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뇌와 종교교육 - 우리가 하나님에 관해 어떻게 배우는지 이해하기 위한 실제적인 자원들
제리 라슨 지음, 김리아 옮김 / 신의정원 / 2022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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뇌교육과 종교교육간의 관계를 다룬 책들은 종종 있다. 하지만 이 책은 ˝중요한 것은 개별 뇌 영역이 아니라 이들의 연결 영역간의 교환과 상호작용˝이라 말하며 신앙형성의 과정을 현장의 언어로 번역해 낸다. 흥미롭다! 최신의 뇌연구결과를 신앙교육에 적용하고 싶은 모든이에게 추천하는 바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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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금이 영원입니다 - 어려운 시기, 당신에게 보내는 위로와 지혜
크리스토프 프리드리히 블룸하르트.요한 크리스토프 블룸하르트 지음, 김성민.고학준 옮김 / 대장간 / 2020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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편집자의 추천사가 돋보이는 것은 이 책을 덮으며 블룸하르트가 하고자하는 메시지가 우리시대의 동시대인에게 같은 공명과 공감을 주기 때문이다. 


"오늘날 대부분의 사람들이 중요하게 여기는 것은 '현세적 삶', 그 덧없는 삶의 조각들이다. 이 사실이 놀랍지 않는 이유는 이러한 것들은 즉각적이고, 만질 수 있고, 볼 수 있기 때문이다. 그러나 이러한 상황은 개탄스럽다. 우리의 삶에서 신성하고 지속되는 부분인 '영원이란 차원'이 길가에 버려진 채 무시되고 우리 시야에서 사라지기 때문이다. 영원이 잊혀질 때 인간의 궁극적 운명에서 참 의미는 사라지고, 삶의 목적은 세속적 차원에서 성취를 추구하는 것으로 제한된다. (...) 영원을 염두에 둔다는 것은 땅 위에 있는 것들이 언젠가는 영구한 생명을 가진 현실에 의해 빛을 잃게 될 것임을 안다는 것을 말한다." -편집자의 서문 중에서 -(p. 12)


그렇다. 내가 딛고 서 있는 현실로부터 우리는 출발하지만, 블룸하르트 부자는 진짜 현실은 땅으로부터가 아니라 하늘로부터 우리에게 주어져 있다고 말한다. 그렇기 때문에 우리가 희망을 꿈꿀 수 있는 이유도, 소망을 품을 수 있는 이유도 나의 부족함, 나의 어떠함, 나의 준비됨으로부터 오지 않는다. 오직 위로부터의 약속, 그 십자가를 통과한 위대한 생명으로부터 시작된다. 


그러한 의미에서 이 책 <지금이 영원입니다>는 우리의 출발점을 되묻고, 희망의 원천이 어디로부터 오는지를 다시금 상기시킨다. 우리는 하늘로부터 십자가를 통해 주어진 '영원한 생명'을 누리지 못한 채, 현실을 연명한다. 하지만 블룸하르트는 말한다. 영원한 생명은 죽어서 가는 하늘나라에서 받는 것이 아니라 지금-여기에서 하늘의 법도로 땅에서 살아내는 삶을 말한다고. 그러니 현실 세계 속에서 하나님의 자녀된 신분과 권세가 무엇인지, 그것이 영향력을 잃어버린 것은 아닌지라고 의문을 갇는 독자가 있다면 이 책은 매우 고무적이고 도전적인 책이 될 것이다. 


* 다른 한편, 아쉬운 점이 있는데, 필자는 블룸하르트에 대해 다른 저서를 통해 접하고 이 책을 두번째로 읽게 되었는데, 만일 이 책이 블룸하르트를 소개받는 첫 책이 된다면 많은 아쉬움을 남길 것 같다. 금언처럼 이루어진 68개의 조각은 그 자체로 의미있는 인사이트를 주겠지만, 그의 사상이 담지하고 있는 깊이와 넓이를 초행길을 걷는 독자가 파악하기란 어간 어려울듯 싶어서이다. 그럼에도 짧은 금언 속에서 묵직한 인사이트를 받을 수 없는 것은 아니니 관심있는 독자라면, 1독을 권해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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행동하며 기다리는 하나님나라
크리스토프 블룸하르트 지음, 전나무 옮김 / 대장간 / 2018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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때론 저자보다 추천사가 화려한 책이 있다. 이 책이 바로 그렇다. 이 책은 분명 블룸하르트에 관한 책인데, 항상 추천사에는 칼 바르트가 따라다닌다. 물론 이러한 현상에는 20세기 교부로 불리는 바르트의 영향력이 한 몫 하겠지만, 블룸하르트가 바르트의 제자도 아니고 오히려 바르트가 블룸하르트를 존경하며 영향받았다고 하는데, 유명세가 역전되도 너무 역전되지 않았나 싶다. 그런 의미에서 블룸하르트의 이 책, <행동하며 기다리는 하나님 나라>는 그러한 의문을 안고 집어든 책이자, 그러한 의문을 잠재운 책이기도 했다.

 

1. 축척된 만나에는 썩은 냄새가 난다.

 

미리 앞질러 말해보고 싶다. 바르트는 블룸하르트에게 구체적으로 어떤 영향을 받았나. 책을 덮고, 떠오른 단 하나의 단어는 하나님의 행위였다. 블룸하르트를 둘러싼 수많은 미사여구가 있을 수 있으나 나는 단연코 하나님의 행위가 그를 둘러싼 사상을 꿸 수 있는 중요한 단어라고 본다. 대학원 시절, 칼바르트 세미나를 하면서 바르트의 톡특함을 정돈해 준 단어 역시 하나님의 행위였다. 바르트에게 있어 하나님에 관한 인간의 인식은 불가능그 자체였다. 오히려 인식은 인간으로부터 시작될 수 없고, 오직 하나님 자신이 인간에게 나타나셔야만 가능한 행위로만 오로지 가능할뿐이었다. , 바르트는 인간이 신에 이를 수 있는 어떠한 인식의 조각, 능력, 가능성을 인정하지 않는다. 오히려 오직 신 자신의 인간에게 다가오시는 주체적 행위’, 행위에만 모든 가능성이 시작될 뿐이다. 바르트는 이를 신-존재증명이 그동안 존재의 범주에서 말해지는 것을 뒤집으며 신은 존재가 아니라 행위라고 말했다. 신은 그의 주체적 행위속에 역동적으로 존재하시는 것이지, 인간의 그 어떤 존재증명 속에서 발견될 수 없는 것인 셈이다.

 

나는 이러한 바르트의 이론을 나름대로 만나에 비유하여 이해한다. , ‘만나는 하늘로부터 주어지는 것이지만, 인간에 손에 놓여지는 순간 화석화된다. 소유하려 들고, 축적하려는 순간, 인간의 욕망에 의해 구속되기 시작하는 것이다. 그리고 이내 만나의 본래적 기원은 사라져 버리고, 만나를 향한 집착 혹은 만나를 통한 목적만이 남는다. , 시작은 하늘로 였을지 모르지만, 끝은 인간의 욕망의 상징이 된다. 축적된 만나에 썩은 냄새가 나는 것이다. 하지만 하나님의 말씀은 매순간 도래하는 만나로 우리에게 주어진다. 그것은 예측가능한 성격이 아니며, 축적될 수 없고, 은혜 안에서만 주어지는 놀라운 선물이다. 그리고 블룸하르트는 우리에게 주어진 선물이자 기적이 매순간 도래하는 만나에 있다는 것을 누구보다 잘 아는 사람이었다. 이런맥락에서 바르트가 시종일관 기독교를 종교라고 말하며 생명의 말씀이 자기구원의 도구로, 기득권적 권력으로, 역동을 잃어버린 박제화된 교리라고 비판하는 바로 이러한 블룸하르트의 행위하시는 하나님에 기대어 있다. 하나님은 그 어떤 인간적인 편집 속에서 자리할 수 없는 것이다. 그분은 그분 자체의 행위속에 근거하시며 과거가 아니라, 지금-여기에서 우리에게 단 한번도 들어보지 못한 새로운 말씀으로 우리에게 말씀하셨고, 말씀하신다.

 

2. 나의 시선을 넘어, 하나님이 바라보시는 세계는?

 

따라서 블룸하르트 책에는 시종일관 도래하는 만나를 기다리고, 기다린 만나를 먹으며, 먹기만 할 뿐 아니라 그 즉시, 그날의 만나를 행동으로 옮기는 역동(행동)이 있다. 그분이 말씀하셨고, 그분이 책임지시는 세계가 바로 하나님의 백성이 사는 방식이기 때문이다. 이러한 방식은 매우 그럴 듯 하고, 멋져 보이지만 우리 마음대로 살고자 하는 독자에게 불편함을 준다. 그렇지 않은가? 우리는 하루살이가 힘겨워 월급을 찾고, 월급을 부족해 일자리를 걱정하는 평범한 인간이지 않은가. 하지만 블룸하르트는 그러한 걱정은 이방인들이 구하는 것이지, 하나님 나라 백성이 구하는 소원이 아니라고 단언한다. 그렇다면 백성은 무엇을 구하는가? 그렇다. 백성은 이 땅에 아버지의 나라가 도래하는 것을 구한다.

 

바로 여기에 블룸하르트의 하나님 나라사상의 근본이 있다. ‘행위로 살아계신 하나님이 나라라는 단어를 만날 때, 벌어지는 일은 그 나라의 건설이다. 앞서 존재로서 하나님이 종교에 의해 화석화 된 것처럼, 오늘날의 하나님의 나라는 미래에 도래할 어떤 나라, 지금 여기와는 굉장히 다를 것만 같은 동경하는 세계정도로 머물러 있다. 하지만 블름하르트는 그럴 수 없다. 지금 행위 속에 계신 하나님이 말씀하시기 때문이다. 지금, 여기의 자리에서 그 나라를 구하고, 찾고, 세우라는 부름 앞에 놓여 있기 때문이다. 그리고 그 나라를 건설하는 모든 자원과 공급은 우리로부터 나오는 것이 아니라 그 분이 이미 예비하셨고, 그 분에 의해 무한 공급을 받을 것이기 때문이다. 어쩌면 독자들은 블룸하르트의 글을 보며 굉장히 낯설지만, 굉장히 확신에 차 있는 광인의 모습을 만나게 될지 모른다. 우리는 우리의 시선에 머물러 하나님하나님의 나라를 상상하지만, 블룸하르트는 시종일관 하나님의 권능으로부터 시작된 소집장을 들고, 고군분투하는 모습을 보인다. 그분이 일하시는데, 가만히 있을 자 누군가라는 외침과 함께 말이다.

 

"교회의 교부들은 있지만 하나님의 시온은 어디에 있습니까? 계속해서 인간적인 이론과 조건들만 늘어만 갑니다. 이런 상황이 어떻게 현재까지 계속되었는지 참 놀라울 뿐입니다. 모두가 다 자기들만의 조건을 정해놓고 그 안에 안주합니다. 그리고 기독교는 꽤 잘 굴러가고 있습니다. 하지만 유대의 사자는 어디 있습니까? 아무 조건없이 하나님께 복종하고, 하나님을 경외하는 사람은 어디 있습니까?"(p.138)


3. 신은 죽었으나, 우리는 살아계신 하나님만난다.

 

이처럼 낯섬과 공감이 공존하는 독서는 우리를 혼란스럽게 한다. 시대는 신은 죽었다(니체) 말하지만, 블룸하르트는 말한다. 그렇다. 신이 죽었기 때문에 나는 더욱 살아계신 하나님을 찬양한다고. 개인적으로 이 책에서 가장 특별하게 다가온 챕터는 8장 새로운 생명이다. 블룸하르트는 지금-여기의 하나님나라를 말하는 자답게, 우리들이 구해야할 것은 천국이 아니라 생명이라고 말한다. 그리고 이 생명은 그리스도인이 마땅히 구하고, 두드리고, 찾아야할 무엇임에도 좀처럼 구하지 않는 비밀이라고 말한다. 요한복음 1010절은 말한다. “내가 온 것은 양으로 생명을 얻게 하고, 더 풍성히 얻게 하려는 것이다”. 따라서 블룸하르트는 말한다.

 

그리스도인이 된다는 것은 이전과는 다른 생명으로 사는 것을 말합니다. 그런데 그 새로운 생명은 당신 전보다 더 나은 사람이 된다는 것을 일컫는 것이 아닙니다. 그런 것이 새로운 생명이라고 생각하셨습니까? 말도 안됩니다. 새로운 생명은 이제 생명을 향한 능력이 당신 안에 꿈틀거리고, 어떤 신적인 것, 거룩한 것이 당신 안에서 자란다는 것을 의미한다. 새로운 생명을 받는 다는 것은 그 생명으로 인해 이제 죄의 욕망이 우리를 더 이상 다스리지 못한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 그리스도의 부활과 생명이 이제 성령을 통해 우리를 다스리고, 우리를 온전케 한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그리스도인의 삶이 이처럼 하나님의 역사하심이 이 생명을 통해 드러나, 그리스도의 살아계심을 나타내는 것을 의미합니다. 정말 놀라운 일이지 않습니까!”(p.110-111)

 

그렇기에 책을 덮으며, 떠오르는 하나의 상념은 바로 이것이다. 왜 하나님 나라는 우리에게 생생하지 않은가. 무엇이 문제인가. 우리는 무엇에 묶여 있고, 어디에 갇혀 있기에 우리 안에 있는 생명을, 하나님의 권세와 능력을, 더 나아가 지금-여기에서 말씀하시는 하나님의 음성을 듣지 못하는가? 블룸하르트의 사자후는 바로 이러한 질문을 시종일관 던지며, 우리가 복음 안에서 깨어나기를 간절히 기도한다. 좀 더 정확히 말해 블룸하르트는 그러한 기도 외에 다른 어떤 것에도 관심이 없는 사람처럼 보인다. 생명으로 살아내며, 살아낸 생명으로 인해 지금-여기에 세워지는 하나님 나라. 그래서 그런지 바르트는 이 책의 추천사에 이런 말을 남긴다. “그는 주 예수여 속히 오시옵소서 외치며, 하나님 나라가 앞당겨지기를 재촉한다. 블룸하르트는 이렇게 이 세상을 하나님께 이끌어 놓고, 하나님을 이 세상에 모시고 내려온다. 인간이 할 수 있는 일 중에 이것보다 멋지고 희망적인 일이 있을까? 아마도 없을 것이다”(p.218)

 

그렇다. 의문은 말씀하시는 하나님과 응답하는 인간안에서 그렇게 잠잠해진다. 결국 블룸하르트도 바르트도 한명의 사상가이기 이전에 하나님으로부터 출발한 그 시작점에 사로잡힌 그리스도인일 뿐이다. 그리고 우리 또한 역시 하나님이 새로운 일을 시작하기를, 그리고 그 시작하신 일에 우리가 참여하기를 고대할 뿐이다. 새롭게 시작하는 한해, 온갖 것들을 내려놓고 우리의 믿음과 소원, 희망을 그분으로부터 재정비하기를 원하는 독자들이 있다면 일독을 권한다. 우리의 희망은 하나님의 행하심을 기다리고, 그것에 참여함에서 비롯되는 것이지 그 반대가 될 수 없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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페이스북 #. 왜 하나님 나라는 생생하지 않은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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생각이 당신을 괴롭힐 때
요한 하인리히 아놀드 지음, 칸앤메리 옮김 / 대장간 / 2021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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때론 묻고 따지지도 않고, 저자만 보고 책을 집어드는 경우가 있다. 왜 그럴까. 필자가 생각하기에 그런 경우는 저자가 보여준 삶의 진실성, 그가 살아내고, 통과한 ‘이야기’가 살아있기 때문일 것이다. 그런 의미에서 이 책 『생각이 당신을 괴롭힐 때』는 괴로운 생각으로부터 해방하는 법같은 한낱 실용적인 이론서들과 거리가 있다. 오히려 브루더호프 공동체의 리더로서 수많은 사람들과 함께 살고, 겪고, 싸우고, 넘어지고, 얽매였던 사연이 글감의 시작점이 된다. 이처럼, 때론 전쟁사의 이론을 잘 정돈하여 가르치는 ‘교수’보다 전쟁을 치르면서 온갖 산전수전을 통해 굳은살이 박힌 한명의 ‘장수’이야기가 그리운 법이다. 그런 의미에서 이 책의 부제는 의미심장하다. 아마 우리는 그 부제로부터 이야기를 시작해야하지 않을까 싶다.

1. 사로잡힌 생각으로부터의 고통

보이지 않지만 누구도 피할 수 없는 싸움에 대하여, 부제는 우리를 누구나 한번쯤 괴로워했을 법한 이야기로 초대한다. 그럼에도 이 초대는 추상적이지 않다. 앞서 말했듯 이 책은 “죄악된 생각으로부터 자유가 선행되지 않고서는 그리스도 안에서 누리는 참 자유에 이를 수 없다”(20)는 각기 다른 신음으로부터 문제의식이 시작되었기 때문이다. 어떤 이는 그 신음이 질투와 원한일 수 있고, 또 어떤 이는 성적인 환상과 퇴행적 행위일 수 있고, 심지어 어떤 이는 신앙생활을 하면서도 계속해서 몰아치는 신성모독이나 살인과 같은 신자답지 못한 모습일 수 있다. 그리고 이는 실제로 믿는 신자로 하여금 다음과 같은 의문을 불러일으킨다. ‘이런 생각을 하는 내가 그리스도인이 맞는가! 하나님은, 사람들은 내가 이런 생각을 하고 있다는 것을 알까?’

따라서 만일 이 책을 집어든 이가 이 책에서 저자가 말하는 바가 ‘아닌데, 여전히 추상적인데’라고 반대한다면, 되려 되묻고 싶다. 그리스도 안에서 이 문제를 가지고 진지하게 씨름해 본적이 있느냐고 말이다. 따라서 이 책은 기도하며 씨름하는 사람들에게 읽혀져야 한다. 그리고 저자 또한 서문에서 “이 책이 이렇게 별다른 요란을 떨지 않았는데도, 해를 거듭하면서 꾸준히 사람들에게 알려졌다는 것은 놀라운 일”며 이 책을 덤덤히 추천한다. “이 책이 은밀한 죄와 죄책, 두려움 때문에 기도가 막힌 사람들에게 기쁨과 소망의 소식이 되기를 바란다. 오직 그리스도만이 영적싸움에서 위로를, 상처입은 영혼에게 치유를, 죄악된 속박으로부터의 자유를 주신다!”

2. 의지의 투쟁 : 끝없는 늪과 보이지 않는 영적세력

그렇다면, 그 그리스도를 의지하여 문제를 돌파하는 방법은 무엇이란 말인가. 마치 사도바울의 고백처럼 ‘마음으로는 원이로되, 죄를 행하는 나를 보는도다.’라는 고백은 우리가 원한다고, 곧바로 해결되는 성격이 아니라는 것을 반증한다. 실제로 저자는 다양한 독자들이 ‘그리스도를 의지한다’는 것과 ‘자신이 의지를 써써 그리스도를 동원하려한다는 것’의 차이를 좀처럼 구별하지 못한다는 점을 지적한다. 일종의 믿음이냐 행위이냐의 이분법인 것마냥 “그리스도를 노오력해서 믿어야지!” 하면서 ‘믿으려 하는 자신을 믿는’ 아이러니한 상황에 놓인다는 것이다. 저자는 이러한 구별을 위해 ‘의지’와 ‘양심’이라는 단어로 이를 구별하는데, 전자가 자신이 행하는 투쟁이라면, 후자는 자신을 내려놓을 때 들려오는 세밀한 음성에 가깝다.

특별히 필자가 인상 깊었던 부분은 이 투쟁이 ‘내가 더 잘하고, 덜 잘하고’ 같은 의지의 문제가 아니라 영적인 문제라고 대놓고 지적하는 부분이다. 사도바울은 말한다. “선과 악의 싸움은 단지 생각의 차원에서만 일어나는 일이 아니다. 내 지체에 서로 다른 법이 있다. 죄와 성령간에 벌어지는 이 싸움은 나 개인 뿐 아니라 전 우주적인 전쟁이다”(로마서) 달리말해 저자는 ‘그리스도’뿐만 아니라 ‘악’이 실재하며, 더 나아가 우리를 ‘그리스도’와 끊어지도록 힘쓴다고 믿는다. 그리고 십자가의 자유는 이를 똑똑히 바라보며, 끊어내고, 돌이키는 것에 있다고 믿는다.

한 예로, 저자는 심리학적 툴(암시와 자기암시)을 통해 우리의 이해를 돕고자 한다. 암시는 외부에서 잠재의식 속으로 들어온 감정이나 이미지들이 우리의 생각을 현실화 하는 것을 말한다. 그리고 자기암시는 이러한 ‘외부’ 영향에 반응하여 ‘내면’에서 반복적으로 떠올리는 강화를 말한다. 쉽게 말해서 생각의 덫이란 원리는 강물에 던져진 나뭇잎처럼 흐르고 흐르다가 때론 지하수로 들어가 사라진듯 보이더라도, 어느새 다시 떠올라 우리를 괴롭힌다. 간헐적이든, 반복적이든 머릿속을 맴도는 생각은 심리적 고통을 유발한다. 어떤 경우엔 사력을 다해 사악한 생각을 떨쳐 버리려 할수록 감정의 소용돌이는 더 심하게 휘몰아친다. 그리고 물에 빠져 허우적대는 모습처럼 결국에는 무기력해지고, 무감각한 상태에 빠져 절망하곤 한다. 이길 수 없는 싸움을 이겨보려는 의지의 투쟁의 종말은 그렇다는 것이다.

그렇다면, 억눌린 생각을 통해 ‘악’이 행하는 전략과 소득은 무엇인가. 전략은 ‘내면의 갈등을 해결할 수 있다고 부추기는 희망’이고, 소득은 그렇게 투쟁하다가 힘을 다 소진해버려서 그리스도를, 그리스도의 형제자매를 보지 못하는 ‘자기고립’이다. 저자는 ‘믿음’과 반대되는 ‘의지’를 말하며 경고한다. “믿음없이 지나치게 자기자신에게만 몰입하면, 우리는 모든 ‘동기’를 의심하게 되고, 변화의 ‘희망’마저 상실하게 됩니다. 결국 하나님과 완전히 멀어지게 됩니다.”

3. 양심의 조명 : 십자가의 용광로와 거듭난 생명의 능력

따라서 중요한 것은 유혹이 찾아왔을 때, 우리가 어떻게 반응하는가이다. 좀더 구체적으로 말하자면, 이것이 유혹이냐 죄냐라고 따져묻고 씨름하는 것이 아니라 눈을 들어 그리스도가 행하신 일을 바라보는 것이다. 저자가 말하는 ‘양심’이란 바로 이러한 “하나님께 내어드리는 마음” 그리고 “마음의 창을 향해 말씀하시는 하나님의 음성”을 전제로 한다. 특별히 브루더호프 공동체는 이러한 ‘예수님을 찾는 내밀한 영혼의 부르짖음’을 ‘성령의 조명’과 연결지어 생각하는데, 이는 필자가 보기에 중세 신비주의자 에크하르트의 사상에 대한 연관이 있다. 에크하르트는 우리 영혼의 근저에 하나님이 살아계시고, 우리가 영혼의 깊은 조명을 받을 때, 하나님의 아들들이 탄생한다고 믿는다. 그러니깐 근대적 사고방식인 마냥 양심을 ‘도덕’이나 인간적 능력을 제한하는 것이 아니라 양심을 영혼이 하나님을 만나는 ‘창문’으로서 거듭난 생명이 깨어나는 장소로 바라보는 것이다.

이러한 전제를 바탕으로 독자로 하여금 “두려워 할 일이 아니다. 눈을 뜨고, 십자가를 바라봐야 하는 일”로서 하는 그리스도-됨을 묻는다. 보이지 않는 우주적 전쟁은 십자가의 용광로 안에서 새롭게 직조된다. 즉, 어제의 씨름과 시끄러움, 부끄러움과 두려움 등은 십자가 안에서 소멸하는 정결함 속에서 그리스도 안에 있는 누리는 거듭난 생명의 능력이 된다. 오히려 이를 위해서 타고난 본성을 버리고, 자기 자신을 완전히 잃어버리라고까지 말한다. (필자는 이런 부분이 에크하르트의 ‘가난’, ‘경청’을 위해 행하는 완전한 ‘순명’ 사상의 영향이라고 본다). 필자는 이러한 저자의 주장이 독자들로 하여금 다양한 반향을 일으킬 수 있다고 믿는다. 어떤 이는 “정말 그렇다”할 것이고, 어떤 이는 “그렇게까지 잘 안되던데”할지 모른다. 하지만 저자는 책의 전반부와 달리 후반부에서는 다양한 사람들의 사연을 의식하지 않는다. 중요한 것은 우리가 ‘내면의 씨름’을 한다는 사실이 아니라 십자가의 용광로는 ‘그 씨름을 끝장’내기 위해 우리 앞에 놓였다는 사실 뿐이다. 즉, 십자가에서 악의 무리는 사라지고, 모든 인간을 향한 그리스도의 사랑은 영원히 타오르고 있다. 그리고 우리가 이 십자가의 능력을 진리로서 바라보지 않고, 개인적으로 깊이 체험하며, 가슴에 깊이 새기지 않는다면 그것은 공허한 말에 지나지 않을 것이다.

살아있는 능력과 공허함 사이에서

책을 덮으며 생각해 본다. 회개하는 심령으로 “십자가 앞에 죄를 내려놓는 것”, 그것은 우리가 주일학교를 다니면서 자주 들었던 말일지 모른다. 하지만 저자의 말마따라 ‘십자가 안에서 일어나는 권세와 능력’에 대해서는 우리는 좀처럼 잘 듣지 못했다. 자주 들려오지 못한 이 소리에 대해 우리가 ‘잘 모르겠어’라고 말하며 설득력이 없었어라고 말해야 할까. 아니다. 왜 공허한 소리에 우리가 귀를 기울여야 하는가. 그런 의미에서 저자의 마지막 챕터 <꿈꾸는 삶>은 인상깊은 대목으로 우리에게 머무를만한 화두를 제시한다. “의지의 투쟁은 ‘변덕스러운 감정과 혼란스러운 자기감정’가 씨름하지만 양심의 조명은 ‘하나님나라를 위해 싸우는 용사들의 파송’으로 우리를 부른다. 그리고 그 용사들은 개인적 변화가 아니라 고통 받는 세계 한 가운데서 당신의 십자가를 짊어진다.” 즉, 죄와 분열, 고통과 어둠, 죽음의 늪에서 허우적대는 사람들이 이제는 보이는 것이다. 그런 의미에서 이 책의 결론은 사로잡힌 생각으로부터 시작되었지만, 그 끝은 그리스도에게만 온전히 사로잡혀 있다!

 

성현철 - #. 무엇이 우리를 자유롭게 하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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비극을 견디고 주체로 농담하기 - 소진사회의 인간과 종교
김화영 지음 / 나다북스(nada) / 2019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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현실을 도피하지 않으면서도 희망을 노래하는 모든 이들에게 강추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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