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밤의 약국 ㅣ 현대문학 핀 시리즈 에세이 1
김희선 지음 / 현대문학 / 2023년 3월
평점 :
‘밤에 약국에 있으면 세상이 무슨 색인지 알게 된다. 그러니까 세계는 사실 검푸른 색이거나 짙은 남보라색이고 낮의 온갖 다채로운 빛깔은 그 어둠을 덮기 위한 위장에 불과하다는 생각? 어디에 있었는지도 알 수 없던 존재들이 밤이 되면 여기저기서 나타났고, 환한 대낮을 걷듯 거리를 활보했다. (중략) 호퍼의 그림을 보면 오래전 그때가 떠오른다. 밤늦게 까지 불을 켜고 있던 약국, 나는 밤을 지키는 듯한 기분이었고, 어둠은 내게 세상의 작은 틈을 보여주었지. 아침이 되고 해가 비쳐들면 서서히 닫혀버릴, 아주 좁고도 가느다란 틈을.’
에드워드 호퍼의 ‘약국’이란 그림을 본다. 어딘가에 있을, 김희선 약사가 있는 약국이 그림에 겹쳐진다. 골목 끝의 하늘부터 남보라 색 으로 덮여 가는 시간. 손님이 다 빠져나간 텅 빈 약국에 앉아 창밖을 응시한다. 오늘 오후에 엄마손을 잡고 왔던 꼬마가 떠올랐고, 꼬마의 손에 들려있던 투명 비닐 봉투 안 에서 유영하는 작은 물고기들로 시선이 옮겨진다. 그 물고기에게 이름을 붙이고, 어디서 왔을까? 물고기의 엄마는 누구일까? 물고기의 가계도를 상상하며 세상의 작은 틈으로 들어가는 약사님, 아니 작가님이 보인다.
‘밤의 약국’은 꿩, 버섯, 강아지, 앵무새, 까치, 고래, 실솔, 외할아버지, 약국 손님, 나무, 달걀, 박스맨, 복사카드 등등 주변의 크고 작은 것들을 글감으로 삼아 상상을 더하고 이야기를 만든 에세이다. 현재에서 2억 5천만 년 전 부터 살아온 거북이들의 이야기로 거슬러 오르기도 하고, 2억년 후 지구 이야기로 날아오르기도 한다. 시공간을 넘나드는 그 길이 정답고 따뜻해서 오늘의 고단이 위로가 된다. 늦은 밤 우리 동네에서, 밤을 지키고 있는 약국을 만난다면 사뭇 궁금해질 것 같다.
‘오늘 그 곳에서는 어떤 세계가 펼쳐지고 있나요?’
‘사실, 세상의 수많은 도서관이 아무도 모르게 원숭이를 키운다는 것은 공공연한 비밀이다. 이것도 일종의 비밀인지 모르지만, 알고 보면 원숭이들은 책을 좋아 한다. 책 읽기를 좋아한다기보다는 무궁무진한 서가의 미로 사이에서 특정한 책 찾아내기를 더 좋아하는 것이겠지만, 물론 원숭이들은 책보다는 고소하고 달콤한 잦을 훨씬 더 좋아하고, 그렇기에 녀석들을 잘 길들이면 도서관의 수많은 장서를 순서대로 정리하는 일도 시킬 수 있다.’
그나저나, 오늘 내가 근무하는 도서관에도 원숭이가 있는지 찾아봐야겠다. 소문은 알고 있었지만 아직 한번 도 마주친 적은 없다. 원숭이들이 쉬는 시간을 알리는 종소리를 잘 들어야 할 텐데...사랑방을 오듯이 쉬는 시간 마다 도서관을 오는 1학년 꼬꼬마들과 마주친다면 도서관이 아니라 교실에서 지내야 할지도 모른다. 그럼 너네도 공부해야해.
매일 보고 지나치던 것들을 유심히 보게 된다. 그러자 단조롭다고 생각했던 일상이 새롭게 보인다. 여유로워진다. 일상의 채도를 높여주는 글 중에서 고르고 고른 문장을 몇 번이나 곱씹어 읽는다.
‘만약 진정한 작별 인사가 가능하다면 우리의 삶은 지금보다 삼천 배쯤은 가벼워질 거다. 그러나 그것은 불가능하고, 하루하루가 지날수록 이루지 못한 인사들은 점점 더 쌓여만 간다.
그리고 어느 날, 난 발밑을 보고 알았어. 내가 밟고 선 땅이 바로 그 인사들의 무게라는 것을. 그 무게가 나를 지탱해주고 나는 거기에 기대어 심연 같은 지상을 날아오르며 건너가는 거지, 무거워질수록 자꾸만 가벼워지며.’
‘만약 진정한 작별 인사가 가능하다면 우리의 삶은 지금보다 삼천 배쯤은 가벼워질 거다. 그러나 그것은 불가능하고, 하루하루가 지날수록 이루지 못한 인사들은 점점 더 쌓여만 간다. 그리고 어느 날, 난 발밑을 보고 알았어. 내가 밟고 선 땅이 바로 그 인사들의 무게라는 것을. 그 무게가 나를 지탱해주고 나는 거기에 기대어 심연 같은 지상을 날아오르며 건너가는 거지, 무거워질수록 자꾸만 가벼워지며.’ - P15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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