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재난을 묻다 - 반복된 참사 꺼내온 기억, 대한민국 재난연대기
416세월호참사 작가기록단 지음 / 서해문집 / 2017년 4월
평점 :
'진실은 규명되지 않았고, 대한민국의 안전은 달라진 게 없다.'
세월호 참사 3주년을 앞두고 <경향신문>과 정세균 국회의장실 의뢰로 한국갤럽이 조사해 내놓은 '세월호에 대한 국민 의견 조사' 결과다. 이 조사에서 세월호 참사 후 대한민국의 안전이 얼마나 개선됐느냐는 질문에 전체 응답자의 71.3%가 '변화 없다'고 답했다. '악화된 편' 8.3%, '매우 악화된 편' 6.6% 등 오히려 나빠졌다고 한 사람도 14.9%였다(<경향신문>, 국민 "세월호 이후 안전, 변한 게 없다").
수많은 사람이 세월호 참사 진상규명과 안전사회 건설을 위해 3년 동안 싸웠지만, 아직까지 한국사회는 여전히 안전한 사회가 아니라고 느끼는 사람이 훨씬 많다는 뜻이다.
돌이켜보면 이런 상황은 낯설지 않다. 대형참사가 일어날 때마다 '인재', '안전불감증'이란 비판이 잇따르지만, 그 후에도 비슷한 참사가 되풀이되고, 또다시 사람들이 죽어 나간다. 국립재난안전연구원에 따르면 1964년부터 2013년까지 10인 이상 사망한 '대형재난'이 276건에 달했다.
"도대체 이 수많은 참사가 되풀이되고 있는 이유는 무엇인가."(5쪽) <금요일엔 돌아오렴>, <다시 봄이 올 거예요>를 쓴 416세월호참사 작가기록단은 이 질문의 답을 얻기 위해 세월호 참사 이전에 발생한 일곱 개의 재난을 추적했다. <재난을 묻다>는 그 결실이다.
안전관리 방치한 정부, 이윤에 눈먼 기업... 무책임이 낳은 참사
나는 이 책을 읽는 내내 '책임'이란 단어를 떠올렸다. 비슷한 참사가 되풀이된 이유를 한마디로 표현하면 '책임지지 않아서'다. 책임에는 두 가지 뜻이 있다. 하나는 "맡아서 해야 할 임무나 의무"란 뜻이고, 다른 하나는 "어떤 일에 관련되어 그 결과에 대하여 지는 의무나 부담. 또는 그 결과로 받는 제재"라는 뜻이다.
정부를 비롯한 참사의 책임자들은 "맡아서 해야 할 임무나 의무"를 다하지 않았고, "어떤 일에 관련되어 그 결과에 대하여 지는 의무나 부담. 또는 그 결과로 받는 제재"는 회피했다. 이 책에는 그런 무책임의 사례가 수도 없이 나온다.
1970년 '남영호 침몰사고' 당시 일본 해상보안청이 침몰한 남영호를 발견하고 한국 해경에 수차례 긴급사태 발생을 타전했지만, 해경은 두 차례 무전을 수신하고도 답신을 보내지 않았다. 교통부와 내무부는 참사의 책임을 면하기 위해 누가 '돼지'(세금을 내지 않기 위해 승객명부에서 누락시킨 승객을 지칭하는 은어-기자말)를 태웠나를 두고 설전을 벌였다.
남영호 침몰사고 책임자들은 사고 이후에도 승승장구했다. 백선엽 교통부 장관은 한국종합화학 사장, 한국경제인연합회 이사 등을 맡았다. 박경원 내무부 장관은 1971년 내각개편으로 물러났다 다시 내무부장관, 교통부장관, 국회의원 등을 역임했다. 선주 일가도 10여 년 전부터 가세가 기울긴 했지만, 참사 이후 30년이 넘도록 지역 유지로 떵떵거리며 살았다.
이뿐만이 아니다. 침몰사고 책임자들은 때론 책임 회피를 위해 문제를 제기하는 유가족들을 '불순분자'로 몰고, 입을 막으려 했다.
"21일 정부가 수색을 중단하고 선체 인양조차 포기할 기미를 보이자 분노한 유족은 부산 해운국과 파출소로 몰려갔다. 한밤의 난투극은 긴급 출동한 경찰들에게 유족들이 전원 연행되면서 끝이 났다. 경찰은 사이비 유족의 개입을 조사하겠다고 밝혔다. 비탄이 시체장사로, 불순폭력 세력으로, 사이비로 매도되는 익숙한 광경이 50년 전 그날에도 펼쳐졌던 것이다." - <재난을 묻다> 43쪽
2011년 춘천봉사활동 산사태참사 때는 춘천시가 산림청의 산사태 위험경보를 지역 주민들에게 제대로 알리지 않았고, 대피도 시키지 않았다. 방치된 방공포 진지에 텃밭까지 일궈 산사태 피해가 더 커졌는데, 춘천시와 군부대는 방공포 진지 관리 문제에 대해 서로 책임을 떠넘기려 했다. 군부대는 현장을 관리할 책임이 춘천시에 있다고 주장했지만, 춘천시는 국정감사에서 '방공포 진지를 방치한 것은 국방부 소관이지 시장이 그것까지 뒤처리하지 않는다'고 했다.
무책임의 주체는 정부만이 아니다. 비용 절감을 위한 안전을 도외시한 기업도 정부 못지않은, 어쩌면 정부보다 더 큰 책임을 져야 할 주범이다.
국내 지하철은 도입단가가 5억~6억에 불과했는데 이는 수출하는 전동차(10억~15억)의 절반 수준이고, 안전관리기준이 높은 홍콩지하철(18억~20억)과 비교하면 ¼ ~⅓ 수준이었다. 저렴한 가격으로 도입한 대구지하철은 화재에 몹시 취약할 뿐만 아니라 화재 시 유독물질을 뿜어내는 소재로 가득해 피해가 더 커졌다.
저자들은 "다른 나라들이 수많은 사람들의 생명과 직결된 대중교통의 안전을 가장 우선적 원칙으로 둔 반면, 우리나라는 비용절감을 위해 이를 우선순위에서 뒤로 미룰 수 있는 것으로 본 것이다"(110쪽)라고 지적한다.
2013년 발생한 태안 해병대캠프 참사도 비용절감을 위한 다단계 하청 구조 속에서 탄생했다.
"허술한 캠프 운영과 안전불감증은 하청에 하청으로 이어지는 먹이사슬에서 기인했음이 드러났다. 학교가 캠프 계약을 체결한 곳은 안면도 유스호스텔 운영자 (주)한영T&Y이었지만 (주)한영T&Y는 (주)케이코오롱트래블에, (주)케이코오롱트래블은 다시 해병대 코리아 측에 훈련을 하청했다. 비용절감이란 목적하에 안전과 전문성은 후순위로 밀렸다." - <재난을 묻다> 247~248쪽.
결국 이윤에 눈먼 기업, 안전관리를 충실히 하지 않은 정부. 이들이 수없이 되풀이되는 참사의 주범이었던 셈이다.
지진 대피한 학생 체벌한 학교... 우리 모두가 '정치적 책임' 져야
하지만 여기서 끝내기엔 뭔가 찜찜함이 남는다. 이제까지 반복된 참사는 몇몇 나쁜 기업과 정부 잘못이고, 우리는 아무 책임이 없다고 안심해도 될 문제일까?
정치철학자 아이리스 영은 구조적인 문제 때문에 발생하는 사회적 불의, 즉 '구조적 부정의'에 대해서는 사회 구성원들이 정치적 책임을 져야 한다고 주장한다.
"우리가 속한 제도가 부정의나 범죄를 저지르는 것을 보거나 혹은 그런 범죄가 저질러지고 있다고 믿는다면, 우리는 다른 이들을 동원해 그 제도에 반대해야 하고 반대 의사를 드러내야 할 정치적 책임을 진다. 그리고 제도를 변화시켜 더 나은 결말을 이끌어 낼 수 있도록 함께 행동해야 할 정치적 책임을 진다." - <정치적 책임에 관하여> 166쪽
아이리스 영의 주장 대로라면 수많은 재난을 낳은 '구조적 부정의'를 목격한 우리에게도 그것을 바로잡을 정치적 책임이 있는 셈이다.
나는 이 책에 나온 여러 재난 가운데 대구지하철 화재참사 대목을 가장 인상 깊게 읽었다. 나는 대구에서 태어나 19년을 살았고, 대구지하철 화재참사가 일어난 2003년에도 대구에 있는 고등학교에 다녔다. 당연히 TV와 신문에서 대구지하철 화재참사에 대한 기사도 봤다. 그런데도 이 책을 읽으며 새로 안 사실이 많다.
나는 상인동 가스폭발참사가 지하철 건설 과정에서 발생했다는 사실을 몰랐고, 역시 지하철 건설 과정에서 발생한 신남네거리 공사장 붕괴사고는 존재조차 몰랐다. 이원준 대구지하철노동조합 당시 위원장이 참사 당시 안전 문제를 요구하며 파업을 벌이다 임금 등 노동조건과 관계없는 사안으로 파업을 벌였다는 이유로 불법파업으로 몰려 형사처벌을 받았다는 사실도 몰랐다.
물론 이런저런 핑계를 댈 수는 있다. 내가 살던 동네에는 지하철이 다니지 않아 참사 이전에 지하철 안전 문제를 생각해 본 적이 없었고, 주변 사람 가운데 참사로 죽거나 다친 사람도 없었다. 상인동 가스폭발참사나 신남네거리 공사장 붕괴사고도 모두 내가 사는 동네와는 떨어진 곳에서 발생했다.
하지만 그 어떤 핑계를 댄다 해도 나는 지나치게 무관심했던 것 아닐까. 당장 내 주변에서 벌어지는 일이 아니라고 해서 누군가 죽어가는 데 무관심해도 되는 걸까. 나는 '구조적 부정의'를 목격하면서도 마음 속으로는 '나와 관계없는 일'이라고 생각하며 마땅히 져야 할 정치적 책임을 회피했던 게 아닐까. 이 책을 읽으며 그런 의문이 머릿속을 맴돌았다.
때로 우리는 단지 무관심했던 것을 넘어 '구조적 부정의'를 낳은 공범이었다. 태안해병대캠프 참사에서 살아남은 자람(가명)씨는 참사의 진짜 원인이 한국사회에 만연한 복종 문화라고 지적한다. 목 밑까지 물이 차오르고 '위험하다'는 생각이 들었지만, 교관이 시키는 대로 바다로 더 깊숙이 발을 내디뎠다.
친구들이 실종된 상황에서도 '빨리 친구를 찾아내라'고 교관에게 따질 생각은 못 하고 그저 시키는 대로 기다리고 있었다. 자람씨는 참사 당시 그날 자신의 모습을 떠올리며 "우리가 교관들한테 복종하는 관계라서 아무것도 못한 것 같아요"라고 회상했다.
문제는 해병대캠프뿐만 아니라 한국사회 곳곳에서 억압과 복종이 만연해있다는 사실이다. 2016년 9월 경주에서 지진이 발생했을 때 교사들은 학생들에게 "학교에서 죽나 거리에서 죽나 똑같으니 여기 있어라", "동요하지 말고 공부나 해라", "수능이 66일 남았는데 지진이 무슨 대수냐", "무단외출 시 벌점 부과하겠다"며 학교에서 계속 야간학습을 시켰다.
어떤 학교는 놀라서 교실에서 뛰쳐나온 학생들에게 체벌을 가했고, 압수해둔 휴대전화를 돌려주지 않아 학생들이 가족과 지인의 안부를 확인할 기회마저 가로막은 학교도 있었다. 운 좋게도 참사가 발생하지 않았다는 점을 제외하면 이 학교들이 앞서 살펴본 참사 책임자들보다 나은 점이 뭘까.
아우슈비츠 생존작가인 프리모 레비는 "괴물들은 존재한다. 그러나 실질적인 위협이 되기에는 그들의 수가 너무 적다. 가장 위험한 것은 보통 사람들이다"라고 말했다. 안전에 관심이 없었던 것은 기업과 정부뿐만 아니라 우리 모두였을지도 모른다. 우리의 무관심과 은밀한 공조 속에 참사를 낳는 사회구조는 오늘날까지 굳건히 존재하고 있다.
일본의 데리다 연구자 다카하시 데쓰야는 책임을 '응답가능성'으로 번역한다. 모든 인간관계의 기초에는 말을 통한 호소와 응답의 관계가 있고, 호소를 들으면 응답할지 말지를 결정하는 응답가능성으로서의 '책임' 안에 놓이게 된다는 것이다. 영어로도 책임(responsibility)은 응답한다(respond to)는 뜻이 있다. 그래서 다카하시 데쓰야는 "인간은 원래 타자의 호소에 응답할 수 있는 존재이고, 응답가능성으로서의 책임 안에 있는 존재"라고 말한다(<일본의 전후책임을 묻는다> 52~55쪽).
그렇다면 재난 피해자들의 호소-이 끔찍한 참사에서 구해달라는 외침, 자신들이 겪었던 고통과 비애를 부르짖는 절규, 다시는 이런 일이 되풀이되지 않도록 진상을 규명하고 안전사회를 함께 만들자는 탄원에 '응답'해야 하는 사람은 정부공직자나 기업 임원만은 아닐 것이다. 재난 피해자들의 호소를 들은 사람이라면 누구나 그 말에 '응답'해야 할 '책임'에서 자유롭지 못할 것이다.
나는 그런 생각을 하며 <재난을 묻다> 마지막 장을 덮고, 재난피해자들의 호소에 '응답'하는 서평을 쓰기 위해 컴퓨터 전원을 켰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