리버튼
케이트 모튼 지음, 문희경 옮김 / 지니북스 / 2010년 10월
평점 :
품절


지금 내가 살고 있는 지.금.이라는 시대를 제외하고

다시 태어난다면 언제로 가보고 싶은가?

혹은 타임머신을 타고 여행을 떠나본다면 어느 시대, 어디로 가보고 싶은가라고 물어본다면

나는 20세기 초반의 유럽을 가장 가보고 싶다.

 

19세기 후반부터 20세기초중반으로 이어지는 유럽은

무언가 설명할 수 없는 역동성과 광기, 폭발력과 그 이상의 잠재력이 어우러진

한마디로 형언할 수 없는 시대일 것이다.

 

지난 수세기동안 이어져오던 신분제가 점점 해체되어나가고

그 사이를 비집고 들어오는 실질적인 자유와 평등의 바람.

수구라고 부르는 것이 마땅할 것 같지만 리버튼에 나오는 귀족들은 절대 인정하지 않을 전통과 보수.

그리고 산업혁명 이후로 폭발적으로 늘어난 생산력을 바탕으로 점점 그 세를 확장해가는 신흥 사업가와 중산층.

19세기 후반부터 20세기 초의 유럽, 특히 도리언 그레이의 초상이나 이 작품 <리버튼>에 나오는 이 시기의 영국은

흡사 대한민국이 해방 후 부터 지금까지 겪고있는 전통과 파격의 혼란을 겪고있는 듯 언제 어떤 파도가 휘몰아칠지 모르는 격동의 모습을 담고있다.

 

귀족이 있고, 하인이 있으며, 남녀간의 전통과 엄격한 규율, 영국과 미국간의 권위의식이 있으면서도

자동차가 지나다니고 전기가 있고, 전화가 있고 비행기가 있는, 그런 세상.

 

지난 수천년간의 역사를 지난 수십년의 진보가 뛰어넘으려하는 그 새로운 세상에 대한 두려움과 기대가 충만하다 못해

광기로 진화해버린 그 시절의 이야기와 모습은 누가 보아도 매력이 철철넘칠 수 밖에 없는 세상의 모습이다.

 

그리고 <리버튼>은 그 모습을 완벽하게 재현해내고 있는 간만에 본 작품이다.  

 

<리버튼>은 두가지의 재미를 동시에 선사하고 있다.

 

첫번째는 위에 말한대로 우리에게 매력을 넘어 마력으로 다가오는 20세기 초반의 유럽사회, 특히 그 당시 세계를 지배한다고까지 할 수 있었던, 그러나 점차 그 지위를 미국에게 넘겨주고 있었던, 그래서 더욱 매력적인 영국사회의 모습을 우리에게 충실히 보여주고 있다.

<리버튼>은 하녀 그레이스의 눈을 통해 당시에도 여전히 영국사회에 존재하고 있던 귀족과 하인의 모습, 귀족들의 권위의식과 남여차별, 미국에 대한 우월감과 교묘하게 드러나 있는 새로운 시대에 대한 두려움 등을 여과없이 보여주고 있다. 또한 그러한 와중에 발달한 기술을 통해 마차대신 자동차가 굴러다니고 영국 최초로 전화가 놓이고 전기가 들어오는 격정적인 시대의 발전 또한 나란히 보여줌으로써 그 시대의 상황과 매력을 한눈에 들여다볼 수 있게 해준다.

또한 세계1차대전에 참전하는 영국의 모습과 함께 전쟁의 두려움과 맞물려 그 시대의 광기를 전쟁후유증을 앓는 알프레드와 로비 헌터를 통해 보여줌으로써 그 시대가 어떤 시대였는지, 얼마나 매력적어있으며 그와 동시에 얼마나 끔찍한 시대였는지에 대해 독자에게 은연중 이야기하고 있다.

약 700페이지에 달하는 긴 이야기 동안 작품이 하나의 사건을 향해 천천히 꾸준히 달려가면서도 그 동력을 잃지 않고 나아갈 수 있었던 이유에는 이 매력적인 시대를 정말로 충실하고 넘치게 그려낸 작가의 필력과 그 시대 자체의 매력 때문일 것이다.

 

 

두번째의 재미는 역시나 작품 전체를 관통하는 해너와 로비헌터의 이루어질 수 없는 사랑이야기이다.

처음 만났을 때부터 사랑에 빠졌지만 그것이 사랑인 몰라 생채기를 낼 수밖에 없었던 해너.

언제부터인지는 모르겠지만, 이미 결혼해버린 해너를 사랑하게 된 젊은 보헤미안 로비헌터.

그레이스의 눈을 통해 해너를 쫓아가다가 결국 해너의 이야기와 함께 폭발적으로 흘러버리는 이 둘의 사랑은

어떤 특별한 사건 없이도 독자들의 눈을 책에서 떼어내지 못하고 긴장감 가득 책장을 넘기게 하는 일등공신이요,

그것을 빛나게 하는 건 역시 작가의 솜씨다.

 

 

둘 중에 하나만 제대로 그려내었어도 충분히 매력적인 작품이 될 수밖에 없는 두가지 요소가 그럴싸하고 이쁘게 결합했다.

그러니 이 작품은 그 두꺼운 페이지의 압박에도 불구하고 손에 책을 잡을 수 밖에 없게 만든다.

 

이 매력이 뚝뚝 뭍어나오는 시대가 과연 둘의 사랑을 어떻게 방해할 것인지,

세상의 눈을 피해 그들이 어떻게 할 것인지 점점 결말이 다가오는 순간,

독자들은 작가의 솜씨에 의해 책을 한페이지 한페이지 넘기다 못해 두페이지, 세페이지 넘기며 결말을 궁금해 할 것이다.

그만큼 작가는 그 두가지 요소를 잘 버무려내었다.

 

 

잘 쓴 작품이지만 그래도 역시나 아쉬움이 남기는 어떤 작품을 보고도 남기 마련이다.(물론 그렇지 않은 작품도 간혹 존재하지만 그런 건 정말 별로 없다)

이 작품은 철저히 하녀 그레이스의 눈을 통해서 진행된다.

그녀가 오래도록, 20세기 한 백년을 모두 받아내면서 겪은 이야기들.

컴퓨터와 인터넷과 핸드폰을 들고 다니는 시대에 적어내는 불과 몇십년전의 수백년 전같은 이야기는 모두 그레이스의 성장과 그 궤를 같이한다.

그런데 이 그레이스의 역할이 어느 순간 맥이 뚝. 끊겨버리고 만다.

그레이스의 역할은 해너가 로비와 사랑에 빠지는 순간 어느덧 주인공같은 관찰자가 아닌 주변인이 되어버린다.

이미 이야기는 해너의 손과 눈으로 넘어가고 만다.

그러면서 이미 그레이스의 리버튼 집안 이야기는 단순히 해너와 로비의 비극적 이야기로 주저앉고만다.

그레이스가 자신의 출생의 비밀과 함께 더 이야기 속으로 빨려들어가면서 힘을 주었어도 좋았을테고

차라리 그레이스의 존재를 조금 더 처음부터 희미하게 해 놓았어도 좋았을테다.

이야기의 결말과 미스터리를 그레이스와 연관시켜놓을 요량이었다면

이야기의 중반부분 그레이스의 역할이 조금은, 아주 조금은 아쉽다.

 

또한, 이 부분은 나 혼자만 이해가 안되는 부분일 수도 있겠지만, 파국으로 치달은 그 사건에서 해너가 로비한테 무슨 일을 한건지,

로비와 해너와 에멀린 사이에서 정확히 어떠한 일이 일어났던 것인지 이해가 안되는 부분은

작가가 의도한 것이든 아니든 개인적으로는 혼란스러운 부분이었다만, 이것은 아쉽다기보다는 작가의 취향일테니.

 

 

안타까운 마음에, 이부분만 내 맘에 조금 더 들었다면 정말로 만족했을 것만 같은 마음에

옥의 티를 끄집어내는 부분이 조금 길어졌다.

 

하지만, 그 옥의티가 너무도 아쉬울만큼

<리버튼>은 간만에 그 시대 이야기를 그 시대만큼 재미있게 풀어낸 작품이다.

 

언제 들어도 귀가 쫑긋 솟아오를 매력적인 사랑이야기가

타임머신이 존재한다면 꼭! 가서 한번 같이 살아보고 싶은 시대상에 아주 잘 버무려져서

무엇과 무엇이 서로 어떻게 혼합하여 작용하는지도 모를만큼 어우러졌다.

 

오랜만이다.

이미 검증된 고전이 아니라, 요즈음의 소설을 보고 이렇게 흐뭇하게,

그 둘의 사랑에 매몰되어 안타깝게 책장을 덮은 기억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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