감염의 전장에서 - 최초의 항생제, 설파제는 어떻게 만들어져 인류를 구했나
토머스 헤이거 지음, 노승영 옮김 / 동아시아 / 2020년 5월
평점 :
절판


이 글에는 스포일러가 포함되어 있습니다.

코로나-19 사태가 장기화되고 "앞으로는 감염병이 일상적으로 찾아올지도 모른다"는 불안감에 평소에는 잘 읽지 않았던 질병과 의약품에 대한 책들을 찾아보게 된다. 그 중 인상적으로 읽은 책 한 권이 바로 「감염의 전장에서」 이다.


이 책의 저자인 토마스 헤이거는 의학미생물학을 전공한 과학자로 현재는 과학저술가로 활발하게 활동하고 있다. 그는「아시모프의 과학기술 인명사전」을 읽던 중 파울 에를리히와 관련한 글에서 '게르하르트 도마크'라는 독일 병리학자를 발견했는데, 도마크에 대해 조사하면 할수록 설파제의 개발과 관련한 흥미로운 이야기들에 매료되었고 그가 현대 의학과 제약시스템에 끼친 영향력을 깨달았다고 한다. 그 이야기들을 한 권의 책으로 정리한 것이 바로 「감염의 전장에서」다.


도마크는 젊은 시절, 제1차 세계대전 우크라이나 전장에서 위생병으로 복무하며 가스 괴저로 죽어가는 수많은 전우의 모습을 목격했다. 당시 전장에서의 유일한 치료법은 괴저를 일으킨 부위를 절단하는 것. 야전병원에서 이루어지는 수술 자체가 엄청난 고통과 위험을 동반하는 것이었기에 도마크는 죽어가는 동료들을 지켜보며 추후 이 세균 감염병과 싸우는데 삶을 바치기로 결심했고, 전장에서 돌아온 후 대학에서 의학과 병리학을 공부하고 독일의 한 연구소에서 세균과 면역계에 대한 연구를 시작했다.



그러던 중 독일에선 거대 화학 복합 기업인 이게파르벤이 설립되었고 계열사 중 하나인 바이엘에서는 제1차 세계대전의 손실을 만회할 신규 의약품을 개발하기 위한 대규모 연구가 시작되었다. 의약품연구부문을 이끌었던 사람은 하인리히 회를라인. 그는 1927년 도마크를 바이엘로 불러들여 함께 각종 세균에 효과적인 화학물질을 찾기 위한 연구에 돌입했다. 도마크는 4년이 넘도록 3,000여가지 화합물을 시험했지만 뚜렷한 성과가 없어 절망하던 중 '아조 염료에 술파닐아미드를 결합한 화합물을 동물에 투여하니 연쇄구균에 감염된 쥐가 완벽하게 회복된다'는 결과를 얻었다. 다른 세포는 헤치지 않고 오로지 연쇄구균에만 작용하는 화합물을 찾은 것이다. 이것이 바로 설파제였다. (유황 sulfar를 포함하고 있어 설파제라 부른다)



인체에 설파제 효과를 시험할 기회는 1935년, 우연한 기회에 찾아왔다. 도마크의 여섯 살짜리 딸 힐데가르트가 바늘에 손을 찔렸고 운 나쁘게도 바늘은 살에 박힌 채 부러지고 말았다. 수술로 바늘은 빼냈지만 상처 부위에 고름이 생기고 나날이 상태가 악화되었다. 고열로 의식이 없어지자 의사는 급기야 팔을 절단해야한다는 끔찍한 처방을 내놓았다. 도마크는 실험실의 설파제를 가져와 딸에게 투약했고 얼마 지나지 않아 딸은 완벽히 회복했다. 인체에 해를 끼치지 않고 세균만 표적으로 삼아 공격하는 마법의 탄약이 탄생하는 순간이었다.


그로부터 1년 후 설파제는 당시 미국대통령이었던 루즈벨트의 아들을 죽음의 문턱에서 살려냈고 이는 유럽을 넘어 미국까지(세계적으로) 설파제 수요가 폭발적으로 증가하는 계기가 되었다. 이게파르벤은 물론 전 세계 제약기업이 비슷비슷한 구조의 설파제를 만들어 팔기 시작했고 적용가능한 질환도 연쇄구균 감염증 뿐 아니라 폐렴과 산욕열, 수막염으로 범위가 넓어져서 1941년에는 50만명이 넘는 사람들의 목숨을 구하기도 했다. (*당시 독일의 특허제도는 신규 화학물질 자체가 아니라 제조과정을 대상으로 했기 때문에 누구나 그 화학물질의 구조물을 새롭게 제조하는 법을 찾으면 또 다른 특허를 출원할 수 있었다)


이에 1939년 스웨덴의 카롤린스카 연구소는 이 기적의 약을 창조한 도마크에게 노벨 생리의학상을 수여했지만, 폴란드를 침공하며 제2차 세계대전의 불씨를 붙인 나치정권은 독일인의 노벨상 수상을 금지하는 명령을 내렸다. (9년 후, 세계대전이 끝나고 나서야 도마크는 노벨상 수상을 할 수 있게 된다)


설파제는 제2차 세계대전 전장에서도 맹활약하게 되는데, 독일군에서는 부상병의 상처부위에 붉은 설파제 가루를 뿌리는 처치만으로도 세균감염으로 인한 사망률을 현저히 줄일 수 있었다. 설파제를 대량으로 군수물자에 투입한 연합군 역시 1만명 가까운 이질 환자가 나왔으나 그 중 겨우 두 명만 사망하는 데 그쳤다. 미군 역시 제1차 세계대전에서는 폐렴 등의 호흡기 질환으로 5만여명이 희생자가 나왔었지만 제 2차 세계대전에서는 호흡기 질환으로 인한 사망자가 1,265명에 그쳤고 이는 설파제 보급이 주된 요인이었다고 공식 기록으로 남아있다.

설파제로 인한 문제가 없는 것은 아니었다. 미국에서는 약의 오남용으로 사람들이 사망하는 사건이 발생하기도 했는데, 이는 당시 허술한 의약품법과 관련이 있었다. 1906년 제정된 미국의 식품의약품법은 의약품의 제조, 판매, 처방 등에 대한 어떤 규제도 없었다. 당시 의약품법 위반을 감시하는 유일한 기관은 농업부 내 작은 부서인 화학국(현재 FDA)이었는데, 시장에 출시된 의약품 중 의심스러운 약물의 라벨, 오염 정도만 검사할 뿐이었다. 설사 문제가 있는 것으로 여겨지는 약의 경우에도 그것을 회수할 수 있는 규제가 없었다. 제약업은 1930년대 중엽 미국에서 네 번째로 큰 산업이었음에도 불구하고 미국인들은 스스로 진단하고 스스로 치료법을 결정하고 자신이 원하는 의약품을 어디에서나 구할 수 있었다. 현대의 시각으로 보면 이해하기 어렵지만 당시엔 그것이 관행이었다.


이런 잘못된 관행을 고치기 위해 농업부 장관 헨리 윌리스, FDA 수장인 캠벨 등이 앞장섰다. 그들은 모든 의약품에 대해 안전을 위한 실험 및 임상시험을 의무화할 것, 건강에 위험을 끼치는 것으로 밝혀진 모든 의약품을 시장에서 퇴출시킬 것, 의약품 라벨에 모든 성분을 표시하고 부작용을 경고하고 올바른 사용을 위한 지침을 제시할 것 등을 미국 의회에 요구했고 마침내 1938년 새로운 연방식품의약품화장품법이 제정되었다.


이렇듯 설파제는 1930년대 중반 기적처럼 등장해서 많은 생명을 구했지만 10여년 후 설파제에 내성이 생긴 세균이 등장하기 시작하고 새로운 항생제 페니실린이 개발되면서 점차 인기가 시들해져갔다.


이 책에서 소개한 설파제 개발과정, 그것의 확산을 둘러싼 이야기들은 흥미로울 뿐만 아니라 의약품과 관련한 역사에 시사하는 바도 큰 것 같다. 개인적으로 인상적인 부분들을 적어보자면,


△ 세균 감염 질병 시대를 개척하다


19세기 후반, 파스퇴르와 코흐를 비롯한 과학자들은 세균이 우리 몸에 들어와 증식하는 과정에 수많은 질병이 발생한다는 사실을 발견하였고 추후 디프테리아, 결핵, 탄저병, 폐렴, 파상풍, 콜레라 등 감염병의 원인균들을 찾아낼 수 있었다. 그러나 1920년대까지 인체 내에서 질병을 일으키는 세균만 없애는 방법은 알지 못했고 유일한 방법은 면역계와 관련 있을거라 예상할 뿐이었다. 백신과 혈청요법이 개발되었지만 질병에 따라 효능이 크게 차이났고 면역계의 작동 원리에 대해서도 충분히 밝혀지지 않은 상태였다. 효과적인 살균 성분, 페놀이 개발되었지만 페놀은 세균 뿐만 아니라 인체세포까지 파괴하기 때문에 외부 소독용으로 사용할 수 밖에 없었다. 그러나 설파제는 눈에 띄는 독성없이 인체에 특정 세균만을 없애주었으니 바야흐로 세균 감염 질병을 극복할 수 있게 된 것이다.



△ 염료 연구에서 화학요법 시대의 실마리를 발견하다


독일 의학자 파울 에일리히는 결핵환자의 병리조직을 염색하는 실험을 하던 중 우연히 결핵균만 선명하게 물들이는 염료를 발견하게 된다. 이는 결핵 진단을 간소화 시켰을 뿐만 아니라 '인체의 세포에 결합하지 않고 오로지 세균과 결합하는 염료가 있다면 세균만 파괴하는 화합물도 틀림없이 존재할 것'이라는 발상을 떠올리게 했다. 마침내 1904년 수면병 치료를 위해 개발한 트리판로트가 특정한 종의 파동편모충에 효과를 보이는 것을 발견하곤(아쉽게도 인간에겐 효과가 없었다) 오로지 세균만 공격하는 염료분자가 있을거라는 발상이 옳다는 것을 증명해냈다. 이후 수많은 실험을 반복하여 606번째 비소 화합물 살바르산이 (독성을 함유하고 있어 만병통치약은 아니었지만) 매독 치료에 효과가 있음을 밝혀냈다. 살바르산의 등장은 수없이 많은 다른 세균 감염증에 대해서도 화학요법을 통해 치료제를 개발할 수 있다는 가능성을 보여주었고 이는 설파제의 개발에도 큰 영향을 끼쳤다.



△ 도마크와 그의 연구팀은 근대적인 제약연구시스템을 만들었다



독일에선 살바르산 이후 뚜렷한 효능을 보이는 치료제를 찾기 어려워지자 화학요법에 대한 비관적인 전망이 고개를 들기 시작했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 영역에 과감히 도전하며 10년간 막대한 자금과 인원을 투입한 이들이 있었으니 바로 바이엘사의 에를리히와 도마크 팀이다. 그들은 어떤 화합물에 약효가 있는지 하나하나 실험하고 가능성이 보이는 화합물을 발견하면 가설을 세우고, 뒷받침할 증거를 찾아 보완하고, 화합물을 개량해 설계하고 합성하는 과정을 반복하며 이상적인 화합물을 만들어갔다. 또한 동물 실험을 통해 면밀하게 효과를 기록하고 부작용을 체크하며 관련 데이터를 쌓아 분석했다.



다만 인체를 대상으로 한 시험 방식은 여전히 마구잡이식이었다. 1933년 당시에는 신약을 찾아낸 의사나 화학자가 자신이나 동료, 심지어 가족에게 시험하는 일이 비일비재했다. 유럽의 화학회사들은 대규모 인체실험을 하기 위해 종종 (자신들의 식민지였던) 아프리카에 갔다. 영국에선 병사들을 이용했고 미국에서는 죄수와 정신병원 입원 환자를 대상으로 시험했다. 당시엔 환자가 발생하면 의사가 화학회사나 판매상 등에 약물을 요청하고 정확한 투약 지침없이 (동물실험 데이터를 바탕으로 추정하여) 마구잡이로 투약하곤 했다. 사례는 개별적이었고 투여량은 제각각이었으며 결과는 소규모 학회나 무명의 학술지에 소개되는 것이 고작이었다.



설파제가 대규모로 생산되고 세계적으로 사용되자 부작용을 호소하거나 오남용으로 사망에 이르는 케이스들이 발생했고, 이는 위에서 언급했듯 의약품법 개정의 방아쇠를 당기게 된다. 의약품 효능판정은 과학의 진보, 그 중에서도 통계학이 제대로 자리잡은 후에야 의미있는 논의가 이루어질 수 있었는데 설파제가 그 첫걸음이었던 셈이다.



이외에도 이 책에선 제2차 세계대전 발발 당시 나치당에 협력한 기업과 과학자들의 말로, 설파제로 인해 달라진 2차 세계대전의 양상, 설파제를 둘러싼 과학자와 정치인들의 치열한 분투 등 흥미로운 에피소드들이 줄줄이 이어진다. 책장을 덮고나면 '의학사를 통틀어 가장 혁명적인 의약품이 설파제'라는 저자의 주장에 저절로 고개가 끄덕여질 정도.



감염의 전장에서 싸운 한 과학자의 삶, 그로 인한 세계사의 명장면들을 놓치고 싶지 않다면 이 책을 읽어보시길~




댓글(0) 먼댓글(0) 좋아요(2)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