청소년은 여러 이름을 갖고 있다. 아이, 어린이, 학생, 1318세대 등. 그리고 그중에는 '주변인'이라는 이름도 있다. 아이도 아니고, 어른도 아닌 둘 사이의 어딘가에 위치한 존재라는 의미다.
아이와 어른, 어디에도 속하지 않았다는 점 때문에 그들의 위치는 항상 모호하다. 이제 아이가 아니니 어른답게 행동하라고 하다가도, 넌 아직 어려서 잘 모른다고 타이르기 일쑤다. 청소년들은 어른으로서 의무를 다하라고 요구받지만, 정작 그에 따른 권리는 인정받지 못한다. <인권은 대학가서 누리라고요?>는 바로 그 모호한 위치에 있는 청소년들의 인권을 정면으로 다루고 있다.
사랑하면 때려도 되나요?
어른들은 흔히 '다 너희를 사랑하기 때문에 때리는 거야'라는 말로 체벌을 정당화한다. 하지만 이런 발언의 밑바닥에는 청소년과 성인은 동등하지 않는다는 전제가 깔려 있다.
…(전략)…그리고 많은 선생님들이 체벌은 교육의 한 방편이라고도 말한다. 미워서 때리는 것이 아니라 '사랑의 매'라는 것이다. 그러면 아이들 입장에서 이렇게 말해도 될지 모르겠다. "저희도 부모님과 선생님을 사랑해요. 그러니 저희도 간혹 어른한테 사랑의 매를 들어도 될까요?"
-<인권은 대학 가서 누리라고요?> 62p 중에서
청소년들도 똑같이 어른들을 사랑하는데 그들은 '사랑의 매'를 들 수 없다면, 그건 청소년은 어른보다 열등한 존재고 따라서 어른을 때려서는 안 된다는 생각이 깊숙이 박혀 있기 때문은 아닌가? 결국 체벌을 정당화하는 '어른'들의 마음 속 깊은 곳에는 어른과 청소년은 대등한 존재가 아니고, 청소년은 미성숙하기 때문에 관리가 필요하며, 경우에 따라서는 때려서라도 말을 듣게 해야 한다는 생각이 있는 것이다.
그러나 청소년이 어른을 때리면 안 되듯, 어른들도 청소년을 때려선 안 된다. '사랑의 매'도 매다. '사랑의 매'를 드는 교사들의 마음은 이해하지만, 사랑을 꼭 매로 표현해야 하는 걸까? 혹자는 한국 교육현실에서는 어쩔 수 없다고 말한다. 하지만 지금 당장 현실을 바꾸진 못하더라도 '이건 뭔가 잘못됐다'는 문제의식은 가지고 있어야 하는 것이 아닐까? 적어도 폭력을 '사랑의 매'라는 이름으로 정당화하지는 말아야 할 것이다. 또다른 예를 통해 사랑하기 때문에 때린다는 논리의 허구성을 살펴보자.
명분과 의도가 아무리 좋아도 체벌은 폭력의 일종이다. 당장 학교 밖에만 나가면 '사랑하니까 때린다'는 논리가 받아들여지는 곳은 단 한 군데도 없다. 회사에서 부장이 "내가 평소 김 과장을 사랑하고 관심이 많은데 업무를 이런 식으로 처리하다니요. 한 대 맞아야 정신 차리겠군요. 자, 엎드리세요"라고 하는 모습을 상상할 수 있는가?
-<인권은 대학 가서 누리라고요?>, 63p 중에서
청소년들을 정말로 사랑한다면, 그 사랑을 체벌이 아닌 다른 방법으로 표현하라. 폭력은 폭력을 낳을 뿐이다.
청소년이 배제된 교육
이 책에 나온 사례 중 하나다. 현재 모든 초·중·고에서는 교육행정정보시스템(NEIS)를 운영하는데, 이 프로그램에는 자녀의 정보를 조회할 수 있는 '학부모 서비스' 코너가 있다. 고등학생 형진이(가명)는 이 안에 담긴 자신의 출결 정보를 보려고 했다. 하지만 선생님은 학생에게는 NEIS의 정보를 볼 수 있는 권한이 없다고 말했다. 선생님도, 형진이의 부모님도 NEIS 정보를 볼 수 있지만, 당사자인 형진이는 볼 수 없다는 것이다.
규정상 형진이는 NEIS 정보를 볼 수 있다. '교육정보 시스템의 운영 등에 관한 규칙' 9조 1항은 '정보 시스템을 활용하는 학교에 재학 중인 학생 또는 학생의 부모 등 법정대리인은 정보 시스템에 접속하여 당해 학생의 전산자료를 열람할 수 있다'고 규정하고 있다. 그러나 규정과 달리 재학 중인 학생이 NEIS에 있는 정보를 열람할 수 있는 방법은 없다. 학부모는 인증서를 발급받아 자녀의 정보를 볼 수 있지만, 학생은 이 인증서를 발급받을 수 없다.
학생들만 자신의 정보를 볼 수 없는 이유에 대해 교과부는 NEIS의 학부모 서비스는 학교와 학부모가 소통할 목적으로 만들었기 때문에 학생에게는 해당 사항이 없다고 밝혔다. 그러나 정작 당사자인 학생들이 배제된 소통이란 대체 어떤 것일까?
여기서 청소년들이 성인과 동등한 존재로 인정받지 못한다는 사실을 새삼 깨달을 수 있다. 청소년들은 교육의 당사자임에도 불구하고 애초에 소통의 대상으로 고려되지 않는다. 학부모는 소통의 대상이지만, 청소년은 소통의 대상이 아니다. 청소년들은 학교와 학부모가 시키는 대로 따라하고, 그렇지 않으면 '사랑의 매'를 맞아야 하는 대상일 뿐이다.
청소년에게도 평등한 권리를
<인권은 대학 가서 누리라고요?>는 위에서 말한 문제들 외에도 청소년 인권에 관한 여러 가지 문제를 다루고 있다. 그 모든 문제들을 관통하는 핵심적인 코드 가운데 하나는 '청소년은 미성숙하기 때문에 관리가 필요하다'는 것이다. 관리의 효율성 앞에서 그들의 권리는 너무도 쉽게 무시된다. 하지만 나이가 많든 적든 인간으로서 누구나 누려야 할 권리가 인권이라면, 청소년들의 인권이 보장되어야 하는 것은 너무나 당연한 사실 아닐까?
누구에게나 행복할 권리가 있다. 청소년들도 마찬가지다. '나이가 어려도, 공부를 못해도, 대학에 가지 않아도' 그들은 행복할 권리가 있다. 청소년들이 꿈꾸는 행복이 어떤 것인지 들으며, 이 서평을 마무리한다.
…(전략)…우리 청소년들이 바라는 것은 거창하거나 대단한 것이 아니다. 그들은 쉬고 싶을 때는 공부나 성적 걱정을 잊고 마음 편히 쉬고, 친구들과 즐겁게 어울려 놀고, 좋아하는 취미활동에 몰두하고, 하루 한 끼 정도는 사랑하는 가족과 식탁에 둘러 앉아 먹을 수 있으면 행복할 것 같다고 말한다. 그것들은 우리가 사람답게 살기 위해 보장받아야 할 최소한의 권리이다. 이제껏 입시경쟁이나 미래의 성공을 위해 곧잘 무시되고, 유예되었던 청소년들의 인권이 보장되고 존중받을 때 우리 사회의 그물코도 온전한 모양을 갖추게 될 것이다.
-<인권은 대학 가서 누리라고요?> 7p~8p 중에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