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느덧 주말이다. 개강하고 나서 정신없이 지내다보니 순식간에 일주일이 지났다. 오랜만의 휴식을 집에서만 보내기엔 아깝다. 뭘 할까 고민하다 얼마 전에 오픈한 후마니타스 책다방에 가기로 했다. 합정역 6번 출구에서 30여 분을 헤매다 마침내 찾은 책다방.
생각보다 넓고 깔끔한 실내 한쪽에는 다양한 책들이 놓여 있었고, 다른 한쪽에는 편집부와 영업부가 자리 잡고 있었다. 후마니타스에서 나온 책은 물론이고, 그 외에도 다양한 인문사회과학서적들이 눈길을 끌었다. 그러나 목표한 바가 있기에 과감히 다른 책들의 유혹을 뿌리치고, <갈등하는 동맹>이 전하는 한·미관계의 세계 속으로 빠져들었다.
<갈등하는 동맹>(역사비평 편집위원회 저, 역사비평사 펴냄)은 이승만-아이젠하워 정부에서 노무현-부시 정권까지 60년의 한·미관계사를 다루고 있다. 이 책은 친미와 반미의 이분법을 넘어서 객관적인 시각에서 한·미관계를 바라보는 것을 목적으로 하고 있다.
친미주의자들에게 일갈 "진보정권이 한미동맹을 망쳤다고?"
보수주의자들은 김대중-노무현의 진보정권이 한·미동맹을 위태롭게 만들었다고 주장한다. 그러나 이는 한·미관계의 특수성을 모르고 하는 말이다. 한·미관계는 높은 수준의 동맹과 높은 수준의 갈등이 함께 진행되는 특이한 양상을 보였다. 이 책의 제목이 <갈등하는 동맹>인 이유다.
대한민국 건국 이래로 한·미관계가 순탄했던 기간은 길지 않다. 이승만 정권은 미국이 이승만을 제거하기 위한 상비계획(Ever-ready Plan)을 입안했을 정도로 미국과 심한 갈등을 빚었다.
박정희 정권 역시 존슨 행정부와의 짧은 밀월을 제외하면 주한미군 감축 문제를 둘러싸고 미국과 끊임없이 갈등했고, 민주화 이후의 김영삼 정권도 대북정책과 관련해 클린턴 행정부와 갈등을 겪었다. 전두환 정권을 제외하면 소위 보수정권이 진보정권보다 미국과 더 사이가 좋았다고는 할 수 없다.
이를 두고 박명림 연세대 교수는 "한·미관계의 성공요인은 긴장과 갈등이었는지 모른다"고 지적하고 있다. 오히려 가장 친미적이었던 장면과 전두환 정권은 미국의 도움이 가장 절실할 때 미국의 도움을 얻지 못했다. 지난 60년간의 한·미관계사는 맹목적으로 미국을 추종하는 것이 '국익'에 도움이 되지 않는다는 것을 보여주고 있다.
비교 관점에서 볼 때도 중동·동남아·라틴아메리카의 친미 일변 독재국가들은 대부분 정치·경제적으로 실패했다. 친미와 독재 중 어느 쪽이 주요인인지는 더 연구해야 할 문제지만, 친미 성향이 이들의 실패에 한 원인이 되었음은 분명하다.
친미주의자들이 생각하는 것처럼 한미관계가 항상 좋기만 했던 것은 아니며, 오히려 미국과의 갈등이 '국익'에 도움이 될 수도 있다는 것이다.
반미주의자들에게 일갈 "미국은 악의 축이 아니다"
1980년 광주항쟁 이후, 한국에서는 반미감정이 고조됐다. 이는 미국이 한국군의 작전지휘권을 갖고 있는 상황에서 미국의 방조 혹은 지원 없이는 군사 쿠데타가 불가능하다는 판단에서 비롯된 것이었다. 그리고 이런 반미감정은 한국에서 벌어지는 모든 주요 사건의 배후에 미국이 있다는 인식으로까지 발전했다. 글라이스틴 대사는 10·26 사태를 다음과 같이 회상한다.
"많은 한국인들과 일부 미국인들까지 박 대통령의 죽음에 미국이 연루된 것으로 생각했다. 가장 보편적인 생각은 박 대통령에 대한 미국의 비판이 그의 몰락에 중요한 영향을 미쳤다는 것이었다. 일부에서는 과격한 추측을 하는 사람들도 있었다. 반체제그룹과 종교계 인사들 및 학생 등 박 대통령을 반대하던 여러 사람들이 미국이 김재규와 범행을 모의했다고 믿은 것이다."
이에 따르면 한국인들은 10·26 사태와 광주항쟁의 배후에 모두 미국이 존재한다고 생각한다는 것이다. 그게 사실이라면 한국의 운명은 미국에 달려있는 셈이다.
그러나 정말로 미국이 모든 것을 좌지우지할 수 있는가? 분단과 전쟁, 독재정권으로 이어지는 한국현대사의 질곡에 미국이 큰 책임을 지고 있다는 것은 부정할 수 없다. 하지만 미국은 전지전능한 존재가 아니다. 멀리 갈 것도 없다. 이라크 전쟁만 해도 미국의 의도와는 달리 수렁에 빠지지 않았는가. 미군 4천여 명의 희생과 약 1조 달러의 전쟁 비용이라는 손실을 치렀지만 미국이 애초에 내건 명분들은 하나도 달성하지 못했고, 미국인들은 전쟁에 환멸을 느끼고 있다.
한반도 역시 마찬가지다. 미국의 의도가 언제나 관철되지는 않는다. 일례로 미국이 이승만 제거 계획을 몇 번이나 세우고도 실행할 수 없었던 것은 이승만을 대체할 정치세력이 없다는 판단에 따른 것이었다. 미국 역시 우리의 국내정치에 영향을 받을 수밖에 없는 것이다.
우리의 운명을 결정짓는 건 우리 자신이다
한·미동맹을 신줏단지처럼 생각하는 친미주의자와 미국을 '악의 축'이라고 보는 반미주의자 사이에는 공통점이 한가지 있다. 그것은 미국을 결정적인 요소로 생각한다는 점이다. 그러나 이미 말했던 것처럼 모든 것이 미국의 뜻대로 되는 것은 아니다. 미국이 상당한 영향력을 행사할 수 있는 건 사실이지만, 결정적인 요소로 볼 수는 없다. 그리고 더 중요한 것은 미국이 항상 부정적인 영향만을 끼친 것은 아니라는 점이다.
미국이 6월항쟁 국면에서 전두환 정부에 대해 결정적인 영향력을 행사한 것은 군의 정치개입을 차단한 것이다. 미국은 한국의 군부가 다시 정치에 개입하는 것을 막고 정치의 민간화를 실현하기 위한 조치를 취했다. 전두환 대통령이 시위대 진압을 위해 군부대의 이동명령을 내릴 기미가 보이자, 미국 정부는 군의 서울 진입을 막도록 조치했다.…(후략)…
-<갈등하는 동맹>, 120p 중에서
전두환 정권은 미국과 매우 순조로운 관계를 유지했지만, 우리 국민들의 민주화에 대한 열망이 뜨거워지자 미국은 전두환 정권이 아닌 민중의 편을 들었다. 우리가 어떻게 행동하느냐에 따라 미국의 영향력을 우리에게 유리한 쪽으로 활용할 수도 있는 것이다. 그런 의미에서 릴리 전 주한미국대사의 말을 경청할 필요가 있다.
"한국에서 일어나는 사건은 어디까지나 한국인 스스로가 자기 나라의 갈 길을 결정해야 하는 '한국의 일'일 수밖에 없다. 미국의 역할은 지원하는 것, 그리고 가능하면 자문해주는 것이지, 진행과정을 통제하는 것이 아니다."
우리의 운명을 결정하는 것은 미국이 아니라 우리다. 미국을 만병통치약으로 생각하거나 만악의 근원으로 생각하는 '미국중심주의'에서 벗어나야 할 이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