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 조각의 진실 - 30년 NHK 기자 천학범의 한국 현대사 증언 역사와 이슈 2
구영식.천학범 지음 / 책으로보는세상(책보세) / 2013년 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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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록되지 않은 역사는 역사가 아니다"라는 말이 있다. 인류가 탄생한 순간부터 오늘날에 이르기까지 세상 곳곳에서 수많은 일이 일어나지만, 그 많은 사실 중에서 기록된 것만이 역사로 남는다는 의미다. 기록은 어떤 사건을 때로는 역사로, 때로는 비(非)역사로 결정할 수 있는 힘을 가진 셈이다.

특히 현대사를 둘러싼 논쟁이 계속되는 한국사회에서 역사적 기록의 의미는 각별하다. 박근혜 정부의 출범에 따라 박정희 시대를 둘러싼 역사논쟁이 재점화될 것으로 예상되는 현 시점에서는 더욱 그렇다. 새로운 기록은 잊힌 박정희 시대의 그림자를 드러내거나 혹은 빛을 밝혀냄으로써 역사논쟁의 새 국면을 열어젖힐 수 있기 때문이다.  

때마침 한국현대사의 이면을 담은 귀중한 기록이 하나 나왔다. 30여 년을 NHK 기자로 활동한 천학범의 증언을 담은 <한 조각의 진실>이 그것이다. 

"박정희도 18년 집권했는데 왜 우리가 못하냐"

천학범은 국내 언론보다 상대적으로 자유로웠던 외신기자의 신분을 이용해 정치권의 막후를 들여다본다. 이 책이 전하는 군사독재정권 시기의 분위기는 자못 살벌하다. 정권의 탄압을 가장 자주, 직접적으로 받았던 것은 김대중과 김영삼으로 대표되는 야당 정치인들이었다. 

박정희 시대에는 김대중과 김영삼이 제일 탄압을 많이 받아 연금을 당하던 시기이기도 했다. 다만 외신 기자들과 각국 대사들에게는 이들의 자택 출입이 허용됐다. 나는 두 사람과 아주 친한 편이었다. 김영삼은 중정(중앙정보부-기자주) 등에서 잡아간다고 협박하면 나에게 전화를 걸어 집으로 오라고 했다. 외신 기자가 집에 있으면 잡아갈 수 없었기 때문이다. - <한 조각의 진실> 48~49p 

여당 정치인 또한 정권의 탄압으로부터 자유로울 수는 없었다. 박정희 전 대통령이 1969년 3선 개헌을 추진했을 때의 일이다. 김종필을 비롯한 공화당 의원 30여 명이 3선 개헌에 반대했지만, 김종필은 강압에 못 이겨 3선 개헌 지지로 돌아선다.

수도경비사령관 윤필용이 김종필에게 가서 권총을 들이대고 3선 개헌 지지를 강요했다. 김종필이 자기 생명이 위험하다는 것을 알고 결국 찬성으로 돌아섰다. - <한 조각의 진실> 90p

거물급 정치인들이 잡혀가지 않기 위해 일개 외신기자의 힘을 빌리고, 정권의 뜻에 반대했다는 이유로 생명의 위협까지 느꼈다는 두 에피소드는 박정희 시대가 어떤 시대였는지를 새삼 생각하게 한다. 

전두환 정권의 권력욕을 드러내는 에피소드도 흥미롭다. 전두환 전 대통령이 12·12사태로 실권을 장악했을 무렵 천학범 기자가 보안사 정치과장과 만나 "정치는 정치인에게 맡겨라"고 충고하자 그는 이렇게 대답한다. 

"박정희가 18년 통치했는데 왜 우리가 못하냐? 우리가 박정희보다 더 젊다. 육사 출신으로 지식도 있고 능력도 갖추었다. 그런데 왜 우리가 못하냐? 우리도 영구 집권할 수 있다."

결과적으로는 실패했지만, 전두환 정권이 영구집권을 획책했음을 짐작할 수 있는 대목이다. 

"모든 게 박정희의 지시나 승인 하에 이루어졌다"

재미있는 에피소드가 많지만, 그 중에서도 가장 흥미로운 대목은 1973년 발생한 'DJ 납치 사건'을 다룬 부분이다. 일국의 거물급 정치인을 외국에서 납치한 전대미문의 사건을 두고 천학범은 '박정희 전 대통령이 사건을 미리 알고 있었고, 이를 지시 내지는 승인했다'고 주장한다. 이를 뒷받침하는 근거는 크게 두 가지다. 첫째는 중앙정보부 판단기획국장을 지낸 김아무개씨의 증언이다. 

중정 판단기획국장을 지낸 김○○이 나에게 직접 '김대중 납치 사건 뒤에 박정희가 이후락과 나(김○○)를 비롯 중정 간부들을 불러 식사를 함께 하면서 칭찬했다'고 얘기했다. - <한 조각의 진실> 74p

두 번째는 김홍래 당시 국무총리실 수석 정보비서관의 증언이다. 그는 천학범에게 김대중이 납치돼 배에 실리는 것을 봤다고 털어놓은 바 있다. 

당시 내가 직접 들은 바로는 누구의 지시를 받았는지는 얘기하지 않았다. 오사카 안가에 가서 김대중이 납치돼 배에 실리는 것까지 봤다는 얘기까지만 들었다. - <한 조각의 진실> 78p

천학범은 이 두 가지 증언을 연결해 'DJ 납치 사건이 박정희 전 대통령의 지시 혹은 승인 아래 이루어졌다'는 결론을 내린다. 

"김○○은 박정희에게 칭찬을 받았으니 박정희가 김대중 납치를 알고 있었다는 것이고, 김홍래는 자신이 일본에 파견됐다고 증언했는데 김종필은 이를 부인하고 있으니 박정희가 파견했다고 볼 수밖에 없다는 것이다. 물론 박정희가 김홍래를 파견할 때 김종필이 알았는지 몰랐는지는 알 수 없다. 결국 모든 게 박정희의 지시나 승인 아래 이루어졌다."

좀 더 검증될 필요는 있으나 DJ 납치 사건의 진실을 밝히는 데 요긴하게 쓰일 만한 귀중한 증언이다. 

한국 현대사의 빈 곳을 채우는 '한 조각의 진실'

책 제목이 <한 조각의 진실>인 이유는 '저자 서문'에 나와 있다. 천학범의 구술을 정리한 구영식 <오마이뉴스> 기자는 천학범의 증언을 "한국 현대사 격동기의 빈 곳을 채우는 '한 조각의 진실'"에 비유한다.

역사의 진실이 한 사람의 증언으로 다 채워지지는 않는다. 하지만 천학범 선생의 현대사 증언은 한국 현대사 격동기의 빈 곳을 채우는 '한 조각의 진실'일 수도 있겠다. 증언의 불완전성을 알지만, 어쩌면 남겨지지 않았을 그 한 조각의 진실을 기록했다는 점에서 참 다행스럽고도 기쁘다. - <한 조각의 진실> 6~7p

이 대목을 읽으며 이집트 신화의 한 자락을 떠올렸다. 이집트의 첫 번째 왕 오시리스는 형제인 세트에게 죽음을 당하고, 14개의 조각으로 찢겨 세상 곳곳으로 흩어진다. 오시리스의 부인 이시스는 흩어진 오시리스의 시신을 모아 마침내 오시리스를 지하세계의 신으로 부활시킨다.  

어쩌면 진실도 그와 같은 것일지 모른다. 온전한 형태의 진실에 닿는 기적은 좀처럼 일어나지 않는다. 우리에게 주어진 것은 부서진 진실의 조각일 때가 대부분이다. 그 조각 하나하나는 너무나도 작고, 불완전하며, 때로는 서로 다른 방향을 가리키지만 그럼에도 그 조각들 없이는 결코 진실에 다가갈 수 없다. 이시스가 그랬듯이 그 작고도 불완전한 '한 조각의 진실'들을 끌어 모으는 것이야말로 우리가 할 수 있는 유일한 일인지도 모른다. 

천학범의 증언은, 작고 불완전하지만 우리를 목적지로 인도할 수 있는 '한 조각의 진실'이다. 이 얇고 작은 책이 귀중한 이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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