처음 처음 | 이전 이전 | 1 | 2 |다음 다음 | 마지막 마지막
엘뤼아르 시 선집 을유세계문학전집 121
폴 엘뤼아르 지음, 조윤경 옮김 / 을유문화사 / 2022년 8월
평점 :
장바구니담기


* 본 게시물은 출판사로부터 도서를 제공 받아 작성되었습니다. 


가장 먼저 눈에 들어온 건 폴 엘뤼아르Paul Éluard가 태어나고 죽은 해였다.


1895 - 1952


잠깐만. 내가 알고 있는 어떤 사람과 출생연도가 비슷한데...아 그래!


샤를 드골Charles de Gaulle, 1890 - 1970


엘뤼아르와 드골. 한 사람은 시인이고 또 한 사람은 군인이자 정치가였다. 전혀 비슷한 구석이 없는 둘이다. 하지만 이들은 서로 같은 시대를 보냈다. 드레퓌스 사건L'affaire Dreyfus과 반유대주의, 1차 대전의 광풍과 참상, 전간기戰間期의 화려함과 좌절. 대공황에 이은 유럽의 불안, 2차 대전의 발발과 프랑스의 굴욕적인 패배, 대독협력La Collaboration과 레지스탕스La Résistance, 그리고 해방. 프랑스, 나아가 유럽은 인간성이 훼손되고 전체주의가 들끓으며 우리 모두가 소중히 지켜온 가치가 송두리째 흔들리는(어쩌면 빼앗기는) 경험을 해야만 했다. 이 둘의 삶의 시작은, 거의 비슷한 지점에서 출발했다.

드골이야 군인이었고, 또 나중엔 레지스탕스 활동을 최종적으로(말은 많지만 그래도 어찌됐든 최후의 형태는 그렇다) 규합했던 정치적 삶을 살았다. 그렇다면 엘뤼아르와 같은 작가들은 어떻게 이 시대를 살았을까. 20세기를 공부하며 늘 궁금했던 질문이었다. 의문은 끊이지 않았고, 그런 찰나에 <엘뤼아르 시 선집>을 만났다. 읽고 나서 깨달았다. 힘들고 고통스러운 때를 보냈더라도 이를 이겨내고 나아가는 방법은 우리가 소중히 하는 무언가와 다르지 않았음을.



 "봄이 전진하듯 전진하다 사랑하다"


<엘뤼아르 시 선집>을 읽는 많은 사람들은 '사랑'이란 말을 가장 많이 만날 것이다. 당연히 그렇다. 엘뤼아르는 작품 전반에 걸쳐 사랑의 가치를 노래한 시인이기 때문에. 여기서 말하는 사랑이란 비단 개인적 차원에만 묶이지 않는다. 연인이 서로 사랑하는 감정, 우리가 누군가에 품는 연민, 사회적 약자에 느끼는 연대, 모두가 같은 밥을 먹고 같은 곳에 살고 있다는 믿음. 그 모든 것이다. 흔히 사랑은 물질적 제약을 넘는다고 이야기한다. 봄이 겨우내 쌓인 눈과 추위를 뚫고 시간의 흐름을 타고 나아가듯, 사랑이란 그러한 것이라 말한다. 사랑이 나아가며, 우리 스스로가 단단해진다고 그는 믿었다. 


"나는 소망한다 / 내게 금지된 것을"


도처에 금지된 것이 많았다. 지금도 그렇다. 각자의 주의主義에 매몰된 개인을 스스로가 금기를 만들고 자유로운 인간의 행동을 구속했다. 20세기 우리가 겪은 두 번의 큰 전쟁은 그런 사회가 만들어 낸 큰 아픔이었다. 엘뤼아르의 사랑이 넘고자 하는 건 바로 이런 '금지'였다. <엘뤼아르 시 선집> 표지를 장식한 작가 자신의 그림(1949년 작)이 보여주듯이, 우리는 서로 어깨를 맞대고 시간을 보낼 수 있는 존재들이다. 인간을 인간답지 않게 만드는 모든 존재들, 그런 금기를 향해 엘뤼아르의 사랑은 시를 타고 행진을 계속했다.


"그대는 불의를 참지 못한다"


프랑스가 겨우 6주 만에 나치 독일에 무릎을 꿇고 1차 대전의 명사名士 필리프 페탱Philippe Pétain 원수마저도 "이제부터 협력의 길에 들어선다"라고 말했던 때(1940), 엘뤼아르의 나이는 이미 적지 않았다(45세). 그럼에도 그는 움직였다. 저항했다. 1차 대전에도 참전하고 다시 레지스탕스 활동에 투신하여 마침내 나치 독일에 의해 최후를 맞았던 역사가 마르크 블로크Marc Bloch를 생각나게 만드는 지점이다. 사랑했기에, 사랑하지 못하게 하는 전체주의 체제에 맞서 싸운 것이다. 그가 쓴 시(<자유>)는 비밀리에 인쇄되어 프랑스 전역에 인쇄되기도 했으며, 레지스탕스 활동으로 인해 죽음을 맞은 동료의 소식을 접하고 '우리도 친숙하게 말을 놓읍시다 그의 희망은 살아 있습니다.'라며 사람들에게 힘을 낼 것을 북돋았다. 우리는 1940년대 그가 쓴 시들을 읽으며 믿음을 잃지 않고자 했던, 한 시인의 투쟁의 흔적을 몸소 체험하게 된다.


"용기로 빛나는 문은 모든 나이에 열려 있네"


엘뤼아르는 한 손에는 사랑을, 한 손에는 용기를 들고 삶을 살았던 시인이다. 그가 이런 시를 남긴 건, 프랑스가 해방(1944)된 뒤였다. 시간적, 물질적 제약을 생각하는 우리에게 시인은 용기에는 그런 제한이 없음을 말한다. 가혹한 시대를 통과하고 맞서 싸운 이가 건넬 수 있는 말이다. 비단 거창한 역사적 흐름을 생각하지 않아도 된다. 우리 삶도 마찬가지니까. 그래서 이 말은 '위로'가 된다. 우리 역시 삶의 모든 순간에서 용기를 낼 수 있음을, 그리고 서로를 향해 용기를 건넬 수 있음을, 그래서 우리 모두가 빛날 수 있음을 시인은 일깨운다. 


"살아왔기 때문에 나는 젊고 강합니다"

"우리 둘 우리는 충실하기 위해서만 살아간다 / 삶에"


그래서 이 모든 시들의 합류점은 '삶에 대한 강한 의지'다. 살아야 한다. 살아야만 한다. 서로 사랑하고, 용기를 갖고 끝까지 삶을 살아야 한다. 자기 앞에 놓은 삶을 사랑할 수 있는 사람만이 누군가를 사랑할 수 있고, 또 누군가에게 용기를 줄 수 있으며 서로에게 위로가 될 수 있다. 엘뤼아르는 거의 사랑을 얘기한다고 <엘뤼아르 시 선집>을 읽는 내내 생각했지만 책을 덮을 때가 다가오자 다시 느끼게 되었다. 이건 삶에 대한 시다. 삶에 대한 의지다. 삶을 살아야만 했기에 사랑했고, 저항했고, 용기를 냈다. 그렇다면 이건 우리에게 주는 깨달음이다. 살아야 한다면 우리는 언제나 젊고 충실하다. 그런 생각이 들었다.



결국 남은 건 사랑과 연대, 용기, 마지막으로 삶의 의지였다. 우리에게도 시사하는 바가 적지 않다고 본다. 우리 사회는 연대가 끊어지기 쉬운 조건이 많다. 각자가 지니고 있는 무언가에 의해 특히 그럴 때가 많다. <엘뤼아르 시 선집>은 그래서 더 우리에게 소중하다. 사랑할 수 있는 사람만이, 용기를 낼 수 있는 이만이, 나란히 걸으며 함께 할 수 있는 존재만이 스스로의 삶을 가치 있게 만들 수 있다고 시인은 믿는다. 이것이 양차 대전이 끝나고 오랜 시간이 지난 지금에도 엘뤼아르의 시가 널리 사랑 받는 이유가 아닐까.   


댓글(0) 먼댓글(0) 좋아요(0)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프랑스 지방문화 - 대서양에서 지중해까지
이상빈 지음 / 아트레이크 / 2022년 7월
평점 :
장바구니담기


글쓴이가 같은 출판사와 손을 맞잡고 펴낸 시리즈의 첫 권 <나의 프랑스>에서 그랬듯, <프랑스 지방문화>도 같은 출발점을 지니고 있다. 우리가 프랑스를 깊게 이해하고 있는가를 묻고 있는 것. 이미 작가가 전작에서 “정직하고 지독하게 승부했다면 나의 프랑스는 그 누구의 프랑스와도 다를 수밖에 없었다(<나의 프랑스>, p.6).”고 밝히지 않았던가. 프랑스를 마주하고 앉아 수십 년을 연구한 저자가 우리 사회가 프랑스를 어떻게 보는지 떠올렸을 때 문제가 있다고 여겼던 것 같다. 사실 그렇다. 우리 사회에서 프랑스가 화제가 된 지 꽤 오랜 시간이 흘렀음에도 톨레랑스, 앙가주망, 루브르…같은 정형화된 유행을 넘지 못했다. 다루는 소재의 지역성으로 파고 들어가면 문제는 더 심각해진다. 파리, 프로방스, 보르도…정도? 유명한 관광지 빼곤 우린 프랑스에 어떤 지방이 있는지 알지 못한다. 바로 여기서 <나의 프랑스>로 자신이 어떻게 프랑스와 승부하고 공부했는지 밝힌 글쓴이가 <프랑스 지방문화>를 펴낸 이유가 나온다.

프랑스엔 파리만 있는 것이 아니다. 우리가 흔히 생각하는 것과 다르게. 역사가 다르고, 같은 사건에 대한 경험이 다른 경우도 있으며, 다름을 바탕으로 다양한 문화를 일궈냈다. 그런 다양함이 모여 ‘프랑스라는 정체성’을 만들어냈다고 보는 것이 맞다. 단적으로 음악만 봐도 그렇다. 한 쪽에선 앙상블 앵테르콩탕포랭Ensemble Intercontemporain이 실험적인 현대음악을 연주하고 있다면 다른 곳에선 훌륭한 고음악 연주를 들을 수 있다. 지역에 자리하고 있는 여러 오케스트라들은 각 음반사와 활발히 함께 일하며 레퍼토리를 가리지 않고 다양한 녹음을 선보인다. 뿐만 아니다. INA(프랑스국립시청각연구소)가 보유하고 있는 여러 음악축제 음원들은 얼마나 다채로운가.

이렇듯 음악만 봐도 알 수 있는 프랑스의 풍부한 다양성이지만 책으로 공부하긴 쉽지 않았다. 여행정보 이외의 문화유산이나 역사 등에 대해 알기 아려웠다는 뜻이다. 거기다 더해서 앞에서 말한 우리 관광객들이 자주 찾는 곳에 대한 서적들이 주가 되는 경향이 짙어졌다. 이런 가운데 <프랑스 지방문화>가 프랑스 곳곳의 모습이 궁금한 이들에게 길을 열어준 것 같아 반갑다.

프랑스를 공부하는 일은 결국 마지막엔 우리 안에 자리하고 있는 프랑스에 대한 선입견을 깨는 일이 될 수 밖에 없다. 우리가 프랑스를 깊이 알지 못햇기에 몇몇 기억과 지식으로 프랑스를 쉽게 정의했던 것. 이런 선입견 중 하나가 ‘프랑스는 파리, 혹은 프로방스만 있다.’라는 것이었고, 그를 극복하는 책으로 <프랑스 지방문화>를 만나게 돼 무척 기쁘다. 당장 이 책을 여러 번 읽으며 신나게 프랑스를 더 넓게 공부할 생각이다. 한 권의 책은 우리 내면의 얼어붙은 바다를 깨는 도끼라는, 카프카의 말을 떠올리면서.

댓글(0) 먼댓글(0) 좋아요(4)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프랑스 지방문화 - 대서양에서 지중해까지
이상빈 지음 / 아트레이크 / 2022년 7월
평점 :
장바구니담기


글쓴이는 다른 책에서도 늘 자신이 바라본 프랑스의 모든 순간을 담았다. <프랑스 지방문화> 역시 마찬가지다. <프랑스 지방문화>는 프랑스가 다양한 지방을 통해 세계성을 구축했다는 점을 밝히며 우리의 관심을 더 넓게할 것을 주문한다. 단순한 여행정보가 아닌, 지방 고유의 역사, 문화와 함께

댓글(0) 먼댓글(0) 좋아요(3)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스트라빈스키 - 종(種)의 최후 현대 예술의 거장
정준호 지음 / 을유문화사 / 2021년 1월
평점 :
장바구니담기


어서 오세요, 스트라빈스키에게

- 스트라빈스키 : 종의 최후란 이름의 길잡이

 

해당 게시물은 출판사로부터 도서를 제공 받아 작성되었습니다.

페이지만 있는 인용문은 모두 스트라빈스키 : 종의 최후에서 가져왔음을 밝힙니다.

※ 《》 : 단행본, <> : 작품 제목

 

 2008년 클래식 음악에 막 관심을 갖게 된 사람도 스트라빈스키를 이해하는데 도움을 준 스트라빈스키 : 현대 음악의 차르(이하 현대 음악의 차르’). 그로부터 13년이 흐른 2021, 현대 음악의 차르는 부제를 종의 최후로 바꾸고 독자들을 다시 만나게 됐다. 스트라빈스키 : 종의 최후(이하 종의 최후’)<불새>, <봄의 제전> 등의 대표 발레곡들로만 기억되는 스트라빈스키가 오랜 삶을 살며 음악사에 자신의 이름을 남기기 위해 기울인 많은 노력을 보여준다. 그가 남긴 음악이 시간이 흘러도 여전히 제 자리를 지키며 20세기의 수준을 증명할 것(p.452)이란 믿음이 책 곳곳을 지배하고 있음은 물론이다. 그렇다면 종의 최후를 읽는 일은 곧 지은이의 믿음을 따라가는 것과 같은 얘기가 된다. 책 위에 펼쳐진 길을 우리는 어떻게 따라가야 하는가.


 먼저 스트라빈스키가 림스키코르사코프에게 음악을 배운 뒤 세르게이 댜길레프를 만났을 때로 돌아간다. 이어서 발레 뤼스(Ballets Russes)에 합류해 쓴 작품들을 떠올려보자. 위에서 말한 두 작품 말고 <페트루시카>, <결혼> 등이 생각난다. 또 페르골레시 등 18세기 작곡가들의 음악에 자신의 악센트를 부여해 재생한(p.201) <풀치넬라>도 있다. 소포클레스 원작을 바탕으로 한 <오이디푸스 왕>도 잘 알려진 작품 중 하나. 지은이가 추천한 파트리치아 코파친스카야(Patricia Kopatchinskaja)의 연주로 <바이올린 협주곡>을 유튜브에서 듣고 나서 책을 보니 <아곤> 등 음렬주의의 영향을 받기 시작한 음악도 있단다. 림스키코르사코프의 영향 아래 있던 음악에서 신고전주의, 거기서 음렬주의를 기반으로 한 작품까지. 스트라빈스키가 구현한 음악 세계는 몹시 광범위하여 작품들만 모아 보면 연결성이 없어 보인다. 하지만 종의 최후에서는 여러 작품들에 논리성을 부여한다. 왜 스트라빈스키는 일찍부터 발레에 눈을 돌렸는지, 왜 객관적이고 감상하기 편한 예술을 향한 귀향(p.199)을 주장했는지 설명한다. 여기에 미국으로 건너간 뒤 음렬주의를 받아들이는 과정까지. 그가 선택한 음악 사조들의 당위성과 배경을 설명한다는 점은 종의 최후가 지닌 가장 큰 장점 중 하나다. 스트라빈스키에 익숙한 애호가들도 음악을 반추하며 그의 고민을 공유할 수 있는 것이다.


 《현대 음악의 차르와 다른 특징도 돋보인다. 2008년에 출간된 책에선 러시아 시대(1882 1914)와 스위스 시대(1914 1920), 프랑스 시대(1920 1939), 그리고 미국 시대(1939 1971)까지. 모두 4부로 나누고 시대마다 함께한 명사(名士)들의 이름을 각 장()의 표제로 삼았다. 그러나 종의 최후는 다르다. 20장 중 17장과 19, 20장을 빼고 대표곡들을 표제로 하여 관련된 이야기와 해설을 중심으로 짜임새를 바꿨다. 시대와 인물, 혹은 사건들이 스트라빈스키가 남긴 음악을 에워싼 모양새가 되는 것이다. 그리하여 독자들은 음악에 더 집중할 수 있다. 또 스트라빈스키가 어떤 생각으로 음악을 만들었는지도 주목하게 된다(그가 야심가적인 면모와 냉혹함을 지니고 있었다는 점을 떠올리면 더 흥미가 생긴다).


 한편 종의 최후가 낸 길을 걷는 독자들은 이런 생각을 품을 수 있다. “가만. 지은이의 관점이 도드라져 보이는데?” 그렇다. 이 책을 쓴 정준호 음악 칼럼니스트는 자신의 음악적 취향이나 생각을 드러내길 두려워하지 않는다. 국내에서 쓰기 힘든 스트라빈스키 저작이므로 필자의 관점을 좀 과감히 드러낼 필요가 있다고 생각했다(p.17)고 스스로 머리말에서 밝히지 않았는가? 스트라빈스키의 음악을 설명하는 과정에서 인용한 쇼스타코비치에 대한 서술에서도 지은이의 시선을 엿볼 수 있다.


현대 음악의 차르》 음악이 좋은 것이냐 나쁜 것이냐를 결정짓는 기준은 프롤레타리아에게 유익한가 아닌가에 달려 있었다당국에게는 베토벤이 가장 모범적인 예술가였고쇼스타코비치의 작품도 그들이 필요로 하는 잣대에 맞게 해석되었다. (현대 음악의 차르, p.249)

 종의 최후》 『시대의 소음이 시대적 양심을 가진 쇼스타코비치와 그와 대비되는 스트라빈스키의 모습을 편파적으로 대조시킨 것과는 별개로 이 두 거장의 음악을 들어보기로 한 독자에게는 다음과 같은 조언을 하고 싶다많은 쇼스타코비치 팬이 그를 베토벤에 비유한다. (중략그 비유가 맞는다면 스트라빈스키는 모차르트에 견주어야 할 것이다베토벤은 말과 음악이 하나라고 했지만모차르트의 음악은 말을 넘어선다. (p.441)

 

 지은이는 책을 읽는 독자들끼리 생각이 다를 수 있는 부분도 과감하게 짚는다. 머리말에 쓴 선언을 그대로 지킨 것이다. 지은이의 주장을 접한 우리는 어떻게 할 수 있을까. 받아들이거나, 아니면 반박하고 비판하기 위해 여러 자료를 찾을 수 있다. 지은이의 관점을 접한 독자들이 자신의 그것과 견주면서 지적 호기심을 충족시킬 수 있다는 점은 종의 최후가 지닌 매력 중 하나라고 생각한다.


 그렇다면 종의 최후는 오직 음악만을 이야기하는가? 아니다. 19세기가 저물고 있는 때(1882)에 태어나 20세기 한복판(1971)에서 숨을 거둔 스트라빈스키의 삶은 늘 시대 안에 머물렀다. <봄의 제전>을 쓴 해에 마르셀 프루스트가 잃어버린 시간을 찾아서를 자비로 출판(p.125)하기도 했고 <병사 이야기>는 스페인 독감의 유행으로 로잔에서 1회 공연에 그쳤다(p.184). 소련 방문(1962)을 할 수 있었던 건 스탈린이 죽고 난 뒤 호전된 분위기가 있었기에 가능했고(p.429 p.430). 이렇게 종의 최후는 그의 삶에 영향을 미친 시대적 배경을 언급하고 림스키코르사코프, 댜길레프, 니진스키 등 여러 인물과의 음악적 작업에 대해서도 충실히 소개한다. 그리하여 이 책은 스트라빈스키를 복합적으로 이해할 수 있는 기초적인 자료를 제공한다.

 

 스트라빈스키를 알기 위해선 스트라빈스키만 알아선 안 된다. 종의 최후의 서평을 준비하면서 떠올린 문장이다. 그는 여든을 바라보던 1960년대에도 유일무이한 독창성을 유지함으로써 자신이 시대에 뒤떨어지지 않는 존재임을 과시했다(p.420). 스트라빈스키는 어떤 주의나 사조에 매몰되지 않았다. 오로지 시대가 원하는 음악적 메시지에 귀를 기울여 색다른 흐름을 만들어 냈다. 이런 영리하고 샘 많은 여우의 모습을 따라가는데 종의 최후는 믿음직한 길잡이 역할을 할 수 있을 것이다. 음악학자이자 작곡가인 장-이브 보쇠르(Jean-Yves Bosseur)서양 음악의 역사(Histoire de la Musique Occidentale)에서 스트라빈스키를 설명하며 쓴 첫 문장과 함께.

 

Stravinsky occupe une situation exceptionnelle dans l’évolution du vingtième siècle.

 

스트라빈스키는 20세기 음악 발달에 있어 특별한(exceptionnelle) 지위를 갖는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4)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국화와 칼 - 일본 문화의 틀
루스 베네딕트 지음, 김윤식.오인석 옮김 / 을유문화사 / 2019년 8월
평점 :
장바구니담기


이 서평은 을유문화사에서 진행한 국화와 칼서평단 활동의 결과로 작성되었으며 출판사로부터 도서를 제공 받았음을 알립니다.

 

  을유문화사에서국화와 칼(The Chrysanthemum and the Sword : Patterns of Japanese Culture)6판을 새롭게 내놓았다는 소식을 들었다. 책을 받고 난 뒤 책상 위에 올려놓고 바라보기를 몇 분. 일본에서의 극우의 득세와 우리 정부의 일본군 성노예와 강제징용에 대한 문제 제기에 반발하며 일본의 경제 보복이 몇 달 째 이어지고 있는 지금 국화와 칼이 다루고 있는 주제는 아직까지도 우리에게 유효한가? 쉽사리 글을 쓰기가 어려웠다.

  그러다가 이 책의 옮긴이와 초판연도가 눈에 들어왔다. 201810월 세상을 떠난 고() 김윤식 선생이 공동역자인 오인석 현 서울대 명예교수와 함께 국화와 칼을 번역한 것은 1974년이다. 굴욕적 수교(1965)가 있고 난 뒤 9년이 지나 한국의 독자들과 만난 책. 그 때 옮긴이가 지닌 문제의식이 과연 우리에게 유효한지를 스스로에게 물어본다면 국화와 칼6판의 의미가 더 크게 다가오리란 생각이 들었다.

옮긴이의 말과 본문을 보며 국화와 칼2019년의 우리에게 알려주는 목소리에 귀를 기울여 보자.

 

1. 방법론 : 우리는 어떻게 일본을 바라보아야 하는가?

 

미국에서 크게 발달한 문화 인류학의 방법론에 의거한 저자의 연구는 매우 전문적이다. 여기서 전문적이라는 것은 단순한 일본 기행문이나 견문기가 아니라 엄밀한 학문적 노작(勞作)이라는 뜻이다.” (p.15)

 

  포털에서 국화와 칼에 대한 내용을 검색하면 아주 중요한 사실을 하나 알려준다. 바로 저자인 루스 베네딕트(Ruth Benedict)가 한 번도 일본에 가보지 않은 상태에서 이 책을 썼다는 것이다.

  태평양 전쟁 시기 미국은 서양의 상식과는 다른 짓(?)을 태연히 저지르는 일본을 면밀히 분석하여 전후 그들이 어떤 행동을 취할 것인지 예측하는 활동이 절실히 필요했고 국화와 칼은 그 의뢰의 결과로 만들어진 것이다(의뢰 주체는 미 전쟁정보국). 베네딕트는 철저히 인류학적 방법으로 일본의 문화 분석에 착수했고 사료 분석이나 미국에 거주하고 있는 일본인과의 면담 등의 방법이 활용되었다. 일본에 방문한 적이 있는 사람들의 기록을 채집하는 것은 물론이다. 그녀가 진행한 연구 과제 분석과 자료 수집의 성격은 <1장 연구 과제 일본>에서 자세히 다뤄지고 있다.

  루스 베네딕트의 인류학적인 접근은 우리에게 매우 중요한 시사점을 하나 준다. 연구의 목적이 어떠하든 실질적인 목적을 위해서 엄정한 학문적 방법론을 고집할 것. 기록에 지나치게 의존하지 말고 연구 대상과의 면담 등 직접적인 방법도 적절히 혼합해야 하며 이들이 가지고 있는 이면의 원인을 잘 살펴볼 것. 아베 신조(安倍晋三)로 대표되는 극우의 집권이 계속될 것이라 예측되는 지금의 정국에서 우리가 일본을 효과적으로 분석하고 예측하기 위해 반드시 필요한 자세다.

2. 인식론 : 일본 문화의 근간을 이루는 것은 무엇인가?

 

이 책의 정수는 계층제도(hierarchy)의 분석에 있다. 그 계층제도가 근대사회로 넘어올 때 어떠한 질서와 충동을 일으키는가에 대한 고찰은 제3메이지유신(明治維新)’ 속에 선명히 드러나 있다.” (p.16)

 

일본인은 국내 문제와 마찬가지로 국제관계로 계층제도의 관점에서 보아 왔다. 최근 10년 동안 일본인은 일본이 국제적 계층제도의 피라미드에서 차츰 정점에 도달하고 있다고 생각해 왔다. 그리고 이미 서양 여러 나라가 정점을 차지한 지금에도, 여전히 현재의 상태를 감수하고 있는 그들의 태도 밑바탕에는 역시 계층제도에 대한 견해가 깔려 있다.” (p.75)

 

  《국화와 칼의 내용을 다소 과격하게 줄이면 이렇다. 일본인들은 각자가 알맞은 자리에 위치해야 편안하다고 느낀다. 이는 오랫동안 사무라이()가 지배한 일본의 봉건 제도와 밀접하게 결합되고 있으며 그들은 정치, 경제, 문화, 심지어 외교의 영역에 있어서도 계층제도를 확립하기 위해 노력한다. ()과 기무(義務), 기리(義理) 등은 그런 계층제도를 유지하는 장치다. 1868년 메이지유신으로 서양의 문물을 받아들였지만 일본인의 사고방식은 그대로 유지되었고 이는 차츰 상승하고 있는 국력에 발맞춰 세계에서 자신들의 위치를 알맞게하기 위한 목적으로 전쟁을 벌였다. 군국주의가 더 이상 효력이 없음을 본 그들은 미국의 정책에 순응하고 평화주의 노선을 걷고 있지만 군국주의가 다시 힘을 얻게 되면 일본은 다시 그 야욕을 드러낼 것이다.

  이런 국화와 칼의 시선은 지금도 여전히 유효하다. 일본이 평화헌법 9조를 폐기(내지는 개정)하고 전쟁이 가능한 보통 국가로 발돋움하려는 것도 이를 방조, 혹은 독려하는 미국이 없다면 불가능한 활동이다. 즉 그들은 세계에서 자신들의 위치를 다시금 알맞게 유지하기 위한 시도를 계속하고 있으며 자신들의 지위를 위협할 뿐 아니라 세계의 바람직한 질서를 위협하는 대한민국에 대한 반감도 이 틀에서 해석이 가능하리라 본다.

  이처럼 개인, 사회, 국가, 세계 등 모든 대상을 향해 알맞은 자리를 지키고 유지하고 차지하고자 하는 일본의 속성에 대한 정보를 압축적으로 제공하고 있는 국화와 칼의 시선은 매우 강력한 인식 논리다. 당장 루스 베네딕트가 이 책의 마지막에 쓴 말이 현실이 되고 있지 않은가.

 

현재 일본인은 군국주의를 실패로 끝난 한 줄기의 광명으로 여기고 있다. 그들은 군국주의가 과연 세계의 다른 나라에서도 실패한 것인가를 알기 위해 다른 나라의 동정을 주시할 것이다. 만일 실패하지 않았다고 한다면, 일본은 스스로의 호전적 정열을 다시 불태워 일본이 얼마나 전쟁에 많은 공헌을 할 수 있는가를 보일 것이다. 만일 다른 나라에서도 군국주의가 실패한 것으로 판단된다면, 일본은 제국주의적 침략 기도는 결코 명예에 이르는 길이 아니라는 교훈을 얼마나 뼈저리게 체득했는가를 증명할 것이다.” (p.406)

 

3. 마치며 : 1970년대와 지금의 한국, 그 사이에 놓인 국화와 칼

 

“1970년대까지만 해도 일본에 대한 연구는 우리나라에서는 거의 황무지에 가까웠다. 가끔 출판된 사사로운 인상기나 체험기는 주관성 때문에 오히려 일본에 대한 이해를 그르칠 수 있었다. 일본 연구의 고전이 된 이 책은 그렇기 때문에 번역할 가치가 있었다.” (p.17)

 

  1965년 한일 간 국교가 정상화되자 한국과 일본의 교류는 날로 늘어갔고 그 반대급부로 일본에 대한 경제적 예속은 한층 깊어졌다. 국화와 칼이 출간된 1974년은 광복(1945)을 맞이한 지 약 30년 밖에 되지 않은 때였다. 식민통치에 대한 반감이 남아 있었고 굴욕적 한일 국교 정상화에 반대하는 목소리의 열기도 그대로였다. 그럼에도 일본과의 경제적 밀착이 가중되는 현실에서 역자들은 일본을 올바르게 바라보기 위한 방법을 고민했던 것 같다.

  그 때보다 우리가 일본에 대한 정보를 받아들이는 방식은 비교할 수도 없이 늘어났다. 일본이 아직까지 종이신문을 바탕으로 하는 언론 시장 구조를 가지고 있지만 인터넷이 생기면서 일본 언론을 인터넷으로 보고 분석하는 네티즌들도 늘어났으며 일본에 방문하는 관광객들도 불매운동 진행 전까지 날로 늘어가는 추세였다. 서점에서 일본어 학습 서적을 보려면 서점 입구에 들어서고 1분도 되지 않아서 찾을 수 있고 NHK 뉴스 콘텐츠도 쉽게 볼 수 있다.

  그러나 우리는 여전히 이 정보들을 효과적으로 선별하고 분석할 수 있는 사람이나 활동이 절실히 필요하다. 1970년대에 역자들이 품었던 올바른 일본의 이해를 위한 노력은 지금도 현재진행형인 것이다. 그런 의미에서 이번 국화와 칼6판은 우리가 처음으로 돌아가 일본의 문화를 짚어보고 오늘의 현상을 이해해야 할 필요성을 다시 알려준다.

 

-끝-


댓글(0) 먼댓글(0) 좋아요(1)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처음 처음 | 이전 이전 | 1 | 2 |다음 다음 | 마지막 마지막