텔레비전에 대하여 동문선 현대신서 9
피에르 부르디외 지음, 현택수 옮김 / 동문선 / 1998년 11월
평점 :
구판절판


19943월 이탈리아 총선에서는 정치에 입문한 지 1년밖에 안 되는 정치신인이 총리가 되는 이변이 발생했다. 그의 이름은 베를루스코니. 텔레비전 방송국, 신문사, 출판사 등 전방위 매체를 거느린 매체 재벌이었던 베를루스코니는 자신이 거느린 언론사를 동원해 선거전을 펼쳤고, 마침내 자신이 속한 우익연합의 승리를 이끌었다. 19943월의 이탈리아 총선은 텔레크라시telecracy), 즉 텔레비전(television)에 의한 지배(cracy)라는 말이 크게 유행하는 계기가 됐다.


베를루스코니의 사례에서 볼 수 있듯 현대사회에서 텔레비전은 엄청난 영향력이 있다. 그렇다면 텔레비전이 가진 이 영향력은 긍정적인 방향으로 발휘되고 있는가? 프랑스의 사회학자 피에르 부르디외는 단호히 아니라고 말한다. 그는 <텔레비전에 대하여>에서 텔레비전이 정치적 삶과 민주주의에 큰 위험을 준다고 선언하며 텔레비전이 민주주의를 어떤 식으로 위협하는지를 설명한다.


시장에 종속된 텔레비전

 

부르디외는 저널리즘, 특히 텔레비전이 점점 더 시장의 요구에 종속되고 있다고 말한다. 시장의 요구가 구체적인 수치로 표현된 것이 바로 시청률이다. 텔레비전은 높은 시청률을 위해 사람들이 정말 알아야 할 중요한 사실보다는 사람들의 흥미를 끌기 쉬운 선정적인 사건사고를 전달하려 한다.

 

세상에 무슨 일이 일어나든지, 텔레비전 뉴스의 시작에 프랑스 축구대회의 결과나 갑자기 편성된 다른 스포츠 사건, 혹은 정치행위의 가장 일화적이고 의례적인 면(외국 국가원수의 방문, 혹은 자국 대통령의 해외순방)을 다루는 일이 점점 더 잦아졌습니다. 그리고 텔레비전이 그 어떤 특별한 지식이나, 특히 정치적 능력을 요구하지 않는 자연재해사건화재 등 단순한 호기심을 불러일으킬 만한 것들을 즐겨 다룬다는 것은 두말할 나위도 없습니다.”-<텔레비전에 대하여> 88

 

하지만 텔레비전이 이처럼 선정적인 사건사고에만 몰두하는 것은 사람들을 탈정치화하는 결과를 낳는다.

 

사건사고는 정치공백화 현상을 만들고, 사회적 삶을 탈정치화시키며, 일화나 소문(스타나 왕족의 삶은 국내적 혹은 세계적인 사건이 됨)으로 축소시켜 버립니다. 말하자면 텔레비전 뉴스는 정치적 영향이 없는 사건들에 한하여 주의를 끌면서 교훈을 얻고자이것들을 극화시키거나, 혹은 사회 문제들로 전환시킵니다.”-<텔레비전에 대하여> 88

 

획일화된 뉴스

 

그렇다고 해도 시청률 경쟁에 뭔가 긍정적인 면도 있지 않을까. 이를테면 경쟁 속에서 창조적이고 개성적인 뉴스가 탄생할 수도 있지 않을까. 부르디외는 이에 대해서도 마찬가지로 단호히 아니라고 말한다.


기자들은 서로 속보를 찾기 위해 경쟁하지만, 주요 텔레비전 방송국의 뉴스들은 서로 비슷하다. 다른 텔레비전 뉴스가 다뤘기 때문에 우리도 그것을 다뤄야 하고, 우리가 먼저 다루면 다른 텔레비전 뉴스도 우리를 따라서 다룬다. 그래서 결국은 모두가 똑같아진다.

 

기자들은 무엇인가를 먼저 보고 보이게 하기 위하여, 거의 아무 짓이나 할 준비가 되어 있습니다. 그리고 경쟁자들보다 항상 앞에 있거나 그들을 앞지르기 위하여, 혹은 그들과 달리하기 위하여 기자들은 서로 베낍니다. 그리하여 결국 모두 똑같아집니다. 다른 분야에서는 배타성의 추구가 창조성독자성을 낳는데, 언론에서는 획일화와 평범화를 가져옵니다.”-<텔레비전에 대하여> 33

 

결국 시청률 경쟁은 텔레비전 뉴스가 선정적인 사건사고에만 매달리게 함으로써 사람들을 탈정치화하고, 뉴스의 획일화를 가져온다. 이는 정치적 삶과 민주주의를 위협하는 결과를 낳는다는 것이 부르디외의 주장이다.

 

시청률은 민주주의가 아니다

 

어떤 이들은 시청률이야말로 민주적이라고 말한다. 다수결의 논리에 따라 사람들이 많이 보는 뉴스를 방영하는 것이 민주적이란 것이다.


하지만 민주주의는 단순히 수의 논리에 따라 판가름나지 않는다. 미국의 정치학자 잭 도널리는 사회가 다수의 뜻에 따라 소수를 학대하는 일이 발생하지 않도록 때론 다수의 의사에 반해서라도 소수의 권리를 보장해야 한다고 말한다. 다수결과 소수의 권리가 적절하게 조화를 이루는 게 민주주의라는 말이다.


그런 점에서 시청률은 민주적이지 않다. 시청률의 논리는 철저하게 다수결에만 의존한다. 사람들이 적게 보는 프로그램은 광고가 안 붙고, 돈이 안 된다는 이유로 폐지당한다. 선정적이고 상업적이지 않는 뉴스 역시 그것을 원하는 사람들이 있음에도 돈이 안 된다는 이유로 제작되지 않는다. 시청률의 논리 앞에서 소수의 권리는 무시당하기 일쑤다. 그래서 부르디외는 민주주의의 미명으로 포장된 시청률과 대항하여 싸워야 한다고 주장한다.


부르디외는 시청률을 향해서만 목소리를 높이지만, 사실 이는 시청률뿐만 아니라 일반적인 시장 논리에까지 확대 적용할 수 있다. 시장논리는 소수의 권리를 철저하게 무시하고, 획일성을 조장한다는 점에서 근본적으로 비민주적이다. 동네상점이 없어진 곳을 메운 프랜차이즈 상점들은 우리의 입맛과 취향을 동질화하고 있다. 이처럼 시장 논리가 지배하는 곳에는 소수의 권리나 다양성이 설 곳이 없다. 시청률에 대항한 싸움이 시장에 대항한 싸움으로까지 확장되어야 하는 이유다.

 

날카로운 문제의식, 아쉬운 결론

 

시청률에 대항해 싸워야 한다는 부르디외의 지적은 날카로울뿐더러 세계적으로 텔레크라시(telecracy)의 문제가 대두하는 현대사회에도 시사하는 바가 크다. 그럼에도 정작 시청률에 어떻게 맞서 싸워야 할지에 대한 대답은 만족스럽지 않다.


부르디외가 대안으로 제시하는 것은 교육이다. 19세기 프랑스 공화국의 창시자들이 교육의 목표를 좋은 시민이 되기 위하여 법을 이해하고 자신의 권리를 이해하며 주장하고 노동조합 등을 만들 줄 알도록 필요한 수단을 갖추게 하는 것에 뒀듯 오늘날 텔레비전 뉴스의 생산자들은 교사노조협회 등과 연대해 텔레비전의 수용 수준을 높이기 위한 교육을 받도록 투쟁해야 한다는 것이다.


그러나 이는 텔레비전이 미치는 해악의 심각성에 비하면 한가롭다는 생각이 들 정도로 막연하다. 비유하자면 중병에 걸린 환자에게 약은 안 주고 그저 밥 잘 먹고, 푹 쉬고, 체력관리 잘하라고 충고하는 것과 비슷하다. 시청자 교육이 필요한 건 사실이지만, 교육을 통해 시청자 수준이 높아지는 데는 꽤 오랜 시간이 걸릴 것이고, 그 사이에도 텔레비전은 끊임없이 시청자를 탈정치화하며 민주주의를 위협할 것인데 이 책에는 그동안 무엇을 할지에 대한 대답은 빠져있다.


또한, 이 책은 텔레비전을 종속시킨 시장의 한 축인 광고주에 대해서도 침묵한다. 시청자의 수준이 높아지면 자연스레 광고주도 시청자들이 많이 보는 프로그램에 광고를 많이 할 것이고, 그렇다면 문제가 해결될 거라고 생각하는지도 모르지만, 그렇게 되기까지는 역시나 시간이 꽤 오래 걸릴 것이란 점을 고려하면 광고주를 어떻게 규제할 것인지에 대한 고민도 필요해 보인다.


결론의 부족함을 채우는 일은 결국 우리의 몫이다. ‘민주주의의 미명으로 포장된 시청률과 대항하여 싸워야 한다는 부르디외의 고민은 우리의 고민이 돼야 한다. 시청률, 나아가 시장논리에 맞서기 위해 우리는 무엇을 해야 하고, 무엇을 할 수 있는가. 이 책이 던지는 묵직한 질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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