칼 구스타프 융의 ‘레드 북’을 읽기 전에 기대도 많았었다. 융이 16년 동안 쓴 책이라고,
직접 삽화까지 그렸다고 하니까. 게다가 본인이 출판을 원하지 않아서 2001년이 되어서야
비로소 원고를 보는 게 가능했다고 하니까. 새로운 책이라는 의미로 ‘liber novus’라는
이름이 붙어있었고, 빨간색 가죽 장정을 하고 있어서 그 스스로 이 책을 ‘red book’이라고
불렀단다. 그런 사연들을 이 책을 읽기 전에 이미 들어서인지 혼자서 상상의 나래를 펴며
기대한 바가 컸었나보다. 그리고 이 책을 읽고나서 이 책을 떠올리면 하게 되는 생각이란...
난해한 남자의 꿈 이야기로 정리된다. 분명 내가 읽을 수 있는 활자로 쓰여져 있는 이 책을
공감하며 읽었다고 한다면 거짓말을 하는 게 될 것 같다. 책의 초반부를 읽을 무렵에는
도무지 무슨 말을 하는지 모르겠다 싶었을 정도니까. 게다가 난 꿈 이야기를 별로 좋아하지
않는다. 학교를 다닐 때 꿈 이야기를 즐겨 하던 같은 반 친구가 있었는데, 이 책을 읽고
있노라니 그때 그 아이가 꿈 이야기 하는 거 무척 지겨워했었다는 게 기억났다. 꿈 이야기는
역시 취향에 맞지 않는다는 걸 이 책을 통해 다시 한번 확인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 책을 중간에서 접을 수 없는 건 그 이야기 속에 마음이 쓰이는 부분이
분명 존재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게다가 그 부분은 넘긴 페이지가 많아지면 많아질수록
빈번하게 출현한다. 그런 부분들의 누적이 이 두툼한 책을 계속 넘기게 만들었다.
익숙해져서일까? 어려운 남자라도 익숙해진다면 그 말을 알아챌 수 있는 능력치가 생기는
것일까? 그렇게 쉬엄쉬엄 읽다보니 어느 순간부터는 무슨 말을 하고 있는 것인지 대충
알 것 같기도 하다는 생각이 들기 시작한다. 그렇다고 확실히 안다는 아니다.
알 것 같으면서 모르겠고, 모르겠다 싶으면 알겠다고 해야하나. 그러고보면 그런 부분을
이 책에서 참으로 많이 만났다. 그래서 복잡했고, 그래서 이 책이 읽는 내내 궁금했었다.
결국 이 사람이 말하고 있는 게 그 누구도 아닌 사람의 마음에 대한 문제인지라
이 책을 읽었고, 읽고 있고, 읽게 될 그 누구도 이 책을 생소하게는 느끼지 않을 것이다.
하지만 생경하기는하다. 이런 식으로 마음을 들여다 본 사람은, 마음을 자신이 사용하는
언어로 세밀하게 묘사하고 해석해보려고 시도한 사람은 드물 것 같으니까.
그래서 이 책을 계속 읽을 수 있었다.
알 것도 같고 모를 것도 같고... 그런 아리송함을 견디며 페이지를 넘기게 되었던 건
그 애매모호한 무엇인가가 이 책을 다 읽을 무렵이면 정리되지 않을까하는 얕은 기대가
있었기 때문이었던 게 한 몫했었다. 어쨌든 그런 기대는 실현되지 않았고 정리도 되지
않았다. 지금도 알 것도 같고 모를 것도 같은 상태이다. 여전히!
하지만 이 책을 읽은 감상이 어땠냐고 묻는다면, 무모하지 않은 시도였다고 대답하지
않을까? 이 책을 읽으며 융에 대해서 새로운 관심이 생겨났다는 것을 부인할 수 없으니까.
그리고 그게 융에 대해서 다른 책을 읽어보고 무엇인가를 찾아보게 될 계기를 제공하리라는
예상이 든다. 분명 그렇게 될 것이다.
16년이라는 시간을 걸쳐 쓴 이야기는 본인 스스로 출판을 거부하고 금고에 넣은 뒤 쾅하고
문을 닫았다고 한다. 그 손자가 출판을 허락한 것은 훨씬 더 세월이 흐른 뒤였다.
이 책의 고유한 가치를 알아챈 것일까 경제적 고탄에서 탈출할 방도였을까. 살짝 궁금해지지
않은 건 아니었지만 어쨌든 그의 선택으로 이 책을 읽을 수 있게 되었고, 이 책을 읽는 동안
어려운 남자의 이야기를 듣는 방법을 익힐 수 있었다. 가만히 귀 기울이면 알아듣는 부분도
생긴다, 정도이지만. 이번 책을 통해 그의 일방적 이야기를 들었다. 그리고 어쩌면 다음,
그 다음 책에서는 제대로 된 독서로 그와 소통하고 싶어졌다. 그러기 위해서 융을 계속
읽어야 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