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간 불평등 기원론 펭귄클래식 85
장 자크 루소 지음, 김중현 옮김 / 펭귄클래식코리아 / 2010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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루소는 인간 불평등 기원론을 통해 인간의 시작이 어떠했는지, 그리고 그 '평등'한 상태에서 어떻게 불평등이 생겨나게 되었는지를 과학적인 견해보다는 논리적 추론과 사고를 통해서 이야기를 진행시켜 나간다. 물론 1700년대 중반의 역사와 인류의 기원에 대한 인식과 지금의 인식은 비교할 수 없으리만큼 큰 차이가 있다. 아무리 당대의 천재였던 루소였던들, 지금 평범한 20대의 삶을 살아가는 내 기본 상식보다도 훨씬 못한 역사, 과학의 상식을 가지고 있을 수 밖에 없다. 따라서 이 책에서 루소가 밝히는 인류의 역사적 진행에서 루소가 잘못 알고 있는 과학적 사실에 대해서는 이야기할 가치가 없다. 이 책은 그런 맞지 않는 사실을 제외하고, 오직 논리적 추론으로만 밝혀내고 있는 인류의 기원과 불평등의 생성과정을 좇아가기에도 벅차며 루소와 함께 고민해볼 이야기가 무궁무진하다.

 

 

 

인간.기원.

최초의 인간은 어떠한 삶을 살았을까. 루소는 이 책에서 인간들이 최초로 발생했을 시기를 떠올린다. 루소는 그들이 각자 따로 떨어져 동물과 같은 삶을 영위했을거라고 짐작한다. 루소는 과연 어떻게해서 그러한 생각을 하게 되었을까. 그는 왜 인간이 무리지어 살기보다는 '처음엔 혼자 살아갔으리라고 생각했을까. 과연 인간은 어떤 상태로 그 기원을 맞이하게 되었을까. 물론 루소가 책에서 말한대로 아무도 그 정확한 시작을 모른다. 그러나 내 생각으로는 루소가 말한것과 같이 개인 대 개인으로의 삶보다는 애초부터 씨족 중심 이상의 집단을 이루어 생활했을 확률이 높다고 생각한다. 동물의 삶을 보자. 인간이라는 과가 생겨나기도 전에 이미 세상에는 너무도 많은 동물들이 살아가고 있었다. 그리고 그 동물들 가운데에서 인간이 진화해나와 따로 떨어져나오게 되었다. 즉 이미 인간이 태어났을때 다른 동물들은 그들 스스로 어떻게 살아가야 하는지 각자의 방식에 맞게 체화되고 발전된 상태였을 것이다. 그 와중에 인간이라는 새로운 이웃이 그들 주변에 나타나게 되었다. 그들은 서로를 경계했을 것이다. 초식동물은 그들이 자신들을 잡아먹지 않을까 경계했을 것이고 육식동물은 그들이 자신보다 상위포식자일지, 아니면 내가 잡아먹어도 되는 동물일지 알아내기 위해 경계했을 것이다. 이 상태에서 인간들은 어떤 삶(삶이다)을 살아야 했을까. 물론 애초 상태를 개별적인 상태로 본다고 할지라도 인간이 개별상태로 존재했을 시간은 극히 짧았을 것이다.(인류의 총 역사를 보았을때) 그들은 집단을 형성할 정도는 아닐지라도, 최소한 가족단위의 모임은 형성해야 나름대로의 생존을 위해 싸울 수 있는 최소한의 조건이 마련되었을 것이다. 물론 그 안에서 어떤 역할은 있었겠지만 그 역할에 따른 서열은 아직 존재하지 않았을 것이다. 다들 서로의 생존을 위해서 각자의 역할을 맡았고, 그것들 중 어느것 하나가 충족되지 않는다면 서로를 지켜줄 수 없기에. 그들은 생존의 필수적인 최소단위로써 운명공동체적인 삶을 공존했을 것이라고 나는 생각한다. 문명이라는 것이 생기기 전에도, 마치 여러 동물들이 집단 생활을 하듯이 최초의 인간 역시 다른 동물들에 맞서기 위해, 오로지 살기 위해 최소한의 인원수 이상으로는 모여서 생활했을것이라고 생각한다.

그렇다면 루소는 왜 인간이 개별상태를 오래도록 유지했다고, 인간이 서로 모이고 모이게 된 것은 아주 오랜 시간이 지나고 문명이라는 것이 발아하는 시점이라고 생각했을까. 그것은 루소가 태초의 자연상태를 어떻게 평가했는지, 그리고 사회화,집단, 문명을 어떻게 생각했는지를 생각해보면 조금은 답을 유추할 수 있다. 루소에게 태초의 자연상태에 놓여있던 인간은 완벽한 인간이었다. 신체적으로 강건하고 질병도 거의 존재하지 않았으며 다른 동물들과 같이 자연이 준 무한한 치유력으로 다친 곳도 금세 낫게 되었다. 또한 오로지 본능만이 존재하고 지식과 욕심이 없으니 그 자체로 소박한 스스로의 삶을 영위해 나갈 수 있는 존재였다.

"어린시절부터 혹독한 날씨와 가혹한 계절에 익숙해지고 피로에 단련되었으며, 벌거벗은 채 무기도 없이 자신의 생명을 방어하고 사냥감을 다른 맹수들로부터 방어하거나 아니면 도망치지 않을 수 없었기에 인간들은 강건하고 거의 불변하는 체질이 된다.....(중략)....매기인의 신체는 자신이 아는 유일한 도구이기 때문에 그는 자신의 신체를 다양하게 사용한다. 하지만 우리의 신체는 연습부족으로 그런 다양한 사용이 불가능해져 버렸다."

 

하지만 이것은 꼭 개별상태로 인간이 존재하지 않더라도 충분히 가능한 일이다. 인간은 전능하지 않다. 하나일때보다 둘이 있을때, 둘이 있을때보다는 서넛이 있을 때 내가 살 수 있는 확률이 높아짐은 지식과 이성과는 무관하게도 본능적으로 알아차렸을 것이다. 그래서 그들은 생존을 위한 최소한의 집단을 이룬채 살아갔을 것이다. 그리고 이 생존을 위한 최소한의 집단과 루소가 말한 인간사이에는 루소가 이 책에서 주장하는 바를 그대로 따라가는데 그다지 큰 차이가 없다. 왜냐하면 루소가 그들 인간을 개별상태로 상정한 이유는 그들에게 아직 사회가 존재하기 이전의 태초상태를 원했기 때문일 것이다. 그러나 최초의 인간들이 집단을 이룬것은 루소가 말한 '사회'가 아니다. 다만 루소가 사회라고 생각하지 않았던 동물들의 집단과 같은 그저 무리지음 그 뿐이었다. 따라서 우리는 루소의 인간 개개인의 개별상태를 이해함에 있어서 문명의 시작이 아닌 단순한 생존을 위한 필수단위 정도로 인간이 모여있는 상태를 생각하면 될일이다. 물론 바로 그 생존을 위한 필수단위에서 인류가 문명으로 나아갔음은 자명한 일이지만, 이 책은 그와 같은 과정으로 나아가기 위한 수천,수만년의 세월을 담고 있기 때문에 이 책에서 말하는 자연상태를 이해함에 있어서는 그다지 무리가 가는 일은 아닐 것이다.  

 

 

 

인간.사회화.질병.나약함

 

그토록 강건한 신체를 가지고 자연의 품 안에서 살아가던 인간은 사회화를 거치면서 나약해지기 시작했다.

"생활방식에서의 극도의 불균등, 이를테면 저마다 다른 지나친 나태나 지나친 노동, 식욕과 관능성의 자극 및 만족에서의 용이성,...(중략)... 온갖 정염의 무절제한 발현, 육체적.정신적 피로, 온갖 상태에서 겪에 되는 끊임없이 영혼을 좀먹는 비애와 고통.이런 것들은 우리의 불행 대부분이 우리 자신의 작품이며, 만일 우리가 자연이 명령한 단순하고 단조로우며 혼자 사는 생활 방식을 유지했더라면 그 모든 것을 거의 피할 수 있었을 것이라는 점에 대한 우울한 증거들이다."

 

루소는 이와 같은 내용을 통해 문명사회에서 벌어지는 병들의 원인이 자연상태에서 기인한 것이 아니라 문명사회에서만 생길수 밖에 없는 구조적 모순들과 인간의 무절제와 탐욕에 기인한 고통, 즉 지금으로 표현하면 스트레스라고 이야기한다. 즉 자연상태에서는 병이 일어나지 않는다는 것이 루소의 주장이었다. 그렇지만 (사전적인 의미의)병의 원인이 오로지 이러한 문명사회에 근저에서 자리잡은 것이라는 것은 그다지 설득력을 가지고 있지 못하다. 인간이 병에 걸리는 요인들 중에는 분명 사회적인 요인이 아니라 자연때문에 생기는 병들또한, 특히 그러한 것일수록 치명적인 것이 많기 때문이다. 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루소의 주장이 틀린 것은 아니다. 문명이 생기고 계급이 생겨난 이래 하위계층의 열악한 삶, 비위생적인 삶은 항상 질병의 원인이 되어온 것 또한 사실이다. 그들이 앓는 배앓이나 전염병등은 분명 비자연적인 요소에 의해 생겨났음은 분명하다. 또한 그리고 루소가 살았던 시절보다 더욱 복잡다단해진 삶을 살아가는 현대초문명사회에서는 '스트레스'라는 것이 병의 주 원인으로 급격히 떠오르고 있음 또한 주지의 사실이다. 아무리 병원에서 검사를 받아보아도 별다른 이상을 발견할수 없지만 분명 통증을 느끼고 호소하는 환자가 점점 늘어난다는 점은 인간의 몸에서 스트레스가 어떤 역할을 하는지 극명하게 보여주는 사례라고 할 수 있다. 루소가 말하는 문명때문에 생기는 질병은 루소의 시대보다도 오히려 시간이 지나면 지날수록 우리에게 더욱 큰 영향을 끼치리라는 것은 명약관화한 일이다.

 루소가 인간의 질병에 관한 이야기를 편 다음에 나오는 가축이야기 또한 그와 궤를 같이 한다. 루소는 가축들이 원래의 야생상태보다 가축이 된 이후 힘과 활기를 잃는다는 것을 예로 들면서 인간 또한 자연상태에서의 강건한 상태에 비해 집단을 이루고 사회화를 이룩하면서 동물이 가축이 되면서 약해지듯 인간 또한 나약해졌음을 이야기하고 있다. 앞서 말한 문명과 질병에 대한 상관관계를 이야기하면서 연이어 인간이 사회화를 통해서 결국 인간은 자연상태에 비해 약해지게 되었음을 보여주고 있다. 그런데 왜 인간은 나약함의 수렁으로 스스로를 옭아매게 되었을까?

 

 

 

인간.개선가능성.천형(天刑).

인간은 왜 스스로를 나약함의 구렁텅이로 빠뜨리게 되었는가. 루소는 그것을 흡사 천형과도 같은 인간의 개선가능성 때문이라고 보았다. 개선가능성. 한마디로 인간의 호기심, 창의력, 추론능력 등의 지적능력과 그 의문을 실행에 옮길 수 있는 행동력을 포괄한 개념일 것이다. 자연상태의 인간들이 시간이 흐르자 자신들도 모르는 사이에 점차 하나 둘 깨닫기 시작했다. 하늘의 불과 자연상태의 불의 차이점을 느낄 수 있었으며 스스로 불은 만들어보기 위해 평생을 바쳤을 것이다. 그리고 동류의 인간들과 점진적인 의사소통을 하기 시작했고 언어라는 것도 만들기 시작했을 것이다. 그리고 루소는 탄식했다. 인간만이 가지고 있는 이 천형의 무게 앞에서.  

"인간과 동물을 구분 짓게 하는 거의 무한한 그 능력이 인간의 모든 불행의 원인이라는 것을, 그 안에서 평화롭고 순진무구한 세월을 보내게 될 그 원초적 상태로부터 세월의 흐름과 함께 인간을 끌어내는 것이 바로 그 능력이라는 것을, ...(중략)...결국에 가서는 자기 자신과 자연의 폭군이 되게 하는 것도 바로 그 능력이라는 것을 우리가 인정해야 하니 우울한 일이 아닐 수 없다."

드디어 루소가 하고자 하는 말의 실체를 조금 파악했다. 인간이 지금과 같은 불평등의 불행을 겪는 이유는 바로 개선가능성. 즉 인간의 이성때문이라는 것. 이 무궁무진한 개선가능성의 가능성 앞에서 인간은 수천,수만년의 시간동안 불을 피우고 언어를 만들고 사회를 만들기 시작했다. 그로부터 다시 유구의 세월이 흐르고 인간은 이제 미개인으로 돌아갈 수 없는 문명인이 되었다.

 

다만 이 부분에서 루소의 시대에 흔히 보이는 스스로 그렇게 비판하는 인간,인간이성의 오만함이 엿보인다. 루소는 인간의 언어의 생성과정을 설명하면서 역시 인간을 개별적인 상태에 놓여있는 것으로 생각했다. 그러한 상태에 놓여있던 인간이 스스로의 힘으로 원초적인 언어를 만들기 시작했다고 설명한다. 그러나 전제조건 자체가 맞지 않는다. 그는 인간과 동물은 다르다고 생각했을까? 이미 우리는 오늘날 동물들의 원초적인 의사표현 방식에 대해 알고 있다. 울음을 통해, 행동을 통해 동물들은 그들 동류의 동물들에게 간단한 의사표현을 할 수 있다. 자연상태의 인간들 역시 '동물들과 마찬가지로' 생존을 위해 최소한의 집단생활을 했을 것이고 동물들과 비슷한 의사소통의 수단을 가지고 있었을 것이다. 그리고 그것은 루소가 밝힌대로 자연의 외침이 대부분이었을 것이다. 즉 인간은 개별적인 상태에서 언어를 '알아서 스스로' 만들어내지 않았다. 인간 역시 다른 동물들과 다를 바 없이 그 시작은 같았을 것이다. 그러나 이 부분에서 개선가능성이 빛을 발했을 것이다. 인간들은 동물과 다르게 조금씩 더 표현하기 시작했고 그만큼 더 관념들이 자라나기 시작했을 것이다. 표현과 관념은 서로가 서로에게 자양분이 되어주며 스스로 자라갔을 것이다. 그리고 마침내 정확한 분절로 된 의사표현, 언어를 만들어내기 시작했을 것이다.

루소는 그 스스로 인간의 개선가능성을 그토록 미워하고 안타까워하고 지금의 불평등을 만들어낸 그것을 저주했을지 모르지만 결국 루소 역시 인간의 개선가능성에 대해 무한한 신뢰와 찬사를 금하지 않았던 것이다. 하지만 인간의 개선가능성은 무에서 유를 창조하는 능력이 아니다. 인간의 개선가능성은 그말 그대로 주위에서 본 것들을 조금 더 그들의 몸에 맞게 개선시키는 능력이었을 것이다.

 

 

 

루소.인간. 무지. 무위. 동정심

그렇다면 루소는 미개인과 문명인을 어떤 시선으로 바라보았을까. 미개인은 문명인에 비해 악한 존재였을까. 인간은 애초에 악한 존재이기 때문에 문명의 힘을 빌려 사회속에서 선한 존재로 거듭나야 하고 통제해야 하는 존재인가. 자연상태의 미개인을 무지하다고 하여,미덕을 모른다고 하여 악하다고 할 수 있는가. 루소의 인간관은 이 부분에서 자연스럽게 드러난다. 루소는 자연상태란 자기 보존의 노력이 타인의 자기 보존에 가장 덜 해로운 상태, 즉 서로 어떤 영향력도 주지 않는 상태이기 때문에 결과적으로 가장 평화로운 상태였다고 생각하였다. 의존적인 인간일수록 약하다. 그리고 자연상태의 인간은 의존적이지 않았다. 결국 자연상태의 인간은 의존적이지 않았기 때문에 같은 인간에게 해를 끼칠 필요도 없었으며 이용할 필요도 없었다. 이것이 루소가 자연상태의 인간성(性)에 대해 말하고 싶은 핵심이었을 것이다. 즉 인간은 애초부터 선하지도 악하지도 않은, 선과 악의 개념이 존재조차 하지 않은 상태에서 시작하였다고 말하고 있다. 그리고 루소는 한가지 비장의 카드를 꺼내든다.

동정심. 선과 악이 무엇인지도 모르는 인간이 기본적으로 가지고 있었을 마음.

"나는 우리처럼 약하고 불행을 많이 겪을 수밖에 없는 존재들에게 부합하는 자질인 동점심에 관해 말하고 있다. 그 미덕은 모든 반성의 습관에 앞서는 만큼 인간에게 더욱 보편적이고 유익하며 너무도 자연적이어서 동물조차도 때로 그에 대한 뚜렷한 표시를 보인다." 

 

루소가 자연상태를 설명하기 위한 마지막 비장의 카드다. 무지하고 무위했기에 인간들간에 어떠한 상호 연관성이 없었던 그 순수한 자연상태에서 인간에게 가장 공통적이고 근본적으로 남아있었던 마음, 동정심의 존재는 자연상태의 인간들이 어떠한 삶을 영위했을지 결론내리게 해준다. 그에게 이성과 문명, 그에 따른 탐욕과 무자비가 존재하지 않았던 자연상태는 인간의 시작이었고 또한 지향점이었다.

 

"그러므로 다음과 같은 결론을 내리자. 즉, 일도 언어도 집도 전쟁도 서로 간의 교류도 없이 숲 속을 이리저리 돌아다니는 미개인은 다른 동료 인간의 필요를 전혀 느끼지 않았을 것이고, 해칠 욕구도 없었을 것이며, 그들 중 누구도 개인적으로 알려고도 하지 않았을 것이다. 그는 정념에도 거의 지배받지 않고 자족하면서 그 상태에 알맞은 감정과 지식만을 가졌으며, 자신의 진정한 필요만을 느꼈고, 보는 것이 재미있다고 생각되는 것만 바라보았다." 

 

 

 

그리고 자연상태의 인간들에게 오랜 세월이 흘렀다. 그리고 그 루소가 말하는 완벽한 평등을 이루고 있던 자연상태의 끝 무렵에 도착하게 되었다.

 

 

 

 

<인간 불평등 기원론>이라는 이름에 걸맞게 루소는 이 책에서 인간의 기원으로 거슬러 올라가 하나씩 하나씩 정리하면서 내려온다. 그리고 마침내 인류가 평등했던 시간이 거의 다 저물어가고 불평등의 기원을 찾아가기 시작한다. 루소는 2부의 시작부분에서 드디어 인간의 불평등, 그 기원에 대한 이야기를 뿜어낸다. 자연상태의 끝무렵, 다시 말하면 불평등으로 치닫기 위한 극한의 시대에서 시작하여 사회와 법이 만들어지기까지를 적나라하면서 웅장하게 살피고 있는 약 20페이지에 달하는 이 부분은 이 저작의 가장 핵심이다. 1부의 그 어렵고도 어려운, 그러나 그것만으로도 이미 충분히 위대한 정리와 가설과 시간의 흐름은 단지 이 20여 페이지를 위한 서론에 불과하다고 할 정도로 이 내용은 책의 압권을 이룬다.

 

 자연상태의 시간들이 흐르고 흐르자 인간의 개선가능성이 슬슬 본성을 발휘하기 시작했다. 인간은 우연히 불을 인지했고 드디어 불을 만들어내는데 성공했다. 물론 불을 처음으로 인지한 사람과 처음으로 만들어낸 사람사이에는 우리는 알 수 없는 수백,수천년의 시간이 존재했을 것이다. 어쨌든 인간은 불을 만들어내는데 성공했다. 그리고 불 뿐만 아니라 차츰차츰 도구라는 것을 만들어내는데 성공했을 것이다. 우연히 발견한 날카로운 것들에서 이제는 점점 스스로 그러한 것들을 깎아내고 생산할 수 있을 정도로. 수천년,수만년의 세월동안 이루어낸 이정도의 진보 속에서 인간은 이제 생존을 위한 필수단위의 모임이 아니라 그 이상이 모일 수 있는, 그것이 더 안정적임을 인식하는 데 성공했다. 그리고 이러한 집적효과는 그동안 낳은 진보를 더욱 가속화시킬 수 있었다. 인간이 많이 모이다보니 자연의 외침 수준의 언어가 아닌 더욱 세분화되고 구체적인 언어가 만들어지기 시작했다. 그리고 역시나 그 언어를 타고 인간의 머리도 점점 무거워지기 시작했다. 불의 발명과 언어의 구체화는 수만년동안 이룩했던 태초 인간들의 생존노력의 정화였다. 이제 인류의 진보는 우리의 손에 곧 잡힐 수 있는 정도까지 오게 되었다.

 

 

감정.존경심.가치

 

인간이 느낀 최초의 감정은 생존의 욕구였다면, 인간이 군락을 이루게 된 이후 점점 부성애와 모성애 등의 감정들을 알아갔을 것이라고 하였다. 그러나 이 부분은 처음부터 말한대로 생존을 위한 필수단위가 존재했을 시절부터 조금씩 진전되고 있었을 것이다. 그들은 서로 스스로의 생존을 위해서 결속을 다져갔을 것이고 이러한 과정에서 인간의 감정은 자연스레 나타나기 시작했을 것이다. 그리고 생물이라면 본능적으로, 아니면 살기 위해서라도 좋고 싫음을 기본으로 한 기본적인 감정은 당연히 자연상태에서의 인간도 가지고 있었을 것이다. 다만 인간이 점점 군락을 이루면서 기본적인 감정 이외에 조금 더 복잡하고 미묘한 감정들은 생겨났을 것이다. 그것들 중에 주목해야 할 것들이 바로 존경심이다. 존경심의 시작은 루소의 말대로 그리 대단한것이 아니었을 것이다. 조금 더 사냥을 잘하는 사람, 조금 더 도구를 잘 만드는 사람, 그리고 조금 더 인간들간의 갈등을 중재할 수 있는 사람이었을 것이다. 잠깐. 갈등이라고? 분명 자연상태에서는 갈등이란 존재하지 않았다. 서로 싸워서 얻을 것이 없었기 때문이다. 그러나 인간들이 필수적인 수가 아닌 필요한 정도의 수 이상으로 모이자 자연스레 갈등은 일어나게 되었다. 그것의 이유가 무엇인지는 중요하지 않다. 아니 중요하다. 그러나 알 길이 없다. 그 갈등의 시작이 살아있는 것들 특유의 본능인 것인지, 아니면 루소의 말대로 배려를 받고 싶어하는 스스로의 자존심들 때문이었는지는. 어쨌거나 인간들이 필요 이상으로 모이자 갈등은 생겨났을 것이다. 그리고 그 갈등을 중재하는 것은 처음에는 그들보다 조금 더 싸움을 잘하는 사람이었을 것이고 나중에는 싸움을 잘하는 사람들 중에서도 점차 그 갈등을 효과적으로 조율할 수 있는 사람들이 나타났을 것이다. 어쨌든 인간들이 모이자 갈등이 생기고 그 과정에서 중재를 할 사람이 필연적으로 나타날 수 밖에 없었다. 그리고 이러한 과정들 속에서 존경심이 나타났고 가치(value)의 개념이 생겨나기 시작했을 것이다. 물론 물질적인 가치는 그 이전에도 존재했을 것이다. 살기위해서는 어떠한 것들이 더욱 중요한 것인지 판단하는 것이 가치의 시작이었을테니 말이다. 그러나 이런 생존을 위한 가치에서 시간이 흐르고 군락이 형성되면서 함께 살아가기 위한 가치가 점점 발견되고 중요하게 자리잡았을 것이다. 생존을 위한 필수단위에서 아주 기초적으로 행해졌던, 특별한 서열이 정해지지 않았던, 설령 서열이 존재하였더라도 그 서열로 인한 차등이 존재하지 않았던 그 시절에서, 이제는 점점 차등을 위한 것들이 생겨나기 시작했다.

 

 

소유. 갈등. 법.

생존을 위한 최소의 단위에서는 소유가 존재할 수 없었다. 물론 저장이라는 개념은 존재했을 것이다. 그러나 그것은 최소단위의 구성원 각각의 몫이 아닌 최소단위 전체를 위한 저장의 개념이었을 것이다. 말그대로 그들은 생존이 지상최대의 목표였기 때문이다. 그러나 인간들이 이러한 생존을 위한 최소단위의 모임이 아니라 점차 더 많은 수의 무리를 이루기 시작했을 때, 즉 우리가 아닌 나와 남으로 인간의 머리에 인식이 시작되었을 때 소유는 생겨났을 것이다. 또한 집단생활을 통해 내것과 너의 것의 구분이 조금 어려워지기 시작하자, 그리고 필요 이상의 소유물이 조금이라도 '존재'하게 되는 그 순간 갈등은 점차 격화되었을 것이다. 그리고 이 소유에 대한 갈등은 인간이 점차 수렵에서 농업과 경작으로 생활양식이 변화함에 따라 절정을 맞이했을 것이다. 순간순간 이동하는 사물의 소유문제보다, 한 해, 혹은 한평생 고정되어 있는 토지의 소유문제는 인간들의 갈등을 잉여생산물간의 꼭 필수적이지 않는 것들의 소유권 갈등문제속에서 다시 한번 생존을 위한 필수적인 소유권 갈등문제를 촉발시킬 수 있는, 생존의 문제였기 때문이다.

결국 마침내 갈등을 중재하던 사람으로부터 갈등을 중재하는 원칙이 생겨나기 시작했다. 그리고 이 원칙은 보다 많은 땅을 가지고 있는 사람들의 주도하에 생겨났을 것이다. 왜냐하면 루소의 말대로 무엇이던 처음에 생겨나는 것은 그것이 꼭 필요한 사람들로부터 만들어지기 때문이다. 이미 땅을 많이 가지고 있고, 그 땅을 지켜야 하는 사람들, 그 사람들로부터 원칙은 생겨나고 그 사람들로 인해서 지켜지기 시작했을 것이다. 그 시대에 이미 땅을 많이 가지고 있을 수 있다는 건, 전에 언급하였던 존경심, 그 존경심을 받는 사람들이 대부분이었을 것이기 때문이다.

드디어 거의 다 왔다. 인간은 자연상태에서 출발하여 법이라고 하는 제도를 잉태하기 시작했다. 그리고 이것은 이제 계급제도라는 사생아를 낳게하였다.

 

 

법.신분.부.

법이 있으면 그것을 지키는 사람과 그것을 만들어내는 사람, 그리고 법 자체를 지켜내는 사람이 필요하다. 이 법을 지키는 사람과 만들고 지키는 사람, 처음 그 두부류의 사람들의 차이는 그렇게 크지 않았을 것이다. 그저 그들이 모인 사회에서 조금 더 존경할 만한 가치가 있는 사람이었을 뿐이었다. 그러나 그것이 시간이 흐르고 흐르자 점차 고착화되기 시작하였다. 더이상 인간은 각자가 가진 능력에 따라 존경심을 드러내기 보다는 각자가 가지고 있는 신분에 따라 혹은 각자가 가지고 있는 잉여재산의 크기에 따라 존경심이 발휘되기 시작하였다. 존경심을 받는 인간은 점점 그 스스로를 드러냄이 심해졌을 것이고 마침내 법을 통한 인간의 사적소유가 시작되었을 것이다. 더이상 존경심이 존경심으로만의 역할을 하지 않았다. 존경심은 권위를 낳았으며 권위는 욕망을 낳고 욕망은

권력을 낳았다. 그리고 그 권력을 통해 물건의 소유 뿐 아니라, 나를 존경해주는 사람들을 법의 울타리 안에서 강제로 가지고 싶어졌다. 그렇게 인간의 평등상태는 사회를 통해서, 토지를 통해서 고착화되고 경직화되었으며 결국 부의 분배와 법을 통해서 신분을 만들어 인간들을 스스로의 불평등한 세계로 몰아넣었다. 이젠 드디어.

 

이미 너와 내가 가진것이 불평등할 뿐 아니라 너와 내가 이미 그 자체로 불평등한 시대가 마침내 도래하게 되었다.

 

 

 

 

사회.진행.흐름.방향.

처음 이 단락의 키워드는 사회.발전.방향 이었다. 그러나 곧 발전은 진행으로 바뀌었다. 그것이 루소의 의견에도, 내 생각에도 맞을 것 같았기 때문이다. 사회는 점점 발달하였는가. 인간이 발생한 태초 이래로 인간은 점점 발전되어 왔는가. 루소는 그렇지 않다고 이야기한다. 루소는 태초의 자연상태. 자연이 우리에게 준 권리, 즉 하늘이 우리에게 준 권리가 지금 침해당하고 있다고 생각했다. 루소가 생각하는 가장 이상적인 인간의 모습은 태초의 자연으로 돌아간 만민의 평등한 상태였다. 정념이 존재하지 않고 고뇌가 존재하지 않으며 탐욕이 존재하지 않는 사회. 각각의 인간이 서로의 권리를 가지고 서로에게 종속되지 않으며 자유로움을 향유할 수 있는 상태였다. 즉 루소에게 있어서 인간이 태어난 이래 인류는 점점 퇴보하여 왔다. 애초에 서로 평등하고 서로에게 권리를 가지지 않았던 인간들은 시대가 흐를수록 능력이 있는 사람에게, 부가 있는 사람에게, 권력이 있는 사람에게 점차 종속되어 왔으며 그만큼 불평등이 커지는 사회로 진행되어 왔다고 보았다. 루소에게 인간사회는 100점 만점의 시대에서 처음으로 불평등이 생기는 순간 0점의 시대가 되었으며 그 이후 급속하게 마이너스로 진행되어 왔다.

루소의 이야기대로 루소가 살던 절대왕정시대까지 유럽의 사회는 점점 불평등이 심화되는 사회로 진행되어왔다. 중세시대 왕과 교황으로 양분되었던 국가의 권력은 이제 오로지 하나. 왕에게 오롯이 집중되었다. 또한 식민지의 개발로 인하여 유럽인들 밑에 더욱 불평등과 차별을 받게된 식민지 백성들이 존재하게 되었다. 루소가 보아온 것은 여기까지. 그는 오히려 중세사회보다도 더욱 불평등의 스펙트럼이 넓혀진 시대에서 불평등의 극을 보게 되었다. 따라서 루소는 과거의 근원으로 돌아가자는 주장으로 다시 환원될 수 밖에 없었을지도 모른다. 역사는 다시 흐르고 흘러 사회는 더이상 자연의 품으로는 돌아갈 수 없는 지경으로 이르렀다. 그러나 그렇다고 해서 불평등이 루소의 시대보다 심해지지는 않았다. 루소의 시대 이후로 역사는 조금씩 진행이 아니라 '발전'이 되어갔다.

 

 

 

다시 법.제도.인간.

 

루소는 결국 발전이 아닌 그저 세월의 흐름 속에서 평등이라는 절대의 가치로 산정한다면 절대적으로 퇴보만 가득했던 시대까지 살았다. 그래서 결국 루소는 다시 자연상태로 돌아가자고 제창했다. 태초의 상태로. 모든 인간이 스스로 만족할 줄 알고 스스로 강건했던 그 시대로 돌아가자고. 그렇다면 그때까지 극으로만 치달았던 불평등은 모조리 해소될수 있을 것이라고 생각했다. 결국 그의 주장은 당시 기득권들에게 철퇴를 맞았을 것이고 평생을 가난한 상태에서 삶을 마감해야 했을 것이다. 당연하다. 이미 세상은 기득권의 것인데 그들에게 그것을 버리고 다시 태초의 상태로 돌아가자고 했으니 그것은 어쩌면 그의 숙명이었을 것이다. 그러나 그렇다고 해서 그가 불행하고 쓸모없는 삶을 살았던 것은 아니다. 그의 사상은 결국 프랑스 대혁명을 일구워냈다. 모든 인간이 자연상태에서 받은 인권이 있다는 사실, 모든 인간은 태초부터 불평등하지 않았다는 사실, 지금의 불평등은 세상이 만들어냈다는 그의 논리는 그 당시 혼미했던 인간의 개선가능성에 다시 새로운 공기를 불어넣어주었다. 루소의 시대 이전까지 점차 마이너스의 시대를 걷던 세상은 인간의 개선가능성에 루소라는 촉매제가 결합하자 다시 새로운 발전가능성이 생겨나기 시작했다. 다시 인간은 물질적인 것 뿐만 아니라, 정치적으로 무형의 자산을 만들어내며 발전하기 시작했다. 모든 인간이 태초에 평등했다는 사실, 그 사실의 환기는 인간이 자연상태에서 불평등의 인위적인 시대에 도달한 이래 수만년의  세월동안 잠들어 있던 인간의 이성과 인권에 대한 본능을 자극했다. 결국 인간은 새로운 '제도'를 만들어내기 시작했다.

루소의 말은 반만 옳고 반은 틀렸다. 다름이 아니다. 옳고 그름이다. 인간은 더이상 태초의 상태로 돌아갈 수 없다. 태초의 상태로 돌아가기에는 이미 너무 깊고 넓은 강을 건너버렸다. 어쩌면 바다를 건너 다른 대륙으로 넘어온 것일지도 모른다. 어쨌든 이제 다시 강 건너 저편으로 돌아갈 수 있는 배는 존재하지 않는다. 인간은 이제 새로운 땅에서 새로운 제도를 만들어야 한다. 그토록 루소가 경멸해마지 않았던 법과 제도를 만들어야 한다. 불평등의 시계를 다시 조금이라도 평등의 시간으로 돌려놓기 위해서.

루소는 제도 자체를 악의 근원으로 보았다. 물론 어떠한 제도든지간에 그 제도라는 것이 존재하는 자체만으로 사람은 둘로 갈라지게 된다. 그 제도를 만들고 수호해야 하는 사람과 지켜야 하는 사람. 그러나 지금까지 그 제도를 만들었던 사람은 그 제도를 통해 이득을 보거나 지킬 필요가 굳이 없었던 인간들이었다. 그러나 루소를 통해서 세상의 시계가 거꾸로 돌아가기 시작했다. 이제는 제도를 만드는 사람도 형식적이나마 제도의 울타리를 넘어서서는 없게 되었다. 제도 그 자체의 본질적인 문제는 해결할 수 없지만, 그 본질에 속하는 사람들의 성질을 바꿔버린 것이다. 이제는 더이상 제도의 위에 다른 사람이 존재하지 않는다. 비록 형식적일지언정. 그러나 세상은 그 형식적인 것에서 시작했다. 아무것도 없는 상태에서 인간은 개선가능성이라는 세상 초유의 능력을 통해 이곳. 불평등의 끝까지 도달했다. 그리고 그 끝으로 오기 시작한 시작에는 원칙, 제도, 법이라는 형식이 존재했다. 결국 지금의 불평등을 만들어낸 처음에는 거의 존재하지 않던 세상에서의 맨처음의 형식이었다. 그 겨자씨 같던 형식하나에서 인간은 여기까지 진행 혹은 발전되어왔다. 그렇다면 지금도 역시 마찬가지다.

자그마한 것부터 시작하면 된다. 그리고 루소가 건드린 인간의 개선가능성과 인권에 대한 자의식은 자그마한 것이 아니었다. 인간은 수만년에 걸친 불평등의 세월을 불과 수백년의 세월동안 상당부분 돌려놓았다. 물론 아직 돌아가야 할 시간이 많다. 루소가 그렇게 바라마지 않던 자연상태의 평등한 곳으로 다시 돌아가기엔 수백, 수천년의 세월이 필요할지도 모른다. 하지만 그것은 이미 시작되었다. 루소가 그렇게 경멸하였던 제도라는 것으로부터. 제도는 다시 인간들은 모두 태어날때부터 평등하다는 인식을, 우리가 1000년전에 태어났다면 전혀 새로운 제도와 인식으로 채워졌을 우리의 머리와 감정과 본능과 몸속에 집어넣고 있다. 수만년의 세월을 거스르기에는 아직 '루소의 시대'가 너무도 짧다. 인류는 루소의 시대부터 다시 발전하기 시작했다. 물론 그 사이사이 다시 그 세월을 역행하려는 시도 또한 존재하였다. 그러나 루소의 말대로 인류의 시간은 무구하다. 수만년의 세월속에서 그런 일들은 티끌하나에 지나지 않는다. 인류는 다시 발전할 것이다.  그리고 언젠간 그토록 루소가 그리던 자연상태에는 도달하지 못할지언정, 그때의 평등을 향해서 조금씩 다가설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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