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빌 브라이슨 발칙한 영어 산책 - 엉뚱하고 발랄한 미국의 거의 모든 역사
빌 브라이슨 지음, 정경옥 옮김 / 살림 / 2009년 4월
평점 :
이 책을 읽는데 꽤 시간이 걸렸다.
678페이지의 사전같은 두께 때문만은 아니었다.
굳이 따지자면 침대 위에서 뒹굴거리면서 읽다가 때마침 근처에 있던 전자사전을 발견한 게 원인이라면 원인일수도 있겠다.
호기심이 고양이를 죽인다는 말이 있지 않던가. 그러고보니 같은 제목의 영화도 있었던 것 같다.
'이런 단어도 사전에 있네'라는 신기함이 다른 단어에 대한 호기심으로 변했고, 말할 수 없이 긴 시간이 걸리는 독서방법을 택할 밖에 없었다. 그것도 이 두꺼운 책을. 처음에는 영어단어만 찾아봤는데 한참후에 인물사전을 뒤지고 위키백과에서 헤매고 있는 자신을 발견했다.
그래도 그나마 전자사전을 이용해서 다행이라고 생각하고 있다. 종이사전에 매료되었다면 아직 절반도 채 읽지 못하고 사전과 '발칙한 영어 산책'에 파묻혀서 절망하고 있었을테니까.
솔직히 절반 정도 읽었을 때 지쳐버려서 그만둘까도 했었는데, 쓸데없는 오기가 생겨서 (도대체, 무엇에 대한! 무엇을 위한!) 끝까지 밀고나가는 곰같은 짓을 해버렸다.
그래도 다 읽고나니까 엄청 뿌듯했다. 한 권의 책으로 엄청 똑똑해진 느낌이 들어서 한껏 기분이 들떴었다.
하지만 그것도 잠시잠깐이었다. 책을 다시 한번 넘겼을 때 깨달았다. 과도한 정보수집의 폐단을!
제대로 정리하지 않고 마구잡이로 수집해서 읽어댄 정보는 완벽하게 뒤섞여 있었다. 정확하게 기억이 나지 않을 뿐더러, 몇가지가 섞여서 정체불명의 잡다한 지식만을 힘겹게 껴안고 있는 꼴이 되었달까. '처음 뵙겠습니다'라고 인사하는 단어들까지 등장해서 허탈감을 더했다.
시간만 잡아먹는 괜한 짓을 한게 아닌가라는 생각도 들었지만, 그래도 책을 읽는 동안 즐거웠다. 오랜만에 열정적으로 읽었달까. 궁금해서 신기해서 잔가지를 치면서 책을 읽었던게 참 오랜만이라서 더 그랬는지도 모르겠다.
'발칙한 영어 산책'은 여러가지 면에서 대단한 책이지만, 우선 그 엄청난 자료에 압도당하게 된다. 빌 브라이슨은 도대체 이런 자료를 어디서 찾았는지 궁금해질 정도로 세세하고 신기한 정보들을 술술 풀어낸다. 영어표현의 유래에 얽힌 이야기, 자잘한 역사적 사실, 수많이 등장한 인물들로 한권의 책을 빽빽히 채웠다니 놀라울 정도였다. 인류의 잔머리와 꼼수가 책의 군데군데 자리잡고 있어서 픽식 웃음이 터져나올 때도 있었다. 인류역사에서 잔머리와 꼼수만 모아둔 책이 나온데도 아주 재미있는 이야기가 될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다.
오랜 역사는 아니지만 비교적 짧은 시간 동안의 엄청난 속도로 발전한 그 바탕에는 많은 사람들의 도전과 희망이 있었다. 그들은 끊임없이 무엇인가를 했으며, 무엇인가를 만들어냈다. 지금은 너무나 당연시 되고 있는 그들이 만들어 낸 많은 것들에 얽힌 이야기가 신기하면서 참 재미있었다. 그리고 이야기를 갖고 있지 않은 발명품은 이 세상에 존재하지 않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을 했다. 다만 내가 모르고 있거나, 전해지지 않을 뿐이다. 그 이야기들이 모여서 역사가 되는거구나라고 느꼈다. 잘 외워지지 않는 이름과 연도, 크고 작은 사건들을 시험을 위해서 차근차근 정리해서 기억의 공간에 채워넣어야 하는 역사과목을 그다지 좋아하지 않았었다. 시험 며칠 전에 바짝 신나게 외웠다. 그리고 시험 시간 종이 치는 순간에 옷에 묻은 먼지 떼어내듯 말끔하게 털어냈었다. 그때도 사람들이 살아간 이야기라고 생각했다면, 재미있게 공부할 수는 없었겠지만 꽤 친한 과목이 됐을텐데라는 생각이 들어서 아쉬워진다. 그래도 지금이라도 친근감을 느낀 것만으로도 좋지 아니한가싶다.
영어를 둘러싼 거의 모든 미국역사를 유쾌하고 흥미진진하게 쓸 수 있는 사람은 빌 브라이슨밖에 없을 것 같다. 특유의 재치와 유머로 재미있는 이야기들이 유연하고 박진감 넘치게 펼쳐진다. 그와 함께하는 영어 산책은 즐거웠다. 비록 이 책을 다 읽고 났을 때 한문장으로 책 내용을 줄일 수도 없었지만 말이다.
이 책의 원서를 사서 읽어 볼 생각이다. Made in America
이번에 열심히 사전을 찾으면서까지 읽었는데, 이 책을 사서 수월하게 읽을 수 있으면 꽤 보람있을 것 같다.
영어공부를 겸해서, 이 책도 열심히 사전을 뒤적이면서 열심히 읽을 생각이다.
이 책을 다 읽게 되면 영어실력과 함께 상식도 이전보다 키가 훌쩍 자랐으면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