엉망으로 열심히 살고 있습니다 - 일기 쓰는 세 여자의 오늘을 자세히 사랑하는 법
천선란.윤혜은.윤소진 지음 / 한겨레출판 / 2023년 12월
평점 :
장바구니담기


지금 초등학생들은 매일 같이 일기를 쓰거나
선생님께 검사를 받지는 않지만
내가 어릴 때만 하더라도
일기는 매일 꼭 써야 하는 의무 같은 과제였다.

아침에 학교에 가서 가장 먼저 하는 일은
전날 쓴 일기장을 교탁 위에 올려놓는 것인데
그렇게 쌓인 아이들의 일기는
선생님께서 확인한 후
띄어쓰기나 맞춤법 등의 교열 작업을 거쳐
빨간색 볼펜으로 체크해 주시곤 했다.

선생님의 확인했다는 도장 혹은 사인과 함께
그날의 일기에 답장처럼 짤막한 글을
덧붙여주시곤 했는데 그 답을 기다리는 재미로
일기를 더 열심히 썼던 것 같다.

본래의 일기라 하면
날마다 그날그날 겪은 일이나 생각,
느낌 따위를 적는 개인의 기록으로
그 글을 읽는 독자 역시 글을 쓴 나 혼자뿐이다.

하지만 사춘기 때 선생님 몰래 베프와 주고받던
교환일기는 혼자 쓰는 일기와는 또 다른 느낌이었다.
똑같이 일상과 내 생각을 다룬 글이지만
글을 읽는 것이 나 혼자가 아닌 친구라는 점,

내 글에 답장하듯 정성 들여 쓴 글씨와 그림으로
마음을 표현하던 친구의 일기를 보며
공감, 우리만의 비밀이라는
특별한 감정을 느낄 수 있었다.

이 책은 친구와 공감을 나누는
교환일기를 읽는듯한 기분을 주는 책으로
SF 소설가 천선란, 에세이스트 윤혜은,
편집자 윤소진 세 명이 함께 만들어내었다.

'글'을 업으로 삼으면서도 취향과 성격,
일상 등 모조리 제각각인 세 사람이 모여
서로의 일기를 읽고 생각을 수다로 나누는
화제의 팟캐스트 〈일기떨기〉를 책으로 출간한 것이다.

팟캐스트에 소개된 회차 중
보다 깊이 있게 나누고픈 이야기들을 선별하여
주제별로 묶고, 팟캐스트에서는 풀지 못한 내용을
전면 다듬고 덧붙여 새로운 대담으로 녹여냈다.

본인의 삶, 생의 복판에서 고군분투하는 하루,
일의 희로애락에 울고 웃는 시간까지
진득한 산문 뒤로 이어지는 세 사람의 대화에서
가득 찬 진심을 읽어 내려갈 수 있었다.

1부에서는 누구 하나 좋다는 사람 없이
후회막심인 20대를 뒤로하고 이젠
'지나치게 하나의 나에게 집중하지 않게다'라는
선언으로 무장한, 30대에 접어든 세 사람의 인생관이

2부에는 결혼에 관심 없는 세 사람의 결혼식 로망이나
만남과 이별, 모녀의 이야기 등 관계에 관한
꾸밈없는 고백이 녹아 있었다.

3부는 이야기가 있다면 무엇이든 좋다는 소설가,
음악 없는 세상을 상상해 본 적 없는 에세이스트,
무언가를 좋아하고 시작하기에 망설임이 없는
편집자가 밝힌 지금의 삶을 더 세세히,
가치있게 돌보는 방법을 담았다.

내가 쓴 글과 나의 일상과 생각에 이만큼 침투해
한마디씩 따스한 말을 더해주는 친구들의 우정은
학창 시절 친구와 나누던 교환일기를 기다리는 마음으로
즐거운 설렘을 오랜만에 느낄 수 있는 시간이었고

책 제목처럼 '엉망이지만 열심히 살며'
어떻게 흘러갔는지 모를 하루,
실수투성이인 것 같아도 어떻게든 마무리되는
일들을 바라보며 삶을 얼렁뚱땅 살고 있다는 생각에
'언젠가는 꼭 더 나은 사람이 되어야겠다는'
그들의 다짐은 실현 가능성을 떠나
어릴 적 일기 말미에 늘 추신처럼 덧붙이던
'내일은 ~해야겠다'라고 쓰던 것처럼
거창한 계획보다는 한심하게 여기며 불화했던
나와의 화해를 위해 손 내미는 노력이랄까
위로라는 생각이 들었다.

나이를 먹고 어른이 되어도 스스로가 미숙하고
어떻게 해야 할지 망설여지는 건 어릴 때와 다를 게 없다.
친구와 주고받던 교환일기에서도
고민이나 울적한 마음을 털어놓아도
이렇다 할 해결책은 없지만 누군가 내 이야기를
들어주고 공감하고 위로해 준다는 사실 자체로
큰 힘이 되었던 것처럼

퍽퍽하고 조금은 흔들리는 30대의 삶에서도
친구들이 건네주는 따스한 사족이
엉망진창이거나 소소하고 지극히 일상적인
회색의 하루가 꽤나 그럴싸하게 열심히 살고자
노력한 결과물로 만들어준다.

블로그에 오픈된 글로 일상을 담아내지만
늘 대나무 숲에 외치는 메아리처럼
혼자만의 일방적인 감정을 쏟아내고 있는데
어린이 되어서도 내 일기를 보며
이렇게 마음을 나눌 수 있는 그들의 우정과
이 따스한 모임이 참 부럽기만 하다.

살다 보면 쓰고 싶고, 쓰다 보면 말하고 싶어지는
그들의 잘 쓰인 마음들과 다정다감한
위로의 대화들을 읽어 내려가며
오랜만에 누군가와 교감하는 일기를
제대로 쓰고 싶다는 생각이 든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1)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