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더블린 사람들 ㅣ 펭귄클래식 96
제임스 조이스 지음, 한일동 옮김 / 펭귄클래식코리아 / 2010년 10월
평점 :
제임스 조이스. 더블린 사람들.
이 이름을 아는 사람이라면 그 이름만으로 읽어보고 싶게 만드는 호기심과 희망, 그리고 그와 동시에 내가 과연 읽어낼 수 있을까? 라는 좌절감을 동시에 안겨줄만한 이름이다. '율리시스'라는, 역시나 너무도 유명하고, 사실 읽어본 사람이 거의 전무하기에 왜 유명한지는 모르지만 어쨌든 모두들 유명하다고, 20세기 소설을 꼽으라면 무조건 다섯 손가락 안에 들어가는 그 이름값으로, 그리고 수 많은 사람들이 시도하지만 결국 다들 포기하고 만다는 그 작품의 압도적인 이름값 앞에서 그 작품의 작가 제임스 조이스라는 이름 역시 가까이 하고 싶지만 다가가기에 너무 먼 당신같은 존재가 되어왔다.
제임스 조이스라는 너무 먼 존재와 그나마 한발자국이라도 가까이해보고 싶은 사람들에게 그나마 조금 쉽게 접근해볼만 한 책이 보인다. 더블린 사람들.
작가가 가장 처음 내놓은 산문작품으로 더 유명한, 제임스 조이스가 자신의 문학적 세계관을 완성시킨 그 곳의 이야기. 15편의 단편소설들로 이루어진 이 작품은 우리에게 나도 제임스 조이스의 작품을 '완독'했다는 기쁨을 비교적 쉽게 누릴 수 있게 해주는 작품으로 보인다. 최소한 나는 그렇게 여기고 시작했다.
단편소설,장편소설. 중독
더블린 사람들은 단편소설의 모음이다. 15편의 10페이지 남짓한 작품부터 60페이지에 가까운 소설들의 묶음이다. 보통 이런 소설집은 각각의 주제를 담고 있는 것이 보통이다. 그리고 그 소설 모음집의 이름 또한 그 중 대표할 만한 것의 이름을 붙인다. 그러나 이 <더블린 사람들>은 그냥 오롯이 더블린 사람들이고 또 그래야만 한다. 15개의 단편소설로 이루어진 이 작품은 이 15개의 작품이 하나로 모여 따로놀던 변신로봇들이 합체하여 더욱 크고 멋진 하나의 로봇을 이루듯이, 따로 또 같이 움직이며 하나의 세계와 작품을 구성한다. 첫 작품 '자매'에서 플린 신부의 '죽음'으로 시작한 작품은 작품 동안 한 인간의 성장을 다루듯이, 소년기부터 청년기, 장년기를 다루고 마침내 '죽은 사람들'로 마침표를 찍는다.
유기체 라는 건 이런 걸 두고 하는 말인가 보다. 전체와 부분이 절대적인 조화를 이루고 있다. 각각의 작품은 더블린 사람들 하나하나의 모습을 파헤치고 끄집어낸다. 그 끄집어낸 이야기들은 밋밋하고 허무하기도 하며 소소하다. 그리고 그 이야기들의 나열과 조합은 결국 더블린 사람들의 둔탁하고 침울한 분위기를 이루어낸다. 결국 단순히 집합체라고 하기엔 끈쩍한 연관성을 지니고 있는 <더블린 사람들>의 분위기는 그 하나하나의 작은 작품들의 총합 이상을 담아내고 있다. 그리고 그 <더블린 사람들>이 만들어낸 분위기의 총합은 결국 각각 하나의 작품과 일맥상통하며 다시 하나의 작품안에서 환원될 수 있다. 그래서 이 소설은 단편소설로 이루어진 장편소설을 만들어낸다.
이 작품의 묘한 중독성은 여기에서 나온다. 분명 이 소설은 그렇게 큰 재미를 담아내고 있지는 않다. 물론 소설은 재미로만 읽지는 않기에. 그렇다고 페이지를 넘길때마다 조금씩 몸을 굳게 만들고 이성을 마비시키는 작가와 작품의 전형적인 카리스마나 압도감 역시 그다지 느끼지 못한다. 그다지 재미있지도, 어쩔 수 없이 페이지를 넘길 수 밖에 없게 만드는 전형적인 카리스마를 풍기지 않음에도, 분명 다음 이야기가 이어지는 내용이 아님에도 이 작품은 하나의 이야기가 끝나면 곧장 다음 이야기로 넘어가고 싶게 만든다. 이 묘한 이끌림은 결국 작가가 배치하고 유도해낸 유기적인 장편소설이 만들어낸 의식의 흐름을 따라가면서 생긴 중독의 발로이다. 한 작품 한 작품 따라가다보면 우리는 어느새 더블린 사람들이 쳐놓은 끈끈한 그물에 걸려 마지막 책장을 덮을 때가지 제임스 조이스의 마수에서 빠져나가지 못한다.
허무
얼마전 화제에 끝난 시트콤 '지붕뚫고 하이킥'의 결말을 가지고 많은 말들이 있었다. 절정부분의 치솟는 긴장감을 맥없이 흐트려놓은 다소 허무하고 뜬금없는 결말은 시청자들 사이에서 많은 찬반 논란을 일으켰다. <더블린 사람들>도 조금 이와 비슷한 결말을 이끌어내지만 약간 느낌이 다르다. 지붕뚫고 하이킥의 결말이 황당한 느낌이었다면 더블린 사람들 각 이야기들 결말의 느낌은 '허무'로 표현할 수 있다. 마치 현대소설이 발달하기 전 재미없는 고전소설의 느낌과 흡사하다. 발단과 전개에서 갈등과 절정이 없이 갑자기 결말로 휘몰아 가는 느낌. 그런데 또 고전소설과는 다르다. 고전소설의 결말이 작가가 벌려놓은 일을 제대로 수습하지 못하고 급하게 뒷정리를 하고 결말은 확실하게 내고 끝을 냈다면, <더블린 사람들>의 결말은 일이 시작되고 독자가 느끼기에 이제 막 중반정도 왔다 싶을 때 결말자체를 매조지하지 않고 끝나버린다. 분명 그 뒤에 어떠한 일이 더 있어야 할 것만 같은데 작가는 거기서 뚝! 흐름을 끊어버린다.
이 허무함은 <애러비>에서 가장 잘 느낄 수 있다. 첫사랑에 빠진 소년은 그녀에게 줄 선물을 사기위해 어렵게 바자에 가지만 결국 거의 모든 가게가 문을 닫은 이후에 도착하고 아무것 하나 사지 못한다. 사지 못했다. 사지 못했으니 이제 소년은 어찌해야 할까. 어떻게 사랑에 빠진 소녀에게 마음을 전해야할까. 그 둘은 어떻게 될까....우리가 이미 저만치 앞서서 생각하고 있는 그 순간. 이 짧은 이야기는 끝이 난다.
"그 어둠 속을 뚫어져라 쳐다보고 있노라니 나 자신이 허영에 쫓겨 농락당하는 한 마리 짐승 같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러자 나의 두 눈은 번민과 분노로 불타올랐다." 라는 문장으로. 마치 그 다음 일을 궁금해하고 앞서나간 나에게 허영심 가득하다고 하는 듯하는 투로, 조이스는 끝을 맺는다.
<더블린 사람들>에 전반적으로 흐르는 기저의 침울하고 어둡고 무거운 분위기는 이러한 허무함에서 기인한다. 분명 무언가 더 있음직한 이야기를 서둘러 끝내는 것도 아니라 그냥 중간을 무자르듯 끊어버리는 이 허무함은 딱히 슬픈 이야기, 암울한 이야기를 담아내지 않더라도 작가가 더블린에서 느낀 불안하고 가라앉아 더 이상 팽창할 수 없을 것만 같은 분위기를 작품을 읽는 내내 한밤의 안개처럼 살며시 우리몸을 적셔준다.
불안.초조.억눌림.
<더블린 사람들>의 각 이야기에서 다루고 있는 사람들은 대부분 더블린을 이끌어가기보다는 어쩔 수 없이 이끌려가는 소시민들이다. 더블린이라는 도시가 침체되자 그 곳의 사람들, 특히 소시민들의 삶은 더욱 곤궁해졌다. 하루벌어 하루 먹고 사는 사람들. 1실링, 1펜스가 소중한 사람들, 선물을 두고 왔다는 안타까움보다 2실링 4펜스를 낭비했다는 것에 더욱 슬픔을 느끼는 사람들이 주인공(진흙의 마리아)이니 만큼 그들이 삶을 이어가면서 느끼는 애한 또한 더블린의 무거운 분위기만큼이나 크고 침중했을 것이다. 그들의 삶은 불안하다. 언제 직장에서 짤릴지 모르고, 언제 자신이 성공하고 빚을 갚아나갈지 모른다.(작은 구름 한점의 꼬마 챈들러) 할 일 없고 시간많고 능력없는 한량들이 할 것이라고는 어수록한 하녀들을 꼬셔내어 동전하나 얻어내는 것이 전부다.(두한량)
억압받고 무시당하며 불안한 삶을 지속하는 그네들. 이들의 삶을 보고 있노라면 더블린의 그 당시 모습과 분위기가 어떠했을지, 그 안에서 그들이 어떤 마음으로 삶과 생각을 이어왔을지, 제임스 조이스는 적나라하게 그들을 해부하여 우리의 눈 앞에 들이민다.
그리고 그 불안과 초조함,억눌림의 한계가 그 끝을 참지 못하고 <작은 구름 한점>과 <분풀이>에서 격렬하게 터져나온다. <작은 구름 한점>의 꼬마 챈들러는 전형적인 소시민의 상징이다. 그는 더블린에서 자신보다 훨씬 못하던 자신의 친구가 런던에 가서 성공하고 돌아온 모습을 보며 자신에게 한없는 자괴감을 느끼다가 그 분풀이를 자신을 옭매고 있는 자신의 갓난아들에게 퍼붓고 망연자실해 한다. <분풀이> 역시 마찬가지다. 직장에서 항상 무시당하고 업신여김 당하며 언제 해고될지 모르는 패링턴. 그가 결국 그 억눌림을 터트릴 수 있는 곳은 자신에게 대항하지 못하는 부인과 자식들 뿐이 없다. 그것도 맨정신에는 차마 하지 못하여 술에 취해있을 때에만 그는 자신을 무겁게 짓눌렀던 것들을 토해낼 수 있다. 그리고 결국 다시 패링턴은 다음 날 납보다 더 무거운 발걸음으로 다시 회사에 미적미적 출근할 것이다.
이 외에 자신이 어떤 길을 향해 가야할지 확신하지 못하고 주저하는 <이블린>의 '이블린'이라든지, 직장을 잃을까 두려움에 앞서 결국 원하지 않는 결혼을 하게 될 <하숙집>의 도런처럼. 제임스 조이스는 어쩔 수 없이 살아가야하고, 이리저리 흔들리는 자신을 둘러싼 시류속에 어쩔 수 없이 따라가야하며, 자신의 꿈을 제대로 펼치지 못하는 도시 하층민들의 삶을 포착하고 가감없이 그려내면서 그들의 삶과 그들의 불안을 더블린 자체의 불안과 몰락으로 확대시키고 동일시한다.
애증.
불안해하고 억눌려 있으며, 동전 한푼에 벌벌 떨던 더블린 사람들. 그들을 바라보는 조이스의 시선은 어떠했을까. <분풀이>를 다시 떠올려보자. 패링턴은 자신의 울분을 얼마나 풀 곳이 없었으면 술에 취해 돌아와 집에서만 그 한을 풀어낼 수 있을까. 언뜻 보면 딱하게 보이는 패링턴. 그러나 작가가 패링턴에게 보내는 시선은 그렇게 가엾고 애처로운 시선이 아니다. 오히려 작가는 패링턴에게 혐오에 가까운 시선을 보낸다. 패링턴이 회사에서 보이는 행태는 실로 가관이다. 근무시간에 몰래 나가 펍에서 시원한 흑맥주 한잔 들이키는 것은 물론이요, 자신이 맡은 일을 다 못끝내자 후에 벌어질 일은 생각하지 않고 당장의 입막음을 위해 자신이 처리해야할 문서들을 몰래 버린다. 그리고 항상 재무담당자에게 가불을 받아 거나하게 술 마실 궁리만을 한다. 제임스 조이스는 절대 패링턴이 당하는 무시와 업신여김을 소시민으로 어쩔 수 없이 감내해야하는 숙명이 아니라 자신이 자초하고 있는 것임을 꾸준하게 상기시킨다. <분풀이>에서 그가 더블린과 더블린을 바라보는 따끔한 시선을 극명하게 느낄 수 있지만 다른 작품도 정도의 차이만 있을 뿐, 예외는 아니다.
<경주가 끝난 뒤>의 흥청망청한 부자집 젊은이들의 모습, <하숙집>에서 건실한 젊은이를 반강제로 꼬여내어 자신의 딸과 결혼시키려는 하숙집 주인의 속물근성, <위원실의 담쟁이 날>에서 나타나는 시의원 선거의 모습과 선거사무실의 풍경너머로 만날 수 있는 풍자, 딸의 성공을 위해 시류에 편승하고 치맛바람이 한창인 <어머니>까지. 조이스는 더블린의 많은 사람들-대부분 도시의 하층민을 중점적으로 다루긴 하지만-과 많은 곳에서 벌어지는 한심한 모습들을 가타부타 설명하지 않고 그대로 담아내는 것 같지만, 그가 고른 소재부터, 그리고 쇠락을 상징하는 무기력한 도시의 모습을 재연하는 그 과정부터 이미 더블린을 바라보는 우호적이지 않은 시선을 자아낸다.
<두 한량> 또한 마찬가지다. 그는 두 한량의 하루를 있는 그대로 관찰하고 그들의 마음속까지 들어가보지만, 결국 그의 관찰은 호기심으로 가득한 우호적 시선이 아닌- 이것들이 어떤 짓을 벌이는지 한번 지켜나보자에 가까운- 경멸어린 시선으로 바라보며 그들의 이야기를 묵묵히 담아낸다.
한 때 아일랜드에서 가장 큰 도시였지만 급속하게 몰락해가고 있는 도시와 그 도시의 사람들을 보면서, 자신의 집안이 몰락하는 과정을 보면서 제임스 조이스는 결코 그것들을 애처로운 시선만으로 바라보지는 않았음이 분명하다. 그는 집안의, 도시의 몰락을 바라보면서 그 몰락의 책임이 어느정도 아버지와 도시와 사람들에게 있음을 말하고 싶어한 것은 아니었을까. 열심히 살아도 분명 좋아지지 않는 살림살이 앞에서 좌절하는 소시민의 삶이 아닌, 소위 당해도 싼 소시민들의 애환을 그려내면서 제임스 조이스는 자신이 더블린과 허영심 가득한 아버지를 바라보는 비판어린 눈초리를 그대로 담아낸 것은 아닌지. 그들의 쇠락과 삶의 힘겨움을 모두 그들의 탓으로 돌릴 수는 없겠지만, 그들 역시 그 책임에서 자유로울 수 없음을 보여주는 제임스 조이스의 시선을 통해서 그가 자신을, 아버지를, 집안을, 더블린을 어떻게 바라보았는지 조금은 생각해 볼 수 있을 것이다.
그렇지만 그래도 그는 더블린을 사랑하는 마음이 더 간절했을 것이다. 그의 관찰. 조이스는 이미 관찰할 대상을 고르는 과정부터 더블린을 바라보는 자신의 불편한 감정과 시선을 드러내었지만, 역설적으로 그러한 사람들을 고른다는 것 자체에, 그리고 그들의 삶을 자세하고 찬찬히 지켜보는 행위 자체에 아직도 더블린에 남아있는 미련과 사랑, 안타까움을 확인해 볼 수있을 것이다. 이 사람들이 어떻게 이렇게 되었을까. 자신이 따르던 신부의 죽음을 슬퍼하고 가끔 수업을 몰래 도망나와 우정어린 모험도 하고 첫사랑을 위해 늦은시간 헐레벌떡 바자에 뛰어갔던 그 아이는. 이제 하루를 탕진하는 한량이 되었고, 직장을 위해 마지못해 원치않는 결혼을 해야하는 젊은이가 되었으며, 삶의 분풀이를 다른 곳에 쏟아부어야 하고 시의원 선거사무실에서 허드렛일을 하는 처지가 되었다. 그들의 모든 바라봄은 이미 그 시선자체로 그들에 대한 관심이며 안타까움의 발로이다. 그래서 조이스가 더블린을 바라보는 시선은 애증. 그 자체이다.
현실. 종교. 죽음.
조이스가 더블린의 사람들, 특히 하층민을, 애증어린 시선으로 -그나마 연민에 조금 더 가까운 시선을 담아- 그들에게 향했다면 그는 더블린의 공기 자체에는 증오에 가까운 시선을 보낸 듯 하다. 더블린의 공기는 무엇으로 채워져있었을까. 그 음울한 붉은 공기속에는 포기와 좌절, 경직과 마비가 담겨 있었다. 그리고 그러한 공기를 만들어 낸 원인을 그는 더블린의 현실정치와 종교에서 찾아내었음이 분명하다.
더블린 사람들의 첫 작품 <자매>에서 주인공 아이가 플린신부에게 보내는 따듯한 시선과는 상관없이 세상과 주위의 어른들은 그를 성직매매로 기억한다. 첫 작품부터 시작한 종교에 대한 차가운 눈빛은 <자매>부터 <죽은 사람들>까지 흘러가는 내내 종교와 정치에 대한 이야기를 언뜻언뜻 내비칠 때마다 싸늘하게 유지된다. 구교와 신교와의 갈등, 그 안에 자리잡은 힘을 합쳐도 모자랄 사람들끼리의 배타적인 모습, 그리고 이와 판박이인 현실정치의 모습, 아일랜드 부흥운동과 그들의 배타성을 조이스는 그리 호의적인 눈으로 바라보지는 않는다. 그리고 그 적의 가득한 시선은 <은총>과 <위원실의 담쟁이 날>에서 절정을 이룬다. <은총>을 통해서는 아일랜드를 좀먹고 있는 종교의 경직성과 구교와 신교의 갈등(종교 뿐 아니라 현실정치까지로도 그대로 이어지는), 그 속에서 벌어지는 사람들의 이율배반적인 모습을 날카롭게 풍자하며, <위원실의 담쟁이 날>에서는 이미 패배주의가 가득하여 더이상 아일랜드의 미래를 보여줄수 없는 무기력한 현실정치의 현장을 낡은 시의원 사무실의 말만 많은 사람들을 통해서 직접적으로, 또한 은유적으로 보여주고 있다.
결국 이러한 현실앞에서 스러지고 있는 그들의 어두운 미래를 소설 전반에 아울러 '죽음'으로써 은연중 내비치고 있다. 더블린은, 아일랜드는 이미 그 기력을 다했다. 사람들에게 믿음과 화합, 신념을 전해주고 당장의 고통을 감내할 수 있게 해야 하는 종교는 초라한 현실과 함께 주저앉아버렸다. 미래에 대한 희망을 전해주고 고통을 분담해야 할 정치는 이제 그 기력을 다하고 언제 죽음을 맞이 할지 모른 채 어두운 관속에 들어갈 날 만을 기다리고 있다. 결국 <더블린 사람들>의 근저를 이루는 허무와 억눌림, 애증은 죽음을 향해 달려가고 있는 더블린과 다름이 아니다.
제임스 조이스. 더블린 사람들.
결국 같은 곳으로 돌아왔다. <더블린 사람들>과 같이. <더블린 사람들>의 처음은 플린 신부의 죽음으로 시작한다. 그리고 그 마지막 역시 가브리엘의 죽음으로 끝이 난다. 같은 죽음이되 그 처음과 끝은 다르다. 내가 처음 제임스 조이스와 더블린 사람들이라는 단어의 자판을 칠때와 지금의 자판이 다르듯이.
플린신부의 죽음으로 시작한 <더블린 사람들>은 극중 인물들과 이야기를 허무와 무력함, 좌절과 애환, 불안과 억눌림, 비판과 경멸, 배타와 경직으로 밀어뜨린다. 작품을 읽는 내내 우리는 그 당시 더블린 사람들이 느꼈던 그 공기와 냄새를 고스란히 맡아볼 수 있다. 처음 우리가 맡았던 죽음의 냄새는 더블린 사람들 전반에 흐르는 그 공기와 분위기의 전조에 불과하다. 조이스는 그 죽음을 향해 달려가는 더블린을 마치 그레타가 자신의 옛 죽은 정인을 가슴 속 깊이 묻어두었던 것과 마찬가지로 머리와 가슴속에 묻어두었다. 그레타가 '오그림의 처녀'를 듣기 전까지 그랬던 것처럼.
그레타는 우연히 '오그림의 처녀'를 듣게 되고 옛 정인에 대한 아련한 추억을 타의적으로 떠올리고 마침내 자의적으로 끄집어내고 풀어내었다. 조이스는 <더블린 사람들>을 쓰는 내내 자신의 정체성을 풀어내었을 것이다. 더블린을 보면서 자신을 보았고, 더블린을 그리면서 자신을 그려보았을 것이다. 그는 죽은 사람들을, 더블린을 추억했다. 자신과 더블린을 지배했던, 그리고 소설 내내 흐르던 '죽음'. 하지만 가브리엘의 깨달음과 관용이 죽음으로 연결되는 순간, 죽음은 더 이상 무기력, 우울, 허무와 동의어가 아니다. 가브리엘의 죽음은 결국 조이스의 깨달음이다. 그는 결국 <더블린 사람들>을 쓰는 내내 그토록 밉게만 바라보았던 더블린을 자신이 사랑하고 있었음을, 단지 그레타처럼 그 추억을 가슴 속 한켠에 자신도 모른채 묻어두고 있었음을 깨달았을 것이다.
그래서
<더블린 사람들>을 지배하는 패배의식과 억눌린 감정을 조이스의 시선을 통해 우리가 오롯이 받아내었음에도 그 마지막은 결코 허무하고 음울하지 않다. 가브리엘의 죽음을 보면서 결국 우리는 조이스가 더블린을 바라보는 시선엔 결국 관용과 사랑이 남았음을 우리는 어렴풋이 짐작할 수 있기 때문이다. 결국 책장을 덮을 때 남아있는 것은 더블린의 음울한 초상보다는 '더블린 사람들'을 향한 조이스의 따듯한 시선이 될 것이기 때문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