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트] 바벨 1~2 세트 - 전2권
R. F. 쿠앙 지음, 이재경 옮김 / 문학사상 / 2025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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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벨이 번역본이 나왔다는 소식을 접하고, 봐야겠다는 생각을 가졌다. 19세기 배경에, 내가 좋아하는 스팀펑크에, 두근두근 산업혁명과 근대사에, “오리엔트까지. 휴고상 수상을 두고 중국 정부의 정치적 개입이 있었다는 이야기도 진입을 이끌었다. 바벨이라는 노골적인 제목 덕분에 원서를 검색해봤더니 0.99$, 안 살 수가 없지. 번역본이 아니라 원서를 바로 결제하여 읽기 시작했다.


정신없이 책을 다 읽고 나서, 책의 종장과 함께 퇴근길에 엉엉 울며 귀가하였다. 집에 와서도 저녁 밥을 차리고 저녁 운동을 갈 준비를 하면서도 울었다. 생각지도 못하게 여운이 깊었다. 안되겠다 싶어 번역본을 주문하였다. 나는 책도 영화도 그렇지만 정말 좋아하는 작품도 두 번을 본 적이 거의 없다. 책은 말할 것도 없고, 영화도 기껏 해봐야 <미안해요, 리키> 정도만 2어번 봤을 정도다. 바벨은 뭐랄까, 감정에 압도되어 벗어날 수 없어 다시 책으로 돌아가고 싶었다. 번역의 난해함과 그 사이에서 소실되는 어떤 것이 주제였던 책인 만큼, 번역 속에서 무언가 소실된 것을 찾고 싶었던 욕망도 함께 했다.


한역은 도움이 된 것도, 아쉬운 것도 있다. 영어가 전달하고 있는 시대적 분위기, 어휘와 문장의 맥락에서 쏟아져 나오는 계급과 신분적 차이, 문명에 대한 함의 등등이 한국어에서는 상실된다. 상실만이 아니라 원치 않는 추가도 있다. 또한 존댓말을 통한 연령주의가 고스란히 갖고 있는 제한이 영어에 적용된다. 그리핀과 로빈 사이의 호형호제라니. 이 어색함과 낯섦. 영어에 드러나는 인종적 편견도 다소 휘발된다. 이런 저런 뉘앙스와 문맥적인 의미들이 사라진다. 이게 바벨의 학자들이 찾는 마법인건데.


번역을 떠나 책으로 돌아가보자면, 우선 언어라고 하는 이 매력적인 소재는 제국의 식민주의적 착취를 명백히 드러낸다. 또한 언어를 차치하고도 주요 인물 구성도 말하고자 하는 바가 명확하다. 마치 <동물농장>을 읽고 있는 것만큼이나. 식민지 인도 출신의, 그러나 힌디가 아닌 라미. 중국 그러나 만다린이 아닌 광둥어를 쓰는 혼혈인 로빈. 아이티 출신의 크레올 흑인 여성 빅투아르. 상위계층이나 여성으로 태어난 반쪽짜리 신분인 잉글리쉬 로즈 레티. 이름이 가지고 있는 배경과 뉘앙스도 마찬가지이다. 아벨 굿펠로는 정말 든든하기 짝이 없다. 이러한 뉘앙스에 대해 알지 못하고 읽어도 독서에 방해되는 것은 없지만, 이들의 이름에서부터 이들의 운명이 모두 암시되어 있다. 그만큼 극이 보여주고 싶은 바가 너무도 명확하다. 빅투아르의 미래와 무운을 비는 종장에서는, 그녀의 이름만큼이나 확신을 주는 것이 없으리라. 때문에 어두우면서도 우울하고, 그러나 힘차고 또 과격한 배경에서, 캐릭터들이 이끄는 이야기는 주저없이 질주한다. 무언가 정해진 운명의 끝을 향해서처럼, 작가가 신랄하게 비판하는 그것의 종장을 보고자 미끄러지듯이. 산업혁명기 고정된 이정과 정시에 맞춰 달려가는 열차처럼.


이러한 질주 말고도 특징적인 것은, 실제 근대사의 현장과도 겹쳐지는 우의적 대화, 구도, 상황이다. 이 지점에서 로빈의 광동 방문이 가장 절정이다. 마치 루쉰의 철방에서 잠자고 있던 그가 깨어나는 것 같은 이 챕터는, 아편전쟁을 떠올리면 자연스럽게 상상되는 표상들이 넘쳐난다. 악덕을 미덕으로 정당화하며 자유무역을 만능처럼 주장하는 베일리스의 대화는, 임칙서와 영국인이 있던 그 현장을 마주하는 책 속의 책 같은 비현실적이고 기묘한 느낌도 준다. 만성 무역적자를 해결하기 위해서는 그 어떠한 방법으로 침략과 악덕과 부정의와 착취를 일삼아도 상관없다. 현재 미국이 그러듯이.


이 장에서 작가는 로빈의 눈과 감정을 통해 제국주의자들에 대한 역겨움을 노골적으로 드러낸다. 로빈이 깨어나는 그 장면은 그의 신체적 신호와 반응으로 점철되어 있다. 가난하고 병에 시달리는, 미개하고 비위생적인 광동의 하수구냄새와, 중국의 자원을 제 것인 것 마냥 착취해가려는 영국인들의 무자비함, 무식함, 기고만장함, 그 모든 역겨움을 보고 느끼고 맡게 한다. 그리고서 이 구토를 유발하는 역겨움은 살의와 끓어오르는 분노의 대상이 되어, 상실과 슬픔과 뒤엉켜 책의 후반을 잠식한다.


제국주의자들이 말하는 자유주의란 결국 자유무역이었으며, 그들이 말하는 번영은 결국 자신들의—제국 기득권들의 번영임이 무엇보다 명징하게 나타난다. 신음하는 역사, 고통받는 소수자가 이 책 첫 문장의 단어 하나하나부터 마지막까지 한걸음 한걸음 내내 길게 늘어진다. 이렇게도 분명하게 보이는 그림자가 눈에 보이지 않는다면, 그대는 눈 감고 귀 막은 철방 안에 갇힌 죄수일 뿐이라는 것. 그 폭력에 저항하려는 순간 시작된 상실, 아니 그 전부터 무겁게 내려 앉아 숨쉬기 어려웠던 슬픔과 상실이, 제국주의자가 씌우는 굴레와 같은 현실과 미래를 차버린 순간부터 질식할 것처럼 눌러온다. 그들의 두렵고 연약한 저항이란 요원하다는 듯이.


로빈의 여린 심성과 양심에 따라 비통함에 잠식되어갈 때쯤, 심지 굳은 생존본능의 빅투아르의 목소리가 들려온다. 선택권이 없기에 저항할 수밖에 없는 연약한 소수자들을 응원하듯이. 그리고 여기에도 다양한 교차성의 벡터가 존재한다. 로빈의 해결책과 빅투아르의 해결책이 교차하는 것도 이 대비를 증폭시킨다. 고통에 직면하여 마침내 선택하는 그들의 결정을, 어떻게 비난하거나 상찬할 수 있을까. 그렇기 때문에 극의 막바지에 이르러서는 깊은 슬픔만이 밀려오는 것이다.


식민사를 전공하기에, 차별을 경험했기에, 어떠한 교차하는 정체성을 가졌기에 이 모든 극의 하나 하나에서 공감했다. 잔혹하지만 아름답고, 속하고 싶지만 결국 속할 수 없어 좌절하고, 분개하지만 타자의 인식론적 무지 앞에서 체념하게 되는 수많은 경험들. 근대의 원죄가 아직도 사해지지 않은 지금이기에, 이 책의 하나하나가 가슴 밑을 찌르며 울린다. 가슴 아프게 공감하고 고통스러워 하기를, 그럼에도 불구하고 일어서서 맞서기를 그 누구보다 바라게 된다. 저자가 주시하는 그 마지막에는 어쩌면, 내가 바라는 그 어떤 이상향이 있는 것 같기도 하다. 그렇게 바벨은 무너졌고 여명의 새벽이 왔다. 박명에 길을 떠나고 있다. 그 끝에 무엇이 있는지 아무도 모르지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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