진보의 상상력 - 기후위기와 불평등의 시대, 정치란 무엇인가
김병권 지음 / 이상북스 / 2021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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몇 달 동안 책이 손에 잡히질 않았다. 문장과 문장은 따로 놀았고, 맥락은 아득히 먼 나라로 달아난 지 오래였다. 그 밥에 그 나물. 맛이 없었다. 휴일 도서관에서 빌려온 책은 다음 휴일에 펼쳐보지 못한 채 반납됐다. 책을 대신한 건 넷플릭스 동영상이었다. 하지만 영상을 통해 본 세상은 허무하고 씁쓸했다. 내겐 텍스트가 주는 단단한 통찰과 위안을 현란한 화면으로 대체하기 불가능했다. 뭐든 읽어야 한다는 생각으로 집어든 책이 바로 진보의 상상력, 바로 이 책이다. 벌써 읽어야 했어야 했는데 이리도 변명이 길다.

 

진보와 미래라는 단어가 낯설어진지 꽤 됐다. 현실과 동떨어진 진보, 곧 붕괴될 지구 문명의 미래라는 관념이 내 머릿속에 가득하다. 그래서 일부러 피했다. 이런 느낌이다. 읽어봐야, 그래서 어쩌라는 건가? 기본 소득, 탈탄소, 진보정치를 말하는 게 몽상이란 생각이 들었다. 십 수년 전까지 난 탈핵주의자였다. 전기료가 인상되더라도 핵발전소가 없어지는 것이 정의라 생각했다. 하지만 문명 붕괴 시간을 지연시키기 위해, 지속가능한 시스템이 자리 잡을 때 까지 원자력을 이용해야 한다는 쪽으로 생각이 바뀌었다. 위험하지만 어쩔 수 없는 것 아닌가. 가용 자원이 부족한 현실에서 말이다. 기본소득도 그렇다. 취지는 공감하지만 그 기본소득의 재원을 어떻게 마련해야 하는지 난 모르겠다. 수출을 늘려 돈만 팡팡 벌면 되는 것인지, 어떤 방식으로든 수입만 많으면 되는 건지, 무기를 팔아 얻는 수익도 괜찮은 건지(우리나라 방산수출액은 20조 이상이다). 당연히 시민 개개인의 의지로 과연 탄소를 줄일 수 있을지 난 도무지 모르겠다. 그렇다고 개인과 시민단체의 힘으로 가능할까?

 

지속가능한 지구를 위한 전문가들의 의견은 한 곳으로 수렴된다. 각 나라의 정치권력이 위기 대처에 앞장서야 한다고. 탈탄소, 기본소득, 소득 불평등, 기후위기에 대한 강력한 법제를 마련해야 한다고. 이는 몇몇 나라에만 해당되는 것이 아니고 전 세계 대부분 국가들이 동참해야 한다고. 하지만 과거 역사와 현재 진행형인 국제정치를 바라보건데 모든 국가의 일치된 힘이란 꿈같은 이야기다. 법과 정의와 도덕이란 국제무대에서 힘없는 국가의 자기위안일 뿐이다. 파국에 맞선 개인의 저항이 세상을 바꿀 수 없다. 인류 문명의 붕괴에 가장 큰 요인은 불평등이다. 경제적, 사회적, 정치적, 종교적 불평등. 구조화된 불평등은 약자가 약자를 혐오하고 배제하는 기형적인 사회를 만든다. 중요한 것은 불평등이란 개인과 공동체에서 시작되어 세계 정치의 매커니즘으로 구조화 된 것이 아니라는 사실이다. 강대국에 의해 좌우되는 불평등이 자본주의 시스템을 통해 각 나라, 각 공동체, 각 개인으로 전파되는 것이다. 다르게 말하면 불평등의 구조화는 위에서 아래로 전개된다. 당연히 문제 해결 또한 위에서 시작해야 한다. 현실적으로 개인과 시민단체의 안간힘으로 어림없다는 말이다. 불평등이 해결되지 않는 한 인간에게 미래는 없다.

 

현실을 진단하고 처방을 내리고 있다는 점에서 책을 충분히 읽어 볼만 하다. 많은 자료와 관련 서적을 접하고 고민한 흔적이 곳곳에 녹아있다. 답이 없는 문제에 답을 찾기 위해 글쓴이가 가진 모든 걸 쥐어 짠 듯하다. 파국의 눈덩이에 조금 큰 생채기를 낼 수 있는 책이다. 다양한 정치적, 경제적 입장에서 벗어나 충분히 읽어볼 만한 책이다.

 

거대한 붕괴 앞에서 우리가, 내가 지금 해야 할 일이 뭔지 난 모른다. 단지 무너지고 부서지는 현실을 바라보며 붕괴의 과정에서 뭔가를 얻기 바랄 뿐이다. 그 뭔가를 찾기 위해 언제까지 무의미의 늪에서 허우적거릴 수 없는 노릇이다. 어차피 의미와 무의미의 반복이겠지만 그 사이에 의미를 넘어선 소중한 무언가를 어쩔 수 없이 희망한다. 무척 어리석어 보이지만 난 이성과 논리가 아닌 인간의 선한 본성에 기대를 건다.

 

소설가 허준(나도 근래에 처음 들어본 이름이다)이 쓴 “잔등”이라는 소설 속 국밥집 할머니 이야기로 글을 마치려한다. 할머니의 하나 남은 막내아들은 노동운동으로 감옥에 갇혀 있었다. 면회 때 아들은 함께 투옥된 일본인 동료에 대해 말한다. 일본인 동료는 일본인은 일본에서 잡히는 멸치만 먹고 살아도 넉넉히 잘 산다는 말을 했다는 이유로 감옥에 갇혔다. 아들은 해방 한 달 전에 옥사했고 할머니는 해방 후 편하게 모시겠다고 찾아온 아들 친구들을 모두 물렀다. 사방에 굶고, 고통 받고, 죽어가는 사람이 천진데 어떻게 자신만 편히 살 수 있겠냐며. 국밥집 할머니는 그토록 미워하는 일본인들(패전국 국민으로 온갖 박해를 받고 있던)에게 묵묵히 국밥을 말아준다. 일본인이 밉지만 아들이 말한 그 일본인 친구 때문에. 혐오와 차별이 넘치는 세상에서 미워하는 이에게 사랑을 베풀어줄 수 있는 할머니의 (책에서 표현된) 슬픈 너그러움이 필요한 시대가 아닐까? 서서히 타올라 꺼지기 직전의 잔등(殘燈)은 희미하지만 어두운 세상을 비추는 소중한 무언가가 아닐까? 무의미와 의미, 이해의 지평 건너편에 존재하는 소중한 무언가가 말이다. 희미하지만 따뜻한 빛을 뿜는 잔등과 슬프지만 너그러운 할머니의 잔상이 어른거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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