길에서 만난 사람들 - 하종강이 만난 진짜 노동자
하종강 지음 / 후마니타스 / 2007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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노동 문제에 관심 있는 사람이라면 하종강이라는 이름을 한 번쯤은 들어봤을 것이다. 민주노총을 비롯한 어떤 조직에도 속해 있지 않지만, 전국 곳곳을 누비며 1년에 300회에 가까운 노동교육을 하는 사람. '집단이기주의'니 '시민에게 불편을 끼치는 파업'이니 하는 노동운동에 대한 수많은 비판에 맞서 '그래도 희망은 노동운동'이라고 역설하는 사람. 성공회대 노동대학장, <작은책> 편집위원 등의 공식적인 직책보다도 그저 '노동자의 벗'으로 기억되고 싶어하는 사람. 하종강은 그런 사람이다.

<길에서 만난 사람들>은 하종강이 2002년부터 2004년까지 <한겨레21>에 '하종강의 진짜 노동자'라는 제목으로 연재했던 글을 골라 엮은 책이다. 그는 "많은 사람들이 올라섰다가 내려선 길에 아직도 서 있는 사람들"을 만났고, 그들의 삶을 글로 썼다. 그렇게 이 책이 탄생했다.

이 길을 걷는 이유, '인간에 대한 애정'

하종강이 만난 사람들은 모두 우리 사회의 비주류에 속한 이들이다. 그들은 우리 사회에서 억압받고 소외당한 수많은 소수자, 이를 테면 노동자, 여성, 장애인, 해방공간에서 학살당한 민간인의 편에 서서 그들의 권리를 위해 싸우고 있다. 물론 요즘 같은 세상에 그렇게 산다는 것은 결코 쉬운 일이 아니다. 

청구성심병원 노동조합에서 일하던 권기한은 회사의 일상적 폭행과 협박에 시달린다. 자신을 폭행했던 간부가 오히려 자신이 폭행당했다며 1000만 원이 넘는 손해배상을 청구하고, 직원들이 슬며시 다가와 "밤에 길 가다 만나면 죽을 줄 알라"고 속삭이는 등 수시로 폭행과 협박에 시달리다가 정신과 치료를 받게 된다.

"내가 당하는 일이 너무 억울해서 잠이 오지 않더군요. 2001년 9월에 적응장애 진단을 받았어요. 열심히 다녀서 다 나았는데…. 병원에서 계속 부딪치니까 다시 또 치료를 받아야 하고…."

그런가 하면 발전노조 파업을 이끌었던 전승욱은 교도소에서 해고 통지서를 받고, 102억 원을 가압류당한다. 그럼에도 그들이 그 길에서 내려올 수 없는 것은 사회주의나 거창한 이데올로기 때문이 아니라 인간에 대한 애정 때문이다.

부산지역일반노동조합의 사무국장으로 일하는 송영수는 하종강의 오랜 후배다. 엄혹하던 1980년대에 송영수가 고문을 받다가 하종강의 이름을 대는 바람에 하종강은 말로만 듣던 통닭구이, 비녀꽂기 고문을 당한 일이 있다. 송영수는 그 후로 해고노동자복직투쟁위원회, 부산노동자연합, 민주노총 등을 거치며 노동운동에 헌신했다.

"그만두고 싶을 때마다 그 사람들 얼굴이..."

인터뷰가 끝날 즈음에 송영수는 하종강에게 아직도 이 일을 계속하는 이유가 무엇이냐고 묻는다. 하종강은 "세계관이 아직 바뀌지 않았거든"이라고 대답하지만, 송영수는 피식 웃으며 "그런 것 때문이었다면 나는 벌써 포기했을 거예요"라고 받아친다. 그리고 이렇게 대답한다.

"나는…이를테면 하 선배에 대한 미안함 때문이었어요. 그거 아세요? 나 때문에 고문당했던 사람들, 나 때문에 징역 산 사람들…. 그 사람들과의 인연이 나를 이 일에서 떠나지 못하게 한다는 것, 그만두고 싶을 때마다 그런 사람들의 얼굴이 자꾸 나를 붙드는 기라. 그동안 내가 만났던 노동자들의 얼굴이 나를 이 일에서 떠나지 못하게 자꾸 붙드는 기라."

나는 이 대목을 읽으며 <전태일평전>을 떠올렸다. <전태일평전>에는 감동적인 구절이 너무나 많지만, 그중에서도 내 머리를 떠나지 않는 이야기가 하나 있다. 어머니는 며칠째 지친 얼굴로 새벽녘에야 집에 들어온 전태일에게 어찌된 일인지 묻는다. 그때 전태일은 이렇게 대답한다.

"오다 파출소에서 자고 왔어요. 어머니가 나 집 나올 때 차비 30원을 주잖아요. 시다들이 밤잠을 제대로 못 자서 낮이면 꾸벅꾸벅 졸고, 일은 해야 하는데 점심까지 쫄쫄 굶기에 보다못해 그 돈으로 풀빵 30개를 사서 여러 사람한테 나눠주었더니 한 시간 반쯤은 견디고 일해요. 그래서 집에 올 때 걸어왔더니 오다가 시간이 늦어서 파출소에 붙잡혔어요." 

이 이야기를 읽으며 전태일의 투쟁은 무엇보다도 인간에 대한 애정에 기반을 두고 있다는 생각을 했다. 시다들이 점심을 거르며 일하는 것을 두고 볼 수 없어 풀빵을 사주고 자신은 버스비가 없어 두세 시간을 걸어 집으로 향했던 전태일이기에 평화시장의 노동자들이 겪는 고통을 차마 내버려둘 수 없었던 것이 아닐까. 그래서 종국에는 '내가 돌보지 않으면 아니 될 나약한 생명체들'을 위해 자신의 몸까지 불살랐던 것이 아닐까. 

하종강이 만난 사람들 역시 크게 다르지 않다. 그들은 사회주의가 어떻고 자본주의가 어떻고 하는 추상적인 이야기를 거의 하지 않는다. 그저 자신들과 자기 주변 사람들의 삶을 이야기할 뿐이다. 고통 받는 인간에 대한 연민과 애정이 그들을 길로 이끈 것이다.


자본주의의 반대말이 '휴머니즘'이었나

지난 8월 공군에서 작성한 '불온서적 리스트'에 이름을 올린 이 책. 하종강은 지난 11월 14일 CBS 라디오 <시사자키 정관용입니다>에서 "제 책은 노동조합 활동을 하다가 해고된 사람 등을 인터뷰한 내용인데 인터뷰 대상자 중 어느 누구도 자본주의를 부정하거나 사회주의를 강조하지는 않는다"며 "도대체 불온서적의 선정 기준을 모르겠다"고 말했다. 

그의 말처럼 이 책은 최신 불온서적 목록 중 '반자본주의' 항목에 속해 있음에도 막상 자본주의를 비판하는 내용은 거의 찾아볼 수 없다. 이 책을 관통하는 하나의 사상이 있다면 그것은 우리 사회에서 억압받고 고통당하는 사람들에 대한 '휴머니즘'이다. 

하종강은 인터뷰할 사람을 정한 기준 중 하나가 '가족이 아닌 다른 사람의 행복을 위해 자신의 손해를 감수해 본 경험이 있는 사람'이라고 말한다. 그의 말처럼 그가 만난 사람들은 경제적 손해를 감수하면서도 자신의 길을 꿋꿋이 걷는다. 하종강은 민족민주열사희생자추모(기념)단체연대회의에서 일하는 이형숙에게 활동비는 나오느냐는 질문을 던진다. 이형숙은 이렇게 대답한다.

"첫 달에 조금 받고 그 다음부터는 거의 못 받았어요. 받을 생각도 별로 없어요."

하종강은 그의 대답을 단 한마디로 평가한다.

"이런 사람이 요즘 세상에도 있다."

이런 사람들의 목록은 계속 이어진다. 그들을 위해서 뭔가 하는 것보다 그들과 같아지는 것이 더 중요하다고 생각해 스스로 도시 빈민이 됐던 시흥여성인력개발센터의 조옥화, 한 달에 60만 원을 받는다고 웃으며 말하는 노동정보화사업단의 이용근, 낮은 생활비를 받으면서도 매년 최고 연봉액을 경신하고 있다고 웃는 씩씩이어린이집의 박인해…. 모두가 경제적 이득보다 인간적 가치를 중요하게 생각하고, 우리 사회의 소외받는 이들을 위해 살고 있다.

문제는 휴머니즘 자체다. 자본주의를 부정하지 않더라도, 경제적 이득보다 중요한 가치가 있다고 주장하는 순간 이미 불온하다. 우리 사회에서는 돈이 최고의 가치이기 때문이다. 요즘 세상에 이런 사람이 있으면 안 된다. 인간에 대한 애정이라든가 고통 받는 사람에 대한 연민이 돈보다도 중요하다고 말하는 것은 '불온한' 일이다.

불온한 시대를 살아가는 올바른 '길'


다시 <전태일평전>을 보자. 전태일이 처음부터 업주에 맞서 싸우겠다고 생각했던 것은 아니다. 그는 재단사로서 재량껏 시다들에게 인간적으로 따뜻하게 대해줬을 뿐이다. 그러나 업주는 그것조차 견딜 수 없었다. 피곤해하는 시다들을 일찍 집에 보내고 그들의 일을 대신 해주는 전태일의 모습을 보며 업주는 '자꾸 그러면 시다들의 버릇이 나빠진다'고 꾸짖는다. 전태일은 시다들이 일할 만큼 자신이 대신 하면 되지 않겠냐고 말하지만, 업주는 몇 차례 그런 일이 생기자 전태일을 해고한다.

전태일은 큰 깨달음을 얻는다. 이 바닥에서는 최소한의 인정조차 허용되지 않는다는 깨달음. 그가 다른 재단사들처럼 시다들에게 잘해주지 않고 자신이 열심히 일해서 돈 벌 생각만 했다면, 업주들의 착취를 못 본 체하고 자기 생각만 했다면 해고당하지 않았을 것이다. 

그런 점에서 전태일의 시대와 우리의 시대는 크게 다르지 않다. 시다에게 인정을 베풀었다는 이유만으로 해고당했던 전태일의 시대. 책 내용이 인간적이라는 이유만으로 불온서적으로 선정되는 우리의 시대.

그래서 불온서적을 읽으며 오히려 우리 사회의 불온성을 다시 생각한다. 가장 인간적인 것이 가장 불온한 것이 되는 사회. 인간보다 돈이 더 중요한 가치로 공인되고, 자본의 논리 앞에 수많은 노동자가 부당하게 정리해고당하는 사회. 309일 동안 고공 크레인에서 농성을 벌이고, 다섯 번의 희망버스가 떠나고, 국회 권고안이 나온 뒤에야 간신히 정리해고가 철회되는 사회.

이 불온한 사회에서 어떻게 살아가는 것이 올바르게 사는 길일까. 그 해답을 알고 싶다면 우리 시대의 불온서적 <길에서 만난 사람들>을 읽어보길 권한다. 이 짧은 글에는 담을 수 없었던 수많은 사람들의 사연이 해답을 알려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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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정희의 맨얼굴 - 8인의 학자, 박정희 경제 신화 화장을 지우다
유종일 엮음 / 시사IN북 / 2011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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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79년 10월 26일 저녁, 궁정동 안가에는 총성이 울려 퍼졌다. 박정희 대통령과 차지철 경호실장이 환락에 빠져 있던 그때, 김재규 중앙정보부장이 민주주의 회복을 위해 야수의 심정으로 '유신의 심장' 박정희를 쏜 것이다.

18년에 걸친 박정희 군부독재정권은 그렇게 끝났지만, 박정희의 영향력은 아직도 건재하다. 많은 사람이 박정희를 역대 대통령 중 가장 훌륭한 대통령으로 꼽고, 박정희의 딸은 대권을 노리고 있다. 747공약으로 대표되는 이명박 정부의 성장지상주의 경제정책에서도 박정희의 그림자를 느낄 수 있다.

박정희에 대한 긍정적인 평가의 중심에는 한강의 기적으로 불리는 박정희의 경제 신화가 놓여 있다. 박정희가 독재는 했지만, 경제성장은 이뤘다는 것이다. 박정희를 옹호하는 이들은 민주주의도 다 먹고 살만할 때나 가능한 것이라며 박정희가 아니었으면 우리가 지금 이렇게 풍족하게 살 수 있겠냐고 주장한다. 

오늘날에도 굳건한 박정희의 경제 신화를 반박하기 위해 8인의 경제학자가 뭉쳐 한 권의 책을 냈다. 민주당 경제민주화특별위원회를 이끄는 유종일, 노무현 대통령 정책특별보좌관을 맡았던 이정우, 경제개혁연대 소장으로 재벌개혁에 앞장서온 김상조를 비롯한 8인의 학자는 <박정희의 맨얼굴>에서 박정희 시대의 경제정책을 꼼꼼히 살피며 박정희의 경제 신화에 도전한다. 

박정희 시대의 거시경제와 재벌 중심 체제

유종일(1장)은 총론에 해당하는 1장에서 박정희 시대의 경제성장이 예외적인 것이 아니었음을 밝힌다. 대만, 홍콩, 싱가포르 등 아시아의 신흥공업국도 비슷한 시기에 고도성장을 이룩했으며, 여기에는 수출 지향적 성장에 유리했던 세계시장의 여건, 경제발전을 위한 초기 조건을 잘 갖추고 있던 점, 역사적으로 축적된 사회문화적 역량 등 박정희 개인의 역량과는 무관한 여러 가지 요인이 복합적으로 작용했다는 것이다. 반면에 박정희 시대는 여러 부정적인 유산을 남겼다. 유종일은 우리 사회의 심각한 양극화 구조 저변에 재벌 중심 성장과 적대적 노사관계가 자리 잡고 있으며, 이는 곧 박정희 시대의 유산이라고 주장한다. 

이정우(2장)는 박정희 시대의 경제성장이 지가와 물가를 폭등하면서 추진됐고, 후대에 큰 부담을 안겼다고 주장한다. 특히 눈여겨볼 부분은 지가 상승과 관련한 통계다. 1953년에서 2007년까지 54년 동안 한국의 지가 총액은 1만 배 넘게 폭등했는데, 이정우는 전체 상승 중 절반 이상(50.5%)은 박정희 정권의 책임이라 분석한다. 또한, 비싼 땅값은 세계 최고의 공장부지 가격, 주택난, 노조의 과도한 임금인상 요구 등으로 이어져 한국 경제에 큰 해악을 끼쳤다고 비판한다. 

박헌주(3장)는 박정희 시대의 경제를 '왜곡된 통제경제체제'라 부르는데, 이는 구체적으로 재벌 중심 체제를 의미한다. 박정희 정권은 군사 통치에 대한 선호와 거대 사적 자본에 대한 혐오, 빠른 성장을 달성해야 할 필요성 때문에 일본의 메이지 근대화를 의식적으로 모방했으며, 그 결과 재벌 중심 체제가 등장했다. 박헌주는 왜곡된 통제경제체제가 상명하달식 권위주의, 편중화된 지원, 성장만능주의, 전투적인 성장 속도 등의 부작용을 낳았으며, 이를 극복하기 위해 이제라도 인간 중심적 발전에 관심을 기울여야 한다는 말로 3장을 끝맺는다.

김상조(4장)는 박정희 시대 금융과 재벌의 관계를 살핀다. 그는 박정희 정권이 민간기업의 자금 조달 및 운용 과정에 직접적으로 개입․통제함으로써 관치금융을 초래했고, 이를 바탕으로 성장한 재벌이 1980년대를 거치며 독점자본으로서의 지배력을 확립했다고 주장한다. 김상조는 독점자본으로 성장한 재벌이 국민경제를 통제하면서부터 적하효과(trickle-down effect)가 많이 감소했을 뿐만 아니라, 정부 정책의 왜곡을 가져와 외환위기라는 비극을 불러왔다고 분석한다.

박섭(5장)은 수출산업 육성과 중화학공업화 등 박정희 정권의 산업정책을 다룬다. 박섭은 다른 연구자와는 달리 여러 가지 문제점에도 박정희 정권이 경제성장을 이룩한 이유에 초점을 맞추고 있다. 그는 그 이유를 세 가지로 정리한다. 박정희 정권은 전략과 정책을 상황에 맞게 바꿨고, 국민소득 증대를 위해 노력했으며, 외환위기의 조짐에도 기민하게 대응했다는 것이다. 그러나 1970년대 말의 한국 사회는 공업화, 도시화, 지식의 증가 등으로 말미암아 1960년대 초와는 판이했고, 박정희식 성장은 계속될 수 없었다. 강조점이 다를 뿐, 박정희식 성장이 지속불가능하다는 점에는 박섭 역시 동의하고 있다. 

성장의 그늘

윤진호(6장)은 박정희 시대의 노동정책과 노동운동을 조망한다. 박정희 정권은 값싼 노동력을 유지하기 위해 경제기획원의 임금 가이드라인 제시와 이에 따른 공기업의 임금인상 상한선 발표 등 인위적인 임금억제정책을 사용했고, 법률과 정부행정기관을 이용해 노동운동을 통제했다. 그러나 이 과정에서 농민들이 도시로 이주하면서 임금노동자가 크게 증가했고, 질적으로도 노동계급이 성장했다. 윤진호는 박정희 정권이 억압적 노동정책을 유지한 결과 양적․질적으로 성장하는 노동운동과 충돌할 수밖에 없었고, 이는 정권의 붕괴를 가져오는 요인이 됐다고 평가한다. 

조석곤(7장)은 한국경제가 '압축성장'한 시기에 한국 농업은 '압축쇠퇴'했다고 주장한다. 양적인 측면에서 농업도 성장하긴 했지만 농업 부문의 성장세는 상대적으로 낮은 것이었으며, 그에 따라 농업 부문이 전체 산업에서 차지하는 비중은 급속하게 줄어들었다. 조석곤은 박정희 정권이 초기에는 농어촌 고리대사업을 실시하는 등 중농주의적 모습을 보였지만, 농업구조 개선방안 마련 실패와 외향적 성장전략의 선택에 따라 농업의 성장을 통한 국민경제의 균형성장을 포기하게 됐으며, 그 결과 한국농업은 '압축쇠퇴'를 경험하게 됐다는 결론을 내린다. 

신동면(8장)은 박정희 정권의 사회복지정책을 살핀다. 신동면은 오늘날 한국의 사회보장제도가 보장 수준이 낮고, 사각지대가 광범위하게 존재하며, 국가의 재정 부담을 최소화한 원인을 박정희 정권에서 추진되었던 잔여적․선별적 사회보장체계에서 찾는다. 박근혜 의원은 "아버지의 궁극적 꿈은 복지국가의 건설이었다"고 말했지만, 박정희 정권에서 복지국가는 말 그대로 '꿈'에 그쳤고, 사회복지정책은 경제정책에 종속되어 '복지 없는 성장'을 가져왔다는 것이다. 

다른 성장은 가능했을까

이 책은 박정희 시대에 경제가 고도성장했다는 점은 부정하지 않는다. 다만, 당시의 경제성장이 재벌 중심 체제, 적대적 노사관계, 사회 양극화 등 오늘날까지 이어지는 구조적인 문제를 낳았고, 지속 불가능한 것이었다는 점을 밝히는 데 주력하고 있다.  

이 책을 읽는 내내 머리를 떠나지 않는 의문이 하나 있었다. 박정희식 경제 성장에 여러 문제점이 있지만, 당시에 다른 방식의 성장이 가능했을까? 경제 성장의 혜택을 모두가 누리면서 빈곤에서 벗어난 신흥공업국이 있었던가? 장하준은 노동자·농민을 억압하지 않고 경제를 발전시키는 데 성공한 나라는 없었다고 말한다. 오늘날 선진국이라는 미국·영국 등도 모두 그런 과정을 거쳐 경제 성장을 이룩했고, 민주주의를 우리보다 더 혹독하게 억압하면서 경제성장도 이루지 못한 제3세계 국가도 많다. 그런 생각을 하면 박정희의 경제 성장을 부정적으로만 볼 수 있는지 회의가 든다. 

이 책의 저자들은 장하준을 비롯한 발전국가론자들을 비판하지만, 아직까지는 발전국가론의 손을 들어주고 싶다. 박정희의 경제 정책에 여러 가지 문제가 있었지만, 다른 방식의 경제 성장이 얼마나 가능성 있었는지는 의문이다. 그래서 이종태의 말에 고개를 끄덕이게 된다.

그러니까 '박정희 개발 독재를 어떻게 볼 것인가.'의 결론은 대충 이렇게 정리되겠군요.
 '박정희라는 인물이 꼭 필요했는지는 모르겠다. 독재의 불가피성에 대해서도 인정하기는 어렵다. 그러나 경제 개발이 필요했던 것만은 분명하다. 그것도 박정희의 경제 개발과 같은 적극적이고 목표 지향적인 방식의 경제 개발이. 그 과정에서의 착취와 저임금 구조는 피할 수만 있다면 피했으면 좋겠지만 역사적으로 볼 때 가능한지 모르겠다.'

이런 이야기를 들을 때마다 생각하게 됩니다. 경제학은 정말 우울한 학문 같다고…

-<쾌도난마 한국경제> 70p~71p

<박정희의 맨얼굴>을 읽고도 박정희식 경제 성장이 분명히 잘못된 것이라는 확신은 들지 않는다. 오히려 토머스 칼라일이 말한 '우울한 학문'이라는 별명이 경제학과 너무나 어울린다는 생각만 든다.

다음에는 박정희식 경제 성장 외에도 다른 성장은 가능했음을, 누구도 소외당하지 않고 모두가 성장의 과실을 함께 누리는 성장도 가능했음을 입증하는 책을 읽고 싶다. 그래서 가벼운 마음으로 박정희의 경제 성장은 과장일 뿐이라고 말할 수 있기를 바란다.…우울하지 않은 경제학은 과연 가능할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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친일파는 살아있다 - 자유.민주의 탈을 쓴 대한민국 보수의 친일 역정
정운현 지음 / 책으로보는세상(책보세) / 2011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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절판


정운현은 고 임종국 선생의 뒤를 잇는 친일파 연구가다. 임종국 선생이 친일파 연구를 개척했다면, 정운현은 친일파 연구에 폭과 깊이를 더한 인물이다. 

정운현은 1980년대 말부터 친일 문제에 관심을 두고 추적해 <친일파> <창씨개명> <나는 황국신민이로소이다> <증언 반민특위> <반민특위 재판기록> 등 10여 권의 관련 저서를 냈고, 그 인연으로 친일반민족행위진상규명위원회에서 3년 가량 사무처장을 지내기도 했다.

20여 년간 친일 문제에 매달린 그가 또 한 권의 친일 문제 관련 서적을 냈다. <친일파는 살아 있다>(책보세 펴냄)가 그것이다. 이 책은 우리 사회에 깊이 뿌리내린 친일파의 실체를 집요하게 드러내며 친일청산의 필요성을 다시 한 번 일깨운다. 

70년대 말까지 친일파에게 장악당한 권력 상층부


1945년 8월 15일, 해방과 함께 친일 청산을 요구하는 목소리도 높아졌다. 일본 제국주의의 식민통치를 도와 우리 민족에 해를 끼친 친일파를 처벌해야 한다는 국민적 열망이 드높았지만, 미 군정이 친일파를 대거 기용하면서 친일 청산은 물 건너갔다. 해방된 조국에서 친일파는 다시 살아남아 권력을 잡았다. 
정운현은 고 임종국 선생의 뒤를 잇는 친일파 연구가다. 임종국 선생이 친일파 연구를 개척했다면, 정운현은 친일파 연구에 폭과 깊이를 더한 인물이다. 

정운현은 1980년대 말부터 친일 문제에 관심을 두고 추적해 <친일파> <창씨개명> <나는 황국신민이로소이다> <증언 반민특위> <반민특위 재판기록> 등 10여 권의 관련 저서를 냈고, 그 인연으로 친일반민족행위진상규명위원회에서 3년 가량 사무처장을 지내기도 했다.

20여 년간 친일 문제에 매달린 그가 또 한 권의 친일 문제 관련 서적을 냈다. <친일파는 살아 있다>(책보세 펴냄)가 그것이다. 이 책은 우리 사회에 깊이 뿌리내린 친일파의 실체를 집요하게 드러내며 친일청산의 필요성을 다시 한 번 일깨운다. 

70년대 말까지 친일파에게 장악당한 권력 상층부


친일파 연구가 임종국의 조사에 따르면, 제1공화국은 각료의 34.5퍼센트, 제2공화국은 각료의 60퍼센트가 친일 전력자였던 것으로 나타났다. 이런 현상은 박정희가 집권한 제3공화국에서도 비슷한 추세를 보였다. 역대 대통령 가운데 친일 전력자로는 박정희·최규하, 총리 가운데는 장면을 비롯해 백두진·정일권·진의종·김정렬 등이며, 각료급은 이루 다 말할 수 없을 정도로 많다. 입법부나 사법부 역시 마찬가지다. 다시 말해 적어도 해방 이후부터 70년대 말까지 대한민국 권력의 상층부는 친일파들이 장악하고 있었다는 얘기다. - <친일파는 살아 있다> 5~6p

권력을 장악한 친일파는 친일 청산 등의 역사 청산을 막은 것은 물론 그 외에도 여러 가지 해악을 끼쳤다. 그 가운데 하나가 군사독재 정권까지 이어진 고문이다. 일본 제국주의는 식민통치의 유지를 위해 독립운동을 탄압했고, 그 과정에서 독립운동가를 고문했다. 유관순 열사는 고문 후유증으로 순국했고, 심산 김창숙은 모진 고문 끝에 두 다리가 마비돼 평생 앉은뱅이로 살았다. 일경의 고문은 그야말로 가혹했다.

두 엄지손가락을 앞뒤로 묶어 천장에 달아맨 다음 거의 다 죽어가는 사람을 뉘어놓고 콧구멍에 양잿물을 쏟는 것이었으며, 혹은 두 손가락 사이에 막대기를 끼운 다음 손가락 끝을 비끌어 매어 좌우로 훑어 내려가 피부가 멍들고 근육이 떨어져나가게 했다.…때때로 의복을 벗겨놓고 철판 마루에 알몸뚱이로 굴리면서 구두 신은 흙발로 사람을 축구공 차듯 하기도 했다. 석탄불에 달군 철봉으로 뼈가 울리게 난타하는 고문은 사람을 생죽음으로 모는 매질이었다. - <야만시대의 기록> 2, 1911년 소위 '105인 사건'에 연루돼 조사를 받은 곽임대의 증언

일제치하에서 독립투사를 고문했던 이들이 군사독재 정권하에서는 민주투사들을 고문했다. 4대 중앙정보부장을 지냈던 김형욱은 중앙정보부 직업수사관들을 이렇게 회고한다.

이들 직업수사관들의 전직은 사찰계 형사, 방첩부대 문관, 헌병 하사관, 심지어 일제치하에서 설치던 조선인 헌병과 밀정 등 형형색색이었다. 그중 어떤 사람은 일제치하에서는 일본 순사로서 독립운동가들을 때려잡다가 자유당치하에서는 야당으로 때려잡다가 한때 공산당이 서울을 점령했던 시절에는 우익 민주인사를 때려잡다가 나중에는 공산당 간첩을 때려잡은 <천의 얼굴>을 가진 사나이도 있었다. - <혁명과 우상> 1,  235p

김형욱은 이들을 '사회의 어두운 그늘 아래서 번성하는 독버섯'에 비유한다. 이런 독버섯을 키운 그늘은 아마도 독재와 친일의 그늘이리라. 권력의 상층부를 장악한 친일파와 그 그늘에서 자라나 민주투사를 고문하고 마침내 박종철 열사를 죽음으로 내몬 하층부의 친일파를 보며 친일파의 뿌리가 얼마나 깊은지, 친일잔재가 얼마나 한국현대사를 왜곡한 건지 새삼 느낀다. 

민주투사 고문하며 독재 정권 유지한, 제2친일파

친일청산에 반대하는 몇 가지 논리가 있다. 그 가운데 하나가 '망각론'이다. 이미 지난 일이고, 당사자들도 다 죽고 없으니 묻어버리자는 이야기다. 그러나 친일파 문제는 단순히 과거의 일로 치부할 일이 아니다. 지금도 여전히 진행 중인 문제다. 생물학적 의미의 친일파는 대개 세상을 떠났지만, 아직도 그들을 옹호하는 친일파의 후예들이 우리 사회 곳곳에 남아 있기 때문이다. 

"일본의 한국에 대한 식민지 지배는 오히려 매우 다행스런 일이며, 원망하기보다는 오히려 축복해야 하며 일본인에게 감사해야 할 것"이라는 한승조 전 고려대 교수나 "(일제) 통치 조직에 조선인들이 충원되었다는 것이 조선인들에게 해로웠다는 주장도 성립되지 않는다. 그것은 자치와 독립을 위한 첫걸음이었다"라는 소설가 복거일, '식민지근대화론'을 주장하는 안병직·이영훈 등의 뉴라이트 진영의 학자들이 바로 그런 자들이다. 

친일파를 두둔하는 것은 일부 지식인들만의 문제가 아니다. 뉴라이트 진영은 이명박 정권 이후 세력을 급속도로 확장했으며, 위험한 징후들이 감지된다.

정운현이 이 책을 쓴 직접적 계기는 KBS가 6월에 방영한 '백선엽 특집 방송'이었다. 간도특설대로 독립군을 진압했던 백선엽의 친일 경력에 대한 설명은 "이후 만주군관학교에 입학 일본군 장교가 된다. 이 전력으로 그는 친일인명사전에 등재됐다"는 10초도 안 되는 언급이 전부였고, '백선엽 특집 방송'은 백선엽을 전쟁영웅으로 미화하는 데 힘썼다. 공영방송의 이러한 작태를 보면 친일파를 두둔하는 세력, 제2의 친일파의 힘이 만만치 않다는 생각이 든다. 

안타깝게도 친일파 찬양 방송은 이것으로 끝이 아닐 것 같다. <동아일보>의 종합편성채널 '채널A'는 50부작 드라마 '인간 박정희'를 계획하고 있는데, 뚜껑을 열어봐야 알 일이지만 박정희의 공과를 균형 있게 다룰 가능성은 희박하다고 본다. 박정희의 친일 행각을 어떻게 다룰지 두 눈을 부릅뜨고 지켜볼 일이다.

그래서 친일 문제는 이대로 묻어버릴 수 있는 일이 아니다. 해방된 조국에서 권력을 잡은 친일파는 일제강점기부터 고문기술을 연마한 '고문기술자'를 활용해 민주투사를 고문하며 독재 정권을 유지했고, 민주화 이후에도 친일파를 옹호하는 제2의 친일파들이 활개치고 다닌다. '뼛속까지 친미·친일'인 대통령부터 시작해서 뉴라이트 진영의 인사들까지 친일파의 후예들이 한국 사회에 얼마나 깊게 뿌리내리고 있는지는 짐작할 만하다. 

정운현의 말처럼 '친일파는 살아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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투명성의 시대 - 위키리크스가 불러온 혁명
미카 시프리 지음, 이진원 옮김 / 샘터사 / 2011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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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는 정부를 공개한다(We open governments)."
 

지난해 세상을 뜨겁게 달궜던 위키리크스가 내건 구호다. 위키리크스는 자신들의 구호처럼 미국을 포함한 각국 정부의 굵직굵직한 치부를 거침없이 폭로하며 엄청난 파장을 가져왔다. '케이블 게이트'로 명명된 미 국무부 외교문서 폭로는 그 정점이었다.

 

각국 정부는 위키리크스를 비판하고 나섰지만, 다른 한편에서는 위키리크스를 옹호하는 시위가 벌어졌다. 위키리크스의 폭로는 알 권리와 국가 안보, 표현의 자유 등을 둘러싼 논란을 불러일으켰고, 논란은 현재 진행형이다.

 

미국의 정치 운동가인 미카 시프리는 위키리크스의 활동을 보며 이제 '투명성의 시대'가 도래했다고 주장한다. 우리는 인류 역사상 어느 때보다도 정보를 자유로이 유통할 수 있는 네트워크를 구축했고, 이러한 네트워크를 통해 권력 기관들의 활동을 투명하게 감시할 수 있게 됐다는 것이다. 저자는 <투명성의 시대>를 통해 위키리크스를 비롯한 전 세계의 투명성 운동을 살펴보고 투명성 운동의 장래를 탐색한다. 

 

위키리크스를 위한 변명

 

저자는 「저자의 말」에서 '이 책은 위키리크스를 주제로 한 논문이 아니다'라고 밝히고 있지만, 많은 독자가 가장 관심 있게 읽는 대목은 위키리크스와 관련한 대목일 것이다. <투명성의 시대> 속의 위키리크스에 대한 비판과 반론을 간략하게 정리해본다.

 

위키리크스의 미 국무부 외교문서 폭로 후, 미국 정부 관계자들은 위키리크스와 그 설립자 줄리안 어산지에 대한 증오와 분노를 노골적으로 드러냈다. 깅그리치 전 하원 의장은 "어산지는 적군으로 간주해야 하고, 위키리크스는 영구히 단호히 폐쇄되어야 마땅하다"라고 말했다.

 

민주당 정치 컨설턴트인 밥 벡켈은 "어산지는 반역자다. 난 사형 제도를 찬성하지는 않는다. 따라서 그를 죽이는 방법은 하나밖에 없다. 불법적으로 이 개xx를 총으로 쏴 죽이는 것이다"라는 말을 서슴지 않았다. 힐러리 클린턴 국무장관은 어산지가 "국가들 사이의 평화로운 관계를 고의적으로 파괴하고 있다"라고 주장하면서 그의 폭로는 "미국을 겨냥한 공격이자 동시에 국제 사회에 대한 공격"이라고 선언했다.

 

그러나 정부에 적대적이지 않은 사람 중에도 이와 반대되는 주장을 펴는 이들이 있었다. 국무부는 위키리크스의 폭로 때문에 목숨을 잃은 사람은 없다고 공식 인정했다. 국무부 대변인 P.J. 크로울리는 2011년 1월 11일 '정치학과 미디어' 세미나에서 가진 한 연설에서 "위키리크스의 설립자는 그들의 폭로 때문에 생명을 잃은 사람이 없다고 주장했다. 우리가 알고 있는 한 그의 주장은 사실이나 그것이 폭로문건이 미치는 영향의 유일한 측정 기준은 아니다"라고 말했다.

 

전 국방장관이자 힐러리 클린턴의 절친한 정치 협력자인 로버트 게이츠는 위키리크스에 대한 비판이 과장된 것이라 지적한다.

 

지금 위키리크스가 폭로한 문건들이 우리의 외교 정책에 미치는 영향을 '멜트다운'이나 '판도 변화' 등으로 묘사되는 걸 들었다. 나는 그러한 묘사는 정말로 심각할 정도로 과장된 걱정이라고 생각한다.

 

하버드 법대 교수이자 후버 연구소의 국가보안법 대책 위원회 위원인 잭 골드스미스 역시 위키리크스에 대한 공격을 이해할 수 없다고 말한다. 

 

"<오바마의 전쟁>에서 저자 밥 우드워드는 분명히 오바마 정부의 많은 고위 관리들로부터 도움을 받아서 일급 비밀 프로그램, 암호명, 문건, 회의 등에 대한 많은 세부 내용을 폭로했다. 나는 고위 관리들이 공개적으로 비밀 분류 구정을 어기고, 아무 권한도 없이 일급비밀 정보를 기회주의적으로 누설하는 상황에서, 정부가 위키리크스를 직접 겨냥해 내뿜고 있는 분노를 이해하느라 애먹고 있다."

물론 이 정도로 위키리크스에 대한 논란을 마무리할 수는 없을 것이다. 그러나 위키리크스에 대한 공격이 지나치게 과장된 것이라는 점은 분명하다고 본다. 위키리크스에 대한 공격은 마치 무상급식이나 반값등록금을 하면 나라가 망할 것이라는 주장과 비슷한 수준의 것이며, 위키리크스가 가져다준 이득을 계산하지 않는다는 점에서 대단히 편향적이다. 

 

기업의 투명성이 필요한 이유

 

저자는 위키리크스뿐만 아니라 크로아티아의 폴리티카, 케냐의 엠잘렌도, 인도의 아이페이드어브라이브, 위키크라임스 등 세계의 다양한 투명성 운동을 소개하고 있다. 위키리크스에 대한 책은 이미 여러 권 나왔지만, <투명성의 시대>가 이러한 책들과 구별되는 지점이 바로 그곳이다.

 

한 가지 아쉬운 점은 이 책이 주로 정부의 투명성에만 초점을 맞추고 있다는 것이다. 저자는 6장 전체를 정부의 투명성 논의에 할애하고 있고, 이 책이 다루는 대부분의 투명성 운동은 정부의 활동을 감시하기 위한 운동이다. 그러나 오늘날 국경을 뛰어넘는 다국적 기업은 정부 못지않은 권력을 휘두르고 있으며, 기업의 투명성은 정부의 투명성에 뒤지지 않는 중요성을 갖고 있다. 미국 7대 기업 중 하나로 평가받았으나 회계상의 문제가 드러나면서 파산한 엔론 등 기업의 투명성과 관련된 사례에 지면을 할애했으면 하는 아쉬움이 남는다. 

 

이 책에 기업의 투명성과도 관련된 흥미로운 사례가 하나 있기는 하다. 월가 구제금융과 관련한 투명성 운동이다. 2008년 9월 29일 미국 하원이 구제금융법 내용을 게재했을 때, 사람들은 법안 내용에 엄청난 관심을 보였다. 하원 수석행정관이 "우리는 2004년에 9.11 사태 최종 보고서가 게재된 이후 이와 같은 관심을 본 적이 없었다"라고 말했을 정도다.

 

사람들은 법안 내용을 놓고 토론했다. 어떤 블로거들은 법안에서 과도한 선심성 내용을 찾아냈고, 또 다른 블로거들은 법안에 찬성한 의원들에게 선거 자금을 댄 사람들이 누군지 분석한 후 월가의 기부금이 표에 영향을 줬다는 주장을 내놓았다. 이러한 관심은 연방준비제도이사회가 은행 위기 도중 구제금융 받은 곳을 구체적으로 밝히게 하는 새로운 법안을 채택하게 했다. <월스트리트저널>은 사설을 통해 연준리의 새로운 투명성을 칭찬했다.

 

예를 들어 우리는 월가 은행들이 은행이나 연준리가 당초 광고했던 것보다 수십 억 달러의 지원금을 더 받았다는 사실을 알게 되었다. 골드만삭스는 프라이머리 딜러 대출 프로그램을 85차례나 이용해서 약 6000억 달러를 받아냈다. 워싱턴에서조차 그것은 아직까지 엄청난 액수의 돈이다. 모건스탠리는 2008년 3월부터 똑같은 초단기 대출 프로그램을 통해 212차례에 걸쳐 자금 지원을 받았다. 이러한 뉴스는 두 은행 중 누구도 연준리의 돈이 없어도 금융위기를 극복할 수 있었을 것이라는 주장을 불가능하게 만든다.

 

나는 여기서 최근 전 세계 1,500여 개 도시로 확산한 '월스트리트 점령(Occupy WallStreet)' 운동을 떠올린다. '월스트리트 점령' 운동은 금융자본의 탐욕을 비판하는데, 2008년의 투명성 운동과 같은 운동이 진작부터 활발하게 일어나 연준리와 월가 금융자본의 활동을 감시했다면 사태는 조금 다른 국면으로 진행됐을지 모른다. 기업을 대상으로 한 투명성 운동이 필요한 이유다.

 

더 많은 투명성을!

 

투명성 운동이 중요한 이유는 정부와 기업, 혹은 그 외의 어떤 조직이 저지르는 비리와 부패를 교정할 수 있기 때문이다. 미카 시프리의 말처럼 "권력을 가진 사람들이 그들이 하는 일이 언젠가는 유출 내지는 노출될 수 있다는 걸 알고 있다면 그들의 행동은 더 좋은 방향으로 바뀔 수 있다"

 

투명성 운동은 또한 비대칭적 권력관계에 대한 도전이다. 지금은 권력자들만 소유하고 있는 정보를 시민의 품으로 가져오는 정보 민주화 운동이고, 시민이 정보를 바탕으로 권력자들의 행동을 일부 통제할 수 있다는 점에서 시민에게 권력을 이양하는 운동이다. 저자는 여기서 한 발 더 나아간다.

 

"그것은 또한 선출된 대표들과 정부 기관들이 문제 해결에 함께할 네트워크들을 찾아내는 과정에서 시민과 협력하는 새로운 종류의 참여적·협력적 정부를 만드는 기틀이 될 수 있다."

 

그래서 투명성 운동은 곧 민주화 운동이다. 베일 뒤에 가려진 권력자들의 탐욕과 부패를 밝히는 것은 시민이 공적 생활의 주인이 되는 것과 절대 무관하지 않다. 숨겨진 문제를 드러내고 그것을 해결하는 과정에서 우리는 방관자에서 깨어 있는 시민으로 변해간다. 지금 우리에게 필요한 것은 더 많은 투명성 운동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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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화의 역사 - 전화로 읽는 한국 문화사 인사 갈마들 총서
강준만 지음 / 인물과사상사 / 2009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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얼마 전 길을 걸으며 친구에게 문자를 보내다가 휴대전화 대리점을 지나쳤다. 판촉 활동에 전념하던 직원은 지나가던 내게 "요즘에도 버튼 눌러서 문자 보내세요? 스마트폰으로 바꾸시면 버튼 누르실 필요 없어요. 정말 편해요"라고 말했다. 

순간 웃기기도 하고 약간 화가 나기도 해서 '내가 더러워서 스마트폰으로 바꾼다'고 생각했지만, 다시 생각하니 화낼 일은 아니었다. 기분은 나쁘지만, 그 직원의 말이 틀린 말은 아니기 때문이다.

국내 스마트폰 사용자는 이미 1700만 명을 넘어섰고, 지금도 빠르게 늘고 있다. 당장 내 주변을 봐도 스마트폰을 사용하지 않는 사람이 별로 없다. 오랜만에 만난 친구는 왜 아직도 스마트폰을 쓰지 않느냐고 타박하고, 카카오톡으로 보낸 단체문자를 나 혼자 못 받은 적도 있다. 스마트폰을 쓰지 않는 나 같은 사람은 조만간 원시인 취급을 받을지도 모른다.

전화는 이렇게 깊숙이 우리 생활 속에 들어와 있다. 집 전화로는 부족해서 휴대전화를 사용하는 것은 기본이고, 이제 어떤 휴대전화를 쓰는지에 신경 써야 한다. 남들에게 당당하게 보여줄 수 있는 최신 기종이 아니라면 꺼낼 때도 눈치를 봐야 한다. 그러나 한국에서 전화가 걸어온 길은 결코 순탄하지 않았다. <전화의 역사>(인물과사상사)는 전화가 우리나라에 처음 들어온 이후 오늘날에 이르기까지의 파란만장한 역사를 기록한 책이다.

전화의 도입과 일제강점기의 전화

전화가 우리나라에 들어온 것은 1890년대 후반의 일이다. 고종은 정부 각 부처를 연결하는 전화를 설치해 정사를 돌보는 데 이용했지만, 전화에 대한 대중의 인식은 부정적이었다. 사람들은 "하늘의 전기바람은 비구름을 말리고 땅의 '덕률풍(당시에는 전화를 덕률풍이라 불렀다)은 땅위의 물을 말린다"며 가뭄을 전신과 전화 탓으로 돌렸다.

일제강점기의 전화는 일본의 식민통치와 떼놓고 설명할 수 없다. 전화의 혜택을 누린 것은 주로 일본인이었고, 3․1운동 후에는 전화가 독립운동을 감시하는 수단으로 활용됐다. 전화교환양과의 통화가 일본어로 이뤄진 것도 전화와 식민통치의 연관성을 보여준다. 윤상길은 이와 관련해 이렇게 기록하고 있다.

"일본어가 국어의 지위를 가지고 공공기관의 공식언어로 사용되던 일제시기, 일본어에 익숙하지 못한 조선민들에게 (상대통화자와 연결하는 중간 교환과정에서) 일본어를 써야만 했던 전화는 소통을 위한 미디어라기보다는 식민지배자의 모습으로 다가갔다."
- <한국의 미디어 사회문화사> 146~147p

전화는 '식민지배자의 모습'을 띠고 있었지만, 대중은 예전만큼 전화를 부정적으로 보지 않았다.

"전화는 점점 권위와 신용의 상징이 되어갔다. <동아일보> 1920년 6월 11일자에 따르면, 이제 상점간판에 전화번호가 적혀있어야 신용이 있어 보이게 되었다. 전화가 없으면 사람들은 '전화 하나 없는 상점이 무엇이 변변하겠느냐'며 냉소를 보냈다는 것이다."
-<전화의 역사> 70p

그 시기의 전화는 대중매체가 아니었다. 1941년에야 전국의 전화기 대수가 7만 대를 돌파했다. 그나마도 패전을 앞둔 일본이 통신시설 공출운동을 펴면서 일반인의 전화 사용은 거의 억제됐다. 전화는 마지막까지 일본 식민통치의 도구로 이용됐다.

독재정권 시절의 전화: 특권의 상징

해방된 조국에서도 전화는 오랫동안 특권의 상징이었다. 1955년께 전국의 전화대수가 3만 2000대에 불과할 정도로 귀한 물건이었기에 대중은 전화를 신기하게 여겼다.

"1950년대 중반에도 서민들에게 전화는 여전히 신기한 물건이었다. 1955년 겨울 광문출판사에 취직한 이호철은 출판사에 있는 다이얼전화를 보고 '9나 0 같은 뒤편 숫자는 때르르르릉 거리며 한참씩 돌아가곤 했다. 그러나 그야말로 '촌놈'인 나는, 그것 하나하나가 여간 신통방통하지가 않았다. 이런 전화를 마음대로 쓸 수 있는 이런 큰 회사에 몸담고 있다는 것부터가 조금 우쭐해지는 느낌이기까지 했던 것이다'고 회고했다."
-<전화의 역사> 116p

전화가 본격적으로 대중화된 것은 1980년대의 일이다. 1985년 전국의 전화대수가 700만 대를 돌파했고, 1987년 9월에는 1000만 회선을 돌파함으로써 '1가구 1전화시대'에 접어들었다. 전화의 대중화는 민주화와 맞물린다.

"중심도 없고 서열도 없는 전화 커뮤니케이션은 그 본질이 민주적인 바, 전국에 걸쳐 이루어진 그런 소통의 기운은 민주화 열망으로 분출됐다. 1가구 1전화시대가 대통령직선제를 쟁취해낸 1987년 6월 민주항쟁과 같이 도래한 것은 결코 우연이 아니었다."
-<전화의 역사> 186p

저자 강준만은 전화가 대중화한 요인으로 군사주의와 핵가족화를 꼽는다. 아파트 대단지가 제공하는 군사주의적 효율성이 통신 인프라 구축에 큰 도움이 됐고, 핵가족화가 가속하는 가운데도 대가족제의 관습이 남아 있어 전화로 안부를 전해야 하기에 전화의 수요가 늘어났다는 것이다.

1990대~현재: 휴대전화의 시대

1가구 1전화 시대 뒤에는 휴대전화의 시대가 왔다. 1984년 국내에서 휴대전화가 처음 선보였지만, 이용자는 소수였다. 휴대전화가 대중화하기 시작한 것은 1990년대 후반. 1997년 휴대전화 가입자가 500만 명을 넘어선 후 1998년 6월 1000만 명, 1999년 8월 2000만 명, 2002년 3월 3000만 명을 돌파했다.

휴대전화는 우리의 생활양식을 뒤바꿨다. 사람들은 수업 중 쉬는 시간이나 대중교통을 타고 이동할 때처럼 잠깐만 짬이 나면 휴대전화를 붙잡고 게임을 하거나 문자를 보낸다. 학생들이 휴대전화에 중독되는 현상이 심해지면서 2007년에는 대전 시내 149개 중·고교교장들이 '학교에 휴대전화 안 가져오기 결의대회'까지 열었다.

휴대전화가 부정적인 역할만 하지는 않았다. 촛불집회 때는 '연대의 미디어'로 톡톡히 제 몫을 했다. 2008년 5월 25일 자 <한겨레>에 실린 <새로운 10대가 왔다: 문자와 인터넷으로 실시간 소통 '사회에 댓글'>기사는 휴대전화가 촛불집회에서 중요한 역할을 했음을 보여준다.

"10대는 빨랐다. 한 손엔 촛불을, 다른 한 손엔 휴대전화를 들었다. 촛불집회현장을 실시간으로 카페사람들에게 전달했고, 이는 카페게시판을 통해 다른 회원들에게 공유됐다. 엄지손가락으로 문자를 쓰는 속도는, 기자들의 노트북 자판속도보다 더 빨랐다."

2008년 12월 우리나라의 휴대전화 가입자는 총 4561만 명으로 전체인구의 93.8%가 휴대전화를 가지고 있는 것으로 드러났다. 이제 휴대전화가 없는 사람이 이상할 정도지만, 전화의 진화는 여기서 그치지 않았다. 스마트폰이 등장한 것이다.

<전화의 역사>는 스마트폰의 등장만을 다루고 있지만, 스마트폰은 그 이후로 눈부시게 발전하고 있다. 스마트폰 가입자는 2010년 10월 500만을 넘었고, 다양한 애플리케이션에 힘입어 빠른 속도로 가입자가 늘고 있는 것이 지금 진행 중인 전화의 역사다.

휴대전화는 소통의 도구일 뿐

강준만은 '맺는말'에서 휴대전화를 한국의 '신흥종교'로 규정한다. '신흥종교'가 급성장한 이유를 ①'고독으로부터의 탈출' 욕구 ②'스트레스로부터의 탈출' 욕구 ③공사(公私) 구분 없는 '뫼비우스효과' ④인맥사회에서의 생존술, ⑤초강력 1극 구조 사회에 대한 저항 ⑥타인의 인정을 바라는 '구별짓기' 문화 ⑦휴대전화 산업의 정치경제학 등 일곱 가지로 정리하고, '신흥종교'를 적당히 믿자는 말로 마무리한다.

전화의 본질은 누가 뭐라 해도 소통이다. 휴대전화에 아무리 게임이 많이 있어도, 스마트폰이 아무리 다양한 애플리케이션을 가지고 있어도, 그것은 부가적인 기능일 뿐이다. 늘어난 휴대전화만큼 소통을 더 잘하게 됐는지, 해도 그만 안 해도 그만인 부질없는 공허한 말들만 쏟아내고 있는 것은 아닌지 한 번쯤 돌이켜 볼 때다.

나아가 인간의 편리를 위해 만든 기계에 종속되고 있는 것은 아닌지 성찰할 필요가 있다. 잠깐이라도 휴대전화와 떨어져 있으면 불안한 우리는 이미 휴대전화의 노예가 된 건지도 모른다. 휴대전화가 없다고 소통할 수 없는 것은 아니다. 휴대전화가 없을 때도 사람들은 얼굴을 마주 보며 소통했다. 휴대전화는 소통을 위한 도구 중 하나일 뿐이고, 이제라도 신앙의 대상으로 승격된 휴대전화를 원래 자리에 되돌려 놓아야 할 때다.

그나저나 휴대전화를 바꿀 때가 되긴 했는데, 무슨 스마트폰으로 바꿔야 하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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