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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약성경 언어의 의사소통 기술 - 신약성경 본문 읽기에 현대 언어학 이론 적용
박윤만 지음 / 그리심 / 2019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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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윤만은 현대 언어학 이론인 인지언어학과 담화분석의 통찰을 신약성경 이해에 적용한다. 신약성경의 저자(화자)가 어떠한 인지 과정을 거쳐 신약성경을 저술(발화)했으며, 동시에 신약성경의 독자(청자)는 신약성경을 어떤 인지 과정을 거쳐 읽고(듣고) 이해(수납)했는지를 분석함으로써 신약성경 이해에 관한 언어학적 근거를 제시하고 있다. 인지언어학은 의미가 글()에 있지 않고, 인간의 인지 과정에서 의미가 생성되어, ()에 담긴다고 생각하기 때문에 우리가 글()에 담는 의미는 어떤 과정을 거쳐 형성되었는지, 그리고 의미가 담긴 글()을 읽고(듣고) 어떤 과정을 거쳐 이해하는지를 설명해 준다. 따라서 인지언어학을 통해 성경을 이해하는 것은 의미가 담긴 성경을 저술한 사람에게 어떤 과정을 거쳐 그 의미가 형성되었는지, 성경을 읽는 사람은 어떤 과정을 거쳐 그 의미를 이해하는지 알 수 있게 된다.


1<신약성경 헬라어의 배경>과 제2<복음서의 문서적 성격과 틀의미론>에서는 인지언어학적 통찰을 신약성경 이해에 접목하기에 앞서 신약성경이 기록된 언어의 특징과 기록된 방법의 특징을 먼저 살핀다. 신약성경 특별히 복음서는 오늘의 출판 문화에서의 책과 다르다는 점을 지적한다. 복음서와 오늘날의 책은 기록되었다는 특징은 같지만, 그 성격은 전혀 다르다. 오늘날의 출판 문화에서 책은 새로운 지식을 체계적으로 정리하기 위한 목적으로 기록한다. 그러나 1세기 사회에서 책(두루마리)은 의사소통을 위한 보조적 도구 즉, 기억에 의존하여 의사소통을 시도할 때 기억을 불러일으키기 위한 보조적 도구로서 새로운 지식이 아닌 기억을 되살리기 위해 이미 알고 있는 정보를 담아두기 위한 목적으로 기록했다. 2장이 본서를 이해하기 위한 핵심이다. 1세기에 기록된 신약성경 본문 읽기에 20세기의 언어학 이론을 적용할 수 있는가에 대한 대답이자, 그렇게 해야만 한다는 당위성을 설명하고 있기 때문이다.


3<문맥에 기초한 본문 읽기>, 4<현저성에 기초로 본문 읽기>, 5<응집성에 기초한 본문 읽기>, 6<추론에 기초한 본문 읽기>, 7<동사상과 빌레몬서 담화 처리>는 모두 기존의 해석학적 이해에 인지언어학적 이해를 더하여 성경을 어떻게 이해해야 하는지 그 실제를 보여준다.


기존의 해석학적 이해에 인지언어학적 이해를 더한다는 말에는 세 가지 의미가 담겨 있다. 첫째, 기존의 해석학적 이해를 조금 더 명료화시킨다. 문맥은 성경 해석에 있어서, 성경 해석을 넘어 모든 언어를 해석하는데 있어서 중요하다고 말할 것이다. 그러나 인지언어학적 이해는 응집성(coherence)을 바탕으로 틀(frame)이라는 경계를 지어 줌으로 그 문맥의 범위를 명료화 시켜준다. 둘째, 기존의 해석학적 이해의 오류를 줄여준다. 저자의 의도가 반영되지 않은 독자의 이해는 바른 이해인가? 일부 사람들은 저자의 손을 떠난 이후 모든 것을 독자의 것으로 돌리기도 하지만, 여전히 저자의 의도를 비중있게 생각했다. 특히 성경 이해에 있어서는 저자의 의도를 이해하는 것이 매우 중요하다. 왜냐하면 성경의 궁극적(최종적) 저자는 하나님이시기 때문이다. 현저성(prominence), 동사상(verbal aspect)을 바탕으로 저자의 의도를 어떻게 읽어낼 것인지를 알 수 있다. 셋째, 기존의 해석학적 이해를 위해 누빈 영역보다 훨씬 더 넓은 영역을 누벼야 그 진정한 의미를 찾아낼 수 있다는 점을 알려준다. 추론이란 저자(화자)의 사고 영역과 독자(청자)의 사고 영역이 비슷할수록 쉽게 이루어지지만, 시대적으로, 지리적으로, 문화적으로 거리가 멀수록 그 영역이 급격히 달라지기 때문에 매우 어려워진다. 따라서 해석했다라고 말하기 위해서 누벼야 할 영역이 훨씬 넓어진다.


3장부터 제7장까지의 내용은 성경 이해에 큰 도움을 준다. 우리가 직접 대면하는 것은 이기 때문에 에 대한 언어학적 차원의 이해가 바탕이 되어야 하기 때문이다. 그러나 저자가 중요하게 생각하는 복음서의 특징인 구술성이 인지언어학적 이해의 근거가 된다는 주장은 동의하기 어렵다. 복음서는 구술성의 특징이 담겨 있다는 주장과 인지언어학적 이해가 성경 이해에 도움이 된다는 주장은 동의할 수 있으나, 구술성으로 인해 인지언어학적 이해를 해야 한다는 주장은 동의하기 어렵다. 왜냐하면 복음서의 특징이 구술성이 아닌 텍스트성이라고 해도 인지언어학적 이해가 필요하기 때문이다. 인지언어학은 텍스트의 성격이 구술성을 갖고 있느냐, 텍스트성을 갖고 있느냐에 따라 적용 가능 여부가 판단되는 것이 아니라, 구술성을 가진 텍스트든, 텍스트성을 가진 텍스트든 어떤 이해가 그 텍스트에 담기게 되었는지와 청자든 독자든 그 텍스트를 어떤 과정을 거쳐 이해하는지를 설명하기 때문이다.


인지언어학은 저자(화자)에게 A라는 개념이 생성되었다면, 그 생성 과정(곧 이해 과정)을 설명하고, 독자(청자)A라는 개념을 어떤 과정을 거쳐 이해하게 되는지를 설명해준다. 텍스트로 기록되기 이전의 단계, 그리고 텍스트로 기록된 이후의 단계를 설명해준다. 여기에서 한 가지 질문을 던질 수 있다. 저자(화자)A라는 개념을 텍스트에 온전히 담아냈는가? 바로 이 질문은 내러티브 비평(Narrative Criticism)에서 다룬다. 저자(화자)는 내레이터를 통해 자신의 의도를 펼쳐낸다. 내레이터는 저자를 대신하여 내러티브의 모든 것을 주관하여 내레이티에게 저자가 의도한 것을 전달한다.


따라서 인지언어학적 이해를 바탕으로 저자(화자)가 어떤 인지 과정을 거쳐 이해가 형성되었는지를 밝히고, 내러티브 비평을 통해 저자(화자)의 이해가 텍스트에 온전히 담겼는자를 밝히고, 다시 인지언어학적 이해를 바탕으로 독자(청자)가 텍스트를 어떤 인지 과정을 거쳐 이해하게 되었는지를 생각해야 한다. 인지언어학적 이해와 내러티브 비평의 조화를 통해 텍스트를 온전히 이해하게 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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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울의 공동체 사상 - 문화적 배경에서 본 초기 교회들
로버트 뱅크스 지음, 장동수 옮김 / IVP / 2007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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구판절판


인간은 사회적 동물이라는 아리스토텔레스의 말을 떠올리지 않더라도 인간은 홀로 존재할 수 없다는 사실은 명백하다. 아리스토텔레스와 세네카에 의해 주목받은 사회적 동물로서 인간이라는 이해는 바울에게서도 발견할 수 있다. 바로 이점이 뱅크스가 주목하는 점이다. 뱅크스는 바울의 글에 그의 사상이 정립되어 있다고 보고, 바울을 사회사상가로서 접근하여 바울을 바울이 살았던 환경 속에서 바울의 사상을 이해하려고 한다.


바울은 그가 살았던 시대에 유일하게 공동체에 대해 말한 사람은 아니다. 그러나 기독교 저술가 중에서 누구보다 공동체에 대해 주목했다고 평가한다. 그렇게 평가하는 데 가장 중요한 이유는 신앙의 본질적인 부분과 관련이 있다. 구원의 경험은 개인적일 수 있지만, 구원받은 사람은 구원받은 사람들로 이루어진 공동체로 들어올 수밖에 없기 때문이다. 따라서 바울 서신에서 다루는 거의 대부분의 문제는 개인의 문제가 아닌 공동체의 문제에 대응하는 바울의 견해이다.


뱅크스는 구원을 자유라는 개념으로 설명한다. 구원이란 죄로부터, 율법으로부터(이방인은 자연법으로부터), 인간에게 영향을 미치는 어떤 세력으로부터 자유를 얻는 것이다. 그런데 자유를 얻은 사람은 반드시 새로운 공동체 안으로 들어오게 된다고 말한다. 그래서 신앙은 공동체 중심이 될 수밖에 없다는 것이다. 그리스도께서 이루신 구원 자체가 온전히 그리스도 독단적이지 않고, 두 번째(혹은 마지막) 아담이라는 표현을 통해서도 알 수 있듯이 연합된 형태로 이뤄졌기 때문이다. 그래서 구원받은 사람은 그리스도의 생명이 그 안에 들어가 있으며, 구원받은 사람 역시 그리스도 안에 들어가 있다. 이러한 개념 자체가 이미 구원이 독단적으로 이뤄지지 않는다는 것을 보여 준다.


바울의 이러한 공동체 사상은 교회’, 헬라어로 에클레시아’(evkklhsi,a)라는 용어의 사용에서부터 나타난다. ‘에클레시아는 기독교 이전에도 정기적인 회합을 가리키는 용어였다. 칠십인경에서 구약 성경의 총회라는 히브리어를 번역하며 에클레시아를 사용했다. 바울은 편지의 수신자인 회중을 그 도시의 다른 모임과 구별되는 그리스도인의 실제적인, 정기적인 모임을 지칭하는 용어로 에클레시아를 사용했다. 바울이 사역을 시작하기 이전에도 그리스도인들 사이에서 이미 에클레시아를 사용했다고 추측할 수 있다. 따라서 공동체 사상이라는 개념을 생각하기 이전부터 자연스럽게 기독교 신앙을 공동체으로 이해했다고 볼 수 있다.


바울의 여러 개념을 통해 공동체 사상을 발견할 수 있다. 대표적으로 로마서 121~2절에서 구약의 제의적 표현을 일상의 생활과 연결 짓는다. 그 핵심 표현인 영적 예배는 개인이 하나님 앞에서 드리는 하나님과 개인의 독대하는 예배가 아닌, “일상 생활의 영역에서 은유적으로 적용”(162)되는 삶이며 행동 방식이다. 은사에 대한 이해에 있어서도, 은사는 개인에게 주어지지만 그 활용은 교회 내의 질서를 생각해야 한다는 점은 개인에게 주어진 것이라 해도 공동체인 상황을 고려해야 한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이 책을 읽으며 바울 서신의 구절들 중에서 가장 개인적인 권면이라고 느껴지는 구절을 떠올려 보았을 때 빌립보서 44주 안에서 항상 기뻐하라 내가 다시 말하노니 기뻐하라라는 구절이 떠올랐다. 그런데 원어를 살펴보니 기뻐하라는 동사는 2인칭 복수형이었다. 기뻐하라는 명령(권면) 자체가 개인을 향한 것이 아니라 공동체를 향한 것이다. 바울 서신에서 2인칭 대명사의 빈도가 단수형(su,( sou( soi( se)보다 복수형(u`mei/j( u`mw/n( u`mi/n( u`ma/j)이 압도적으로 많다는 사실 또한 의미 있게 주목해볼 만하다.


바울의 공동체 사상에서 우리가 배울 점은 무엇인가? 공동체적 관점을 갖는 것, 삶의 지침을 얻는 것도 물론 중요하다. 그러나 뱅크스는 결론에서 이렇게 말한다. “바울의 공동체들은 그가 제시한 공동 생활의 이상들을 충분히 실현하는 데 실패했으며 바울도 분명 이 사실을 알았다. 하지만 공동체에 대한 그의 견해를 이상적인 것으로만 여긴다면 그것은 잘못이다. ... 그럼에도 그는 자신의 공동체에게 그들의 공동 생활이 어떠해야 하며 어떠할 것이라는 비전을 계속 제시한다. ... 문화적인 상황의 변화로 바울의 실제적인 관행들을 오늘날에 맞게 항상 적용할 수는 없어도, 그 배후에 있는 원리들은 적극적으로 공동체를 추구하는 이들의 계속적인 관심을 끌고 있다.”(319~323) 우리의 신앙을 개인의 구원적 차원에서 머무르게 하지 말고, 공동체적 차원으로 관심을 옮겨가야 한다. 코로나19 엔더믹으로 인해 이전보다 더 개인주의적인 성향이 나타나고, 공동체를 이루는 것에 대한 막연한 두려움이 생기는 시대이기에 더욱 한계적이기는 하나 분명한 것은 교회는 그리스도의 몸으로 몸을 이루는 여러 지체가 있다는 점을 반드시 기억해야 한다.


그러나 사회가 발전함에 따라 공동체를 어디까지 볼 것이냐의 문제는 남아있다. 바울의 시대에 사람들이 일반적으로 생각하던 공동체와 2022년 우리가 생각하는 공동체는 그 범위와 경계가 상당히 다르다. 이것은 개인에 따라서도 큰 차이를 보인다. 우리는 공동체를 어느 범위까지로 인식해야 하는가? 여름 수련회를 앞두고 교회 공동체를 생각하며 비가 오지 않고 좋은 날씨를 기도해야 하는가, 가뭄으로 고생하는 농작물을 기르는 이웃과 산불의 위험이 높아진 사회적 분위기를 고려하여 비가 내리도록 기도해야 하는가? 참 어려운 문제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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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울의 선교 방법들
로버트 L. 플러머.존 마크 테리 엮음, 조호형 옮김 / 기독교문서선교회(CLC) / 2016년 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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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0년이면 강산도 변한다는 말이 있으니, 100년이면 강산이 열 번도 넘게 변할 수 있는 시간이다. 바울의 선교 방법들은 알렌의 Missionary Methods: St Paul’s or Ours?의 출판 100주년을 기념하여 그의 책의 주제를 다시 살펴보며 알렌의 공헌을 통해 지금도 배울 수 있는 점을 찾기 위해 여러 선교학자들의 글을 모아 출판했다. 알렌은 1868년 영국에서 태어났다. 1895년부터 1903년까지 중국 선교사로 활동했고, 이후 성공회 교회 성직자로, 동아프리카 선교사로 활동하며 40여 년간 선교에 대한 많은 글을 저술했다. 그리고 1947년 케냐에서 하나님의 부름을 받았다. 알랜이 저술한 책들은 선교학의 고전으로 여겨진다. 알렌이 저술한 여러 책들 중에서 Missionary Methods: St Paul’s or Ours?1912년에 출판되었다. 알렌의 책은 당시 선교 정책의 전 영역에 대한 비판만 다루는 것이 아니라 바울로부터 더 나은 방법을 배우려는 건설적인 노력이 담긴 책이라는 평가를 받았다. 100여 년이 지난 후에도 여전히 선교전략의 근본적인 변화를 이끌어냈다라는 평가를 받는다.


바울의 선교 방법들은 크게 두 부분으로 나눌 수 있다. 전반부는 플러머(Robert L. Plummer)가 편집을 주관하고, 버드(Michael F. Bird), 슈나벨(Echhard J. Schnabel), 플러머, 머클(Benjamin L. Merkle), 스텐쉬케(Christph W. Stenschke), 호웰(Don N. Howell Jr.), 키너(Craig Keener)의 글을 통해 1세기 정황에서 여러 질문들과 함께 바울의 메시지를 살펴본다. 후반부는 테리(John Mark Terry)가 편집을 주관하고, 헤셀그레이브(David J. Hesselgrave), 포콕(Michael Pocock), 테리, 스테처(Ed Stetzer)와 비어드(Lizette Beard), 실스(M. David Sills), 로리스(Chuck Lawless)의 글을 통해 선교학자들에 의해 논의된 중요한 질문들을 다룬다.


알렌의 선교신학 중에서 가장 중요한 전제는 바울이 가르쳤던 교리들은 대게 그가 직면했던 선교적인 상황에서 나왔다. 따라서 오늘날 행해지는 선교는 바울의 선교방법들과 그 방법들을 뒷받침하는 신학적인 근거에 적합해야 한다.”(24)라는 말이다. 선교가 바울의 선교에서 신학적 근거를 찾아야 한다는 말이 너무도 당연한 말이지만, 서구 사회에서 식민주의적 사관에 의해 선교가 진행되었기 때문에 더욱 중요하게 기억해야 할 말이다. 지금보다 식민주의적 사관이 더 짙었을 1912년에 선교를 바울의 선교로부터 그 근본 원리를 찾아야 한다는 알렌의 주장은 매우 급진적이었을 것이다. 혹자는 알렌을 시대를 앞섰기 때문에 불행했던 선교사라고 평가한다. 실제로 알렌의 선교 신학은 알렌이 하나님의 부름을 받고 십여 년이 지난 1960년대에 이르러 주목받았다. 따라서 100여 년이 지난 시점에 플러머와 테리가 알렌의 책을 다시 생각해보는 시도는 의미있다. 그리고 바울의 선교에서 선교의 신학적 근거를 찾으려는 노력은 알렌의 시대에나, 100여 년이 지금 지금에나, 그리고 앞으로 다가올 미래에도 계속되어야 한다.


전반부에서 말하는 내용들은 어쩌면 당연한 내용일 것이다. 바울에게서 바울의 선교신학을 다루는 책이 아니더라도 충분히 다룰 수 있는, 그리고 다루고 있는 내용이다. 왜냐하면 회심 후 바울의 인생은 모두 선교하는 삶이었기 때문이다. 따라서 바울에 대한 연구가 곧 바울의 선교 신학에 대한 연구라고 할 수 있다. 바울에게서 선교 원리를 찾는다는 말과 바울 신학의 메시지를 찾는다는 말을 동의어로 사용해도 될 것이다.


실제적인 관점에서 선교에 도움을 받을 수 있는 내용은 후반부에 담겨 있다. 헤셀그레이브는 바울의 선교전략과 알렌의 입장을 평가하며 알렌의 교리에 대한 관심이 바른 교리의 해석을 통해 선교 현장에 접목시키는데 있지 않고, 교리에 대한 바른 이해 자체에만 있다는 점을 약점으로 지적한다. WCC가 교리를 주장하지 않고 교제에 중점을 두었지만 실제 선교에 해로운 결과를 끼쳤다는 점이 알렌의 이해가 갖는 약점을 그대로 보여준다. 테리가 정리한 알렌의 토착화에 대한 원칙은 오늘 선교 현장에도 바로 적용할 수 있을 만큼 시대를 앞선 내용이다. 그러나 그것에서 머물지 않고 테리는 토착화를 통해 상황화를 이루어 복음을 효과적으로 전파해야 한다고 한 걸음 나아간 전략을 제시한다. 상황화에 대해서는 실스가 자세히 서술했다. 오늘날 가장 많은 이견이 있는 주제가 바로 상황화이기 때문에 매우 조심스럽게 접근하지만, 알렌이 제시한 4가지 원칙(알기 쉬운 가르침, 유지될 수 있는 기관, 독립적인 재정 운영, 권징에 대한 바른 시행)은 그가 시대를 앞선 선교사로 인정할 수밖에 없는 내용이다.


책을 읽으며 인용된 알렌의 문장들은 매우 가치 있는 것들이었다. 그리고 알렌의 글을 평가하며 교훈을 삼고, 반성을 하는 여러 학자들의 태도는 매우 인상깊었다. 다만 개혁주의 전통에서 칼빈만이유일한 교과서인 것처럼 대하는 잘못된 태도가 선교학의 영역에서 나타나지 않기를 바라는 마음이었다.


그리고 신약을 공부하며 공부가 신약 성경 안에만 머무르지 않고, 우리 삶의 현장으로 가져올 수 있는 살아있는 신학 공부가 되길 다짐하게 된다. 사도행전과 바울의 서신들을 읽으며 이런 선교의 원리들을 찾아내는 노력이 선교학자들에게서만 나타나지 않도록, 그리고 신약신학자로서 더 깊이 있는 해석을 통해 타 영역의 사람들에게 기여하는 공부가 되길 다짐하게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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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세기 그리스도인의 공동읽기 - 예수 시대 기독교 전승은 어떻게 형성되고 보존되었는가
브라이언 라이트 지음, 박규태 옮김 / IVP / 2021년 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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브라이트는 1세기 그리스도인의 공동 읽기를 통해 공동 읽기 현상이 2세기 이후에 나타난 현상이라는 학자들의 전제를 뒤틀어 1세기에 이미 공동 읽기 관습이 존재했고, 널리 퍼져 있었다는 사실을 밝힌다. 1세기에 공동 읽기 관습이 존재했고, 널리 퍼져 있었다는 사실이 중요한 이유는 초기 기독교 전승의 형성과 보존에 관하여 바르게 이해할 수 있는 근거가 되기 때문이다. 이 주장은 브라이트가 인용하는 그리스-로마 저자의 글 중에서 발레리우스 막시무스의 기억할 만한 말과 행위(Memorable Words and Deeds)를 통해서 만으로도 증명될 수 있다고 생각한다. 기억할 만한 말과 행위의 등장인물인 아이스키네스가 자신이 사람들 앞에서 글을 읽을 수 있는 능력은 있으나 데모스테네스의 글을 읽어줄 자격이 없다고 말한다. 이 부분을 브라이트는 데모스테네스가 그 자리에 없으므로 데모스테네스의 글에 빠진 부분을 제시할 수 없어서 글을 읽을 자격이 없다고 해석한다(134). 브라이트의 해석이 정확하다면 이 부분에서 공동 읽기와 전승 통제의 관계성이 드러난다고 볼 수 있다. 읽을 수 있는 능력이 있는 사람이 통제해 줄 사람이 없다는 이유로 공동 읽기자(reader)로 서는 것을 거절한다면, 사람들의 사고 속에 공동 읽기는 읽는 행위만 공동으로 하는 것이 아니라 청중이 통제 역할을 함으로 함께 참여한다는 의식이 있다는 것을 보여주는 것이기 때문이다.


1<새 통제 전략 도입하기>에서 브라이트는 이 책을 통해 기원후 1세기에 공동 읽기는 보편적인 현상이었으며, 예수 전승을 통제하는 역할을 했다는 사실을 증명해 나갈 것이라고 선포한다. 학자들 사이에서 1세기 사회에서 공동 읽기 현상은 존재했다는 사실과 어떤 방식으로든(리처드 보컴은 목격자에 의해, 제임스 던은 공동체가 공유하는 기억을 통해, 사무엘 뷔쉬코그는 실연[performance]을 통해 등) 예수 전승이 통제되었다는 사실을 각각 설명했다. 그러나 그 둘을 연결하지는 않았다. 브라이트는 바로 이 점을 지적하며, 1세기 공동 읽기 현상이 예수 전승 통제의 확실한 수단으로 작용했다는 점을 말한다.


2<예수 시대 공동 읽기 사건 발견하기>에서 브라이트는 공동’(communal)이라는 표현은 개별 읽기와 구별되는 사회적인 측면을 부각해 주는 표현이지만, 그렇다고 공적(public) 읽기를 의미하는 것은 아니라고 설명한다. 공동 읽기는 공적 읽기일 수도 있고, 사사로운 읽기일 수도 있으나, 중요한 점은 둘 이상의 사람들이 참여하여 읽는 행위를 가리킨다는 점이다. 이것을 밝히기 위해 다양한 주제의 글을 망라하여 연구의 대상으로 삼는다. 글의 주제를 파악하기 위한 연구가 아니라, 글을 읽는 방식에 관한 연구이기 때문이다. 그리고 글의 저작 목적이나 공동 읽기를 한 공동체의 성격, 사회적 위치, 또는 신약성경의 정경성, 본문 비평, 자료 비평 등의 주제는 다루지 않는다. 오직 1세기 사회에 공동 읽기 현상이 보편적으로 있었고, 보편적이었던 공동 읽기 현상이 예수 전승을 통제했다는 것을 밝히는 일에만 초점을 맞춘다.


3<경제 요인과 정치 요인>에서 브라이트는 1세기 경제 요인, 정치 요인으로 인해 공동 읽기 현상이 나타나기에 적합한 환경이었다는 점을 주장한다. 브라이트는 기원후 수 세기 동안 지중해 지역의 경제가 기존의 이해와는 달리 상당한 발전을 이루었다는 근래의 타 분야 연구 결과들을 수용하여 1세기 사회가 경제 발전이 이뤄져 다양한 분야에 영향을 미쳤을 것이라고 추론한다. 경제 발전으로 인해 여유로운 생활이 가능하고, 사람들이 모이는 일이 어렵지 않기 때문에 공동 읽기에 적합한 환경이었고, 나아가 공동 읽기 현상을 널리 퍼뜨렸을 수도 있다고 말한다. 경제적 요인이 반드시 공동 읽기 현상을 발생시키는 것은 아니지만, 공동 읽기 현상의 확산이 가능할 수 있도록 경제적으로 튼튼한 사회였다고 말한다. 브라이트는 기원전 1세기부터 기원후 2~3세기까지 로마의 평화 시대라고 불리며, 실제로 극장, 전차 경기장, 원형 극장 등 대형 건축물이 존재할 수 있었다는 것은 안정된 사회였음을 보여주는 것이기 때문에 그런 안정이 공동 읽기 현상에도 영향을 끼쳤을 것이라고 추론한다. 안정된 사회이기 때문에 공동 읽기 현상이 방해받을 이유가 없기 때문이다. 또한 안정된 사회이기 때문에 다른 지역으로 이동하거나 여행하기에 어렵지 않은 시대였다. 따라서 어떤 글이 다른 지역에 전해지기도 쉬운 환경이었을 것이며, 다른 지역에 글이 전해질 때 공동 읽기 현상이 수반되었을 것으로 추측한다.


4<사회 정황>에서 브라이트는 5장과 6장에서 본격적으로 1세기 공동 읽기에 관한 증거를 제시하기에 앞서 공동 읽기가 사회 전반적으로 나타났던 보통의 사건임을 다양한 분야의 글을 인용하여 제시한다. 다양한 분야의 글을 통해 공동 읽기가 일어난 무대 역시도 시골 장터, 공회당, 극장, 가난한 사람의 집, 엘리트 계층에 속하는 사람의 집, 마을과 마을 사이의 공터 등 다양했다. 다양한 장소에서 다양한 사람들이 공동 읽기에 참여하는 사회였다. 따라서 공동 읽기의 청중 중에는 공동 읽기에 참여하여 직접 읽는 사람보다 그 내용에 관하여 더 잘 앍고 있는 사람도 있었을 것이다. 그런 청중이 공동 읽기를 통해 전승이 변형되는 것을 통제하는 역할을 했을 것이다. 일반 사회에서도 공동 읽기가 만연한데 회당 중심의 문화를 가진 유대교에서 공동 읽기는 당연히 일반적인 현상이었다. 브라이트는 이 시기에는 사실상 모든 문헌이 공동으로 읽을 목적으로 저작되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닐 것이다.”라고까지 말한다.


5<1세기의 공동 읽기 사건: 선별된 저자와 텍스트>에서 브라이트는 그리스-로마 사회에서 공동 읽기 사건이 일어났다는 정황을 발견할 수 있는 신약성경 외 문헌(그리스-로마 저작, 유대 저작)을 추적한다. 먼저 에픽테토스, 스트라본, 발레리우스 막시무스, 카리톤, 오비디우스, 마르티알리스, 페르시우스, 디온 크리소스토모스, 스타티우스, 퀸투스 쿠르티우스 루푸스, 퀸틸리아누스, 대 세네카, 켈수스, 페트로니우스, 소 세네카, 기원전 1세기부터 기원후 2세기의 그리스-로마의 여러 저자의 글을 발췌하여 공동 읽기 사건이 있었음을 증명한다. 이어 마카베오4, 필론, 위 필론, 요세푸스, 에스라4서와 같은 유대 저작에서도 공동 읽기가 존재했다는 증거를 제시한다.


브라이트는 지금까지 공동 읽기 현상이 폭넓은 지역에서, 다양한 사람들이 참여하여 이뤄졌으며, 하나의 문화를 이루고 있음을 논증했다. 그리고 6<1세기의 공동 읽기 사건: 신약성경>에서는 신약성경 저자들의 기록을 토대로 공동 읽기 현상에 대해 추적한다. 브라이트는 먼저 복음서와 사도행전에서 발견할 수 있는 공동 읽기 현장을 정리한다. 특별히 누가복음에서 공동 읽기 사건을 찾아볼 수 있기에 다른 복음서와 구분하여 별도로 정리한다. 이어 브라이트는 나머지 신약성경에서도 발견할 수 있는 예를 정리하여 제시한다.


6장에서 브라이트는 누가복음 5장을 언급하며 “5장을 보면, 우리가 살펴볼 또 다른 공동 읽기 사건이 있지만, 이번에는 회당에서 일어난 사건은 아니다”(227)라고 정리하며, 누가복음 51~11절의 예수가 게네사렛 호숫가에서 베드로를 부르는 장면을 상기시킨다. 누가복음 51~11절을 공동 읽기가 실행됐을 법한 사건이라고 추측하는 이유는 예수가 하나님의 말씀을 말했다는 문구 때문이다. 누가는 하나님의 말씀이 책에 기록된 것을 가리키는 말로 사용한 적이 있다(6:2, 18:11). 그러나 누가는 책에 기록된 것을 가리키지 않는 경우에도 같은 표현을 사용한다(8:11, 8:21, 11:28; 4:31, 6:7, 8:14, 11:1, 12:24) 물론 책에 기록된 것을 가리키는지 애매한 경우도 있다(13:44, 13:46, 17:13). 브라이트도 예수가 유대교 경전에 들어 있는 두루마리를 휴대하고 다녔으리라는 뜻은 아니다. 그는 그냥 글로 기록된 텍스트를 기억에서 불러내 들려주었을 수도 있고, 아니면 어떤 축약된 메모 형태를 사용했을 수도 있다.”(228)이라고 설명한다. 그런데 갑자기 그럼에도, 여기에서는 이 에피소드를 공동 읽기 사건으로 여길 만한 근거가 없는 것 같다.”(228)라고 결론을 내린다. 공동읽기 사건이라는 것인가, 아니란 것인가? 개정판이 나온다면 논지를 명확히 해야 할 부분이다. 나는 하나님의 말씀이라는 문구만으로 공동 읽기 사건이라고 보기에는 어렵다고 생각한다.


초기 기독교 전승의 형성과 보존이 공동 읽기를 통해 이루어졌다는 주장은 확실히 타당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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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경헬라어 동사 상의 기초
콘스탄틴 R. 캠벨 지음 / 그리심 / 2017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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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초 헬라어를 배우며 동사에 기본적으로 시간 개념이 들어있다고 받아들이는데, 캠벨의 책을 읽으며 시간 개념을 제거하고 헬라어 동사를 바라보게 한다. 기초 헬라어를 배우면서 익숙해진 동사의 시간 개념을 제거하기가 쉽지는 않다. 그러나 캠벨의 설명을 읽으면, 특히 마지막 장 <결론적 후기: 공간과 시간>를 읽으면 시간 개념을 제거하는게 어떤 의미인지 이해할 수 있다. 만약 책을 읽으며 캠벨의 개념이 이해가 되지 않는다면 후기를 먼저 읽는 것도 좋은 방법이다.
완벽한 이론은 없기 때문에 캠벨이 제시하는 동사 상(aspect) 개념으로 성경 모든 본문을 명쾌하게 해석할 수는 없다. 그러나 기초 헬라어, 중급 헬라어를 배운 지식으로 성경 본문을 마주했을 때 생겼던 의문점들이 많이 해결되는 것을 느낀다. 상호보완적으로, 그리고 더 깊은 공부로 하나님께서 말씀하시고자 했던 그분의 뜻을 밝히 이해하게 되길, 나아가 설교를 통해 바르게 전달하길 소원한다.

에스라가 여호와의 율법을 연구하여 준행하며 율례와 규례를 이스라엘에게 가르치기로 결심하였었더라 (스7: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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