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추장밥에 들어가는 재료는 간단하다. 고추장, 식용유 또는 버터, 간장 또는 굴소스, 참기름, 찬밥 또는 더운밥, 이것이 전부다.
만드는 방법 또한 아주 쉽다. 두 가지가 있는데 그 중 하나는 찬밥으로 할 때다. 프라이팬에 식용유 또는 버터를 알맞게 두르고 밥을 넣는다. 한 공기라면 고추장 한 큰술, 굴소스 반 큰술을 넣어 볶아 준다. 뭉쳐 있던 밥알들이 잘 흩어질 때까지 볶다가 참기름 몇 방울을 떨어뜨려 향을 낸다.
다른 하나는 더운밥을 준비했을 때다. 이때는 굳이 볶지 않아도 좋다. 밥에 고추장, 간장을 넣어 잘 비벼 주면 된다. 볶을 때와 달리 참기름은 한 큰술쯤 넉넉하게 넣기를. 너무 쉽지 않은가? 깔끔하면서도 풍미 있는 맛이야 구구절절 늘어놓을 필요가 없다. 취향에 따라 달걀프라이를 올리거나 김, 오이지를 곁들여 먹어도 감동적이라는 말밖엔.
이 고추장밥은 내가 집에서 가장 즐겨 해 먹는 요리다. 반찬이 없을 때, 배고픈데 뭔가 만들기는 귀찮을 때 서슴없이 이 녀석을 택한다. 재료가 떨어지는 경우가 없고 달걀프라이까지 넉넉잡아 십 분이면 만들 수 있으니 사랑한다. 그런데 이 녀석을 사랑하게 된 까닭은 단출한 재료와 짧은 시간 말고도 더 있다.
몇 년을 거슬러 올라간다. 2004년 7월, 그러니까 대학교 3학년 여름방학, 친구들과 넷이서 유럽 배낭여행을 갔을 때다. 영국에 가면 피시 앤 칩스, 독일로 넘어가면 소시지와 생맥주, 이탈리아에선 정통 피자와 까르보나라를 먹어 보는 거야! 출발할 무렵만 해도 얼마나 꿈이 야무졌던가. 여행서와 블로그를 뒤져 정리한 현지 맛집 목록을 손에 쥔 채 몹시 든든해 하기도 했다.
그러나 현실은 녹록치 않았다. 우리는 돈도 시간도 부족한 배낭여행자였고, 더구나 길치였다. 끼니 대부분은 어딜 가도 눈에 띄는 맥도날드에 가서 해결해야 했다. 다시는 햄버거와 프렌치프라이를 먹지 않아도 좋다고 생각하는 건 그때 먹은 맥도날드 패스트푸드 때문이다. 결코 싸지 않았던, 그러나 똑같이 니글니글하고 찜찜했던 유럽 맥도날드. 남들은 배낭여행을 하면서 살이 쑥쑥 빠진다던데, 우리는 주구장창 맥도날드를 드나든 탓인지 경이로운 체중감량 같은 건 경험할 수 없었다.
여행 식생활이 늘 그렇게 기름진 것만은 아니었다. 우리나라 요구르트보다 유산균이 몇 배는 더 많이 든 것 같은 요구르트, 햇빛을 듬뿍 받아 풍성하고 달디 단 과일도 종종 섭취했다. 그리고 일주일에 두 번씩 비상식량으로 챙겨 간 햇반을 먹었다. 반찬이라곤 튜브 고추장과 통조림 참치뿐이었음에도 왜 그리 꿀맛이었는지. 밥을 먹으면서 되뇌고 또 되뇌었던 기억이 난다. 집에 가면 밥만 먹을 거야, 매일매일 고추장이랑 먹을 거야!
고추장밥과 열렬한 사랑에 빠진 것은 그때부터다. 먹어도, 먹어도 질리지 않는 요리 두 가지가 이 고추장밥과 떡볶이다. 그 이유는 틀림없이 매운맛을 내는 고추장에 있다. 짜릿한 매콤함, 기분 좋은 얼얼함, 뿌리칠 수 없는 쌉쌀함 때문에 지금껏 고추장밥을 아낀다. 아마 앞으로도 쭉 그럴 것 같다.
며칠 전에 들었던 인문학 강의에서 이런 이야기가 나왔다. ‘사람을 자라게 하는 것은 고통이다’라는. 혹자는 당연한 말 아니냐고 할지도 모르겠다. 옳다, 우리가 숱하게 들어 온 당연한 말이다. 그러나 그만큼 삶에 새기고 있는지 돌아보면 ‘당연하다’고 말하긴 어려울 터이다.
사람들은 피할 수 없는 고통과 맞닥뜨렸을 때 절망한다. 또는 터무니없이 희망한다. 누군가를 원망하고, 누군가에게 매달리며, 누군가의 위로를 움켜잡는다. 삶이 매운 것을 견디지 못하는 까닭에 발돋움 따위는 내다보지 않는다. 뭐, 괜찮다. 어쨌든 살아 내고 있다면, 조금씩 나아가고 있다면 그것만으로도 충분하다고 생각한다. 약했던 모습이야 나중에 깨달아도 늦지 않는다. 깨달음이 오는 그때에 곧 한 뼘 자라 있을 테니까. 새로 맞은 호랑이해에 고추장밥을 먹는 나도 그러하리라. 적어도 배낭여행 때 고추장밥을 먹던 나와는 다르지 않겠는가.
어머니가 나를 뱃속에 넣고 계실 때 암호랑이 꿈을 꾸셨다고 들었다. 꼬리를 살살 흔드는 작은 호랑이가 한눈에 봐도 암놈이었다고 한다. 그 녀석은 지금쯤 꼬리를 흔드는 대신 어디론가 달리고 있을 것이다. 삶이 얼마만큼 맵다는 점도 알아차렸을 터이다. 눈매는 또렷해지고, 이빨과 발톱은 한결 날카로워졌겠지. 나는 달리는 호랑이를 지지한다. 고추장과 밥을 섞어 놓아도 맛있게 먹어치울 듯한 호랑이를 응원한다. 멈추지 마라, 호랑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