심연
앨마 카츠 지음, 이은선 옮김 / 현대문학 / 2023년 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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낮과 밤, 연안과 심해, 바람 한 점 없이 고요한 날과 폭풍우로 파도가 높게 오르는 날, 바다는 자주 얼굴을 바꾼다. 나는 낮에는 아이처럼 바다에 뛰어 들어 놀다가도 밤에는 선뜻 다가가지 못한다. 밤이 되면 형체가 없는 거대한 힘이 나를 삼킬 것 만 같아 바다에서 이만큼 떨어져 걷는다. 뛰어들고 싶은 순간과 멈칫하게 되는 순간들이 공존한다. 마지 못할 때가 있긴 하지만, 나서서 배를 타지는 않는다. 타지 못한다고 해야 겠다. 땅을 딛고 섰던 두 다리가 육지에서 멀어지고, 배라는 폐쇄적인 공간에 갇혀서 불친절한 파도의 일렁임에 따라 오르내리는 기분. 어린 시절 배를 타고 온 몸으로 느꼈던 그 기억의 자국은 여전히 깊다.

“브리태닉은 자매선인 타이태닉과 쌍둥이다. 병원선이라고 표시하기 위해 도장한 색깔만 다르다. 익숙한 떨림으로 그녀의 온몸이 울리고 그 첫 번째 배에 얽힌 추억이 봇물처럼 밀려든다. 그 배는 모든 면에서 바다 위의 궁전이었다.“

침몰한 두 척의 타이태닉, 브리태닉 호에서 살아남아 소설 속 주인공의 친구로 등장하는 바이올린 제솝. 이 실화를 바탕으로 유령, 그리스 신화 속의 세이렌, 아일랜드 설화라는 허구가 더해져 하나의 이야기가 되었다. 긴 이야기는 1912년과 1916년의 시간을 타이태닉과 브리태닉 호를 오가며 이어진다. 등장인물들의 상황과 불안한 심리를 따라가다 보면 그들 사이에 복잡하게 얽힌 서사의 끝에 묶여 있는 매듭이 보인다. ‘심연(The deep)’이라는 제목은 바다보다 더 깊고 어두운 인간의 내면과 그 속의 어긋난 욕망, 어긋남에 따른 불안과 공포를 뜻하고 있었다.

침몰한 타이태닉호에서 살아남아 다시 브리태닉호에 오른 애니와 바이올린. 여전히 그날의 기억에 시달리며, 가끔 소리도 지르고 악몽을 꾸지만 다시 바다로 나가서 배를 타는 건 어떤 절박함이었을까? 스스로도 이해하지 못하는 마음이 쉽게 짐작되지 않는다. 그들을 따라 두려움을 안고 배를 탔다. 가는 길목에 옅게 깔린 불투명하고 무거운 긴장감이 600 페이지 분량의 긴 이야기를 따라가는 힘이 되었다. 한동안 잊고 있었던 내 기억의 자국이 선명해졌고, 여전히 배는 무서웠지만 그 기억에서 잠시 벗어나 본다. 내 세계를 벗어난다는 감각, 책 안에서만 느낄 수 있는 자유로움, 내 세계와 책의 세계를 끊임없이 오가는 이유다. 무더운 여름 밤 보다는 서늘한 겨울밤에 읽기를 권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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