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감정 독재 ㅣ 세상을 꿰뚫는 50가지 이론 1
강준만 지음 / 인물과사상사 / 2013년 12월
평점 :
절판
인간이 합리적 존재라는 믿음은 뿌리가 깊고, 견고하다. 이를테면 주류경제학이 전형적 인간상으로 상정한 ‘호모 이코노미쿠스’의 핵심 요소는 합리성이다. 한정된 자원으로 욕망을 최대한 충족하기 위해서는 합리적으로 사고해 주어진 자원을 효율적으로 사용하는 능력이 필수적이기 때문이다.
하지만 행동경제학이 등장하면서 인간의 합리성에 대한 믿음이 흔들리기 시작했다. 미국의 행동경제학자 댄 애리얼리는 “경제학은 종교”라고 선언한다. 경제학이 가정하듯 사람들이 이성적으로 행동하며 자신에게 가장 이익이 되도록 행동한다는 증거가 없다는 것이다.
언론학자 강준만도 인간을 비합리적 존재로 본다. “많은 경우 이성은 감정의 ‘졸卒’이거나 ‘호위 무사’ 수준에 지나지 않는다”는 것이다. 그는 인터넷과 SNS로 대변되는 커뮤니케이션 혁명의 결과, 감정의 영향력이 더욱 커져 우리는 마침내 ‘감정 독재’ 체제 하에 살게 됐다고 주장한다. <감정 독재>는 50가지의 심리학 이론을 빌려 ‘감정 독재’ 체제가 어떤 식으로 작동하는지를 탐구한 책이다.
‘노력 정당화 효과’와 ‘기본적 귀인 오류’
강준만은 다양한 사례를 통해 사람들이 어떤 방식으로 생각하는지를 보여준다. 해병대 출신의 엄청난 자부심에서 ‘노력 정당화 효과’를 읽고, 자신의 지각과 타인의 지각에 다른 잣대를 들이미는 현실을 통해 ‘기본적 귀인 오류’를 설명하는 식이다.
‘귀신 잡는 해병대’라는 해병대 특유의 자부심은 그들이 받은 혹독한 훈련에서 비롯된다. 높은 지원율을 뚫고 합격해 엄청난 기합과 지옥 훈련을 겪은 이들은 ‘해병대’라는 이름에 큰 가치를 부여한다. 자신이 큰 고생을 했거나 엄청난 노력을 쏟아 부은 일을 더 가치 있는 것으로 평가하는 ‘노력 정당화 효과’가 발생하는 것이다. 강준만은 사회적으로 큰 성공을 거둔 사람들이 감정 노동자들에게 폭력이나 폭언을 하는 것도 ‘노력 정당화 효과’로 해석한다. ‘내가 어떻게 해서 여기까지 왔는데…’란 생각이 그들을 탐욕과 오만의 포로로 만들었다는 것이다.
내가 지각할 때는 “길이 막혀서 늦었어”라고 하며 지각의 원인을 외부 상황 탓으로 돌리지만, 타인이 지각하면 “늦장을 부리다가 늦었을 거야”라고 생각하며 지각의 원인을 당사자에게 돌리는 것은 ‘기본적 귀인 오류’다. 사람은 자신이 처한 상황적 제약은 잘 알기 때문에 내 문제는 ‘세상 탓’을 한다. 하지만 타인이 처한 상황은 잘 모르기 때문에 타인의 문제에는 ‘사람 탓’을 하는 경향이 있다.
‘기본적 귀인 오류’가 자주 나타나는 미국 사회에서는 범죄 사건이 발생했을 때, 그 원인을 사회 구조적 문제보다는 범죄자 개인의 정신적 문제에서 찾으려 한다. 강준만은 이상복 <중앙일보> 기자의 말을 빌려 “이런 식으로 책임을 개인에게 돌리면 일시적 공포는 피할 수 있지만, 책임을 사회에 묻지 않으니 같은 사건이 재연되기 마련이다”라고 말한다.
<감정 독재>는 이처럼 구체적 사례를 통해 인간이 얼마나 비합리적인 판단을 하는지, 그런 판단들이 어떤 부정적 결과를 낳는지를 생생하게 보여준다.
‘감정 독재’인가, ‘제한된 합리성’인가
강준만이 <감정 독재>에서 소개하는 다양한 이론과 사례는 흥미롭고, 인간의 심리를 이해하는 데도 유용하다. 하지만 그의 논의가 인간의 비합리성을 보여주는 데 지나치게 치우쳤다는 느낌을 지울 수 없다.
강준만의 문제의식은 ‘사람들이 왜 이렇게 어리석은 행동을 하는가?’에 맞춰져 있다. 누군가 잘못된 의사결정을 한 상황을 설정하고 그가 왜 그런 판단을 했는지 심리학 이론으로 설명하는 방식이다. 오류를 저지른 상황에서 시작하니 그가 설명하는 여러 효과 역시 인간의 비합리성을 드러내는 것으로 보일 수밖에 없다. 하지만 ‘제한된 합리성’의 관점에서 보면 그가 소개한 여러 심리학 이론이 인간의 비합리성을 증명하는 게 아닐 수도 있다.
행동경제학 탄생에 큰 영향을 끼친 미국의 심리학자 허버트 사이먼은 ‘제한된 합리성’이란 개념을 통해 인간의 의사결정을 분석한다. 지식의 불완전성, 예측의 어려움, 행동 가능성의 현실적 범위 등 여러 가지 제약 때문에 인간은 완전한 합리성을 추구할 수 없고, ‘제한된 합리성’에 따라 의사결정을 한다는 것이다.
일례로 체스에는 10120개의 결과가 나올 수 있는데, 이를 모두 분석하고 자신의 차례마다 최선의 수를 두는 것은 불가능하다. 그렇다면 항상 최선의 수를 두려고 하기보다는 상대방을 이길 수 있는 수 중 하나를 고르는 게 오히려 합리적일 수 있다. 상대방을 이길 수만 있다면 굳이 가장 효율적인 방식으로 이길 필요는 없는 것이다.
이처럼 인간은 복잡한 실제 상황을 다루기 위해 ‘단순화된 모델’을 구축한다. 이것이 주류경제학에서 말하는 완전한 합리성은 아니지만, 그렇다고 해서 비합리적이라고 단언할 수는 없다. 가끔 오류가 있지만 가격 대 성능비가 탁월한 ‘단순화된 모델’을 사용하는 것이야말로 합리적인 선택이라고도 볼 수 있다.
‘단순화된 모델’의 합리성
이 책이 다루는 50가지 심리학 이론도 가격 대 성능비가 좋은 ‘단순화된 모델’일 수 있다. 예를 들어 강준만은 ‘노력 정당화 효과’의 부정적인 면을 강조하지만, 가치 있는 것은 그만큼 노력해야만 얻을 수 있는 게 현실일 수도 있다. 부와 명예, 화목한 가정 등 세상의 가치 있는 것 중 노력 없이 얻을 수 있는 게 얼마나 있을까. 그렇게 보면 ‘노력 정당화 효과’는 무엇이 가치 있는지를 판단하는 데 유용한 ‘단순화된 모델’일지도 모른다.
그가 말한 ‘기본적 귀인 오류’ 역시 반드시 ‘단순화된 모델’일 가능성이 있다. 어떤 사건의 책임이 실제로 사람에게 있을 때가 많다면, 부족한 정보로 책임 소재를 판단해야 하는 상황에서 사람 탓을 하는 것은 합리적인 선택이다. 사실 강준만이 든 지각 사례만 해도 지각한 사람을 탓하는 것이 반드시 비합리적이라고는 할 수 없다. 내 경험에 비춰볼 때, 지각도 하던 사람이 한다. 수년간 만나면서 한 번도 지각하지 않은 사람이 있는가 하면, 유난히 자주 지각하는 사람도 있다. 지각하는 사람과 지각 안 하는 사람의 분류는 시간이 지나도 크게 바뀌지 않는다. 오래 만날수록 처음 했던 분류가 들어맞는다고 느낄 때가 많다. 남의 지각에 ‘사람 탓’하는 것은 가끔 오류는 있겠지만, 대체로 합리적인 판단일 수 있다.
이런 점을 고려하면 특정 상황에서 오류를 낳는다는 이유만으로 그것을 낳는 심리적 메커니즘 자체가 비합리적이라고 주장하기는 힘들다. ‘노력 정당화 효과’나 ‘기본적 귀인’, 그리고 그가 소개한 다양한 심리학 이론이 얼마나 잘 들어맞는지는 따져봐야 할 문제지만, 도를 지나치지만 않으면 합리적인 사고방식일 수 있다.
인간의 의사 결정은 ‘감정 독재’라는 말로 설명할 수 있을 만큼 단순하지 않다. ‘제한된 합리성’의 관점에서 본다면 “많은 경우 이성은 감정의 ‘졸卒’이거나 ‘호위 무사’ 수준에 지나지 않는다”는 강준만의 말과 달리 ‘감정 독재’로 보이는 상황에서조차 감정은 이성의 ‘졸卒’이거나 ‘호위 무사’일지도 모른다. 그렇다면 인간의 의사 결정을 ‘감정 독재’로 설명하려든 그의 판단도 일종의 오류 아닐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