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트] 둠즈데이북 1~2 세트 - 전2권 옥스퍼드 시간 여행 시리즈
코니 윌리스 지음, 최용준 옮김 / 아작 / 2018년 2월
평점 :
품절


<둠즈데이북>을 처음 읽었을 때는 사실 이 시리즈를 다 소화하지 못 할 것이라고 생각했다. <둠즈데이북>의 주인공 키브린은 옥스퍼드 대학에서 중세 역사를 전공하고 있어서, 중세는 여성에게 위험지수가 높다는 만류에도 불구하고 야심차게 중세를 연구하기 위해 시간여행을 떠난다. 여기까지만 보면 완전 끌린다. 와 중세덕후 여자 역사학자가 중세로 시간여행을 간다!! 그런데 심각한 문제가 생긴다. 키브린이 '현재'에서 사라지자마자 (시간여행의 출발점이자 복귀지점이 되는..웜홀같은 개념의) 네트를 조작하고 관리하는 기술자 바드리가 "뭔가가 잘못되었습니다"라는 말만 남긴 채 쓰러지고, 그는 뭐가 어떻게 잘못되었다는 것인지 제대로 말을 하지 못한다. 바드리는 '현재'에서 갑자기 유행하는 심각한 바이러스에 감염된 것인데, 바드리가 하려던 말을 알아내어 키브린을 구해내야 하는 던워디 교수 역시 바이러스에 감염되면서 일은 점점 꼬이게 된다. 한편 키브린은 원래 가려던 시점이 아닌 다른 시점에 떨어진데다 원인을 알 수 없는 고열에 시달리며 어느 집으로 옮겨진 상태에서 간신히 정신을 차리고 자신이 어느 시점의 어느 곳에 있는지 알아내야 한다. 곧 키브린은 그 잘못된 도착이 초래한 고통을 맞이하게 된다.

결말을 제외한 내용을 정리하자면 이러한데, 1권 내내 꼬인 일을 해결해야 할 인물들이 서로 만나지 못 하고 만나더라도 소통에 실패하고 계속 각자 해야할 말을 못 하게 되는 와중에 전염성이 강한 바이러스가 도대체 무엇인지도 알 수 없고 중세의 키브린과 현재의 병원 모두가 아연실색 혼란 그 자체라, 보는 내내 속이 터지는 줄 알았다. 나중에 알게 된 것이지만 '소통이 안 된다는 것'은 코니 윌리스 소설의 가장 큰 특징이자, 소설의 주요 갈등을 이루는 요소였다. 등장인물들이 모종의 이유로 진실을 말하지 않든, 말을 할 수가 없든, 혹은 문자 그대로 말이 통하지 않든, 진실을 감추고 있는 과잉 혹은 과소 혹은 틀린 정보 속에서 인물들은 쉽게 대화하지 못하고 해결의 지점을 멀리서부터 빙빙 돌아온다. (이러한 소통의 문제에 대한 코니 윌리스의 의식은 크리스마스 단편집 <빨간 구두 꺼져! 나는 로켓무용단이 되고 싶었다고!>에 실린 "모두가 땅에 앉아있었는데"에서도 잘 나타난다. 아주 귀엽고 감동적이고 로맨틱하고 좋은 단편...) 다른 작품에서도 그로 인한 갈등이 답답하긴 하지만, 둠즈데이북의 경우 '투병'이라는 극한의 요소와 옥스퍼드 내부 및 병원의 돌아버릴 것 같은 행정절차, 알량한 권력다툼 등이 개입되므로 더더욱 보기 힘들었던 것 같다. 그러나 코니 윌리스의 소설은 그것을 극복하고 도달하는 결말의 아름다움이 아주아주 큰 작품이다. 키브린이 위험에 빠졌다는 것을 알자마자 주저없이 찾으러 가(려..)는 던워디교수, 자신의 몸을 돌보지 않고 수많은 환자를 살리려 노력한 의사 메리 아렌스(이 이름만 이야기하면 눈물이 앞을 가려요...), 그리고 자신이 처한 극한 상황에서 최선을 다해 할 수 있는 모든 것을 하는 키브린. 열정으로 반짝거렸던 키브린이 중세에서 수많은 죽음을 겪으며 변화하는 모습을 바라보는 것은 마음아프지만 가장 황폐화된 배경에서 극히 소진되었음에도 불구하고 마지막까지 the next right thing(feat.겨울왕국 안나)을 놓지 않는 캐릭터는 당연히 큰 감동을 준다.

코니 윌리스의 인물들의 원형을 키브린이라고 한다면, 그 특성은 명확하다. 그들은 옳은 선택을 한다. 그것이 얼마나 힘든 것이든, 그리고 자신이 얼마나 위험해지든. 그 옳은 선택의 기준은 더 많은 사람을 살리는 것에 있다. 언제나 행동의 근원은 인류애다. 그렇기 때문에 이 시리즈는 전쟁으로, 서양인들의 시점에서 인류애가 가장 절체절명의 위기에 처했던 제2차 세계대전으로 향할 수밖에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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평등하기만 하면 모두의 삶이 쉬워질까? 대답에 매몰되지 말고 이 질문이 맞는 것인지 생각해보자. 우리가 권리와 기회를 요구할 때 그 결과로 기대하는 것은 편한 삶이 아니다. 우리 시설에 갇혀서 남이 주는 대로 먹고 자고 아무런 노동을 하지 않으며 생애를 보내는 인생을 인간답다고 하지 않는다. 이런 삶은 동물에게도 가혹하다. 불평등한 위치에 있는 사람이 평등한 권리와 기회를 요구하는 건 다른 사람과 마찬가지로 위험을 감수하고 모험하면서 나름의 삶을 헤쳐나가겠다는 의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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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람들은 왜 너 자신에 집중하지 못하고 다른 사람을 위해 사느냐고 묻는다. 끝내는 아무것도 남지 않고, 아무도 고마워하지 않을 거라고. 하지만그런 사람들이 가지고 있는 건전한 절대 명제, ‘누구나 하나의 세계를 이룰수 있다‘는 역사상 가장 오래 되풀이된 거짓말 중 하나일 거라고 주영은 생각했다. 세계를 만들 수 없는 사람도 있다. 아니, 대부분의 사람들은 탁월하고 독창적인 사람들이 만든 세계에 기생할 수밖에 없다. 한 사람 한 사람 이 똑같이 기여하는 것이 아니다. 거인이 휘저어 만든 큰 흐름에 멍한 얼굴로 휩쓸리다가 길지 않은 수명을 다 보내는 게 대개의 인생이란 걸 주영은어째선지 아주 어린 나이에 깨달았다. 끊임없이 공자와 소크라테스의 세계에, 예수와 부처의 세계에, 셰익스피어와 세르반테스의 세계에, 테슬라와에디슨의 세계에, 애덤 스미스와 마르크스의 세계에, 비틀스와 퀸의 세계에, 빌 게이츠와 스티브 잡스의 세계에 포함되고 포함되고 또 포함되어 처절히 벤다이어그램의 중심이 되어가면서 말이다.
어차피 다른 이의 세계에 무력하게 휩쓸리고 포함당하며 살아가야 한다.
면, 차라리 아폴로의 그 다시없이 아름다운 세계에 뛰어들어 살겠다. 그 세계만이 의지로 선택한 유일한 세계가 되도록 하겠다…… 주영의 선택은, 남들이 생각하는 것처럼 아무 고민 없는 아둔한 열병 같은 것이 아니었다. 차라리 명확한 목표 의식의 결과였다.
그런데 그 세계가, 주영이 선택한 단 하나의 세계가 사라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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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직 빠순이로서 어쩔 수 없이 알겠는 마음.

아폴로를 처음 만났을 때는 교복을 입고 있었다. 주영은 수습 불가능한헤어스타일을 한 아무것도 모르는 고등학생이었지만 아폴로를 처음 보고, 아니, 처음 듣고 인생의 소명을 알아버렸다. 저 사람을 벅찬 마음으로 따라가기 위해 태어났다고, 소명을 어린 나이에 아는 것은 사실 엄청난 행운이 아닌지.
"오빠는, 오빠는, 정말 눈부신 사람이에요. 언젠가 굉장해질 거라고 생각해요."
지금 생각해도 참으로 낯 뜨거운 고백이었으나, 되돌아가도 그렇게 토하듯 감정을 쏟을 것이 분명하다. 턱밑까지 찰랑찰랑 차올라서 어쩔 수 없었다. 요동치는 마음은 여전히 하나도 변하지 않았으니, 당시 주영의 격찬에아폴로는 살짝 난처한 미소를 지었다.
"글쎄요, 여기 공연도 고정이 아닌데 잘되려나."
"모든 사람들이, 전 세계가 오빠를 알아볼 날이 올 거예요. 그때가 되면옛날에 걔가 보는 눈이 있었구나 싶을걸요. 계속 곁에 있었으면 하지만요."
아폴로가 드디어 눈으로도 웃었다.
"고마워요. 오늘 그런 말을 듣는 게 정말 필요했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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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래도 모르니까 두 사람은 어깨를 서로 살짝 부딪쳤다.
"조심하세요."
"가서 구할 수 있으면, 나도 티켓 보내줄게요. 휴가 와요."
"올해 휴가 일수 안 남았기 때문에."
주영과 정규가 다른 방향으로 걷기 시작했다.
둘은 다시는 서로를 보지 못했다. 그래서 더욱 그 만남은 기억에 남을 만 한 것이었고 훗날 종종 서로를 생각하며 웃게 되었다. 그렇게 이상한 경험 을 함께한 사람, 기억나지 않을 리가.
동시에 웃었던 적도 있다. 한 사람은 서울에서, 한 사람은 우주 투어 길 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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