계엄령
알베르 카뮈 지음, 안건우 옮김 / 녹색광선 / 2025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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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글에는 스포일러가 포함되어 있습니다.

란한 계엄 정국을 사느라 지친 상태에서 참으로 시기 적절하게 까뮈의 <계엄령>이 출간하였다. 반가운 맘에 보자마자 흥분했고, 구매하지 않을 수 없었다. 무엇보다 깔끔한 번역이 가독성을 높여주어 독서를 시작하자마자 단숨에 끝까지 읽을 수 있었다. (원래 희곡은 이렇게 읽는 것을 추천한다. 연극 상연을 목적으로 쓰여졌기 때문에 공연을 보는 마음으로 중간에 끊지 않고 읽기.)


한 편의 우화 같은 이 희곡은 공포를 통치 수단으로 삼는 독재를 '페스트'라는 인물로 의인화하여 이야기를 풀어나간다. 알다시피 페스트는 전염병이다. 독재를 사람들의 마음에 공포를 전염시키는 병에 비유한 것이다. 독재자 페스트는 그의 비서에게 사람들을 관리+감독하도록 한다. 비서는 데스노트를 들고 다니며 체제에 위협이 되는 존재들을 감염병자 취급하며 노트에서 그 이름을 삭제하고, 그러면 그 사람은 죽는다. 이러한 설정이 다소 만화적이고 풍자처럼 보여서 그로테스크한 코미디처럼 느껴지기도 한다. 게다가 그리스 비극이나 중세극의 형식을 차용하여 우화적인 느낌을 더욱 강조하는데, 코로스의 등장이 바로 그러하다. 이런 극적 장치들은 관객에게 '계엄'과 '전체주의'가 무엇인지, 그것이 왜 위험한지를 쉽게 이해시킨다. 이 작품은 다분히 계몽적인 의도가 엿보인다. 그래서 나는 이 작품을 많은 사람들이 꼭 좀 읽었으면 좋겠다. 지금 우리가 처한 현실과 시쳇말로 '존똑'이기 때문이다. 


"당연하지, 이 여편네야. 똑같은 언어로 말을 하더라도, 누구도 말뜻을 이해하지 못하도록 하는 게 목적이니 말이야. 당신한테 똑똑히 말해 두겠는데 우리 정부는 지금 아무리 떠들더라도 상대편으로부터 어떠한 반응도 얻지 못하는 상태를 모두가 경험하게 되는 완벽한 상태에 도달하고 있어. 하나의 도시에서 서로 날을 세우는 두 개의 언어가 어찌나 집요하게 서로를 파괴하는지 결국에는 모두가 침묵과 죽음이라는 최후의 목표를 현실로 만들기 위해 나아가는 그런 상태를 말이야." 99p


정말 소름끼치게 그를 떠올리게 하지 않는가? 


더욱 중요한 점은 까뮈가 이 작품에서 독재자인 패스트의 폭력과 권력욕만을 문제 삼지 않았다는 점이다. 여자 주인공 빅토리아의 판사 아버지와 엄마 그리고 동생들과의 관계도 전체주의적 폭력의 양상을 보이며, 극의 마지막에 이르러서 데스노트가 민중에게 주어졌을 때 그들 또한 자기 맘에 안 드는 사람은 죽이려고 하는 폭력성을 보인다. 따라서 개개인이 깨어나 의식적으로 성장하지 않는 한 누구나 전체주의적인 폭력성을 발휘할 수 있고, 그런 지도자에게 동조할 수 있음을 알 수 있다. 


주인공 청년 디에고와 빅토리아는 서로 사랑하는 사이이고, 혼란스런 폭압 사회 안에서 자신과 공동체를 지키려고 최선을 다한다. 그들이 지닌 유일한 무기는 사랑과 포기하지 않는 마음이었다. 디에고의 죽음과 함께 자유는 다시 찾아온다. 패스트는 떠난 것이지 죽지 않았다. 그는 언제나 다시 돌아올 수 있음을 암시하며 떠난다. 


'디에고는 역시 죽어야 하는구나... ' 나는 씁쓸하고 마음이 아팠다. 우리나라도 지난 세기 내내 많은 디에고들이 죽으면서 민주주의를 지켜냈다. 이승만 때도, 박정희 때도, 전두환 때도. 참 많은 디에고들이 죽었다. 하여 디에고의 죽음은 우화가 아니다. 죽음은 우화가 될 수 없다. 


완전히 떠난 줄 알았던 패스트가 이렇게 황당한 방식으로도 돌아올 수 있다는 걸 우리는 참 비싼 대가를 치르면서 배우고 있다. 서로 정치적 의견이 다를 수 있다. 지지하는 정당도 다를 수 있다. 당연한 거다. 그런 게 민주주의니까. 하지만 독재는 안된다!!!!! 그 어떤 것으로도 독재는 옹호될 수 없다는 것을 까뮈는 이 책을 통해 인류에게 호소하고 있는 것이다. 


시기 적절하게 이 책을 출간한 녹색 광선에게 박수를 보낸다. 게다가 이렇게 멋진 표지라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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