섬, 섬옥수
이나미 지음 / 자음과모음(이룸) / 2013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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올해 등단 25년을 맞은 소설가 이나미(52)의 연작소설집 ‘섬, 섬옥수’는 섬에 대한 일곱 개의 이야기를 담고 있다. 작가는 한반도 최남단 마라도에 갔다가 소설을 착안했으며 제목 ‘섬, 섬옥수(纖獄囚)’의 한자에서 유추할 수 있듯, 태생지인 섬에서 나고 자라 바다에 순응하며 모진 삶을 이어온 원주민들, 스스로를 유폐시키려고 찾아들었거나, 생존을 위해 먹고살려고 모여든 외지인들이 섬이라는 특수성, 폐쇄성 때문에 보이지 않는 창살에 갇힌 채 서로 부대끼며 갈등, 대립, 오해를 겪다 결국 사랑으로 구원을 모색하는 이야기를 적나라하게 쓰고 싶었다고 한다.

 

10년 동안 나름의 자부심을 갖고 임했으나 정작 뒤돌아보니 남은게 없었던 교단생활에 대한 회의감과 아이 없는 부부 사이가 멀어지고 서로에게 무관심해지면서 소원해진 남편과의 관계로 인해 도피하듯이 찾은 땅끝섬에 머무른 정애의 이야기. 일찍 남편을 여이고 하나뿐인 아들과 시어머니를 먹여 살리기 위해 젊은 시절부터 악착같이 물질을 하며 살고 있는 막순과 사람 좋은 종태 모자, 뭍으로 시집 갔다 이혼하고 홀 몸으로 돌아와 물질하다 죽은 정희, 아내를 자궁암으로 잃고 섬을 떠났으나 섬 사람들의 이기심을 그저 두고 볼 수 없어 돌아온 전 파출소장 장씨 등 총 일곱 개의 이야기 안에는 저마다의 사연들이 가득하다.

 

화기애애하고 서로 나누기 좋아했던 섬사람들이 돈과 이권을 둘러싸고 서로 패가 갈려 변하게 된 것은 섬이 천연보호구역으로 지정되면서부터다. 아름다운 천혜의 자연을 즐기기 위해 관광객이 몰려들자 돈을 벌어보겠다고 들어온 외지인들과 터줏대감 행세를 하는 원주민들 사이의 갈등은 깊어진다. 심지어 주인을 닮아 땅끝섬의 개들도 세력 다툼을 하는 지경이다.

 

“처음에 마을 사내들은 경쟁심에서 질세라 족보 있는 비싼 개들를 들여왔지만 섬에 들어오는 순간 바로 방목했다. 개들은 어디 누구네 집 개로 살아가되 먹는 건 스스로 해결한다. 관광객들에게 앵벌이로 목숨을 부지하든 말든 주인들은 개들을 돌보지 않는다. 그러다 적당히 살이 오르면 잡아먹힌다.”(‘섬, 섬옥수 4’ 부분)

 

마을 사람들이 경쟁적으로 들여온 것은 족보 있는 비싼 개들 뿐만이 아니다. 이들은 “손바닥보다 작아서 천천히 걸어서 한 바퀴 돌아도 사십분이면 충분”할 정도인 땅끝섬에 너나 할 것 없이 골프카를 들여와 호객행위를 하며 뭍에서도 실컷 먹을 수 있는 자장면을 섬의 특산품으로 내세워 장사하기 바쁘다. “언제부터 땅끝섬의 명물이 골프카와 짜장면이 됐는가. 섬에 처음 오는 관광객들은 배에서 내리자마자 즐비하게 늘어선 골프카 운전사들의 밀고 당기는 호객에 정신을 빼앗겨 선택의 여지가 없었다.”(‘섬, 섬옥수 5’ 부분)

 

그런 무법천지였던 섬에 오랜만에 평화가 찾아왔다. 골프카 회수의 경고에도 불구하고 그동안 성행했던 골프카 상업과 불법으로 증축한 건축물과 쓰레기 무단 투기로 인하여 섬의 환경오염이 심각하게 우려되자 서귀포시가 보다 못해 정화의 칼을 뽑아든 것이다. 섬사람들의 자각으로 인한 해결이 아닌 공권력의 작용으로 문제가 해결된 점이 씁쓸하게 느껴지는 결말이다.

 

작가는 “2006년 여름, 마라도에 한 달간 머물 기회가 있었는데, 그때 서너 대뿐이던 관광용 골프카가 나중엔 80여 대로 늘어나면서 섬이 황폐해지기 시작했다”며 “사람들의 품성이 환경과 조건에 의해 어떻게 지배당하고 좌충우돌하는지, 여러 유형의 인간군상을 통해 그려내고 싶었다”고 말한다. 과연 사람은 환경이 만드는 것일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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계약자 자음과모음 청소년문학 34
선자은 지음 / 자음과모음 / 2013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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줄거리

 

주인공 홍알음은 친구 소희의 부탁으로 그녀의 짝사랑을 이뤄주기 위해 함께 빈집에서 ‘계약’이라는 알 수 없는 의식을 치른다. 그리고 그날 밤 알음의 꿈에는 “보려는 대로 보이는 것이다”라고 말하는 거미처럼 생긴 괴물이 나타난다. 알음의 엄마는 자상하고 정이 많다 못해 여자관계가 복잡한 아빠에게 휘둘리기만 하다가 결국 누군지도 모르는 여자의 아이까지 맡게 되었다. 게다가 그 아이는 아빠의 ‘아들’이라고 굳게 믿는 할머니의 사랑까지 독차지해버렸다. 단란했던 가정이 깨졌다고 느낀 알음은 자신의 소중한 가족을 깨뜨린 아이를 증오하게 된다.



알음은 친구 소희가 짝사랑하는 신율에게 끌리면서 소희에게 질투를 느낀다. 다시 알음의 꿈에 나타난 계약자는 “네가 원하는 것을 들어주겠다”라고 말한다. 알음은 계약자가 소희가 아니라 자신에게 나타났다는 사실에 묘한 희열을 느끼며 계약자에게 ‘그 아이를 없애줄 것’을 소원으로 빈다.알음은 소희 몰래 신율과 가까워지고, 불량스러운 소문을 가진 나비진 패거리와 어울려 편의점 습격 사건에 얽히는 등 점점 예전의 평범한 일상과 멀어져만 간다. 



작가소개

 


이 책의 저자인 선자은 작가는 "펜더가 우는 밤"(2011)으로 제1회 살림 청소년문학상을 수상했다. 지난해 출간한 자음과모음 청소년문학 "제2우주"는 선택의 끝에서 또 다른 우주에서 존재하는 자신을 만나는 흥미진진한 이야기로 많은 청소년들의 사랑을 받았다. "계약자"는 2011년 계간 "어린이책이야기"에 연재한 소설이다. 하지만 같은 소설이라고 할 수 없을 정도로 제목부터 결말까지 크게 달라졌다. 책을 출간하면서 빼놓은 부분을 첨가했고, 한 권의 책에서만 읽혔으면 하는 부분을 다시 써서 넣으며 완성도를 높였다.

 

 

 

 

 

느낀 점

 

어느날 밤 문득 잠에서 깨어보니 까만 어둠속에서 조금씩 명암을 달리 하는 다른 어둠의 덩어리를 보았고 그 덩어리가 계약자의 소재가 되었다고 작가는 말한다. 글을 쓰게 된 계기가 특이한 만큼 계약자는 매우 특색이 있는 소설이다. 주인공 홍알음과 주변인물들에 대한 묘사는 마치 어딘가에 실제로 존재할 것만 같은 생생함을 느끼게 해주는 반면 거미를 닮은 계약자는 평상시엔 생각도 못한 존재로 그 생경함이 색다른 재미를 가져온다. 총 18개의 에피소드로 이루어진 글을 읽다보면 자신도 모르는 사이 빠져들게 되는 무한 매력의 책 계약자. 흡입력 있는 이 책을 혼자만 알기엔 너무 아깝다. 우리 모두 계약자의 매력 속으로 빠져 보는 건 어떨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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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제 쓴 글이 부끄러워 오늘도 쓴다 - 거리의 인문학자 최준영 에세이
최준영 지음 / 이지북 / 2013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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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준영

 

     최준영 작가님은 2005년 성프란시스대학(최초의 노숙인 인문학 과정)을 시작으로 관악인문대학, 경희대 실천인문학센터 등에서 노숙인, 여성 가장, 교도소 수형인들에게 글쓰기와 문학을 강의했고 또 노숙인의 재활을 돕는 잡지 《빅 이슈》 창간을 위해 3년간 공을 들이기도 했습니다.

     전국의 관공서, 공공기관, 도서관, 대학, 기업 등에서 초청 1순위로 꼽는 대중 강연가이며, 일상에서 인문학적 사색을 길어 올린 '420자 칼럼'을 페이스북에 매일같이 연재하여 수많은 팬을 불러 모으는 페이스북 논객으로도 유명합니다. 지은 책으로는 『결핍을 즐겨라』 『책이 저를 살렸습니         다』 『유쾌한 420자 인문학』 등이 있습니다. 

        

 

 

 

 『어제 쓴 글이 부끄러워 오늘도 쓴다』는 작가님이 지난 1년간 매일매일 페이스북에 썼던 420자 칼럼들을 엮어서 만든 책으로 1장은 노숙인 인문학 강좌 에피소드를 2장은 일상속에서 작가가 느꼈던 것에 대한 이야기 및 가족이야기3장은 여러가지 책을 읽고 난 후의 느낌과 단상에 대해서 4장은 작가가 생각하는 글쓰기 지론, 왜 인터넷에 계속 글을 써오는지에 대해 서술되어 있으며, 총 4장으로 구성되어 있습니다. 

 

 

1장.

p.86 문득 홍세화의 말이 떠오릅니다. "존중하시오. 그리하여 존중받으시오." 『나는 빠리의 택시운전사』에 나오는 말인데요, 파리의 공원에 붙어 있는 잔디를 밟지 말라는 의미의 푯말이랍니다. 우리 나라에선 잔디가 아닌 사람을 두고 해야 할 말인 것 같습니다.

 

2장

p.94 미안한 걸 미안해할 줄 알고, 부끄러운 걸 부끄러워할 줄 알고, 잘못한 일을 반성할 줄 알고, 표피 너머의 심연을 성찰하려는 자세를 가지려 노력한다면 실수나 무지는 그리 큰 문제가 되지 않습니다. 어차피 삶이란 무지를 헤쳐 나가는 끝없는 배움의 과정이고 실수를 되풀이하면서도 앞으로 나아가는 것이니 말입니다.

 

p.135 생산적이며 창조적인 삶, 의미있는 삶을 살기 위해서는 지금 내가 어디쯤에 있는지를 성찰할 필요가 있습니다. 후배와의 만남 이후 새삼 저 자신에게 묻게 되더군요. '나는 지금 어디쯤 와 있는가?'

 

4장.

 

p.308 비는 바람이 내미는 손일지 모릅니다. 비는 구름이 하는 말일지도 모릅니다. 바람이 내민 손, 구름이 하는 말에 답하기 위해 나도 누군가에게 손 매일고 자분자분하게 나의 말을 이어갈 것입니다. 왜 쓰는가 물으면 이젠 할 말이 있습니다. 나는 떠나기 위해 씁니다. 못 떠나는 마음을 달래기 위해 여태 쓰고 있는 거라고요. 그러나 이제 입이 아니라 몸으로 대답할 터입니다. 떠남으로써, 떠돎으로써, 안녕! 후덥지근한 일상이여, 헛헛한 마음이여, 답답한 가슴이여.

 

 

 

같이 사는 사회, 더불어 사는 사회를 꿈꾸는 작가의 바람이 그대로 묻어나는 책. 어제 쓴 글이 부끄러워 오늘도 쓴다.는 현재를 살아가는 우리들에게 꼭 필요한 책이 아닐까 싶다. 나만 잘 살면 그만이라는 식의 사고가 지배한 지 이미 오래인 사회속에서 개개인들은 점점 타자화 되어가고 사람들은 연대의 의미를 잊어버린 것만 같다. 

한치 앞도 모르는게 사람 일이라고들 하지 않는가. 그동안 무관심으로 일관했던 사회의 일들이 나에게 닥치지 않으리란 법은 없다. 

사회로부터의 낙오를 막기 위한 최소한의 방지책으로 작가는 주변을 돌아보는 따뜻한 시선을 제시한다. 연대의 손길 하나가 사람을 살린다는 것이다. GDP 3백달러에서 3만달러로 경제적으로는 더욱더 풍족해졌지만 주변 사람에 대한 시선은 더욱더 각박해진 사회이기도 한 현재를 살아가는 우리들에게 있어 이 책은 인간존중에 대한 경각심을 일깨우게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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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 이모 자음과모음 청소년문학 33
사가와 미츠하루 지음, 장은선 옮김 / 자음과모음 / 2013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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절판





우리이모, 사가와 미츠하루 장편소설

 

 

 제 26히 쓰보다조지 문학상 수상작. 카이세이 명문학교의 콧대높은 중학생 요스케가 그동안 자신이  살아온 부모님의 안온한 세계와는 완전히 다른 생명력 넘치는 삶을 살아가는 이모를 만나면서 변화하  는 모습을 그려낸 소설이다. 우리이모는 일본에서 꽤 호응이 있어, 2011년에 나온 속편에 이어서 얼  마전에 3편까지 출간되었다.

 







 

사가와 미츠하루

 

 1965년 2월 8일 도쿄출생. 2000년 '생활의 설계'로 32회 신초 신인상을, 2002년 '줄어든 사랑'으로     24회 노마 문예신인상을 받았다. 2011년 '우리 이모'로 26회 쓰보다조지 문학상을 받았다.

 

 

 

요스케는 부유한 가정의 외동아들로 힘든 입시에 성공해 명문 카이세이 중학교에 다니던 학생이었다. 하지만 은행 부지점장인 아빠가 고객의 돈에 손을 댄 것이 밝혀진 후 요스케의 인생은 완전히 뒤바뀌고 만다. 엄마와 헤어져 한 번도 본 적 없던 이모가 운영하는 보육시설에 살게된 요스케는 새롭게 맞닥뜨린 상황에 당환한다. 하지만 한편으로 현실을 수긍하고 자신의 자리를 찾으려 계속 노력하는 성숙한 면을 지녔다. 그리고 냉정하게 현실을 관조하는 자세를 유지하는 애늙은이 같은 면으로 자신의 가치관을 조금씩 수정해 나간다.

 

 

 p.203 타쿠야와 나란히 서서 이모를 바라보았다. 나도 이모처럼 온 힘을 다해 살아가고 싶다. 어디서 무얼 할지는 모르지만, 뭐든 될 수 있을 것 같은 기분이 든다. 이모도 그렇게 생각하면서 의대를 지망하고, 배우가 되고, 연극에 빠져들었겠지. 그러니 나도 자신이 결정한 일에 온 힘을 다해 부딪친 후, 그 결과가 아무리 비참한 현실이라 해도 이모나 타쿠야가 그러는 것처럼 가슴을 펴고서 살아가고 싶다.

 

 

 p.206 - 옮긴이 후기

 항상 미래를 염두에두고 계획을 세우지만 때로는 노력한 것과 상관없이 어쩔 수 없는 돌발상황이 발생하곤 합니다. 계획은 어그러지고, 심지어는 쓰디쓴 실패를 겪습니다. 그럴때마다 인생이 다 끝나버린 것 같은 기분에 사로잡히게 되죠. 그러나 실패나 추락 후에도 길은 계속 이어지는 법입니다. 상황에 떠밀려 정신없이 흘러가면서, 새로운 인연들과 이어지고 친해지고 정들고, 그러다 문득 정신을 차리면 전혀 다른 풍경이 보이는 곳에 서 있곤 하지요 (......) 과거는 여전히 따끔거리고, 때로는 실체를 가진 사건으로 나타나 상처를 쑤시기도 합니다. 그럴때마다 찾아드는 후회나 원망은 뼈저리게 아프지만, 그들을 사랑하기 때문에, 그마음으로 인해 쓰라린 기억마저 끌어안을 수 있게 되는 거지요. 추락하지 않았다면 서로를 영영 만날 수 없었을 테니까요. 그렇게 생각하는 순간, 실패는 후회스런 상처가 아닌 그냥 과거의 기억이 되고 새로운 강능성이 열리기 시작합니다. 



세상을 살아가다 보면 자의든 타의든 한번쯤은 시련을 맞이하게 된다. 그럴 때 그 시련을 대하는 태도의 차이가 각자의 미래의 차이를 만든다고 생각한다.

자신에게 힘든 일이 찾아 왔을 때, 바로 이를 극복하고 앞으로 나아가는 사람이 있는 반면 그 상태 그대로 멈춰 있는 사람도 있고 오히려 더 후퇴하여 시련을 극복하는 데에 오래 걸리는 사람도 있다. 이렇듯 실패의 극복과정이야 개개인마다 다르지만 이의 극복을 위해서 중요한 것은 혼자 고립되어 있지 말고 주변 사람들과 함께 시간을 보내면서 자기 자신을 잃지 않으려고 노력하는 자세를 갖는 것이다.  

사가와 미츠하루는 소설 우리이모를 통해서 우리에게 실패에 맞서는 법을 보여주려 한다. 한번의 실패로 절망의 구렁텅이에 빠져 허우적 거리지 말고, 오히려 그 실패를 새로운 가능성의 발판으로 삼으라는 격려의 말을 독자들에게 전하고 있는 것이다. 만일 지금 힘든 시간을 보내고 있는 사람이 있다면 이 책, 우리 이모를 추천하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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파과
구병모 지음 / 자음과모음(이룸) / 2013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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구판절판


 


p.9 그러니까 금요일 밤 시간대의 전철이란 으레 그렇다. 밀착을 넘어 연체동물의 빨판처럼 서로에게 흡착되다시피 한 생면부지의 몸 사이에 종잇장만 한 틈이 있다는 사실만으로도 고마운. 누군가 입을 열거나 숨을 쉴 때마다 머리 위로 끼얹어지는 구운 갈비와 마늘 냄새, 문뱃내에 들숨을 참더라도 그걸로 닷새 치 노역이 끝났음을 확인하며 안도하는 시간. 다음 역 문이 열리고 쏟아지는 한 무더기 노동자들의 얼굴에 드리워진 피로와 고뇌와 한편으론 얼른 귀가하여 젖은 휴지 같은 몸을 매트리스에 부려놓고 싶다는 갈망 사이로 그녀가 들어선다.

 

 "금요일 밤 사람 많은 전철은 피곤하다"라는 내용을 비유적 표현으로 늘여 쓴 문단. (굉장한 길이의 4  문장이다) 작가의 글솜씨가 돋보인다. 

 

 이외에도 책 전체가 묘사, 비유적 표현이 많이 되어 있어 마치 캐릭터가 내 주변 어딘가에 실제로 살아있을 것만 같은 느낌이 든다. 

 

처음, 서장은 늙은 할머니가 지하철 하차 시에 쥐도새도 모르게 한 남자를 살해하는 내용을 담고있다.  

지하철에서 꼬장 부리는 남자를 왜 죽였을까? 하는 의문이 들었다. 왜냐하면, 

앞에 나온 내용이라고는 같은 지하철 칸에 타고 있던 남자가 젊은 여자에게 자리 양보 안하느냐고 시비거는 부분만 나왔을 뿐이기 때문이다. 구체적 살인동기는 설명하지 않는다. 

그리고는 독성분에 대한 잠깐의 설명 뿐.

매우 흥미로운 파과의 시작이다!

 

 

서장과 종장을 포함하여 총 12장으로 구성되어 있는 파과는 65세의 현역킬러 조각의 과거와 현재를 넘나들며 스펙터클한 한 여자의 삶을 그려내고 있다. 

 

덮어놓고 싸지르기만 하고 낳은 자식에 대한 책임은 지지 않는 무능한 부모를 둔 덕에 어린나이에 그녀는 당숙네 집으로 식모살이를 하러 가게 된다. 힘든 더부살이도 잠시, 당숙의 딸이 시집을 가게 되면서 당숙과 당숙모는 어린 그녀에게 공부도 시켜주고 미래를 위한 지원을 약속한다. 그러나 희망도 잠시 그곳에서 일어난 한 사건으로 인해 그녀의 인생은 송두리째 바껴버리게 된다.

 

p.153 소녀는 류의 가게에서 얻은, 무슨 욕인지 모를 영어가 앞뒤로 적힌 커다란 박스 티셔츠와 긴 면바지를 입고 술병이 담긴 상자를 메어 날랐다. 티셔츠는 어깨선이 거의 팔꿈치까지 내려왔고 끝단은 무릎을 덮어서 소녀는 부대를 뒤집어쓴 것처럼 보였다. 작은 아이가 힘을 곧잘 쓰고 일도 바지런히 잘하니 소개받은 클럽 지배인은 그녀의 나이 외에는 아무런 불만을 표하지 않았다.

 

 

그녀에게 있어 운명과도 같은 류와의 만남. 일하던 곳에서 미군에게 성폭행을 당할 뻔 했으나 타고난 영민함과 민첩성 덕분에 위기에서 벗어나고, 이 일을 계기로 본격적으로 류와 함께 방역업을 시작하게 된다.

 

 

p.176-177 류에게 의지하고 류가 세상의 전부였다 해도 그에게 느낀 감정은 집착과 애정의 착종에 다름 아니었다. 혈연이 문제라고 할 것 같으면 아홉 달 반을 배 속에서 키운 아이는 탯줄이 떨어지기도 전에 해외 입양 브로커의 손에 넘어갔고(......) 그랬는데 이제와서 타인의눈 속에 둥지를 튼 공허를 발견하고 생겨나는 이 연민이라니, 살과 뼈에 대한 새삼스러운 이해라니. 노화와 쇠잔의 표지가 아니고서야 이런 일관성 없음이라니.

 

 

p.222 달콤하고 상쾌하며 부드러운 시절을 잊은 그 갈색 덩어리를 버리기 위해 그녀는 음식물쓰레기 봉지를 펼친다. 최고의 시절에 누군가의 입속을 가득 채웠어야 할, 그러지 못한, 지금은 시큼한 시취를 풍기는 덩어리에 손을 뻗는다. (...) 어쩔 수 없이 그녀는 부서진 조각들을 하나하나 건져 봉지에 담고, 그러고도 벽에 단단히 들러붙은 살점들을 떼어내기 위해 손톱으로 긁는다. 그것들은 냉장고 안에 핀 성에꽃에 미련이라도 남은 듯 붙어서 잘 떨어지지 않는다. 그녀는 문득 콧속을 파고드는 시지근한 냄새를 맡으며 눈물을 흘린다. 

 

단 한번도 정상적인 가정을 이뤄본적이 없는 그녀. 어쩌면 그러한 애정의 결핍때문에 방역업자라는 직업을 갖게 된 것이 아닐까. 일생동안 유일하게 자신을 보듬어준 사람을 위해서. 

그러나,

살고자 해서 사는게 아니라 살아있기에 그저 하루 하루를 살아갔던 이 방역업자 안에서 무언가 어떤 욕망이 살아난다. 그간 잊고 있었던 자신의 여성성. 

무자비한 킬러였지만 그녀 안에 남아 있던 여성성은 사랑했던 이의 죽음과 피붙이 혈육과의 생이별 후에도 흔들리지 않았던 그녀를 끝내 무너뜨리고 결국 그녀가 현업에서 손을 떼게 만든다.  

 

 

 

pp.332-333

이 순간 그녀는 깨지고 상하고 뒤틀린 자신의 손톱 위에 얹어놓은 이 작품이 마음에 든다. 무엇보다 그것은 진짜가 아니며 짧은 시간 빛나다 사라질 것이기에 더욱 그렇다. 
사라진다. 
살아 있는 모든 것이 농익은 과일이나 밤하늘에 쏘아올린 불꽃처럼 부서져 사라지기 때문에 유달리 빛나는 순간을 한 번쯤은 갖게 되는지도 모른다. 
지금이야말로 주어진 모든 상실을 살아야 할 때.

 

 

 

결국 사람은 언젠가는 부서지기 마련이다.

그렇기에 주어진 상실 속에서 얼마나 부단히 자기 자신과 부딪히며 살아가느냐에 따라 개개인의 삶의 종착지는 달라질 것이다. 설령 모두가 다 똑같이 죽음을 맞이할지라도.

 

어차피 살아내야 하는 삶이라면

긍정을 갖고 

자기 자신에게 솔직하게 숨김없이 살아간다면

먼 길을 돌아 간다 해도

결국엔 자기 자신에 이르게 되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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