근린생활자
배지영 지음 / 한겨레출판 / 2019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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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글에는 스포일러가 포함되어 있습니다.

쓸모없는 인간다움을 위한 찬가

출구 없는 폐쇄회로를 벗어나려는 몸부림

 

 

소설(小說)이란 무엇인가. 배지영의 <근린생활자>를 읽으면서 문득 소설이라는 문학 장르에 대해 생각했다.

 

작을 소(小)에 말씀 설(說)을 써서 ‘작은 이야기’라 이름 붙은 문학 장르. 조선 시대 선비들에게 소설은 그런 존재였다. 공자나 맹자 같은 유학자의 가르침을 담은 이야기가 아니라 쓸모없고, 때로는 우매한 백성을 현혹하는 이야기.

 

공자는 시를 문학작품이 아니라 올바른 가르침을 전달하기 위한 도구로 봤고, 시 3,000여 수 가운데 ‘생각에 사악함이 없는 시’ 300여 수를 간추렸다. 유학의 관점에서 보면 소설은 보잘것없고, 교훈적이지도 않은 이야기에 불과했다.

 

하지만 그 위대하신 유학자들의 말씀이야말로 인간을 차별하고 억압하는 사농공상의 계급 질서를 정당화하지 않았던가? 대다수 백성에게는 현실의 모순을 비판하고, 잠시나마 다른 세상을 꿈꿀 수 있게 하는 소설이 유교 경전보다 훨씬 유익하고, 위로가 되지 않았을까?

 

물론 소설을 읽는다고 해서 신분 질서의 질곡이나 가부장제의 모순에서 벗어날 수는 없다. 그런 의미에서 소설은 쓸모가 없다. 그러나 소설은 문학평론가 김현의 말처럼 “억압에 대해서 생각하게 만든다.” 이를테면 <홍길동전>은 적서차별 문제를 제기했고, <방한림전>은 현실에서 존재할 수 없던 여성 영웅을 탄생시킴으로써 가부장제 질서에 반기를 들었다.

 

나는 소설, 나아가 문학의 의미가 바로 그곳에 있다고 믿는다. 문학은 현실의 모순과 부조리, 억압에 대해 생각하게 한다. 철학자 사르트르의 말처럼 문학은 죽어가는 어린아이 앞에서 아무런 힘도 없지만, 또한 문학평론가 장 리카르두의 말처럼 문학은 어린아이의 아사를 추문으로 만들어 그 죽음에 의미를 부여한다. “문학이 있기 때문에, 한 어린아이가 굶주려 죽는 것은 추문이 된다. 그것이 문학이 남아 있어야 할 이유다.”(<코드 훔치기> 80쪽)

 

배지영의 <근린생활자>는 한국사회의 여러 모순과 억압에 대해 생각하게 만든다는 점에서 문학의 본령에 닿아 있다. 배지영은 주거 불안에 시달리는 젊은 세대의 삶을 이야기하고(「근린생활자」), 조금 더 나은 노동조건을 위한 노동자의 투쟁이 어떻게 이기주의로 매도당하는지(「삿갓조개」)를 말한다.

 

그가 그려내는 현실은 출구 없는 폐쇄회로다. 그 속에서 주인공들은 출구를 찾기 위해 몸부림을 벌이지만, 세상 어디에도 탈출구 따윈 존재하지 않는다. 거대세력에 맞서 진실을 밝히려는 시도는 실패로 돌아가고(「그것」), 전임 회장과의 약속을 지키면서 주어진 일에 최선을 다하는 연구원은 ‘최악의 처세를 하는 사회인’으로 조롱받는다.(「청소기의 혁명」) 그들의 몸부림은 무엇 하나 바꾸지 못한다. 그런데도 그들은 자신도 주체할 수 없는 질주를 계속한다.

 

“이제 곧 나무에 부딪혀 머리가 깨지거나 발이 미끄러져 구르다 갈비가 부러질지 모른다, 아니 그 전에 무릎에 꺾여 사정없이 내동댕이쳐질 것이다. 그런데도 우린 울음 같은 웃음도 달음박질도 그리고 눈물도 멈출 수가 없었다. 아무리 애를 써 봐도 도무지 속도를 줄일 수가 없었다.”-「사마리아 여인들」 중에서

 

그들이 부질없을지도 모를 몸부림을 멈출 수 없는 것은 그들이 맞닥뜨린 현실의 억압이 큰 만큼 흔히 쓸모없다고 치부되는, 그래서 점점 사라져가는 인간적인 가치를 절실하게 열망하기 때문이다.

 

<근린생활자>에 수록된 작품 속 주인공들은 대개 세상에서 쓸모없다고 말하는 가치를 좇는다. 「사마리아 여인들」은 ‘박카스 할머니’라고 불리는 성매매 노인과 도벽으로 생계를 유지하는 노인의 우정을 다루고 있다. 남들이 보기엔 밑바닥 인생끼리의 만남, 범죄자끼리의 만남이겠지만, 국가나 가족의 보살핌을 받지 못하는 이들에게는 서로가 너무나 소중하다.

 

「그것」의 주인공은 우수사원으로 인정받아 그럭저럭 만족스러운 직장생활을 할 수도 있지만, 가족의 죽음에 얽힌 진실을 찾기 위해, “세상에서 봤을 때는 그저 아무것도 아닌 죽음”의 진실을 밝히기 위해 목숨을 걸고 거대한 악에 맞선다.

 

「청소기의 혁명」 속 주인공은 최선을 다해 유행이 지난 청소기를 팔고, 환불돼 돌아온 청소기 속 먼지마저 “개인이 남긴 개별적인 자취”(「청소기의 혁명」)라고 생각하며 비우지 않는다. 그가 비우지 않은 먼지는 세월호 참사(에서 모티브를 얻은 것이 분명한 사건)를 당해 돌아오지 못한 학생이 이 세상에 남겨둔 마지막 흔적이 된다. 그는 학생의 어머니에게 ‘드릴 게 있다’고 말한다.

 

‘불운과 슬픔의 도시로 자신의 터전이 낙인찍히기를 바라지 않는’ 사람들이 가득한 세상, 추모관이 몇 년 만에 헐리는 세상에서 그만은 여전히 쓸모없는 것들의 가치를 믿고, 그 쓸모없음이 인간다움과 맞닿아 있다고 믿는다. 성능과는 아무 관계없지만 소소한 즐거움을 줄 수 있는 청소기, 가령 “같이 커피를 마시는 청소기, 딸꾹질을 하다가 웃음을 터트리는 청소기”가 사람들의 마음을 움직일 것이라고 믿는다. 그런 그만이, 그런 그였기에 청소기 속 먼지마저 소중하게 간직하면서 망자의 마지막 흔적을 유족에게 전해준다.

 

그의 행동이 세상을 바꾸지는 못하더라도, 그 같은 사람이 있어서 이 어둡고, 차가운 세상이 한 줌의 온기, 한 줌의 인간다움을 간직하고 있는 것이 아닐까. <근린생활자> 속 등장인물들의 행동은 세상을 바꾸지 못한다는 점에서 쓸모없을지 모르지만, 이 지점에서 의미를 획득한다.

 

<근린생활자>의 의미도 그곳에서 찾을 수 있다. 이 소설집은 부조리한 사회를 바꾸기 위해 사람들이 지금 당장 일어서야 한다고 소리 높여 외치거나 구호를 외치지 않는다. 오히려 그런 행동이 사회를 바꾸지 못하고, 저항이 패배로 끝나리라고 비관하는 쪽에 가깝다. 그럼에도 이 책은 “억압에 대해서 생각하게 만든다.”

 

또한 이 책은 억압에 의해 짓눌린 인간적인 가치들의 의미를 생각하게 만든다. 사람들이 쓸모없다고 말하는 가치, 이를테면 우정, 가족애, 정의감, 아름다움 같은 것들이 이 비루한 세상을 조금이나마 살만한 곳으로 만든다고 넌지시 말한다.

 

그래서 이 책은 세상이 부정하는 가치를 추구하는 인간들의 처절한 실패담이자 실패할 수밖에 없는 가치들이 얼마나 소중한지, 왜 그들이 부질없는 몸부림을 계속할 수밖에 없는지에 대한 증언이다. 나아가 모두가 쓸모를 말하는 시대, 인간다운 가치가 쓸모없는 것으로 치부되고, 멸시당하는 시대를 사는 우리 모두의 이야기다.

 

“실용적인 것에만 매달리고 손해 보는 짓, 무용한 생각, 실없지만, 피식 웃게 하는 농담을 외면하는 사람들은, 아마도 큰 불행을 당한 이들 앞에서 ‘지겨우니 그만하라’라는 식의 막말도 서슴지 않고 할 거 같아요.

따지고 보면 정말 중요한 거라 여겼던 것들은 지나고 나면 아무 것도 아니고, 별거 아니라 여겼던 것들이 실은 진짜 중요했단 것을 깨닫는 순간이 옵니다. 사소한 거라 여겼던 것들이 지나고 나서 가장 큰 후회로 남는 것처럼 말이죠.”-「작가 인터뷰」 중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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