며칠 전 일본 인디필름 페스티벌 상영작 가운데 하나인 <남극의 쉐프>를 봤다. 한 마디 감상평을 써 보자면 ‘자극 없이 웃기고 신파 없이도 짠한 요리영화’라고 할까. 졸지에 기러기 아빠가 된 조리사가 식사시간이 유일한 낙인 남극관측 대원들에게 맛있는 음식으로 기쁨을 준다는 줄거리가 튀지 않으면서 신선하고 훈훈한 작품이었다.

영화에는 여러 가지 요리가 나왔다. 계란말이와 미소된장국이 기본인 일본 가정식부터 연어와 장조림과 명란젓을 넣은 주먹밥, 회전식 반찬대에 담아 돌려 먹는 중식, 타르타르소스를 끼얹은 닭새우튀김, 쥐불놀이 하듯 구운 고기, 천연얼음 위에 시럽을 부어 숟갈로 긁어 먹는 셔벗, 프랑스 거위간 요리인 ‘푸아그라’를 포함한 만찬, 손수 만든 간수로 끓인 라멘까지, 아침을 거른 채 영화를 보는 내 오관이 떨릴 만큼 많은 요리가 스쳐 갔다.
다 맛있어 보였지만 그 가운데에서도 가장 눈에 띈 요리는 거대한 닭새우튀김이었다. 조리사 ‘니시무라’가 회로 먹자고 거듭 권했으나 다른 대원 모두가 강력하게 밀어붙여 튀김으로 거듭난 닭새우. 너무 커서 한 접시에 가지런히 담길 수 없는 탓에 머리는 따로 세워지고 몸통은 옆에 누였다. 통통하다 하기엔 터질 듯하고 먹음직스럽다 하기엔 무지막지한 녀석 앞에 할 말을 잃은 대원들에게 니시무라가 어정쩡한 웃음을 보이며, 그러나 자상한 목소리로 한마디 건넨다. “머리내장을 섞은 타르타르소스를 곁들였습니다.”
닭새우는 누가 봐도 튀김을 해 먹기엔 알맞지 않은 녀석이었다. 회로 먹었다면 틀림없이 더 생생하고 담백한 새우맛을 느낄 수 있었을 것이다. 그럼에도 대원들이 부득부득 튀김을 고집했던 이유는 뭘까?
해발 3,810m, 평균 기온 -54도인 남극 돔 후지 기지. 그곳엔 펭귄도, 바다표범도 살지 않는다. 심지어 바이러스조차 살아남지 못한다. 기지 밖에 있으면 얼굴에 난 털이란 털에 고드름이 달릴 지경이다. 바람과 눈보라보다 더 지긋지긋한 것은 ‘추위’다. 그들은 늘 추위에 시달린다. 가족과 애인을 떠나 하루하루를 버티는 그들에게 극한지는 한층 가혹한 곳이다. 당연히 따뜻한 음식이 그리울 테고, 날카로운 칼로 뜬 차가운 회보다는 뜨거운 기름에 튀겨 낸 소복한 튀김이 더 먹고 싶었으리라.
그들이 두툼한 새우튀김을 한입 가득 베어 무는 모습을 보면서 나 또한 새우튀김이 먹고 싶어졌다. 만들어 본 적은 없지만, 중간크기 새우를 넉넉히 튀겨 식구들과 함께 먹으면 참 좋을 것 같았다. 더구나 타르타르소스는 양식실기수업 때 배운 요리였다. 군침이 돌았다. 좋았어, 고소한 소스도 만들어 바삭한 튀김에 곁들여 먹자!
그렇게 해서 타르타르소스를 먼저 만들게 됐다. 소스는 만들고 나서 시간이 좀 지났을 때 맛이 한결 좋아짐을 기억했다. 양파와 피클, 삶은 달걀흰자를 다지고 달걀노른자는 체에 내렸다. 손질한 재료들을 한데 모은 뒤 같은 양의 마요네즈를 넣어 섞었다. 조리법에 따르자면 소금과 흰후추를 넣어야 했지만, 마요네즈 자체가 짜기 때문에 건너뛰었다. 마지막으로 냉장고 서랍에서 굴러다니던 레몬을 토막 내 짜서 묽기를 맞췄다. 소스 완성!

다음은 새우를 튀길 차례였다. 중하 한 모둠을 샀더니 열다섯 마리가 들어 있었는데, 온 식구가 배불리(?) 먹기에는 부족한 듯해서 고구마도 튀기기로 했다. 새우를 튀기면 내장이 흘러나와 기름색이 변한다니 고구마튀김을 먼저 해야 했다.
어머니가 고구마튀김 만들기를 도와주시는 사이에 새우를 손질했다. 가시와 수염을 잘라 내고 마디 끝부분을 뺀 나머지 부분 껍질을 벗겼다. 수업시간에 했던 것처럼 이쑤시개를 등 두 번째 마디에 찔러 넣어 내장도 뺐다. 시간이 꽤 걸렸다. 손질한 새우에는 소금과 후추를 살짝 뿌리고 튀김옷을 입혔다. 밀가루 묻히고 달걀물에 빠뜨리고 빵가루 위에서 굴리고. 모양을 생각해 머리와 꼬리에 묻은 가루는 털어 냈다.
튀길 때는 기름을 적게 썼다. 깊은 바다에 풍덩 빠뜨리는 느낌이 아니라 얕은 물에 눕히는 느낌으로 했다. 그렇게 마무리한 튀김도 바삭하고 고소했다. 새우튀김은 군소리할 나위 없이 맛났고, 고구마와 ‘삐죽삐죽 튀김옷’도 제법 잘 어울렸다. 양파를 듬뿍 넣은 타르타르소스에 찍어 먹으니 느끼한 가운데서도 상큼해 계속 손이 갔다. 다들 맛있다며 잘 먹어 주었다. 내가 한결 즐겁게 맛볼 수 있었던 까닭은 그 때문일 터이다.

따듯함과 바삭함, 고소함을 나누다 보니 웃음이 번졌다. 온몸을 출렁이게 하는 ‘큰웃음’은 아니었지만 한겨울 추위를 덮기에는 알맞춤했다. 니시무라가 식사시간마다 흐뭇해 했던 이유를 알 것 같았다. 그가 사람들에게 준 것은 음식만이 아니었고, 그가 먹은 것 또한 음식만이 아니었다. 추위와 외로움을 잊게 하는 훈훈함, 입 속과 마음속을 동시에 채워 주는 포만감, 함께 씹고 삼키고 마신다는 유대감… 그는 그 모든 요리를 만들어 먹이고, 먹어 온 것이다.
요리란, 그래서 예술이기 이전에 삶이다. 두꺼운 튀김옷을 입은 새우는 파란 장미 새겨진 ‘접시’가 아니라 차가운 ‘계절’에 꼭 들어맞는다. 삶은 접시 위에만 놓이지 않고 남극에, 대한민국 서울에, 겨울을 견디고 있는 사람들에게 따듯함과 바삭함, 고소함을 전해 준다. 추워도 춥지 않게 하는 것. 아, 이보다 맛있는 일이 또 있을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