상상 라디오
이토 세이코 지음, 권남희 옮김 / 영림카디널 / 2015년 2월
평점 :
절판


비오는 소리에 커튼을 쳐보니 창문 사이로 비가 추적추적 내리고 있었다. 헤이즐넛 향이 물씬 나는 커피를 내리면서 이런 날씨에 딱 어울리는 소설을 읽고 싶어 책 제목을 훑어보다가 한 권을 집었다. 커피 향에 충분히 취했으니 이번에는 이 책에 적힌 사연에 취해 볼까 하고 "상상 라디오"라고 적힌 책을 펼쳤다. 죽음이라는 무거운 주제를 다루고 있지만, 밝고 경쾌한 이야기라고 적혀 있다. 죽은 자가 보내는 사연, 상상을 해야 들을 수 있는 죽은 자들의 라디오!

 

상상 라디오는 스폰, 라디오 방송국, 스튜디오가 없다. 마이크도 없고, 말도 하지 않는다. 오직 상상력이다. 그것이 전파, 마이크, 스튜디오 등 모든 것을 대행한다. 그리고 이 상상 라디오는 같은 시간에 다른 곡을 틀 수 있고 뿐만 아니라 전곡을 들을 수 있으며, 자기가 원하면 무음도 가능하고, 아니면 이야기만 듣는 것도 가능하다. 이렇게 변환이 자유로운 상상 라디오를 진행하는 자는 비유를 잘하는 수다쟁이 DJ아크다. 눈이 내리고 온몸이 꽁꽁 얼어붙을 것 같은 날씨에 빨간 방한용 재킷 하나만 입고 높다란 삼나무 위에 걸려서 이도저도 못한 상태가 되어 상상 라디오 방송을 하게 된 DJ아크... DJ아크는 우선 자신의 이야기부터 풀어 놓는다. 도쿄에서 10년 동안 매니지먼트 일을 하다가 일에 염증이 생겨 그만두고 바닷가가 있는 작은 마을 본가로 들어오게 되었고 어느 순간 삼나무 위에 걸치게 되었다는 것이다. 아버지와 형의 이야기, 아내와 아들을 그리워하는 이야기 등 풀어 놓으면서 음악을 들려주고 중간에 들어오는 죽은 자의 사연도 읽어 주기도 한다. 아크가 매니저를 맡았던 메톨즈를 보았다고 그 중 한 멤버가 멋있었다는 이야기, 2년 동안 앙상하게 말라버린 몸을 비트적거리며 정처 없이 걸어가고 있다는 이야기, 채소 매입을 하고 있고 도로가 막혀서 중간에 부하직원하고 쉬고 있다는 이야기, 아무도 없고 어둠만 있는 곳에서 혼자서 밑으로 가라앉고 있다는 한 여성의 이야기, 부하직원하고 숙소에서 쉬고 있었는데 갑자기 땅이 흔들리면서 부하직원이 사라져 찾고 있다는 이야기 그리고 그 많은 사연 중  중학교 같은 반 이었던 요코의 이야기를 듣게 된다.

 

밝고 경쾌한 이야기라고 했는데 그런 것도 아니고, 그렇다고 마음이 무거워지는 이야기도 아니고 이도 저도 아니다. 전개가 이상하다. DJ아크 개인 이야기도, 상상 라디오로 보내는 사연도 내 마음 깊은 곳에 가락 앉아 있는 감정을 위로 끌어 올리지 못했다. 감정이 움직일 생각도 않고 그냥 깊은 곳에서 조용히 잠들어 있을 뿐이었다. 쓰나미 피해를 입은 일본 사연을 토대로 쓴 글이라고 해서 죽은 자들이 남기고 간 어떤 감동적인 사연들을 줄줄 써 놓았는지 알았다. 그래서 이 책을 집었을 때, 오랜만에 내 눈의 갈증을 해소해주겠구나 싶었다. 근데, DJ아크 개인 이야기도, 죽은 자들의 사연도, 자원봉사자들 이야기도 그 어떤 이야기도 나의 내면을 들여다보는 기회를 주지 못했다. 어쩌면 내 감정이 돌처럼 단단하게 굳어져 있어 그런지도 모르겠다. 그래도 만약에 이런 상상 라디오가 존재한다면 얼마나 좋을까 하는 생각을 하게 된다. 갑자기 이별해야 했던 사람들과 서로 상상력 전파를 전달하면서 같이 눈물 흘러주고, 같이 고통을 느끼고, 같이 슬퍼해주고, 서로 어루만져 주면서 미련 없이 떠나 갈 수 있게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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