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쟁과 평화 1~4 세트 - 전4권 (무선) 문학동네 세계문학전집
레프 톨스토이 지음, 박형규 옮김 / 문학동네 / 2017년 11월
평점 :
장바구니담기


(1) 들어가며 : 전쟁의 영광 뒤에 가려진 그들의 이야기

 

  나팔 소리가 하늘을 메우고 뿌연 먼지가 피어오른다. 이내 함성과 비명이 뒤섞인다. 소리가 잦아들자 먼지가 걷히고 어지러이 널린 시체들이 보인다. 몇 줄의 역사만으로는 담을 수 없는 참혹한 현장. 전쟁은 이런 광경을 몇 번이고 목격해야 하는 비극이다.

  1812년의 조국전쟁도 마찬가지였다. 어머니 대지를 위협하는 가장 큰 적인 나폴레옹의 프랑스를 꺾고 조국을 지켜낸 자랑스러운 전쟁으로 기록된 러시아의 자랑스러운 역사. 그러나 이는 조국을 위해 많은 사람들이 죽거나 다치는 아픔이 있었다는 이야기와 같다. 레프 톨스토이(Лев Толстой, 1828 1910)는 전쟁을 겪으며 흐느끼고 아파했던 이들에게 주목했다. 예나 지금이나 빗발치는 총알을 무릅쓰고 가장 앞에 서는 사람들은 바로 청년들. 결국 조국전쟁을 다룬 대서사시인 전쟁과 평화(Война и мир)는 나폴레옹의 침략을 겪은 젊은이들의 이야기이며 그들이 전쟁을 통해 어떤 깨달음을 얻고 삶을 살아가는지를 다룬 성장기이도 하다.

 

(2) 올라가며 : 고민하고, 흔들리는 청년들

 

 그런데 대단한 전쟁을 겪기로 예정된 이들이 어째 우리보다 대단한 모습을 보여주는 것 같지는 않다. 아니, 오히려 똑같거나 못하다. 1권과 2권에 나오는 주인공들은 쉽게 고민하고, 기운을 잃거나 방황하여 우리에게 큰 공감(!)을 불러일으킨다. 막대한 재산을 가지고 있던 아버지가 세상을 떠나면서 모두가 부러워하는 재산상속자가 되지만 아내와 갈등을 빚고 번민을 거듭하는 피예르 베주호프. 나름의 야심을 갖고 전장에 나섰으나 아우스터리츠(Austerlitz)에서 큰 부상을 입고 돌아온 고향에서 아내의 죽음을 보고 삶에 대한 회의를 갖는 안드레이 볼콘스키. 그런 그를 사랑하게 되었으나 안드레이의 부재 중 아나톨 쿠라긴의 유혹에 넘어가게 되는 나타샤 로스토바. 모두가 방황하는 청춘들이다.

  게다가 등장인물들의 생각 또한 다소 설익었다는 느낌을 받게 되는데 피예르를 보면 특히 그렇다. 1권의 첫머리를 장식하는 야회에서 그는 나폴레옹을 예찬하며 유럽 전역에서 일어난 전쟁을 옹호한다. 연회에 있던 사람들이야 차르 궁정과 관련된 이들이니 그렇다 해도 글을 읽는 독자들도 선뜻 피예르의 생각에 고개를 끄덕이기 어렵다. 피예르 뿐만 아니라 안드레이, 니콜라이 로스토프 등 다른 주인공들도 마찬가지다. 정치적 견해는 물론이고 삶을 바라보는 시선이 불완전하다. 그렇기에 전쟁과 평화1권과 2권에 등장하는 주인공들의 모습을 한 마디로 말하자면 미성숙이다.

 

(3) 정상에서 : 그들이 찾은 것은 삶에서 느끼는 행복과 사랑이었네

 

 

문학동네의 '만화로 읽는 불멸의 고전 시리즈' 중 《전쟁과 평화》 표지.

안드레이와 나타샤의 무도회 장면을 그리고 있다.

(이미지 출처 : 문학동네 홈페이지 - http://www.munhak.com/)

 

 행복해지기 위해서는 행복의 가능성을 믿어야 한다고 했던 피예르의 말은 진리이고, 나도 지금은 그것을 믿는다. 죽은 자를 묻는 일은 죽은 자에게 맡겨야 하며, 생명이 있는 한 살아서 행복해져야 한다. (2p.334 335)

 

  안드레이와 나타샤가 만난 2권의 무도회 장면은 흔히 무도회장 특유의 아름다운 광경을 잘 그려냈다는 평가를 받는다. 하지만 조금 다른 시각에서 평가해보면 그 대목에서부터 조금씩 등장인물들에게 사랑이라는 감정이 자리 잡는다고 말하고 싶다. 함께 춤을 추면서 서로에 대한 연정이 싹튼 둘은 말할 나위 없고 프리메이슨 운동 등에 힘을 쏟는 등 삶의 방향을 잡지 못하던 피예르에게도 사랑이 조금씩 파고들었다. 이제 마음에 들어온 사랑이 각자에 맞는 방향으로 나타나는 일만 남은 것이다.

  아버지의 반대를 가라앉히기 위해 잠시 나타샤 곁을 떠나기로 한 안드레이와 그를 기다리다 아나톨의 손을 잡은 나타샤. 이 둘이 사실이 아닌 진실을 알았으면 좋겠다는 생각이 들던 찰나 보로지노 전투에 참전한 안드레이가 치명상을 입는다. 그가 합류한 부상병 대열은 피난을 떠난 로스토프 가문의 행렬과 길을 같이하게 되고 마침내 둘은 사랑의 불이 꺼졌다고 생각될 때 다시 만난다. 자신을 배신한 연인. 하지만 안드레이는 그녀에게 미안하다고 말한다. 울음을 터뜨리는 나타샤. 그렇다. 안드레이는 나타샤를 진심으로 사랑했다. 나타샤도 마찬가지였다. 사랑하는 이에게 무슨 말을 더 할 수 있을까. 사랑했기에 행복했다. 당연히 어떤 조건도 붙지 않았다. 둘은 그저 지나간 허물과 아픔을 잊고 행복한 순간만을 기억한다. 그리고 그 사랑을 간직한 채 안드레이는 눈을 감는다. 행복했던 기억을 안고.

  옐렌과의 부부관계가 파경으로 치닫고 삶의 의미를 얻지 못해 떠돌던 피예르. 하지만 역설적으로 불타는 모스크바에서 포로로 잡히고 난 뒤에 진정한 깨달음을 얻게 되니 바로 농민보병 플라톤 카라타예프(플라투샤)와의 만남이 그것이다. 포로라는 비참한 처지에도 감자에 소금을 쳐서 먹는 걸 잊지 말라고 태연하게 말하는 플라톤을 보며 피예르는 무슨 생각을 했을까? 자신에게 사랑을 주지 못한 채 많은 시간을 보냈던 스스로의 모습이 떠올랐으리라. 어찌 보면 지금 내가 가지고 있는 것과 내 눈 앞에 있는 것을 사랑하고 아끼는 것이 더 나은 삶을 향한 출발이 아닐까? 따지고 보면 전쟁과 평화에서 보인 피예르의 방황은 결국엔 자신의 삶을 돌보지 못한데서 비롯된 문제들이었다. 그렇게 깨달음을 얻은 피예르는 진정으로 스스로를 사랑하는 법을 배우고 어떤 고난과 역경, 흔들림에도 고개 숙이지 않고 자신을 잃지 않는 방법을 터득했다

 

(4) 내려가며 : 프랑스어로 가득한 19세기 초의 러시아, 그리고 승리의 원동력

 

 톨스토이는 전쟁과 평화를 쓰기 위해 수많은 자료를 참고했는데 이에 대한 생각을 다음과 같이 나타내고 있다.

 

내 소설에서 역사적 인물이 말하고 행동하는 모든 대목은 내가 만들어 낸 것이 아니라 여러 자료에서 나온 것이고, 집필하는 동안 나의 서재는 참고자료들로 완전한 하나의 도서관을 이루었으며, 자료의 제목들을 여기에 열거할 필요는 없겠지만, 나는 언제라도 그것을 보여줄 수 있다. (4, p.544)

 

  그가 이렇게 자신 있게 말한 것처럼 전쟁과 평화19세기 초 러시아의 상황 등을 엿볼 수 있는 내용들로 가득하다. 이렇게 톨스토이가 도화지가 아닌 책 위에 그린 그림들을 하나 둘 살펴보는 것도 전쟁과 평화에 다가가는 또 하나의 독법(讀法) 중 하나라 대표적인 측면만 여기에 짧게 제시하고자 한다.

  《전쟁과 평화가 보여주고 있는 19세기 러시아의 모습 중 가장 눈에 띄는 것은 프랑스어의 사용빈도가 높다는 점이다. 18세기부터 표트르 대제(Пётр I, 재위 1682 1725)와 예카테리나 2(Екатерина II, 재위 1762 1796)의 강력한 의지에 힘입어 서구의 제도와 사상이 러시아로 들어오게 되고 이후 많은 러시아의 귀족들이 프랑스어를 평상시에 구사하게 되는데(당시 유럽 문화를 주도하던 국가 중 하나가 프랑스였으므로) 톨스토이는 이를 놓치지 않고 전쟁과 평화에 프랑스어를 쓰는 귀족들의 모습을 잘 묘사했다. 이 때문에 오늘날 전쟁과 평화를 배우는 러시아 학생들이 프랑스어로 된 부분을 보며 골머리를 앓는 불상사(?)가 자주 일어난다는 이야기도 들린다. 비록 프랑스어 원문을 표기한 것은 아니지만 최근 문학동네 출판사에서 박형규 고려대 노어노문학과 교수의 번역으로 새롭게 펴낸 전쟁과 평화에는 프랑스어로 표기된 부분이 이탤릭체 번역으로 되어 있어 얼마나 이 책에서 프랑스어의 사용 비중이 높은지 짐작할 수 있다.

  이렇게 천천히 책장을 넘기다 보면 과연 러시아는 어떻게 프랑스를 이길 수 있었는지에 대한 의문을 품게 된다. 톨스토이는 전쟁과 평화에서 기회가 될 때마다 이를 말하고 있는데 놀랍게도 민중이 자신이 해야 할 일을 한 것을 그 까닭으로 제시했다. 차르도, 스페란스키도, 그 어느 권력자도 민중의 의지를 의도한 방향으로 끌고 올 수 없었다. 오로지 민중들은 자신의 자리에서 마땅히 해야 하는 일들을 했다. 그는 거대한 사건 속에서 결정적인 인과관계를 찾으려는 시도를 비판하며 특히 위대한 인물로 인해 역사적 흐름이 바뀌었다는 흔한 믿음을 부정한다. 운명론이나 결과론, 그리고 소수의 위인들에 구애받지 않은 톨스토이의 서술 방식은 조국전쟁을 바라보는 신선한 시각을 제시했고, 이는 지금에도 그 위력을 잃지 않았다고 생각한다.

 

(5) 나오며 : 우리 시대에 전쟁과 평화를 내미는 까닭

 

  왜 전쟁과 평화를 읽어야 하는가. 이제 그 답을 할 때가 왔다.

  처음엔 이 책을 통해 19세기 전반의 러시아를 알고 싶었다. 하지만 책을 다 덮고 마음속에 남은 것은 우리의 삶이 얼마나 소중한지, 그리고 그를 사랑하는 것에서 진정한 시작이 있다는 깨달음이었다. 사실 전쟁과 평화를 읽으며 나폴레옹 전쟁 당시의 전역(戰域)이나 정치적 상황, 풍습 등을 아는 것은 부차적인 문제에 속한다고 생각한다. 그보다 살아가는 자신의 모습이 소중히 하고 이를 사랑하는 것이 행복의 출발이라고 안드레이가, 피예르가, 나타샤가 돌아가며 말하는 외침을 듣는다면 이 책에서 얻는 바가 결코 작지 않다.

  언제부턴가 있는 그대로의 모습을 평가받기 어려운 시대가 되었다. 끊임없이 타인과 자신을 비교하는 문화 속에서 우리는 작아질 때가 많고 심지어 누군가에 대한 연정을 품을 때도 고민을 거듭하는 경우를 보게 된다. 그들에게 전쟁과 평화는 말한다. 삶을 사랑하고, 행복해지는 것이 우리가 추구해야 하는 진정한 목적이라고 말이다. 이것이 오늘날 우리가 고전이라 불리는 이 책을 먼지더미 속에서 꺼내 다시 책상 위에 올려놔야 할 이유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1)
좋아요
공유하기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