스키마
조안영 지음 / 지식과감성# / 2019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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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안영이라는 의사이자 작가인 분이 쓴 소설이다. 내가 가진 편견 때문에 나는 이 소설에 크게 기대하지 않았다. 그런데 책을 다 읽고 나서 나의 생각이 몹시 부끄러웠다. 궁금증을 유발하는 전개 방식이라 책을 읽기 시작한 지 반나절만에 이 책을 다 읽었을 만큼 순식간에 빨려들어갔다.


이 소설은 미스터리 장르의 옴니버스 구성으로 되어 있다. 처음에는 각각의 단편인 줄 알았는데 조금 더 읽다 보면 쉽게 눈치챌 수 있다. 작가는 인지, 해리, 스키마 같은 심리학 용어의 사전적 정의들을 각 장마다 적어놓았다. 우리와 같은 일반 사람들은 사실 그 정의를 읽는다고 해도 잘 이해를 못할 것이다. 그러나 주제에 맞게 이어지는 이야기들이 물 흐르듯 그렇게 흘러가고 나면 그 의미를 어렴풋이 짐작하게 되는 놀라운 경험을 하게 된다. 플롯 자체가 이 소설의 주제라는 말이 정말 맞다. 읽는 내내 예측을 빗나가는 전개가 흥미진진했고, 곳곳에 내 마음을 들킨 것 같은 문장들이 많아서 공감하며 즐겁게 읽었다.

"무의식을 의식화하지 않으면 뮤위식이 우리의 삶의 방향을 결정하게 되는데, 우리는 바로 이런 것을 운명이라 부른다."

소설의 맨 앞에 칼 구스타프 융의 말이 적혀 있다. 운명에 대한 강렬한 문구였다.


잊는다, 고로 존재한다

요즘 기억과 망각에 대한 생각을 많이 한다. 예전에 CNN에 한 천재 화가가 나온 적이 있다. 그 청년은 아이큐가 매우 높아서 모든 것을 기억했다. 그래서 좋은 대학에 다녔고, 한 번 본 장면을 그림으로 그려내서 천재 화가로 불렸다. 그런 그가 말했다. 그에게 삶이 고통 그 자체였다고. 어쩌면 망각은 축복이다. 반면에, 시인에게 망각은 끊임없이 뭔가를 끄집어 와야하는 깊이를 알 수 없는 구덩이일 것이다. 기억의 정체가 뭔지도 모르면서 기대와 두려움을 가지고 부지런히 찌를 건져 올리는 연못같은 것일 것이다. 그것이 무엇이든 망각은 살아있다는 증거다. 정말 그렇다.

스키마는 한 살인 사건을 기점으로 그것과 관련된 사람들의 이야기이다. 40대 성공한 음악교수가 그의 어린 아내에게 살해당하는 것으로 이야기가 시작된다. 그리고 한때 '독수리 오형제'라고 불릴 만큼 친했던 형석, 진우, 아영, 주은, 석기의 이야기가 나오고, 불륜남으로 지목된 현우와 인기가수 한아름의 이야기가 나온다. 후반으로 갈수록 이야기가 한데 모아지는 부분이 재미있다. 인간의 이면에 관한 것이고, 기억의 편향성과 인지 왜곡이 빚어낸 비극성을 다룬 소설이다. 심리학 용어들이 등장하는데 많이 배우게 되고 깊게 생각하게 한다.


심리학에 관심이 있는 독자라면, 이 책을 적극 권한다. 실용적인 책들도 많을테지만, 가끔은 이런 소설을 읽는 것은 인간의 삶으로 들어가 관찰자가 되는 것이다. 관찰자가 되는 것은 더욱 깊은 사유를 가능하게 하기 때문이다.


#스키마 #조안영작가 #지식과감성 #서평 #책추천 #심리학소설 #심리학서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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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가 원하는 것을 나도 모를 때 - 잃어버린 나를 찾는 인생의 문장들
전승환 지음 / 다산초당(다산북스) / 2020년 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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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승환 작가는 '문장수집가'라는 말이 가장 적절한 것 같습니다. 이 책은 오랜 독서로 주옥같은 문장들을 선별해 놓은 보물상자 같은 책입니다. 무언가 고민이 생길 때 책에서 해답을 찾는다는 필자는 각각의 상황별로 다양한 문장들을 분류하고 자신의 경험과 생각을 덧붙입니다. 그 문장들 중에는 제가 읽었던 책과 읽으려던 책이 있었고 앞으로 읽고 싶어진 책들도 있었습니다. 책 뒤에 꼼꼼하게 문장들의 출처도 잘 적혀 있어서 우리가 책을 고를 때 좋은 참고가 될 것 같습니다.

문장들을 읽으면서 필자와 제가 매우 비슷하다는 것에 놀랐습니다. 문장 속에서 위안을 받는다는 점과 외로울 때 더 외로워지려고 노력한다거나 적정한 거리에 대한 생각이라던가 우리는 매우 비슷한 점을 공유하고 있었습니다. 이 책이 갖는 힘은 바로 이러한 공감에서 오는 것 같습니다.


저에게 가장 와닿았던 문장들을 몇 개 적어볼까 합니다.


이 고독과 명상의 시간이야말로 하루 중에 내 마음이 흐트러지거나 방해받는 일 없이 온전히 나 자신이 되고 나 자신에게 집중하는 유일한 시간이다. 또 내가 자연이 바랐던 대로 존재한다고 진심으로 말할 수 있는 유일한 시간이기도 하다.

장 자크 루소, <고독한 산책자의 몽상> p.99


산책 매니아였던 루소는 파리 교외를 혼자 걷는 것을 좋아했다고 합니다. "일생이 불행의 연속이었던 루소는 자신의 지친 마음을 위로해준 것이 산책을 통한 고독과 명상의 시간이었다"(p.99)고 말합니다. 읽으면서 지금 나에게 필요한 것이 산책이라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걷는다는 것은 치유의 힘을 가지고 있습니다. 이렇게 좋은 날에는 좀 걷고 싶습니다. 지친 일상을 좀 달래고 사유를 통해 단단해지고 싶어집니다. 늦은 오전에 홀로 하는 산책을 루틴으로 만들어야겠다고 다짐해봅니다. 


예전 책에

'여기서 행복할 것'

이라는 말을 써두었더니

누군가 나에게 일러주었다

'여기서 행복할 것"의 줄임말이

'여행'이라고

나는 크게 고개를 끄덕였다.

김민철, <모든 요일의 여행> p.30


여행을 가면 늘 하게 되는 생각은 일상을 여행이라고 생각하고 살 수 있으면 얼마나 좋을까입니다. 그리고 돌아와서 생각합니다. 삶이 여행이고 행복은 멀리 있는 게 아니라 바로 지금 여기 있다고 말입니다. 여기서 행복하게 살기 위해 지금 이 순간에 집중해야 할 때입니다. 그러기 위해서 우리는 늘 마음의 소리에 귀 기울여야 합니다. 


나는 다른 사람을 이해한다는 일이 가능하다는 것에 회의적이다. 우리는 대부분 다른 사람들을 오해한다. 네 마음을 내가 알아, 라고 말해서는 안 된다. 그보다는 네가 하는 말의 뜻도 나는 모른다, 라고 말해야만 한다. 내가 희망을 느끼는 건 인간의 이런 한계를 발견할 때다. 우린 노력하지 않는 한, 서로를 이해하지 못한다. 이런 세상에 사랑이라는 게 존재한다. 따라서 누군가를 사랑하는 한, 우리는 노력해야만 한다. 그리고 다른 사람을 위해 노력하는 이 행위 자체가 우리 인생을 살아볼 만한 값어치가 있는 것으로 만든다.

김연수, <세계의 끝, 여자친구> p.246


요즘 제가 가장 많이 생각하는 것이기도 합니다. 누군가를 이해한다는 것이 가능할까요? 오랫동안 고민해봤지만 저는 불가능하다고 생각합니다. 그렇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는 노력해야 합니다. 서로가 끊임없이 이해하려고 노력한다면 어떤 순간 서로를 이해하는 찰나를 경험할 수 있을 거라고 믿습니다. 그리고 그런 과정들을 사랑이라고 생각합니다.

제가 무슨 말을 해도 무슨 말인지 모르겠다는 사람이 있습니다. 답답하다고 느끼면서도 꾸며내지 않는 그 사람이 좋았습니다. 그냥 무심코 내뱉는 이해한다라는 말보다 모릅니다 그렇지만 들어보고 싶습니다라는 그의 태도가 좋았습니다. 제 말을 영원히 이해하지 못하더라도 괜찮았습니다. 이 책을 읽는 독자분들은 더이상 이해받으려고 모든 에너지를 쏟아 부으며 허망하게 살아가지 않기를 바랍니다. 


사람들은 말한다. 사람 사이에 느껴지는 거리가 싫다고. 하지만 나는 사람과 사람 사이에도 적당한 간격이 필요하다고 생각한다. 사람에게는 저마다 오로지 혼자 가꾸어야 할 자기 세계가 있기 때문이다. 또한 떨어져 있어서 빈 채로 있는 그 여백으로 인해 서로 애틋하게 그리워할 수 있게 된다. 구속하듯 구속하지 않는 것, 그것을 위해 서로 그리울 정도의 간격을 유지하는 일은 정말 사랑하는 사이일수록 필요하다. 너무 가까이 다가와서 상처주지 않는, 그러면서도 서로의 존재를 늘 느끼고 바라볼 수 있는 그 정도의 간격을 유지하는 지혜가 필요한 것이다. 나는 나무들이 올곧게 잘 자라는데 필요한 이 간격을 '그리움의 간격'이라고 부른다. 서로의 체온을 느끼고 바라볼 수는 있지만 절대 간섭하거나 구속할 수 없는 거리, 그래서 서로 그리워할 수 밖에 없는 거리.

우종영, <나는 나무처럼 살고 싶다> p.36 


예전에 우울증과 대인 기피증을 심하게 앓았던 적이 있습니다. 집 밖으로 한 발자국도 나갈 수 없는 삶을 살던 저는 어느 날 문득 용기가 생겨 밖으로 나가야겠다라는 생각을 했습니다. 그때 가장 두려웠던 건 누군가 나에 대해 말을 거는 것이었습니다. 나의 문제를 물어보고 나를 짐작하고 나에 대해 단정짓는 말들이 가장 무서웠습니다. 그래서 그때 저는 정말 이기적이게도 "내 곁에서 적당한 거리를 유지하세요. 내 곁에 있는 건 상관 없지만, 나에게 말은 걸지 말아주세요. "라고 얘기했던 것이 생각이 납니다. 지금 생각해보면 참 못됐다라고 생각되지만 그럼에도 누구에게나 이런 때가 있을 거라고 생각합니다. 우리 모두는 자기만의 세계를 가지고 있고, 그 곳을 침범당하면 몹시 괴롭습니다. 우종영 작가의 문장은 사람과 사람의 관계 속에서 적당한 거리에 대해 생각해 볼 수 있는 좋은 문장이었습니다. 


문학이 위로가 아니라 고문이라는 말도 옳은 말이지만, 그럼에도 가끔은 문학이 위로가 될 수 있는 이유는 그것이 고통이 무엇인지 아는 사람들의 말이기 때문이고, 고통받는 사람에게는 그런 사람의 말만이 진실하게 들리기 때문이다.

신형철, <슬픔을 공부하는 슬픔> p.17


제가 가장 좋아하는 단어들 중 하나가 바로 "문학"입니다. 어떻게 살아야 할 것인가라는 질문에 대해 늘 생각하게 하는 문학을 한결같이 사랑했습니다. 그러나 가끔은 문학으로 인해 나 자신의 감정이 크게 영향을 받고, 심할 때면 일상을 유지하기 힘들 정도로 고통스럽기도 합니다. 문학을 읽는다는 것은 종종 아픈 곳을 바늘로 찔러 고름을 빼내는 작업과 유사합니다. 몹시 아프지만 치유하는 과정인 셈이죠. 평론가로 유명한 신형철 작가의 이 문장은 평생 기억해두고 싶었습니다. 


마지막으로 이 책은 꼭 순서대로 읽을 필요가 없습니다. 목차를 펼쳐 지금 이순간 가장 필요한 대목을 읽으세요. 그리고 그 문장들을 읽고 잠시 위안을 얻으실 수 있기를 바랍니다. 


#내가원하는것을나도모를때 #전승환작가 #다산초당 #다산북스 #문장수집 #책추천 #에세이추천 #힐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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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가 원하는 것을 나도 모를 때 - 잃어버린 나를 찾는 인생의 문장들
전승환 지음 / 다산초당(다산북스) / 2020년 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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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승환 작가는 '문장수집가'라는 말이 가장 적절한 것 같습니다. 이 책은 오랜 독서로 주옥같은 문장들을 선별해 놓은 보물상자 같은 책입니다. 무언가 고민이 생길 때 책에서 해답을 찾는다는 필자는 각각의 상황별로 다양한 문장들을 분류하고 자신의 경험과 생각을 덧붙입니다. 그 문장들 중에는 제가 읽었던 책과 읽으려던 책이 있었고 앞으로 읽고 싶어진 책들도 있었습니다. 책 뒤에 꼼꼼하게 문장들의 출처도 잘 적혀 있어서 우리가 책을 고를 때 좋은 참고가 될 것 같습니다.

문장들을 읽으면서 필자와 제가 매우 비슷하다는 것에 놀랐습니다. 문장 속에서 위안을 받는다는 점과 외로울 때 더 외로워지려고 노력한다거나 적정한 거리에 대한 생각이라던가 우리는 매우 비슷한 점을 공유하고 있었습니다. 이 책이 갖는 힘은 바로 이러한 공감에서 오는 것 같습니다. 



저에게 가장 와닿았던 문장들을 몇 개 적어볼까 합니다.

이 고독과 명상의 시간이야말로 하루 중에 내 마음이 흐트러지거나 방해받는 일 없이 온전히 나 자신이 되고 나 자신에게 집중하는 유일한 시간이다. 또 내가 자연이 바랐던 대로 존재한다고 진심으로 말할 수 있는 유일한 시간이기도 하다.

장 자크 루소, <고독한 산책자의 몽상> p.99


산책 매니아였던 루소는 파리 교외를 혼자 걷는 것을 좋아했다고 합니다. "일생이 불행의 연속이었던 루소는 자신의 지친 마음을 위로해준 것이 산책을 통한 고독과 명상의 시간이었다"(p.99)고 말합니다. 읽으면서 지금 나에게 필요한 것이 산책이라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걷는다는 것은 치유의 힘을 가지고 있습니다. 이렇게 좋은 날에는 좀 걷고 싶습니다. 지친 일상을 좀 달래고 사유를 통해 단단해지고 싶어집니다. 늦은 오전에 홀로 하는 산책을 루틴으로 만들어야겠다고 다짐해봅니다. 


예전 책에

'여기서 행복할 것'

이라는 말을 써두었더니

누군가 나에게 일러주었다

'여기서 행복할 것"의 줄임말이

'여행'이라고

나는 크게 고개를 끄덕였다.

김민철, <모든 요일의 여행> p.30


여행을 가면 늘 하게 되는 생각은 일상을 여행이라고 생각하고 살 수 있으면 얼마나 좋을까입니다. 그리고 돌아와서 생각합니다. 삶이 여행이고 행복은 멀리 있는 게 아니라 바로 지금 여기 있다고 말입니다. 여기서 행복하게 살기 위해 지금 이 순간에 집중해야 할 때입니다. 그러기 위해서 우리는 늘 마음의 소리에 귀 기울여야 합니다. 


나는 다른 사람을 이해한다는 일이 가능하다는 것에 회의적이다. 우리는 대부분 다른 사람들을 오해한다. 네 마음을 내가 알아, 라고 말해서는 안 된다. 그보다는 네가 하는 말의 뜻도 나는 모른다, 라고 말해야만 한다. 내가 희망을 느끼는 건 인간의 이런 한계를 발견할 때다. 우린 노력하지 않는 한, 서로를 이해하지 못한다. 이런 세상에 사랑이라는 게 존재한다. 따라서 누군가를 사랑하는 한, 우리는 노력해야만 한다. 그리고 다른 사람을 위해 노력하는 이 행위 자체가 우리 인생을 살아볼 만한 값어치가 있는 것으로 만든다.

김연수, <세계의 끝, 여자친구> p.246


요즘 제가 가장 많이 생각하는 것이기도 합니다. 누군가를 이해한다는 것이 가능할까요? 오랫동안 고민해봤지만 저는 불가능하다고 생각합니다. 그렇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는 노력해야 합니다. 서로가 끊임없이 이해하려고 노력한다면 어떤 순간 서로를 이해하는 찰나를 경험할 수 있을 거라고 믿습니다. 그리고 그런 과정들을 사랑이라고 생각합니다.

제가 무슨 말을 해도 무슨 말인지 모르겠다는 사람이 있습니다. 답답하다고 느끼면서도 꾸며내지 않는 그 사람이 좋았습니다. 그냥 무심코 내뱉는 이해한다라는 말보다 모릅니다 그렇지만 들어보고 싶습니다라는 그의 태도가 좋았습니다. 제 말을 영원히 이해하지 못하더라도 괜찮았습니다. 이 책을 읽는 독자분들은 더이상 이해받으려고 모든 에너지를 쏟아 부으며 허망하게 살아가지 않기를 바랍니다. 


사람들은 말한다. 사람 사이에 느껴지는 거리가 싫다고. 하지만 나는 사람과 사람 사이에도 적당한 간격이 필요하다고 생각한다. 사람에게는 저마다 오로지 혼자 가꾸어야 할 자기 세계가 있기 때문이다. 또한 떨어져 있어서 빈 채로 있는 그 여백으로 인해 서로 애틋하게 그리워할 수 있게 된다. 구속하듯 구속하지 않는 것, 그것을 위해 서로 그리울 정도의 간격을 유지하는 일은 정말 사랑하는 사이일수록 필요하다. 너무 가까이 다가와서 상처주지 않는, 그러면서도 서로의 존재를 늘 느끼고 바라볼 수 있는 그 정도의 간격을 유지하는 지혜가 필요한 것이다. 나는 나무들이 올곧게 잘 자라는데 필요한 이 간격을 '그리움의 간격'이라고 부른다. 서로의 체온을 느끼고 바라볼 수는 있지만 절대 간섭하거나 구속할 수 없는 거리, 그래서 서로 그리워할 수 밖에 없는 거리.

우종영, <나는 나무처럼 살고 싶다> p.36 


예전에 우울증과 대인 기피증을 심하게 앓았던 적이 있습니다. 집 밖으로 한 발자국도 나갈 수 없는 삶을 살던 저는 어느 날 문득 용기가 생겨 밖으로 나가야겠다라는 생각을 했습니다. 그때 가장 두려웠던 건 누군가 나에 대해 말을 거는 것이었습니다. 나의 문제를 물어보고 나를 짐작하고 나에 대해 단정짓는 말들이 가장 무서웠습니다. 그래서 그때 저는 정말 이기적이게도 "내 곁에서 적당한 거리를 유지하세요. 내 곁에 있는 건 상관 없지만, 나에게 말은 걸지 말아주세요. "라고 얘기했던 것이 생각이 납니다. 지금 생각해보면 참 못됐다라고 생각되지만 그럼에도 누구에게나 이런 때가 있을 거라고 생각합니다. 우리 모두는 자기만의 세계를 가지고 있고, 그 곳을 침범당하면 몹시 괴롭습니다. 우종영 작가의 문장은 사람과 사람의 관계 속에서 적당한 거리에 대해 생각해 볼 수 있는 좋은 문장이었습니다. 


문학이 위로가 아니라 고문이라는 말도 옳은 말이지만, 그럼에도 가끔은 문학이 위로가 될 수 있는 이유는 그것이 고통이 무엇인지 아는 사람들의 말이기 때문이고, 고통받는 사람에게는 그런 사람의 말만이 진실하게 들리기 때문이다.

신형철, <슬픔을 공부하는 슬픔> p.17


제가 가장 좋아하는 단어들 중 하나가 바로 "문학"입니다. 어떻게 살아야 할 것인가라는 질문에 대해 늘 생각하게 하는 문학을 한결같이 사랑했습니다. 그러나 가끔은 문학으로 인해 나 자신의 감정이 크게 영향을 받고, 심할 때면 일상을 유지하기 힘들 정도로 고통스럽기도 합니다. 문학을 읽는다는 것은 종종 아픈 곳을 바늘로 찔러 고름을 빼내는 작업과 유사합니다. 몹시 아프지만 치유하는 과정인 셈이죠. 평론가로 유명한 신형철 작가의 이 문장은 평생 기억해두고 싶었습니다. 


마지막으로 이 책은 꼭 순서대로 읽을 필요가 없습니다. 목차를 펼쳐 지금 이순간 가장 필요한 대목을 읽으세요. 그리고 그 문장들을 읽고 잠시 위안을 얻으실 수 있기를 바랍니다. 


#내가원하는것을나도모를때 #전승환작가 #다산초당 #다산북스 #문장수집 #책추천 #에세이추천 #힐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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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곱 개의 회의 블랙 앤 화이트 시리즈 86
이케이도 준 지음, 심정명 옮김 / 비채 / 2020년 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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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자와 나오키> 시리즈로 유명한 이케이도 준의 책이다. 한때 히가시노 게이고의 소설과 미야베 미유키의 책들을 닥치는 대로 흡수하며 읽었었다. 이케이도 준은 이 둘을 섞어놓았다는 평이 많아서 기대감을 갖고 읽었다. 책이 워낙 재밌어서 책을 받자마자 이틀 만에 다 읽었다. 평이한 문체의 소설로 가독성이 좋았으며, 클라이맥스로 갈수록 긴장감이 고조되어 숨죽여가며 읽었다. 기회가 되면 이 작가의 다른 책들도 찾아서 읽어보고 싶다. 시간 내서 이 소설을 영화화한 <내부 고발자들: 월급쟁이의 전쟁>도 보려고 한다.

도쿄겐덴이라는 소닉의 자회사이자 견실한 중견기업을 배경으로 그 안에서 일어나는 비리와 내부고발에 관한 소설이다. 끝까지 밝혀서 조직의 썩은 부분을 도려내려는 내부고발자들과 어떻게든 이것을 감추려는 자들이 고군분투하는 이야기이다. 양측이 서로 대립하며 엎치락뒤치락 하며 새로운 사실들이 수면 위로 드러나고 전혀 다른 방향으로 흘러가고 예측을 할 수 없어서 더 재밌게 읽었다. 일본판 '미생'이라고 생각하고 읽어도 좋을 것 같다. 우리와 비슷한 점도 많고, 다른 문화도 있어서 비교해가며 읽는 재미가 있다.

이 소설은 옴니버스 구성으로 1화에서 발단이 되는 사건이 벌어지고, 이 소설의 중심이 되는 대략적인 인물들이 나온다. 그리고 2화부터는 '도교겐덴'이라는 조직을 구성하는 개개인들을 중심으로 서술하며 점차 어떤 비리의 실체에 다가간다. 각 부서들의 풍경과 애로사항들을 묘사하고 있어서 공감 가는 점이 많았다. 주력 부서인 영업 1과와 만년 2등인 영업 2과의 상반된 모습과 이 회사의 주된 일이 영업이라 대부분 영업부를 중심으로 이야기가 전개되지만 주변을 둘러싸고 있는 인사부, 총무부, 경리부, 고객담당실 그리고 하청업체들이 상호작용하는 모습들이 재밌게 읽혔다. 어느 회사에서나 있을 것 같은 인간 군상들과 사무실 풍경들이 이 소설에 리얼리티를 부여했고, 서로 다른 이야기를 하고 있는 것 같지만 결국 하나의 교집합을 도출해내는 과정들이 매우 흥미로웠다.

나오는 인물들이 전부 개성있고 독특하다. 뒤로 갈수록 인물들이 많아지고 일본어 이름이어서 그런지 매우 비슷하게 느껴진다. 1화를 읽으면서 인물들을 조금 정리해두는 것을 추천한다. 나중에 어떤 인물이었는지 찾느라 시간을 낭비하지 않아도 되고 인물을 더 잘 이해하게 된다. 외국소설을 읽을 때 마인드 맵을 활용하자.

수주를 위해 원가를 절감해야 하는 상황이다. 제대로 해내지 못하면 회의에서 질타가 이어지고 능력없는 놈으로 찍히고 평생 진급이라는 걸 하지 못할지도 모른다. 이런 상황에서 당신은 어떻게 할 것인가? 어느 쪽을 선택할 것인가? "겉치레의 번영인가? 진실한 청빈인가?" 어떤 선택을 할 것이냐고 묻지만 더 나아가 어떻게 살 것이냐고 묻는 소설이다.



작가는 각각의 인물들을 다루는 데 있어 가족 구성과 부모에 대한 이야기, 어린 시절을 빼놓지 않고 설명한다. 독자들이 인물을 이해하는 데 있어 꼭 필요하단 판단이 있었을 것이고 이런 세심한 부분이 좋았다. 왜 이 사람이 이런 선택을 하게 된 것일까라는 점에서 인물의 심리적인 측면에서 이해를 돕는다. 그리고 아버지들에 대한 인물들의 독백이 인상적이었다. 이 책을 읽는 독자들은 분명 소설 속 '나'의 상황이 자신의 상황과 크게 다르지 않음을 충분히 인지할 것이다. 더 나아가 자신의 아버지에 대한 생각도 같이 하게 될 것이다. 나보다 먼저 모진 세상을 겪어낸 아버지들에 대해 존경심을 느낄 것이다. 위기였을 때마다 흔들리지 않으려 애쓰고 반복되는 불행에도 자식에게 결코 내색하지 않으셨을 지금의 나와 결코 다르지 않았던 그 존재들 말이다.

​ 이 소설은 하청업체의 입장에서 읽는다면 조금은 슬플 것이다. 하청의 수익을 대기업이 빨아올리는 구조가 우리나라와 비슷하다. 한결같은 마음보다 가격 경쟁력이 중요한 시대이다. 실제로 '네지로쿠'와 비슷한 회사들이 많다. 버티는 것만이 정답은 아닐지도 모른다고 밤낮을 고민하고 있는 사람들이 있다. 자주 가는 단골집이 바뀌고 마음속으로 응원하던 회사가 사라지는 것을 무수히 보게 되고 가끔 그것에 서운하기도 하지만 그럼에도 우리가 어떡해야 할까라는 생각을 해본 적 없던 것 같다. 우리는 가격보다 진심을 보는 사람들인가?

​ 딱 한 번만 눈 감고 비리를 저지르는 사람이 있다. 비리를 못 본 척 하는 사람들이 있다. 누군가는 거짓말을 하고 그 거짓말을 덮기 위해 더 큰 거짓말을 하게 된다. 수많은 사람들의 침묵과 동조 속에서 눈덩이처럼 커진 암세포로 조직이 썩어가고 있다. 그 곳에서 한 줄기 희망 같은 내부고발자들이 있다. 내부 고발의 목적도 다양하다. 자신의 안위이거나 누군가에 대한 복수일 수도 있고, 그야말로 정의 그 자체인 경우도 있다. 이 소설은 이처럼 혼란스로운 세상 속에서 어떤 인물로 존재하고 싶냐고 묻는다. 당신은 어떤 사람인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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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는 언제나 늑대였다
애비 웜백 지음, 이민경 옮김 / 다산북스 / 2020년 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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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글에는 스포일러가 포함되어 있습니다.
이 책은 미국의 한 축구 선수의 목소리를 담고 있는 책입니다. 실제로 에비 웜백은 매우 위대한 축구 선수이며, 굉장한 기록을 갖고 있는 선수입니다. 그녀는 남녀 통틀어 최고의 기록을 보유하였고, 주장으로서 몇 번의 올림픽에서 금메달을 땄고, 월드컵에서 우승하였습니다. 늘 최고의 자리에 있었던 그녀의 이야기가 몹시 궁금해졌습니다.

<우리는 언제나 늑대였다>라는 제목에서 '늑대'라는 단어는 강렬하게 다가옵니다. 왜 하필 늑대였을까? 늑대의 힘과 무리의 사랑이 뭘까? 책을 다 읽고 나면 진실을 알게 되리라는 기대감을 안고 책을 읽었습니다.

이 책은 늑대 무리에 들어온 것에 대한 환영 인사로 시작하고, 여덟 가지의 새로운 규칙을 배우고, 마지막에 가서는 게임을 바꿀 시간이 왔음을 알리는 말로 끝납니다. 구성 자체가 매우 간결하면서 짜임새가 있어 쉽게 읽을 수 있습니다.

서문에서 필자는 왜 자신과 우리가 늑대 무리인지 밝힙니다. 1995년 옐로 스톤 국립공원에 우연히 늑대가 돌아왔고, 그로 인해 동식물의 생태계가 복원되었습니다. 정말 마법 같은 이야기였습니다.

그는 체계의 위협이 된다고 여겨지던 늑대들이 존재만으로 생태계를 구원하듯 체계에 위협이 된다고 여겨지던 여성들이 우리 사회를 살리고 있다고 힘주어 말합니다. 피파는 여성 축구를 폄하하고 무시했고 끊임없이 인정하지 않으려 했지만 그들은 포기하지 않고 싸우고 노력했으며, 그래서 바꾸고 이뤄냈습니다. 당신은 이 책을 읽는 순간부터 늑대 무리에 동참하게 될 것입니다. 저 또한 그랬고 강한 동지애를 느꼈습니다.

빨간 모자 이야기에서 빨간 모자가 받는 엄격한 규칙은 다음과 같습니다.

"길을 벗어나지 말고 그대로 있어라.
누구와도 이야기하지 말아라.
고개를 숙이고 망토 속으로 숨어라."

빨간 모자는 처음에는 규칙을 잘 지키다가 호기심이 생겨 길을 벗어납니다. 그리고는 나쁜 늑대를 만나게 됩니다.

이 이야기가 소녀들에게 주는 메시지는 다음과 같습니다.

"규칙을 따르라.
호기심을 갖지 마라.
너무 많이 말하지 마라.
더 기대하지 마라.
그렇지 않으면 '나쁜 일'이 일어난다."

필자는 이 이야기가 틀렸다고 말합니다. 그녀는 현실에서 길을 벗어나기로 결심했을 때마다 항상 좋은 일이 있어났다고 말합니다. 그리고 어린 '나'를 만난다면 이렇게 말해주고 싶다고 합니다.

"애비,
너는 한 번도 빨간 모자였던 적이 없어.
너는 언제나 늑대였단다."

이 대목에서 우리는 무심코 아이들에게 들려주는 동화가 얼마나 위험할 수 있는지 실감하게 됩니다. 나의 무지함이 어린 동생들과, 제자들과, 딸들에게 규칙을 만들고 그들을 억압할 수 있다는 사실에 무척이나 놀라고, 자신 또한 그렇게 길러졌다는 사실에 화가 났습니다.

반면에, 빨간 모자의 규칙을 따르지 않는 여성들이 있습니다. 애초에 이들을 위한 길은 없었기 때문에 늘 벽돌 하나씩 쌓으며 자신들의 길을 만들어갑니다. 다음에 올 늑대 세대를 위해 자신들의 삶과 경력을 걸고 필요한 것을 직접 창조해내며 그렇게 자신의 길을 걸어갔습니다.

이 책을 읽는 동안 자신도 몰랐던 내면의 분노를 발견한다면 우리는 변할 수 있는 사람입니다. 저는 이 책을 읽으면서 제 자신에게 계속 준비가 되었냐고 질문을 던졌습니다. 움직일 준비, 변할 준비, 늑대 무리 속에 들어가 그들과 함께 호흡할 준비 말입니다.

"그저 감사하기만 하는 태도"를 반성하게 되었습니다. 저는 왜 단 한 번도 그런 생각을 해보지 못한 걸까요? 차별이라는 걸 당하면서도 이거라도 감사해야 한다고 믿었던 제 자신이 부끄러워졌습니다. 여러분들은 어떻게 생각하시나요?

저는 늘 제가 '리더'랑은 어울리지 않는다고만 생각했습니다. 나와는 먼 이야기인 줄로만 알았는데, 애비는 우리 모두는 살아있는 한 '리더'라고 말합니다. 조금만 생각해봐도 정말 그렇습니다. 내 가정에서, 내 일에서, 내 삶에서, 내 글에서 저는 '리더'일 수밖에 없는 존재입니다. 벤치에서 리더가 되지 못한다면 필드에서도 어쩌면 자신의 삶에서도 리더가 될 수 없습니다.


저는 양보와 겸손이 미덕인 줄 알고 살았던 사람입니다. 자신있는 게 있어도 쉽게 나서지 못하는 사람이었습니다. 그런 저에게 애비는 큰 깨우침을 주었습니다. 내가 가진 힘을 드러내려고 합니다. 당장 일어나서 말하고 싶습니다. 빌어먹을. 공 내놔.

여덟 가지 규칙들 모두 하나하나 깊이 새기고 싶은 이야기였습니다. 나머지 규칙들은 책을 통해 직접 확인해 보시길 바랍니다.

마지막에 애비 웜백은 자신을 잊어달라고 말합니다. 자신이 잊힌 날이 우리가 승리하는 날일 거라고 말합니다. 과연 그 날은 언제 올까요? 저는 그 날이 멀지 않았다고 굳게 믿습니다.

여기서부터는 사담입니다. 저는 이 책을 다 읽기 무섭게 동생의 기숙사로 부쳤습니다. 그리고 서점에서 몇 권을 더 사서 제자들에게 나눠줄 생각입니다. 그 동안에 많은 리더십 관련 책들을 읽었지만 이만큼 저에게 크게 다가온 책은 없었습니다. 애비 웜백의 이야기는 확실히 무언가 다른 게 있습니다. 간결한 문체와 쉽게 읽히도록 쓰여졌다는 사실 말고도 이 책에는 "애비 웜백"이라는 빛나는 사람이 들어가 있습니다. 그의 삶이 그랬듯이 그를
닮은 이 책의 진심은 누구에게나 통할 것이라고 믿습니다.
내가 잘 하고 있는지 모르겠을 때, 한참을 그렇게 방황하고 있을 때 이 책을 만난 건 행운이었습니다. 좋은 책을 선물해주신 다산북스 관계자 분들께 감사하다는 말을 꼭 전하고 싶습니다.

마지막은 책에서 인용된 한 구절로 마무리하겠습니다.
"포기하지 않는 여성은 질 수 없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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