 흰여울문화마을이었다. 육지와 짧은 다리 하나로 연결되어 있으면서도 섬 특유의 느낌을 잃지 않고, 자기만의 독특한 분위기를 만들어내는 영도는 특별한 인상을 안겨주었다. 그리고 이 속에 있는 자그마한 마을, 흰여울문화마을 역시 마치 동화 속에 나오는 색감과 아름다운 풍경이 어우러져 그야말로 절경을 만들어내고 있었다.

"이 곳은 한국의 산토리니라고 불려요. 참 이쁘죠?"

그냥 고개를 끄덕여도 되는 가이드님의 말씀이, 왠지 다르게 와닿았다. 산토리니는 그리스의 섬이자 절경이 아름답기로 유명한 관광도시이다. 직접 가보진 않았지만, 마치 물감으로 칠한 듯 새하얀 건물들이 옹기종기 모여 있는 모습이 지중해만의 그 독특한 풍경과 잘 어우러져 무척 예쁘다고 한다. 하지만 뭔가 아쉬웠다. 영도 흰여울문화마을은 어째서 그 자체로 불리기보다, '한국의 산토리니'라 불리는 걸까. 아니, 그렇게 불려야만 하는 걸까. 제각기 느끼는 게 다를 수밖에 없는 '아름다움'의 정도를 비교하려는 마음은 없지만, 아름다움의 기준이나 척도가 너무 외국의 것들에만 초점이 맞춰진 게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들었다. 그러던 차에 「시가 있는 등대 이야기」라는 책을 만나게 되었다.

「시가 있는 등대 이야기」는 등단을 한 지 20년이 넘은 동길산 시인이 부산·경남 일대의 등대들을 찾아 바라보며 쓴 글을 묶은 책이다. 오륙도등대부터 시작해 제뢰등대까지, 총 30여 개의 등대가 소개되고 그 속에 담긴 이야기와 저자의 감상 등이 이어진다. 단순히 등대를 예찬하기만 하거나 지나치게 감성적인 글로만 빠지진 않는다. 늘 곁에 있지만, 자세히 알지 못하는 '등대'에 관한 정확한 정보와 사실들을 전달해주면서도, 딱딱하지 않게 재미있는 이야기들을 들려준다. 저자와 함께 등대를 하나하나씩 만나다 보면, 당장이고 카메라를 들고 나가고 싶어진다. 어려운 일도 아니다. 이 책 속에 나오는 등대들은 내가 사는 곳 가까이 있으니 말이다.

'새로운 것에 대한 선의, 익숙하지 않은 것에 대한 호의를 가져라'라는 니체의 말을 떠올리면 내가 사는 곳이 아닌 새로운 곳, 낯선 곳을 끊임없이 찾아다니고 싶어 지지만, 생각해보면 '낯선 곳'은 꼭 물리적으로 먼 거리에만 존재하는 것은 아니었다. 지금 내가 사는 이곳, 지금 내가 하는 행위들 속에서도 얼마든지 '낯섦'을 찾아보고 더 나아가 느낄 수 있다. 내 주변에 있는 것들도 제대로 보지 못하면서 저 멀리 있는 화려해 보이는 것들에만 열광한다면, 제아무리 여행을 많이 다니고 유명한 것들을 많이 보더라도 '여행을 위한 여행'이 될 가능성이 높다. 이러한 점에서 가까운 것을 좀 더 세밀하게 '들여다보는' 행위는 꽤 중요한 일일지도 모른다.

어쩌면 우리는 '들여다보는' 것에 익숙하지 않기 때문에 해외여행을 자주 가고, 그 화려한 건축물이나 광활한 자연 풍경에 감동하려 하는 것일지도 모르겠다. 당장 우리가 사는 곳 근처에 있는 등대에는 별 관심을 가지지 않고, 기어코 그리스나 이탈리아까지 가서 그곳의 등대를 보며 감명받으려 한다. 진정으로 아름다워서 감명을 받는 것인지, 아니면 세계적으로 유명하고 남들이 다 예쁘다고 하니까 감명을 받는 '척'을 하는 건지, 한 번쯤은 생각해 볼 필요가 있는 문제가 아닐까 싶다. 세계적으로 유명한 곳이 아닌 우리가 사는 곳 근처에 있는 등대에 대해 이야기를 하는 저자의 모습은 우리들의 이러한 모습과 무척 대조적이다. 담담하면서도 아름다운 글로 등대를 노래하고 있지만, 그 노랫소리는 우리에게 일침으로 다가온다. 해외여행을 다니기 바쁜 우리에게 이렇게 묻고 있는 듯하다. 너는 지금 네가 사는 곳을 한 번이라도 제대로 들여다보았냐고 말이다.

나를 둘러싸고 있는 이곳. 내가 평소 만나는 사람. 내가 하는 일. 이러한 것들을 조금 더 섬세한 시선으로 바라보고 싶다. 낯선 곳으로 여행을 가더라도 내 주위에 있는 것들에 충실해질 수 있도록 들여다보는 연습을 충분히 한 후에 떠나고 싶다. 내 주변의 것들에 충실히 하게 되는 것이 곧 내가 스스로 주인이 되는 길이기도 하다. 누구를 흉내 내는 것이 아닌 나 자신으로서 당당히 설 수 있게 되는 것. 이러한 개인들이 모이면 영도의 흰여울문화마을도 더 이상 '한국의 산토리니'가 아닌 흰여울문화마을 자체만으로 바라볼 수 있게 되지 않을까.

 "불교가 조선에 들어오면 <조선의 불교>여야하지 어째서 <불교의 조선>인가"

故 신채호 선생님의 사자후가 유난히도 크게 울려 퍼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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