리틀 아이즈
사만타 슈웨블린 지음, 엄지영 옮김 / 창비 / 2021년 12월
평점 :
장바구니담기


<리틀 아이즈>, 사만타 슈웨블린 지음, 엄지영 옮김 (창비)

제목 <리틀 아이즈>는 동물 모양의 ‘켄투키’라는 반려로봇의 눈을 말한다. 두더지, 토끼, 까마귀, 판다, 용, 부엉이 등 그 모습은 다양하다. 켄투키는 단순 로봇이 아닌, 리틀 아이즈를 통해 사용자가 소유자의 일상을 볼 수 있는 모니터다. 스타들이 집에서 혼자 지내는 생활을 관찰하는 예능 ‘나 혼자 산다’ 속 마스코트 곰인형 윌슨이라고 생각하면 되겠다. 그러나 켄투키는 특정인을 지정하여 볼 수 없다. 모든 매칭이 서버에서 임의로 이루어진다.

켄터키의 사용자가 되길 원하는 이들은 ‘관음’적 욕망이 있는 것으로 볼 수 있다. 그러나 사실 모든 인간에게는 자신도 자각하지 못한 채, 이러한 욕망이 내재되어 있다고 한다. 대표적인 예로, 극장에 가서 영화를 보는 행위도 이에 해당한다. 불을 모두 끈 어두운 장소에서 빛이 흘러 나오는 화면에 집중하는 것이 일종의 관음적 행위다. 인간은 이러한 상황에서 상위의 권력 관계에 놓이게 된다. 남이 나를 볼 수 없는 상태에서, 나는 그 사람의 사소한 모습까지 모두 보게 되는 시선의 비대칭성을 향유할 수 있는 것이다.

켄투키가 어떤 역할을 하는 로봇인지 알게되는 순간, 걷잡을 수 없는 위험성이 예상되고 그것은 범죄로까지 이어지는 공포로부터 불가피하다. 소설 속 켄투키 소유자는 현재 리틀 아이즈 너머로 어떤 사람이 자신을 관찰하고 있는 지 알 수 없다. 켄투키를 방에 두고 바라보는 것 자체만으로 소름이 끼칠 것 같다.

소유자마다 켄투키와의 경험이 다를 수 있으므로, 때에 따라 이것은 생명을 다하게 만들어졌다. 사용자가 오랫동안 접속하지 않거나 배터리가 소진되면 연결이 영원히 끊기고 되살릴 수 없다.

켄터키의 죽음은 인공지능과 로봇의 윤리라는 점에서 논해볼 수 있는 쟁점이 된다. 소설에서는 ‘켄투키 해방 클럽’이라는 것이 등장한다.

“켄투키를 학대하는 것이 개를 땡볕 아래 하루 종일 묶어두는 것만큼이나, 아니 그 반대편에 진짜 사람이 있다는 점을 고려한다면 그보다 훨씬 더 잔인한 짓임에 틀림없다고 생각한 몇몇 사용자들이 클럽을 만들어 이를 해방하기 시작한 것이다.”

이제는 누군가에게 일상이 된 인스타그램이나 sns. 그 속에서 보이는 모습이 진짜 그들이라고 할 수 있을까. 아니면 새로운 가상의 캐릭터로 용인해야 할까. 두 세계는 하나인 듯 구분되어 양가의 감정을 느끼게 한다. 책에서도 현실 세계의 자유와 켄투키 세계에서의 자유에 대해 언급한다. 이 둘이 같지 않은 건 당연하지만, 연쇄 관계로 이어져 있는 건 분명하다. 현실에서 갈망해온 욕망을 자유라는 이름으로 실현시키기 위해 새로운 세계를 만드는 것이 과연 올바른 일인가?

소설은 꿈이라 일컬어지는 새로운 세계에 대한 이야기를 써내려간, 현재를 기준을 비현실을 실현시키는 욕망의 매개체다. 그러나 단순히 이러한 기능에서 벗어나 때로는 현실로 다가올 미래를 조금 일찍 앞당겨 우려되는 문제들을 사용자가 될 우리에게 생각해보게 한다. 무분별하게 자유로워질 수 있는 세계에서 날뛰는 것을 스스로 절제하도록 하는 가상 캐릭터의 의식을 전달한다.

*출판사로부터 책을 제공받아 솔직하게 작성한 서평입니다.
@changbi_insta

댓글(0) 먼댓글(0) 좋아요(0)
좋아요
공유하기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