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치의 발견 - 정치에서 가능성을 찾고자 하는 사람들을 위한 정치학 강의
박상훈 지음 / 후마니타스 / 2013년 2월
평점 :
구판절판


<정치의 발견>은 '정치바로 아카데미'에서 저자 박상훈이 진행한 5차례의 강좌를 묶은 책이다. 저자는 이 책을 통해 반정치주의와 정치에 대한 냉소가 팽배한 현실에서 정치의 가능성을 강조하며 좋은 정치를 위해 좋은 정치가가 필요함을 역설하고 있다. 이 서평은 강좌별 논의를 나름대로 정리하고 필자의 생각을 덧붙이는 식으로 서술할 것이다. 

제1강: 정치는 누가 어떻게 하는가?

1강은 막스 베버의 <직업으로서의 정치>를 인용하며 인간과 정치의 문제를 살피고 있다. 저자는 인간은 천사가 아니기에 더 나은 공동체를 위해 정치를 필요로 한다고 말한다. 그러나 정치는 그를 위한 수단으로 강제력이 필요하기 때문에 '선한 목적'을 위해 '악마적 수단'을 사용해야 하는 근원적 딜레마를 갖고 있다.

이 딜레마는 결국 인간의 한계에서 비롯된 것이다. 인간이 선하기만 한 존재라면 애초에 정치가 필요 없을 것이다. 어떤 규율이나 강제성 없이도 이상적인 공동체가 가능할 것이기 때문이다. 하지만, 인간은 양면성을 가진 존재이기 때문에 강제력, 즉 권력을 통해서만 더 나은 공동체를 추구할 수 있다. 그러나 역시 인간의 양면성 때문에 정치는 본래의 목적과 달리 공동체에 재앙을 가져올 수도 있다. 그렇다고 해서 정치 자체를 부인하는 것은 현명하지 못한 태도다. 인간이 불완전한 존재임을 인정한다면 정치의 문제는 회피할 수 없는 문제고, 정치가라면 이 딜레마를 깊이 인식하면서도 동시에 이를 극복하려는 의지와 능력을 갖춰야 할 것이다. 

그래서 정치가의 길은 쉽지 않다. 저자는 선한 의도를 강변하는 '신념 윤리'나 결과에 대해 책임을 지는 '책임 윤리' 어느 하나만으로는 좋은 정치를 할 수 없다고 주장한다. 다만, 책임 윤리의 한계를 지적하는 대목은 상당히 추상적이라는 느낌을 지울 수 없었다. 잠깐 인용해보자. 

이런 세계에서 대의에 대한 헌신 없는 권력 정치가가 표면적으로 아무리 당당한 정치적 성공을 거둔다 해도 "그 성공에는 피조물 특유의 공허함이라는 저주가 드리워져" 있다. 베버에게 권력정치론은 "인간 행위의 의미에 대한 극도로 빈약하고 얄팍한 오만함의 산물로서, 이런 오만함은 모든 행위 특히 정치적 행위에 내포되어 있는 비극성을 전혀 인식하지 못한 데"서 비롯된다. -<정치의 발견>, 34p 중에서  

이 대목은 베버가 권력 정치의 옹호자가 아니었다는 데 초점을 맞추고 있고, '책임 윤리'의 한계에 대한 부분은 짧은데다 관념적인 언어로 서술되어 있다. 반대로 질문해보자. 대의에 대한 헌신을 가진 정치가의 성공 역시 피조물로서의 한계를 가지지 않을까? 정치란 그 한계 위에서 희미한 가능성을 찾는 것이 아닌가? 막스 베버를 잘 모르는 필자와 같은 사람들을 위해 더욱 구체적인 언어로 서술할 필요가 있지 않은가 생각한다. 

제2강: 정치의 기술, 실천의 기술

2강은 버락 오바마와 미국의 빈민 지역 운동가였던 사울 알린스키의 사례를 주로 언급하며 정치적 실천론을 다루고 있다. 개인적으로 알린스키의 말 중에 인상적인 말이 많았다. 일례로 "최우선적으로 알아야 하는 것은 당신 자신이다. 자신을 아는 사람은 자신의 바깥으로 걸어나갈 수 있으며, 자기 자신의 반응들을 마치 관찰자처럼 살펴볼 수 있다"는 알린스키의 말을 인용하며 저자는 '이 얼마나 멋진 말인가.'라고 감탄하는데, 필자 역시 그 대목에서 감탄했다. 알린스키의 <급진주의자를 위한 규칙>을 반드시 읽어야겠다는 생각이 들 정도였다. 

그러나 저자가 길게 인용한 오바마의 2002년 이라크 전쟁 참전 반대 연설은 그만큼 감동적이지 않았다. 그건 필자가 오바마의 정치적 견해에서 느낀 불편함 때문이다. 예를 들면 다음과 같은 구절에서 필자는 불편함을 느꼈다.

"남북전쟁은 역사상 가장 잔인한 전쟁 가운데 하나였지만, 무력으로 인한 시련과 수많은 인명의 희생을 통해 이 나라를 완성했고 이 땅에서 노예제도라는 사회적 악을 철폐할 수 있었다."

그러나 남북전쟁이 노예해방을 위한 전쟁이 아니었다는 사실은 널리 알려졌다. 링컨은 신문기자 호러스 그릴리에게 보내는 편지에서 다음과 같이 말하고 있다. 

이 분쟁에서 저의 궁극적인 목표는 어디까지나 연방을 보존하는 것이지 노예제를 유지하거나 폐지하는 것이 아닙니다. 노예를 해방시키지 않고도 연방을 보존할 수 있다면 저는 그렇게 할 것입니다. 반대로 노예를 해방시켜야 연방을 보존할 수 있다면 저는 그렇게 할 것입니다. 

이처럼 노예해방은 남북전쟁의 목표가 아니라 부산물에 불과했다. 남북전쟁이 끝나고 노예해방이 이뤄진 후에도 흑인들의 삶은 힘겨웠다. 남부에서 KKK단을 필두로 한 백인우월주의 단체가 나타나 흑인들에게 폭력을 가하기 시작했다. 백인이 흑인을 살해하고 가정집과 교회, 학교에 불을 질렀다. 미국의 진보사학자 하워드 진에 따르면 1867년~1871년 사이에 켄터키 주에서만 이러한 인종적 폭력이 116건이나 발생했다고 한다. 그러나 연방정부는 이러한 폭력으로부터 흑인들을 보호하는 데 소홀했고, 이후 남부에 주둔하던 연방 군대를 철수하면서 남부 흑인들에 대한 마지막 군사적 보호마저 사라졌다. 

물론 엄밀히 말하면 의도야 어쨌든 남북전쟁을 통해 '노예제도라는 사회적 악을 철폐할 수 있었'던 것은 사실이다. 그러나 남북전쟁이 노예해방을 위한 전쟁이 아니었다는 점, 그리고 노예해방이 차별과 불평등으로부터의 해방으로는 이어지지 못했다는 사실까지 같이 언급하는 것이 공정하리라 생각한다. 

다음과 같은 구절 역시 필자를 불편하게 했다.

"나의 할아버지는 진주만이 습격당한 다음 날 입대해 패튼 장군의 군단에서 싸웠다. 할아버지는 좀 더 많은 사람들의 자유를 위해 싸웠고, 그것이야말로 민주주의가 악과 대항하여 승리하도록 해주는 힘의 원천이라고 믿었다." 

할아버지의 생각을 빌리고 있지만, 특별한 가치판단이 없는 것으로 미루어보아 오바마 자신의 생각이라 봐도 좋을 듯하다. 그렇다면 오바마는 2차 세계대전이 진정 자유와 민주주의를 위한 전쟁이었다고 생각하는가? 다시 하워드 진의 말을 들어보자.

유대인들이 강제수용소에 수용되어 있고, 독일이 훗날 홀로코스트(Holocaust)라 불리는 끔찍한 대학살(유대인 600만 명과 수백만 명의 소수 민족과 반체제 인사들)을 준비하고 있는 동안 프랭클린 D.루스벨트는 그들의 생명을 구하기 위한 그 어떤 조치도 취하지 않았다. 그는 그 문제를 국무부에 떠넘겼고, 국무부 역시 아무것도 하지 않았다. - 하워드 진, <살아있는 미국역사> 205p 중에서 

그래서 묻고 싶어진다. 2차 세계대전은 과연 자유와 민주주의를 추구하는 선한 국가들과 파시즘을 지향하는 악한 국가들 사이의 전쟁이었을까? 오히려 하워드 진이 공군에서 만난 한 친구의 말처럼 제국주의 간의 전쟁은 아니었을까?  

그래서 오바마의 연설에 감탄만 하기에는 개운치 않았다. "우리가 기꺼이 가담할 전투는 바로 이것이다. 무지와 편협, 부패와 탐욕, 빈곤과 절망과의 전쟁 말이다."라는 연설의 마무리는 꽤 감동적이었지만, 위에서 말한 부분들이 마음에 걸렸다.

물론 하워드 진의 의견에 동의하지 않을 수도 있다. 그러나 하워드 진을 비롯한 진보파의 목소리에 대해 저자가 언급해줬으면 어땠을까 하는 아쉬움이 남는다. 오바마의 다른 연설을 인용하며 저자는 오바마의 의견에 완전히 동의하지 않을 독자들을 위해 오바마의 책 한 부분을 같이 인용하고 있다. 그처럼 오바마보다 왼쪽에 있을 독자들을 위해 이 연설에서도 오바마를 옹호하든 비판하든 뭔가를 말해줬으면 하는 생각이 들었다. 필자가 하워드 진을 인용하며 이야기했던 것들에 대해 박상훈 정도의 인물이 모를 리는 없다고 생각하기에 더 그랬다. 그리고 <정치의 발견>이 주로 진보파를 위한 책이라는 점을 고려하면 오바마의 견해에 완전히 동의할 수는 없는 필자 같은 사람들을 위해 저자가 뭔가 더 목소리를 낼 필요가 있었다고 생각한다. 그게 설득이 됐든 비판이 됐든 간에.

3강: 민주주의를 이해하기 위한 싸움

3강에서는 민주주의의 기원, 고대 민주주의와 현대 민주주의의 차이, 촛불집회를 이해하는 방법 등 많은 내용을 다루고 있는데, 몇 가지 생각해볼 대목을 지적하고 촛불집회에 대한 필자의 견해를 짧게 서술하는 것으로 갈음하고자 한다.

…(전략)…정당정치가 유럽에 비해 덜 발달했다는 미국에서조차 지지하는 정당이 다른 사람들이 식사 약속을 하는 경우는 흔치 않다. 심리학에서 식사를 같이 하는 사람이란 그가 가장 편하게 느끼는 사람이 누군지를 알아보는 지표인데, 정치적 견해를 달리 하는 사람과 함께 식사하는 일이 편할 리 없기 때문이다.…(후략) - <정치의 발견>, 102p~103P 중에서 

저자가 민주정치에서 정당의 중요성을 끊임없이 강조하는 것을 고려하면 저자는 이와 같은 현상을 긍정적으로, 최소한 부정적이지는 않다고 보는 듯하다. 그러나 이게 꼭 긍정적일까? 민주당 지지자들은 민주당 지지자들끼리, 공화당 지지자들은 공화당 지지자들끼리 그들만의 리그를 만들고 있는 것은 아닐까? 내부의 결속력은 강해지겠지만, 다른 정당을 지지하는 사람들과는 오히려 벽을 쌓는 게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들었다. 정당이 지금보다 더 사회생활로 들어와야 한다는 저자의 견해는 동의하지만, 이런 방식이 좋은 것인지에 대해선 의문이 든다.  

(전략)…많은 마르크스주의자들이 강조했듯, 민주주의는 혁명의 가장 강력한 안티테제다.…(후략) - <정치의 발견>, 117p 중에서 

필자는 책을 읽다 이 구절을 여러 번 곱씹었다. 아마도 마르크스주의자들이 최장집이나 저자와 의견을 달리하는 가장 중요한 지점 중 하나라 생각한다. 고종석이 어느 글에서 지적했듯이 좌파-어쩌면 필자도-는 가슴 깊은 곳에 혁명에 대한 꿈을 간직하고 있다. 이들이 혁명에 대한 꿈을 버릴 수 있을까? 좌파들을 설득하기 위해서는 지금보다 더 정교한, 굉장한 설득력을 가진 논리가 필요할 것이란 생각을 잠깐 했다.  

촛불집회에 대한 논쟁은 쉽게 결론이 나지 않을 것이기에 필자의 생각을 가능한 짧게 적어보겠다. 저자의 말처럼 촛불집회에 과도한 의미를 부여하는 것은 경계해야 할 일이고, 직접 민주주의에 대한 환상을 갖는 것 역시 위험한 일이다. 현대 민주주의에서 정당의 중요성을 부정하기는 어렵다. 하지만 샤츠슈나이더의 말처럼 정당정치의 역할이 사회 갈등을 폭 넓게 조직하고 동원하는 데 있다면, 사회 갈등이야말로 정당정치의 기반이다. 그리고 운동은 사회 갈등을 드러내는 중요한 요소다. 운동이 곧 시민사회를 대변할 수 있는 것은 아니겠지만, 그럼에도 운동은 시민들이 정치적 견해를 표현할 수 있는 주요한 수단이며 따라서 운동은 권장되어야 한다고 생각한다. 운동이 정치체제를 대신할 수는 없겠지만, 정치체제 또한 운동을 대신할 수는 없다. 열정의 소모를 두려워해 열정의 제도화를 위한 수단으로 정당을 이야기하는 것이겠지만, 열정이 가능한 많이 표출될 때 제도화가 가능할 것이다. 그런 의미에서 정당의 중요성을 인정하지만, 운동과 함께일 때 더 나은 정치 공동체가 가능하리라 생각한다.  

4강: 과거의 경험으로부터 배울 것들

4강은 민주주의 초기 단계에서 진보파의 경험을 다루고 있다. 이번 강의를 통틀어 저자는 '마르크스주의가 민주정치에서는 큰 도움이 되지 못한다'(157p)는 견해를 피력한다. 그 견해에 일부 공감하면서도 고개를 갸우뚱하게 되는 대목이 있었다. '혁명론은 무엇보다도 종말론적 사고를 강화하기 쉽고, 실제 혁명에 성공한다 해도 그것이 갖는 반정치적인 사고 경향 때문에 혁명 이후를 전체주의 사회로 이끌기 쉽다'(140p)란 대목이 그것이다. 그렇다면 저자의 견해처럼 혁명 이후의 사회는 주로 전체주의 사회였던가? 프랑스 혁명이나 미국 시민 혁명, 영국의 명예혁명 이후의 사회를 전체주의 사회라 볼 수 있는가? 필자가 과문한 탓도 있겠지만, 이런 혁명이 있은 후 전체주의 사회가 됐다는 이야기는 들어본 적이 없다. 이들 혁명은 마르크스주의적 혁명과는 다른 자유주의적인 혁명이라 말할지도 모르겠다. 그러나 이들 혁명에서도 분명히 혁명론이 있었을 것이다. 그렇다면 어째서 프랑스 혁명이나 미국 시민 혁명, 영국 명예혁명에서는 혁명론이 이후의 사회를 전체주의 사회로 이끌지 않았는가? 이 부분에 대해서는 보강이 필요할 것이라 생각한다. 혁명론이 달랐다면 어떻게 달랐는지, 그것이 혁명의 과정과 결과에서 어떻게 작용했는지 보다 구체적으로 논증해야 하지 않을까. 

'마르크스주의가 민주정치에서는 큰 도움이 되지 못한다'는 명제에 대해서는 저자의 말대로 더 많은 논의가 있어야 한다고 생각한다. 아직도 진보 진영 일각에서는 마르크스의 사상이 상당한 권위를 가지고 있고, 그 권위를 뛰어넘기 위해서는 더욱 정교한 논리가 필요할 것이다. 개인적으로 이 부분과 관련해서 소련의 언론관에 주목하고 있다. 마르크스주의나 소련의 언론관에 대해 깊이 알지 못하기 때문에 말하기 조심스럽지만, '소비에트 공산주의 이론'에 따르면 언론은 국가나 공산당 노동자계급 기관들의 엄격한 지도와 통제하에 있어야 하며, 사회주의 사회의 기본 조직이나 구상에 대해 언론은 이견을 제시할 수 없었다고 한다.

아주 깔끔하게 연결되지는 않지만, 필자가 의문을 가지는 것은 이런 것이다. 공산주의 사회는 사상의 자유를 보장하는가? 자본주의 사상은 용납될 수 있을까? 장담할 수는 없지만, 지금으로선 다소 부정적인 답을 내릴 수밖에 없다. 소위 좌파들-이렇게 말하는 필자도 좌파로 분류될 여지가 크지만- 과 이야기하다 보면 자신과 생각이 다른 사람들은 상대할 가치도 없는 수구꼴통이나 현실과 타협하는 개량주의자로 낙인찍는 느낌을 받을 때가 있다. 소수파인 지금도 그러한데, 이들이 권력을 장악한 혁명 이후의 공산주의 사회에서 자본주의자는 과연 사상의 자유를 누릴 수 있을까? 주제넘지만, 이런 관점에서 마르크스주의와 민주정치의 관계를 바라보면 위의 명제를 입증하는 데 도움이 되지 않을까 생각해본다.  

5강: 이런 정치를 원한다

5강은 마지막이니만큼 이제까지 이야기했던 내용들을 요약‧정리하고 있다. 개인적으로는 이 대목이 저자가 말하고 싶던 핵심이라 생각한다.

요컨대 정치적 이성이란 기본적으로 불확실성에 대한 존중, 무지의 가능성에 대한 자각, 진보만이 지배하는 세상이 아닌 이념과 가치의 다원주의, 누구든 의견을 가질 권리가 있다는 것의 존중, 타인에 대한 인간적 정중함과 관용 등을 내용으로 한다.…(후략) - <정치의 발견> 173p 중에서  

이 구절을 읽으며 스웨덴 사민당의 이론가였던 비그포르스의 말을 생각했다. 

미래에 대한 구상은 끝없는 노력을 통해 우리가 그것을 향해 그저 조금씩 접근해갈 수 있는 종착점에 대한, 한번 만들어지고 나면 바뀔 필요 없는 구상이어서는 안 된다. 그 대신 미래에 대한 구상은 길을 인도해주는 별과 같은 것, 당면한 어려움으로부터 빠져나갈 수 있는 최선의 출구를 발견하는 데 도움을 주는 것이어야 한다. - Ernst Wigforss 

인간은 불완전한 존재이기에 더 나은 공동체를 위해 정치를 필요로 한다. 인간이 천사나 신이라면 애초에 정치는 필요 없다. 그러나 동시에 인간이기에 틀릴 수 있다는 생각을 항상 해야 한다. 선한 의도가 때론 끔찍한 결과를 가져올 수 있다는 사실을 염두에 둬야 한다. '역사 발전의 필연성'을 신봉하는 것은 그래서 위험하다. 이러한 인간의 한계와 이성에 대한 회의를 기반으로 우리는 어떤 정치인가를 고민해야 한다. 그래서 '정치의 발견'이다.


물론 <정치의 발견>이 정치와 민주주의의 정답을 제시하고 있지는 못하다. 저자가 말하듯 인간과 정치를 이해하는 문제에 있어서 '하나의 의견 내지 주장'이다. 모두가 저자의 견해에 동의하지는 않을 것이고, 그럴 수도 없을 것이다. 그러나 오늘날 민주주의와 정치에 관심 있는 사람이라면 사상의 좌우를 떠나 누구든 한 번쯤 시간을 들여 읽을 만한 가치가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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