터프 이너프 - 진실을 직시하는 강인함에 관하여
데보라 넬슨 지음, 김선형 옮김 / 책세상 / 2019년 11월
평점 :
절판


여기 여섯 명의 여성들이 있다.

시몬 베유, 한나 아렌트, 메리 매카시, 수전 손택, 다이앤 아버스, 조앤 디디온.


데보라 넬슨은 그들을 (시대가 여성에게 요구한 스타일을 거부하고) 당대의 역사적 사건들에 대해 냉철하고 비판적인 목소리를 당당하게 내보인 '터프한' 여성들로 지칭하며 그들이 각자의 분야에서 보여준 지적, 사회적 활동과 그것들이 불러온 파장에 주목했다.


이들은 모두 1,2차 세계대전을 겪은 세대라는 공통점이 있다. 사람들은 전쟁 후 인간의 근대성과 도덕성을 의심하며 혁명적 변화보다는 수정적 현실을 도모하고 '전쟁'이라는 커다란 수난을 공감과 연대로 극복하기 위해 영적, 사회적, 미학적, 정치적 도전을 시작했다. 데보라 넬슨은 이 과정에서 유독 당대 여성 지식인, 철학자, 예술가들에겐 감상적인 태도와 정서적 표현을 요구하고 있다는 점을 발견하곤 이 책을 저술했다고 한다.


프랑스의 사상가 시몬 베유(1909~1943)는 '전쟁'이라는 커다란 수난을 맞닥뜨린 이들이 종교적 활동을 통해 위안을 얻고 사후세계 이미지를 보고 마음의 평화를 얻고자 할 때 <중력과 은총>에서 그에 반하는 주장을 펼쳤다. '운명, 천형, 맹목적 필연'이라는 개념을 들며 트라우마의 시대에 수난이 어떤 의미가 있는지 사색함으로써 도덕성을 강화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이러한 '비극적 감수성'을 정치의 영역으로 끌어들일 때 근대 사회의 한계를 극복할 수 있다는 것이다. 시몬 베유의 사유는 이에 머물지 않고 권력과 언어(의 추상성)의 관계, 민주주의적 포괄성, 기타 신학적 개념을 향해 나아간다. 그러나 시몬 베유의 이러한 생각은 당대 종교활동을 통해 온기와 공감을 얻고자 하는 이들에겐 냉정하고 무자비하게 받아들여졌으며 이러한 대중의 평가는 그녀의 몰개성적인 문체로 인해 더 공고해졌다. 그그러나 그녀는 "표현의 노고는 형식 뿐만 아니라 사유는 물론 내면적 존재 전체와 관련이 있어요."라고 말하며 직설적이고 강직한 스타일을 고수했다. 스페인 내전에서 돌아온 후 쓴 에세이 <말의 힘>에서는 추상(어)에 대한 경계를, 공장노동자들을 옹호하는 정치적 에세이 공장노동>에서는 개인적 상념과 에피소드를 배제하며 대상과의 거리감을 유지했는데 이러한 그녀의 글쓰기 방식은 사려깊게 더 정의로운 세계와 직접적인 신의 체험을 선택하기 위한 그녀만의 철학이라 볼 수 있다.


데보라 넬슨은 이어 <예루살렘의 아이히만> 저술로 커다란 스캔들을 일으킨 한나 아렌트(1906~1975)를 소개한다. 1961년 아돌프 아이히만의 예수살렘 재판은 홀로코스트와 관련해 공감을 전시하기 위한 정치적 목적을 띄고 37개국에 생중계되었는데 한나 아렌트는 <뉴요커>의 요청을 받아 이 모든 재판과정을 기록하게 된다. 그 기록물이 바로 <예루살렘의 아이히만>인데 이 책은 출판되자마자 엄청난 비판과 비난을 받았다. 기록의 정확성에 대한 사소한 오류보다 더 큰 비난의 대상이 된 것은 바로 한나 아렌트의 비감상적인 unsentimental 문체였다. 재판과정의 무게를 전달하기 위한 산문의 리듬, 복잡한 문장으로 이어지다 팡 터지지는 충격으로 끝맺는 문장 등의 스타일이 공감능력이 없고 야만적인 인간이기 때문이라고 공격한 것이다. 그러나 저자를 비롯한 후대 연구자들은 <예루살렘의 아이히만>의 저술방식에 대해 다른 견해를 내보인다. 그녀의 저작 전반에서 그녀가 '감정들이 정치적·공적 담론에 미치는 참담한 영향력'과 '공감의 관습(희생자의 감정을 수용하고 공유하려는 시도)이 내포한 문제점'을 인식하고 있다는 점을 들어 '<예수살렘의 아이히만>저술방식은 현실을 직시하고 (현실이 불러일으키는 감정에 매몰되지 않고) 그 현실을 기반으로 사유하는 법을 터득하기 위한 수사적 전략'이라 보는 것이다.


그렇다면 글이 아닌 '사진'의 영역에선 여성들의 터프함에 어떠한 반응들을 보였을까?


저자는 '수전 손택(1933~2004)'과 '다이앤 아버스(1923~1971)'의 사례를 이어 소개했다.

수전 손택은 미국의 예술 및 정치비평가로 우리나라에서도 <타인의 고통>, <사진에 관하여> 등의 저작으로 유명하다. 그녀는 <사진에 관하여>에서 전쟁 보도 사진에 대해 크게 우려했다. 사진의 극단성은 전쟁 종식에 전혀 영향을 끼치지 못했으며 오히려 사진의 현실미화가 인간의 불행(수난)을 아름답게 만든다고 비판했다. 특히, 반복적인 노출은 충격을 약화시키고 도덕적인 반응을 불러일으키지도 못한다고 말하며 이를 '현대 시각 문화의 마취효과'라 명명했다. 우리가 사진에게 기대하는 것은 사진 속 고통을 목격할 때 '연민의 감정을 갖는 것'이 아니라 '그 고통의 의미를 알고 어떻게 대처해야하는지' 사유하는 것이다. 이러한 수전 손택의 주장은 전쟁의 참상을 담은 사진으로 연민을 끌어모아 전후 사회를 재건하고 변화를 추동하려는 세력들에겐 탐탁치 않은 것이었고 그들은 그녀를 임상적이고 몰개성적인 캐릭터로 몰고갔다.


다이앤 아버스 역시 감상자의 공감을 이끌어내기 위한, 정치적인 목적을 띈 다큐멘터리 사진을 거부했다. 대신 기형인, 난쟁이, 거인, 트렌스 젠더, 동성애자, 도착증 환자 등 주류사회에서 소외된 인물 군상을 드러내는 사진을 ㅗ찰영했다. 그녀는 '공감을 거부하는 것이 관심과 리얼리티를 위한 공간을 열여준다'고 생각했기에 현실의 이해를 무디게 하는 여성의 섬세한 시선을 거부하고 사회적 약자를 있는 그대로 드러내는, 빤히 바라보는 사진을 찍었다. 이런 그녀의 작업을 보고 사람들은 무정하고 폭력적이라 질타했는데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녀는 현실과 카메라가 가진 감정의 간극을 드러내고 그 간극을 허락하지 않는 사회 구조에 맞서나갔다. "빤히 보는 것을 금기시 하는 것은 동시에 관심을 거둬들이는 일이기도 하다"고 말하며 인간 조건에 만연한 고통과 일탈을 인식하기 위해 사회적 약자들을 끈질기게 촬영했고 작업과정에서 촬영대상의 존엄을 지키기 위해 디테일을 면밀히 살폈다고 한다.


이외에도 데보라 넬슨은 이 책에서 미국의 소설가인 메리 매카시와 조앤 디디온의 이야기도 함께 소개한다. 메리 매카시 이야기에서는 '사실성을 향한 집착'에 대해, 조앤 디디온에게서는 자기연민의 문제에 대한 그들의 냉혹한 논리와 강력한 도덕성을 설파한다. 이 역시 당대 주도적이었던 뉴저널리즘 아래에선 낯설고 엄격한 스타일이었는데 그럼에도 불구하고 자신만의 스타일을 위해 부단히 노력한 두 여성에게 저자는 기꺼이 헌사를 바친다.


사실 이 책은 한나 아렌트와 수전 손택, 조앤 디디온의 저서를 이미 읽었던터라 저자가 그들의 글을 도덕적·정치적 미학으로 어떻게 바라보았을지 궁금했고 이번 기회에 다른 여성 지식인·예술가들의 저작들도 챙겨 읽고 싶어 선택했다. 하지만 책의 특성상 여섯 여성들이 쓴 저작들을 읽고 어느 정도 이해해야만 저자의 해석을 따라갈 수 있기 때문에 생각보다 완독하는 데 오랜 시간이 걸렸다. 다루는 내용이 방대하고 차용되는 개념(어)들이 익숙하지 않아 연계독서도 필수적이었다. 또한 이 책이 여섯 명이 쓴 글들의 '스타일' 문제를 다루고 있는데 그들의 저작물을 번역서로 읽으면 저자가 언급한 세련되고 품위있는 그들의 문체(문장의 구조, 서술어법, 리듬감 있는 단어사용, 표현의 절제, 아이러니 등)를 전혀 느낄 수 없다는 한계가 있었다.


그러나 지난한 시간을 지나 완독하고 나니 1900년대 전후 사회를 지배했던 영적, 사회적, 정치적 분위기를 상상하며 그에 반하여 자신만의 목소리를 낸 용감한 여성 지식인·예술가들을 마주하는 기쁨을 느낄 수 있었다. 터프한 스타일 뒤엔 전후 사회에 만연한 억압과 소외, 감당하기 어려운 수난을 극복하기 위한 처절한 노력이 있었을테다. 특히 다이앤 아버스라는 사진 작가를 알게된 것은 큰 수확이었고 동시대를 살아간 여성들이니만큼 서로 찬사와 비판을 주고받은 에피소드들이 곳곳에 있어 읽는 내내 흥미로웠다. (수전 손택의 다이앤 아버스 비평은 의외기도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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