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들의 일그러진 영웅
이문열 지음 / 민음사 / 1992년 4월
평점 :
절판


지독할 정도의 현실 부적응이다. 과거에 대한 지나친 그리움이 그의 발목을 계속해서 잡아 끄는 것일까? 글 쓰는 이에게 그의 글은 모범적으로 보일 지경이다. 실제로 그는 글을 참 잘 쓴다. 하지만 그 놀라운 글 솜씨를 가지고 그가 만들어내는 작품들은 실로 놀라울 지경이다. 어쩌면 내가 처음으로 접한 그의 책이 다름 아닌 <선택>이었기 때문인지도 모른다. 처음부터 끝까지 흥분을 넘어선 광분 밖에 허락되지 않았던 그 책 때문에 나는 이문열이라는 이름을 피하려고 안간힘을 써 왔던 것 같다. 1987년 이상문학상 대상을 수상한 우리들의 일그러진 영웅. 이미 영화화되어 많은 이들의 입에 오르내렸던 이 책을 느지막이 집어 들었던 것은 아마도 작가에 대한 반항 때문이었던 것 같다.

엄석대에 의해 운영(?)되는 학급, 그것은 가히 축소된 우리네 세계였다. 부조리한 질서는 모든 이들의 암묵적인 동의에 의해 오히려 견고히 유지된다. 그 틀은 너무도 견고해 심지어 담임 선생님 조차도 신뢰할 지경이다. 어른들의 비딱한 시선 속에서 엄석대는 그저 멋진 아이일 따름이다. 어른스럽고 리더십도 있는데다가 공부까지 잘하는, 서울서 전학한 주인공에게 그는 힘으로는 도저히 꺾을 수 없는 인물인 것이다. 그 공고함은 어떠한 저항도 용납하지 않는다. 그저 알아서 조용히 기기만 하면 되는 것이 그 학급의 특징이자 우리네 세상의 특징이기도 하다. 강한 자 앞에서는 한없이 약하고 약한 자 앞에서는 한없이 강한, 새로운 담임 선생님에 의해 처절하게 엄석대의 권위가 무너지기 전까지 모든 아이들이 그 질서에 동조했듯이 우리 역시 그렇게 살고 있는 것이다. 아무리 외쳐도 내게 돌아오는 것 하나 없는, 그토록 외로운 존재로 전락하지 않기 위해서는 그저 남들과 똑같이 행동하면 되는. 그런 세상에서 저항은 괜한 것이다.

지긋이 눈을 감고 외면하는 그 순간에도 무언가 거창한 그 무언가가 되어 있길 바라는 마음하며, 지독한 경쟁을 거치는 와중에서 그래도 그 요상한 질서도 견딜만 했노라는 쓴 웃음까지, 경제가 어려우니 독재여도 과거가 좋다며 말하는 이들이 존재하듯이 저자에게도 엄석대는 과거 속에 존재하는 고향과도 같은 존재였다. 하나의 영웅을 탄생시킴으로써 모든 안위가 보장되던, 그 회피로 가득했던 생활을 어쩌면 지금의 우리는 그리워하는 것일지도 모른다. 그래도 그 땐 살만 했다는 그 말 한마디와 함께 말이다.

일그러진 영웅이라 그는 말했지만, 그에게 있어서 영웅은 아무리 일그러졌을지라도 영웅일 따름이다. 후대에 제 아무리 새로운 가치 체계가 마련되어도 재평가될 수 없는, 그렇기에 영원히 옹립되어야만 하는 존재. 시대가 아무리 변해도, 아니 시대가 바뀌면 바뀔수록 그와 같은 영웅에 대한 신념은 더더욱 확고해진다. 현실을 부정하는 속에서 자신 안에 존재하는 과거를 향한 찬양은 더욱 강고해지고, 결국에는 시대착오적일지라도 자신과 다른 모든 이들의 생각은 배제하는 속에서 또 다른 권력을 창출하는. 그것은 다름 아닌 엄석대에 대한 그리움이고, 결코 깨어지지 않을 것 같은 부조리한 권력 구조에 대한 회귀심이다. 오늘날 이문열은 그로부터 자유롭지 못한 것이다. 자신이 만들어놓은 우물 속에서 영원히 헤엄치면서, 자신이 지금껏 점해온 위치로 인하여 자신과 같은 생각을 가진 이상한(!) 보수를 대거 양산하는데 기여하고 있다. 하지만 그 모든 행동이 자신의 의지라기 보다는 자신의 것을 지키기 위한 발악처럼 여겨지기에 안타까운 것이다. 왜 그는 엄석대로부터 자유롭지 못한 것일까. 왜 그에게 엄석대는 여전히 정당한 무언가로 여겨지는 것일까. (스펙트럼의 저 쪽, 그것도 아주 끝에 머무르는 그와 같은 이가 존재하기 때문에 우리 사회에서는 극좌파로 치부될 것 같은) 나로서는, 그의 글 솜씨가 실로 아깝다는 말 밖에 달리 할 수 있는 말이 없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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