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
스트라빈스키 - 종(種)의 최후 ㅣ 현대 예술의 거장
정준호 지음 / 을유문화사 / 2021년 1월
평점 :
어서 오세요, 스트라빈스키에게
- 《스트라빈스키 : 종의 최후》란 이름의 길잡이
※ 해당 게시물은 출판사로부터 도서를 제공 받아 작성되었습니다.
※ 페이지만 있는 인용문은 모두 《스트라빈스키 : 종의 최후》에서 가져왔음을 밝힙니다.
※ 《》 : 단행본, <> : 작품 제목
2008년 클래식 음악에 막 관심을 갖게 된 사람도 스트라빈스키를 이해하는데 도움을 준 《스트라빈스키 : 현대 음악의 차르(이하 ‘현대 음악의 차르’)》. 그로부터 13년이 흐른 2021년, 《현대 음악의 차르》는 부제를 ‘종의 최후’로 바꾸고 독자들을 다시 만나게 됐다. 《스트라빈스키 : 종의 최후(이하 ‘종의 최후’)》는 <불새>, <봄의 제전> 등의 대표 발레곡들로만 기억되는 스트라빈스키가 오랜 삶을 살며 음악사에 자신의 이름을 남기기 위해 기울인 많은 노력을 보여준다. 그가 남긴 음악이 시간이 흘러도 여전히 제 자리를 지키며 20세기의 수준을 증명할 것(p.452)이란 믿음이 책 곳곳을 지배하고 있음은 물론이다. 그렇다면 《종의 최후》를 읽는 일은 곧 지은이의 믿음을 따라가는 것과 같은 얘기가 된다. 책 위에 펼쳐진 길을 우리는 어떻게 따라가야 하는가.
먼저 스트라빈스키가 림스키코르사코프에게 음악을 배운 뒤 세르게이 댜길레프를 만났을 때로 돌아간다. 이어서 발레 뤼스(Ballets Russes)에 합류해 쓴 작품들을 떠올려보자. 위에서 말한 두 작품 말고 <페트루시카>, <결혼> 등이 생각난다. 또 페르골레시 등 18세기 작곡가들의 음악에 자신의 악센트를 부여해 재생한(p.201) <풀치넬라>도 있다. 소포클레스 원작을 바탕으로 한 <오이디푸스 왕>도 잘 알려진 작품 중 하나. 지은이가 추천한 파트리치아 코파친스카야(Patricia Kopatchinskaja)의 연주로 <바이올린 협주곡>을 유튜브에서 듣고 나서 책을 보니 <아곤> 등 음렬주의의 영향을 받기 시작한 음악도 있단다. 림스키코르사코프의 영향 아래 있던 음악에서 신고전주의, 거기서 음렬주의를 기반으로 한 작품까지. 스트라빈스키가 구현한 음악 세계는 몹시 광범위하여 작품들만 모아 보면 연결성이 없어 보인다. 하지만 《종의 최후》에서는 여러 작품들에 논리성을 부여한다. 왜 스트라빈스키는 일찍부터 발레에 눈을 돌렸는지, 왜 객관적이고 감상하기 편한 예술을 향한 귀향(p.199)을 주장했는지 설명한다. 여기에 미국으로 건너간 뒤 음렬주의를 받아들이는 과정까지. 그가 선택한 음악 사조들의 당위성과 배경을 설명한다는 점은 《종의 최후》가 지닌 가장 큰 장점 중 하나다. 스트라빈스키에 익숙한 애호가들도 음악을 반추하며 그의 고민을 공유할 수 있는 것이다.
《현대 음악의 차르》와 다른 특징도 돋보인다. 2008년에 출간된 책에선 러시아 시대(1882 – 1914)와 스위스 시대(1914 – 1920), 프랑스 시대(1920 – 1939), 그리고 미국 시대(1939 – 1971)까지. 모두 4부로 나누고 시대마다 함께한 명사(名士)들의 이름을 각 장(章)의 표제로 삼았다. 그러나 《종의 최후》는 다르다. 총 20장 중 17장과 19, 20장을 빼고 대표곡들을 표제로 하여 관련된 이야기와 해설을 중심으로 짜임새를 바꿨다. 시대와 인물, 혹은 사건들이 스트라빈스키가 남긴 음악을 에워싼 모양새가 되는 것이다. 그리하여 독자들은 음악에 더 집중할 수 있다. 또 스트라빈스키가 어떤 생각으로 음악을 만들었는지도 주목하게 된다(그가 야심가적인 면모와 냉혹함을 지니고 있었다는 점을 떠올리면 더 흥미가 생긴다).
한편 《종의 최후》가 낸 길을 걷는 독자들은 이런 생각을 품을 수 있다. “가만. 지은이의 관점이 도드라져 보이는데?” 그렇다. 이 책을 쓴 정준호 음악 칼럼니스트는 자신의 음악적 취향이나 생각을 드러내길 두려워하지 않는다. 국내에서 쓰기 힘든 스트라빈스키 저작이므로 필자의 관점을 좀 과감히 드러낼 필요가 있다고 생각했다(p.17)고 스스로 머리말에서 밝히지 않았는가? 스트라빈스키의 음악을 설명하는 과정에서 인용한 쇼스타코비치에 대한 서술에서도 지은이의 시선을 엿볼 수 있다.
《현대 음악의 차르》 음악이 좋은 것이냐 나쁜 것이냐를 결정짓는 기준은 프롤레타리아에게 유익한가 아닌가에 달려 있었다. 당국에게는 베토벤이 가장 모범적인 예술가였고, 쇼스타코비치의 작품도 그들이 필요로 하는 잣대에 맞게 해석되었다. (《현대 음악의 차르》, p.249)
《종의 최후》 『시대의 소음』이 ‘시대적 양심을 가진 쇼스타코비치’와 그와 대비되는 스트라빈스키의 모습을 편파적으로 대조시킨 것과는 별개로 이 두 거장의 음악을 들어보기로 한 독자에게는 다음과 같은 조언을 하고 싶다. 많은 쇼스타코비치 팬이 그를 베토벤에 비유한다. (중략) 그 비유가 맞는다면 스트라빈스키는 모차르트에 견주어야 할 것이다. 베토벤은 말과 음악이 하나라고 했지만, 모차르트의 음악은 말을 넘어선다. (p.441)
지은이는 책을 읽는 독자들끼리 생각이 다를 수 있는 부분도 과감하게 짚는다. 머리말에 쓴 선언을 그대로 지킨 것이다. 지은이의 주장을 접한 우리는 어떻게 할 수 있을까. 받아들이거나, 아니면 반박하고 비판하기 위해 여러 자료를 찾을 수 있다. 지은이의 관점을 접한 독자들이 자신의 그것과 견주면서 지적 호기심을 충족시킬 수 있다는 점은 《종의 최후》가 지닌 매력 중 하나라고 생각한다.
그렇다면 《종의 최후》는 오직 음악만을 이야기하는가? 아니다. 19세기가 저물고 있는 때(1882년)에 태어나 20세기 한복판(1971)에서 숨을 거둔 스트라빈스키의 삶은 늘 시대 안에 머물렀다. <봄의 제전>을 쓴 해에 마르셀 프루스트가 《잃어버린 시간을 찾아서》를 자비로 출판(p.125)하기도 했고 <병사 이야기>는 스페인 독감의 유행으로 로잔에서 1회 공연에 그쳤다(p.184). 소련 방문(1962)을 할 수 있었던 건 스탈린이 죽고 난 뒤 호전된 분위기가 있었기에 가능했고(p.429 – p.430). 이렇게 《종의 최후》는 그의 삶에 영향을 미친 시대적 배경을 언급하고 림스키코르사코프, 댜길레프, 니진스키 등 여러 인물과의 음악적 작업에 대해서도 충실히 소개한다. 그리하여 이 책은 스트라빈스키를 복합적으로 이해할 수 있는 기초적인 자료를 제공한다.
스트라빈스키를 알기 위해선 스트라빈스키만 알아선 안 된다. 《종의 최후》의 서평을 준비하면서 떠올린 문장이다. 그는 여든을 바라보던 1960년대에도 유일무이한 독창성을 유지함으로써 자신이 시대에 뒤떨어지지 않는 존재임을 과시했다(p.420). 스트라빈스키는 어떤 주의나 사조에 매몰되지 않았다. 오로지 시대가 원하는 음악적 메시지에 귀를 기울여 색다른 흐름을 만들어 냈다. 이런 ‘영리하고 샘 많은 여우’의 모습을 따라가는데 《종의 최후》는 믿음직한 길잡이 역할을 할 수 있을 것이다. 음악학자이자 작곡가인 장-이브 보쇠르(Jean-Yves Bosseur)가 《서양 음악의 역사(Histoire de la Musique Occidentale)》에서 스트라빈스키를 설명하며 쓴 첫 문장과 함께.
Stravinsky occupe une situation exceptionnelle dans l’évolution du vingtième siècle.
“스트라빈스키는 20세기 음악 발달에 있어 특별한(exceptionnelle) 지위를 갖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