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징어에 칼집을 넣어본 사람은 알 것이다. 한 번 해본 ‘칼집 넣기’를 좀처럼 끊을 수 없음을.
칼집을 넣는 이유엔 여러 가지가 있다. 우선 눈을 즐겁게 한다는 것. 오징어를 막대 모양으로 뚝뚝 썰어놓은 것에 비하면 훨씬 재미있고 이색적이지 않은가. 뿐만이 아니다. 칼집 사이사이로 양념이 고루 배어 음식의 맛도 한결 좋아진다. 씹을 때의 오돌토돌한 느낌 역시 즐거운 식사에 한 몫 한다.
한식에 오징어볶음이 있다면 중식엔 오징어냉채가 있다. 오징어볶음은 ‘X’자 모양의 칼집을 넣어야 하고, 오징어냉채는 종횡으로 칼집을 넣어야 한다. 두 경우 다 칼이 몸통 두께의 절반까지 들어가야 하는데, 그래야 오징어를 데쳤을 때 모양이 제대로 살기 때문이다. 특별히 어려운 과정은 아니지만 눈이 나쁘거나 손 떨림이 있는 사람에겐 힘들 수도 있다. 칼 쥔 손의 힘을 잘 조절하며 한 번에 한 줄씩, 빠르게 만들어가는 연습이 필요하다.

완성 후 시간이 많이 지난 뒤에 찍은 것이라 겨자소스가 뭉쳐 있다.
제출할 때 이런 상태여선 곤란하다!
중식과정 때 제출했던 오징어냉채다. 선생님은 제출된 완성품 중에서 가장 좋다고, 오징어에 재주가 있나보다고 하셨다. 수강생 분들은 칼집이 고르다, 활 모양이 살아 있다 등등의 칭찬을 해주셨다. 오징어볶음으로 한식자격증을 딴 나이니 칼집은 무조건 예뻐야 했다. 강박증을 안고 요리를 하는 것은 아니지만, 합격자로서 고른 솜씨를 유지하려는 노력은 들이고 있으니까.
오징어에 칼집을 넣기 시작한 뒤로 일어난 변화들이 있다. 먼저 오징어에 대한 애정이 생겼다. 솔직히 전에는 그다지 즐기지 않았던 재료다. 그런데 요리를 하면서 생각보다 맛나고 부드러운 식재료임을 알았다. 씹을 때는 질긴 오징어가 실은 얼마나 야들야들한 녀석인지, 직접 만지고 손질한 오징어의 맛은 얼마나 담백한지. 이는 오징어 요리를 해봄으로써 알게 된 것들이다.
변화는 또 있다. 오징어에 칼집을 넣는 데 집중하면서 마음 속에 있던 칼집들은 희미해졌다. 요리를 통한 몰입과 기쁨으로 패인 자리가 메워졌다. 투명한 오징어 몸통에 마지막 한 줄의 칼집을 넣을 때마다 든 생각, 타인의 가슴을 할퀴는 것은 얼마나 무의미한 일인가.
삶은 종종 우리를 속인다. 그러나 ‘너 죽고 나 죽는’ 짓을 할 바에야 오징어에 칼집을 넣는 것이 백 배 맛있는 일이다. 신성한 식재료에 넣는 칼집은 흉하지 않다. 그것은 당신이 제거하고자 하는 무엇을 정확히 겨냥할 활(오징어냉채의 모양), 당신의 식탁을 풍성하게 해줄 도깨비방망이(오징어볶음의 모양)가 될 수 있으므로.
지금 무언가에 금을 긋거나 상처를 내고 싶은 당신에게 오징어 한 마리를 바친다. 사선이든 종횡이든 칼집을 넣어보시라. 마음껏, 당신이 내킬 때까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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