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레닌을 사랑한 오타쿠 ㅣ 우리 시대 젊은 만인보 8
김민하 지음 / 텍스트 / 2009년 11월
평점 :
품절
책은 이렇게 시작합니다.
"이 땅에서 혁명가(운동가, 직업 활동가, 진보적 직업 정치인 등 무엇이든 좋다)로 산다는 것은 매우 특이한 괴짜로 사람들의 마음에 각인되어야함을 의미한다. 그들은 자신들을 싫어하는 사람들에게는 '사회불안을 야기하는 이상한 폭도들'이고, 자신을 반겨주는 사람들에게는 '자신의 삶을 내팽개치고 남을 위하는 이상한 영웅들'이다. 보통 사람들은 어떻게 그들이 그런 괴짜가 될 수 있는지에 대해 의하하게 생각한다. 하지만 생각보다 많은 사람들이 이런 의미에서든 저런 의미에서든 '괴짜'로 살아가고 있다. (중략) 보통 대단한 운동가들은 태어나면서부터 텔레비전도 보지 않고 날마다 진지한 책을 읽으며 밤을 지새웠을 것 같지만 전혀 그렇지 않다. 즉 '혁명가'도 그 수많은 '괴짜'들의 일원일 뿐이다. 괴짜들의 일원이 되는 것은 그리 어려운 일이 아니고, ‘혁명가’가 되는 것도 어떤 대단한 증표를 얻어야만 가능한 일이 아니다. 정치적으로 각성할 기회는 생활 곳곳에 널려 있다. 집 밖으로 한발만 내딛으면 곧바로 정치의 영역이 펼쳐지는 것이다. (중략) 이 책은 바로 그런 수많은 ‘정치적 순간’들이 어떻게 평범한 사람을 레닌으로 만들 수 있는지에 대한 것이다"
김민하는 어린 시절의 자신이 어떻게 게임 매니아, 음악 매니아, PC통신 매니아로 자랐는지 보여줍니다. 가난한 탓에 친구의 게임기를 빌려서 했던 기억, 한번 산 게임은 돈이 아까워서라도 끝까지 잡았던 기억, 통신은 하고 싶지만 돈이 없어서 야간 정액을 신청해 밤을 샜던 기억.. 흥미로운 것은 그가 PC통신을 하면서 나우누리의 허술한 서비스에 분노해 다른 사용자들과 게시판 시위를 벌였던 것이나, DC인사이드 초기의 전설적 사건인 '병욱 대첩'(서울대 학생 게시판 스누라이프에서 과외비는 40만원 이상으로 받자는 글을 올린 서울대생을 털어버린 사건) 등을 자신에게 있어서 어떤 정치 의식의 출발점으로 보고 있다는 점입니다. 물론 그 것은 사실 사이버테러나 이지메에 가까운 일이지만, 참여자들에게 있어서 어떤 '민중적 자력구제의 쾌감'을 주는 행위이기도 합니다.
"돌이켜보면 이 사건이야말로 일종의 '징후'였다. 폐인들이 공유했던 이 사건의 정당성은 그들이 잠시 양심을 망각한 결과로만 이야기할 수 있는 것이 아니다. 그들이 서울대생의 과외비 동결론을 보고 느꼈던 분노는 그것이 정당한지 여부를 떠나서 매우 '민중적'인 것이었다. 그리고 인터넷 시대에서 그들은 그 '민중적인' 분노를 매우 '민중적으로' 표현했다. 그들은 '사이버 테러'를 저지르는 내내 자신들의 손으로 부조리를 응징하는 '자력구제의 쾌감'을 공유했던게 분명하다."
이러한 '사이버 민중주의자'들은 2002년이 되서야 드디어 어떤 성과를 내게 됩니다. 바로 노무현의 당선이죠. 물론 인터넷 여론이 노무현 단일 노선으로 결집하지는 않았지만, 적어도 상대 후보였던 이회창이 지배권력층에 대한 민중적인 네거티브 의식과 결합하여 사이버 공간에서 내내 비웃음 당하고 비난당했던 것은 사실이죠.
그다지 정치에 관심이 없었던 이들에게도 드라마틱한 노무현의 인생은 매력적으로 다가올 수 밖에 없었습니다. 물론 그 것은 저에게도 마찬가지였구요. 당시 인터넷 상에서는 '어디선가' 등장한 노무현 지지 논리가 빠르게 확산되었던 기억이 납니다. 당시 제가 활동했던 사이트에서도 갑자기 노무현 지지 글이 올라와 상당히 당황스러웠었는데 - 서태지 팬사이트였음에도 불구하고! - 이렇게 인터넷 여론이 움직인 것은 당시 네티즌들의 '사이버 민중주의'와 연관지어 생각할 수 있을 것 같습니다.
수능을 친 김민하는 초고속 인터넷 망을 설치하고 본격적으로 인터넷 세상으로 빠져들게 됩니다. 그는 뭔가 생산적인 일을 해야한다는 생각을 하다가 스스로 정치에 무관심했다는 사실을 깨닫게 됩니다. 그게 2001년 말이었고, 막 민주당 대선 후보 경선이 치열했던 시기였습니다. 그는 '딴지일보'를 발견하게 되는데, 당시 쌈마이 B급 언론을 표방했던 딴지일보는 상당한 영향력을 가진 인터넷 매체였고, 상당히 명확한 입장, 그러니까 안티 조선/H당 성향이 강렬했죠. 김민하는 딴지일보를 열독하다가 생소한 이름의 당을 만나게 됩니다. 그게 바로 민주노동당이었구요.
당시 인터넷 여론이 주로 한나라 vs 민주당 구도로 편성되어, 노무현이냐 아니냐로 시끄럽던 상황에서 민노당은 '다른 스케일'의 정서와 세계관을 보여주었습니다. 이 것은 김민하에게 충격적으로 다가왔죠. (저 역시 그랬습니다.) 지금도 그렇지만, 당시에도 대표적인 논객으로 진중권이 있었습니다. 김민하는 진중권의 글을 보고 흥미를 느끼게 되는데, 당시 진중권이 활동하던 사이트인 '깨끗한 손'(김문옥 지지 사이트였죠.)을 찾아들어가게 되지요. 그리고 여기서 인생이 뒤집히는 경험을 하게 됩니다.
"이후 나는 본격적으로 좌파이론에 대한 수박겉핡기식 공부를 시작하게 되었다. 주된 교재는 진중권 선생이 인터넷에 쓰는 여러 진지한 글들과 왕년에 운동 좀 했다는 네티즌의 잡스러운 글들이었다. 그것들만으로 이론을 정확하고 섬세하게 공부할 수는 없었지만, 대강의 맥락을 통해 기본적인 계급론 정도는 습득할 수 있었다. 세상은 지배계급과 피지배계급으로 이루어져있고 지금까지의 역사는 계급투쟁의 역사였다는.. 이 한 문장 가지고도 너무 많은 것을 이야기할 수 있어서 나는 큰 충격을 받았다."
이제까지 이해할 수 없는 것을 접하면 그건 원래 이해가 불가능한 것이라고 생각했던 그는, 알고보면 내가 이해할 수 없었던 것들에도 거의 다 이해할 만한 이유가 있다는 사실을 배우게 됩니다. 이해할 수 없었던 것들에 대해 나름의 코멘트를 붙이기. 이 것은 '스스로 생각하는 법'을 알려주는 것이었죠. 여기서 김민하의 '각성'이 시작됩니다.
그리고 그는 푸코, 김규항, 유시민, 촘스키등의 "태어나서 처음으로 주문한 정치와 사회과학 관련 도서"들을 읽어나갔고, 레닌을 만납니다. 현실을 정확하게 파악하여 필요한 정치적 행동을 제시하고, 직접 행동하는 사람인 레닌은 김민하에게 깊은 감명을 주지요. 김민하는 이른바 운동권으로 거듭나게 됩니다.
운동권으로 거듭난 그에게 02년 대선은 커다란 정치적 경험이 됩니다. 당시 진보정당 내부에서도 노무현에 대한 비판적 지지와, 진보정당 후보를 지켜야 한다는 반대 여론 사이에서 커다란 충돌이 있었습니다. 아니, 당원도 아닌 나도 권영길을 지지하는데, 당원이라는 사람들이 노무현을 지지하다니?! 라는 충격에 그는 대선 직후 "내가 입당해서 당을 바꿔야 겠다!" 라는 생각을 가지게 됩니다. 그 뿐 아니라 인터넷에서 계속해서 벌어지던 당 내 노선 싸움을 통해 점차 진보정당을 지켜야한다는 생각을 굳힌 그는 진보누리가 생길 때 참여하면서, 점차 직업적 운동권의 길로 향하게 되었다고 합니다.
그가 활동가가 되기까지 단지 '키보드 배틀'의 과정만 있던 것은 아닙니다. 방학 동안 공장에서 알바를 했던 것도 활동가로서의 의식에 중요한 작용을 했죠. 두 달 동안 공장 노동자로 일하면서, 실내화를 강매한다거나 회사와 공장 노조가 담합한다거나 시급을 빼먹는다거나 강제 잔업을 시킨다거나 파견을 통해 탈법 행위를 한다거나 하는 일들.. 근로기준법을 준수하라며 노동사무소에 찾아갔지만, 사실 근로감독관 역시 공장과 입을 맞춘 상황.. 이러한 현실의 경험들은 그의 '의식화'를 점차 촉진 시키게 됩니다.
온라인 게임을 하면서 어뷰저를 적발하기 위해 다른 게이머들과 논쟁을 벌였던 것도 그에게 깨달음의 과정이었구요. 결국 사건의 진상을 밝히지 못하고, 게임을 떠나면서 그는 "싸움을 하려거든 만반의 준비를 하고 해야한다"는, 혁명가에게 무엇보다도 중요한 교훈을 얻었습니다.
그후 그는 최연소 회원으로 민노당 범좌파 정파였던 '전진'에 참여하게 됩니다. 그 회원으로 정당 활동에 가열차게 참여하게 되구요. 그러나 어린 나이와 현장 경험의 부족은 그에게 한계로 작용하게 됩니다. 그는 현장 경험을 쌓겠다! 는 생각으로 노조 운동에서도 가장 과격하고 힘들다는 덤프연대 상근자를 자원하게 됩니다.
덤프 노동자들은 자영업자로 취급되지만, 사실 자영업자가 아닌 특수 고용 노동자라고 할 수 있습니다. 노동자지만, 법적으로 노동자가 아니기 때문에 근로기준법의 사각지대에 놓여있고, 그들끼리 경쟁할 수 밖에 없는 구조에서 단합하기도 어려운 상황에 있죠. 직종 특성 상, 투쟁의 양상도 과격한 물리적 시위로 갈 수 밖에 없구요. 이런 상황을 현장에서 겪으며 김민하는 노조도 중요하지만, 세상을 바꾸려면 결국 '당'과 '정치'가 필요하다는 생각을 하게 됩니다. 그리고 민노당 강남구위원회 상근자로 옮기게 되구요.
이 때 07년 대선후보 경선이 시작하게 됩니다. 아시다시피 경선이 끝나고, 대선이 '패배'로 마무리 되고, 비대위가 실패하면서 분당이 되지요. 경선 국면에서 명망가 위주의 정당, 정파간 갈등, 낡은 사상을 추종하는 특정 조직 등의 문제에 대한 해묵은 상처들이 다시 불거지게 됩니다. 당원들은 당 사수파와 분당파로 나뉘었고, 당내 우파가 득세하며, 경선 이후 조직이 활력을 잃어가면서 김민하가 속했던 '전진' 역시 마찬가지의 내홍을 겪게 되죠. 이러한 당 안팎의 위기 상황에서, 김민하는 아빠가 됩니다.
어느날 갑자기 여자친구가 전한 임신 소식. 둘 다 한창 때인 20대 중후반의 나이에, 활동가로 할 일도 적지 않은 터에, 그리고 아직 군대도 다녀오지 않은 상황에서 그 것은 크리티컬한 사건이었습니다. 이미 6개월. 여자 친구의 의사에 따라, 또 자신의 선택에 따라 아이를 낳기로 결정한 그는 가까스로 양가 부모의 허락을 받고, 결국 아빠가 된 후에, 또 돈이 없기 때문에 집을 구하지 못하고 원거리 부부가 되는 상황에 닥치게 됩니다. 그리고 '세상에 불만을 품은 20대'였던 김민하는 여기에 '아이의 미래를 염려하는 아빠'라는 새로운 정체성을 가지게 되지요.
이 책은 김민하가 진보신당 상근자로 일하는 모습을 끝으로, 또 공익요원으로 입대를 앞둔 상황에서 마무리가 됩니다. 사실 어떻게 보면 김민하의 지금 모습은, 희망도 미래도 보이지 않은 상황이라 할 수 있겠습니다. 음악에 미쳐 7년 동안 아마추어 밴드에 몰입하고, 준비도 하지 않은 상황에서 갑자기 아이를 낳고 결혼하게 되고, 운동권 활동에 매진하여 학교는 뒷전이었고, 게다가 마땅한 돈벌이도 못하고 진보정당 상근자로 쥐꼬리 만한 월급을 받는, 게다가 스물 여덟이라는 나이에 아직 군 복무를 해야하는! 그야말로 '답이 안나오는' 인생. 집안이 빵빵한 것도 아니고, 또 부부 모두 활동가의 길을 걷기로 했으니 경제적 궁핍과 허름한 삶을 떠올릴 수 밖에 없습니다.
그러나 과연 이 것은 김민하가 '못나서' 그런 것일까요? 20대는 집에 돈 없고 안정된 직장이 없다면 애를 낳아서도, 또 결혼 해서도 안되는 걸까요? 정당에서 일한다는 것은, 정말로 쥐꼬리만한 돈을 받으며 자원봉사하듯 일하는 것이어야 하나요? 20대의 2년이라는 세월을, 우리는 꼭 자유를 잃고 묶여 살아야하는건가요? 젊은이들을 이렇게, 금지와 강요의 삶으로 몰아넣은 것은 과연 누구인가요?
아기 아빠가 된 김민하는, 이 것들이 우리 '모두의 잘못'이라고 봅니다. 특정한 누구의 잘못도 아니고, 20대의 잘못도 아니고, 386 세대의 잘못도 아니고, 또 그 이전 세대의 잘못도 아닌, 우리 모두의 잘못이죠. 그리고 이 잘못을 반성하기 위해서, 실천하기 위해서, 바꾸기 위해서는 정치가 필요합니다. 김민하는, 그리고 그의 아내는 이러한 상황에서도 운동과 정치에 대한 신념을 꾸준히 지켜나가고 있는 것이죠.
비관적으로 보이는 상황에서도, 김민하나 그의 아내, 혹은 그 밖의 많은 사람들이 여전히 새로운 세상을 꿈꾸고, 정열적으로 움직이고 있따는 사실, 그것은 남다른 유전자가 있기 때문이 아닙니다. 똑같이 힘들고 어려운, 평범한 삶을 사는 사람들도 어느날 갑자기 일상에서 새로운 깨달음을 얻고 새로운 레닌이 될 수도 있는 것이죠.
아직까지 무언가 제대로 '실천'했다고 할 수 없는 저는, 비록 김민하의 생각에 100% 동의할 수 없을지라도 그가 삶 속에서 계속 선택과 변화를 두려워하지 않는 모습을 보고 모종의 감동을 받았습니다. 그런데 이게 그냥 감동에서 끝나버리면 안되겠죠. '감동'이라는 것은 어찌보면 자신을 누군가에게 잠깐 동일시했다가, 바로 타자의 입장으로 돌아가 "그래도 나는 저렇게 살 수는 없을거야.."라고 중얼거리는 것에 불과하지 않나 싶습니다. 만약 책을 읽는다는 것이 우리에게 의미를 가지는 것이라면, 그 것은 책을 읽은 후의 자신이 읽기 전의 모습과 변해있을 때만 유효한 이야기가 아닌가 싶습니다. 김민하는 그저 '학삐리'로 살아온 저에게, 두렵더라도 실패하더라도 손가락질 받더라도 네 희망을 보이라고 이야기합니다. 그가 '성공'할지, 아니면 '실패'할지는 모르겠습니다. 그러나 그가 진보정당에 몸을 던진 것처럼, 저 역시 제가 무엇을 할지 정할 때가 된 것 같습니다. 그런 의미에서, 저는 그를 제 삶의 한 '선배'로 생각할 수 있을 것 같습니다.
1) 한윤형의 책이 인터넷 정치 담론의 흐름과 현실 정치의 사건들을 관찰자의 입장에서 기록하고 있다면, 김민하의 책은 진보정당의 과거와 현재를 '당원'의 시선으로 바라보고 있습니다. 현실 정치에 관심은 있는데 뭐가 뭔지 모르겠고 다들 각자 자기 얘기만 하는 것 같다, 싶은 분들은 이 책이 도움이 될 것 같습니다.
2) 한윤형과 김민하는 스스로를 '진중권 1세대'라고 부르는데요, 진보누리 같은 사이트는 정말 한 때 진중권을 비롯한 여러 논객들의 집합소였죠. 한윤형과 김민하는 가장 젊은 축에 속했던 것 같네요. 근데 그 때 그 논객들이 지금 뭐하고 있나 찾아보면 많이 씁쓸해지긴 합니다. orz
3) 이 시리즈를 죽 살펴보면 진보신당 쪽 인사들이 주로 등장하는 것 같은데, 좀 아쉬운 부분이 있군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