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황현산의 현대시 산고 - 황현산 유고 평론집
황현산 지음 / 난다 / 2020년 9월
평점 :
현대시(現代詩, the modern poetry)는 개화기 이후 최근까지 존재한 시(詩) 장르 전체를 가리킨다. (출처 : 학문명 백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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산고 : 1. 아이를 낳는 일 2. 아이를 낳을 때 느끼는 고통 (출처 : 국어사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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황현산 선생님의 책 중에 가장 먼저 읽은 것이 <내가 모르는 것이 참 많다>다.
연로하신 선생님의 트위터 모음집은 그 존재 자체만으로도 흥미롭고 재미있었으며
무엇보다 유익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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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번에 난다에서 받은 책의 제목은 <황현산의 현대시 산고>였다.
쉽게 펼치지 못했으며, 펼친 이후에도 쉽게 읽혀지지 않았으며, 어문학부 때로 돌아가서
시험 전에 전공책을 펼친 기분이었다. 그러나 읽다 보니 문장에 빠져들었다. 선생의 문장이다. 얼마나 정제된 문장이었을까. 나는 만난적 없는 선생에게, 만날 수 없는 선생에게
겸손과 통찰과 진솔함을 배우게 되었다. 이 시대에 자신의 실패를 인정할 수 있는 어른이 얼마나 될까? 현대시와 산고라는 단어를 번갈아 생각하며 읽어나가니 이 책이 역사책으로 읽혀졌다. 역사는 내가 제일 좋아하는 분야이기 때문에 버거웠지만 단숨에 읽을 수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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현대시 산고, 우리가 이렇게 편안하게, 쉽게 읽고 있는 시는 어떻게 탄생했을까?
근대와 현대 사이에 무슨 일이 있었을까?
망국과 식민지와 해방과 전쟁과 독재와 가난. 시인들은 자신의 시를 통해 어느 정도
도피를 할 수 있었을까? 아니 그 시대에 시인들이 제정신으로 살아가기 힘들었던 건,
정확히는 착란을 느끼며 시를 써야 했던 건 당연한 게 아니었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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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사 속에 이름을 남긴 사람들을 볼 때, 우리는 각자가 보고 싶은 면만 보거나,
널리 알려진 부분만 보려고 한다. 그러나 선생의 말대로 우리는 당시의 상황, 그 사람의 다양한 면, 다양한 시기 등을 고려해야 한다. 육사의 안 좋은 시들처럼 우리는 어떤 시인은 강한 시인이야, 어떤 시인은 마음이 여린 시인이야, 라고 색안경을 써서는 안 된다.
시인 뿐 아니라 모든 사람에게도 마찬가지. 선생은 항상 인생을 알려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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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제 시와 조금 가까워지고 시집을 모으기 시작한 시뽀시래기가 이 책을 소화하려다간
과식으로 배탈이 날 수도 있겠지만, 선생의 글은 친절하고 그 맛을 음미할 수 밖에 없어서
곱게 씹어 먹게 만들기에 다 읽고 나서도 배탈이 나진 않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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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육사, 김수영, 아폴리네르, 백석, 김종삼, 발레리, 전봉건, 박서원 등 많은 시인들의 시와 이야기를 만날 수 있어 좋았다. 무엇보다 예전부터 궁금했던 시를 번역하는 일에 대해 자신의 실패를 숨기지 않고 말씀해주셔서 진솔하게 읽을 수 있었다. 최근에 김이듬 시인의 번역시가 미국에서 수상한 사실을 상기하게 되었다. 이 사실을 황현산 선생님이 아셨다면 정말 기뻐하시고 뿌듯하게 생각하셨겠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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번역의 어려움, 그럼에도 그 어려움을, 재창조를 해내는 일. 얼마전 미국에서 입상한 김이듬 시인의 소식을 선생이 들었다면 얼마나 좋아하셨을까, 우리 문학은 일본에 몇 십년 뒤졌으나 이제는 어깨를 나란히 하지 않을까? 언젠가 우리 나라에서도 노벨문학상 후보를 낼 날이 오지 않을까, 하는 희망을 가져 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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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행이 반복되듯 현대시의 역사도 한사이클이 완성되어 선생의 책에 나온 시인을 보며, 우리 시대 시인을 떠올리게 된다. '이 정도 시는 나도 쓸 수 있어요.'라고 자신감 넘친 모습으로 선생과 마주했을 박서원 시인에게서는 이원하 시인의 모습이, 어느 겨울 육사의 시에서는 이병률 시인의 모습이 겹쳐 보인다. 현대시 산고. 출산의 고통이 있었고, 여전히 양육의 고생이 있지만, 그 고통을 또 느끼게 하지 않으려는 선생과 많은 이들의 노력 덕분에 지금의 대한민국은 제법 좋은 토양에서 시를 쓰고 소설을 쓰며 비평을 하는 것이 아닐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