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뉴욕 111번가의 목수 - 나를 바꾸는 진정한 삶의 가치
존 고든 지음, 구미화 옮김 / 한경비피 / 2014년 12월
평점 :
절판


책을 좋아하는 편이지만 자기계발서를 읽은 기억은 거의 없다. 누구나 할 수 있는 뻔한 말들을 늘어놓고, 긍정의 자세는 좋지만 정도가 지나쳐 무한긍정주의로 흐르는 것 같은 내용들이 그다지 깊이있게 느껴지지 않았기 때문이다. 개인적인 취향도 고민거리가 많은 내용이거나 혹은 작가가 한 문장 한 문장 깊은 고민을 한 것 같은 책, 다시 말해 가볍지만은 않은 책을 선호하는 편이다보니 더욱 그랬을 것이다.

그래서 디지털 시대를 살고 있음에도 난 언제나 아날로그인이었다. 공교롭게도 아날로그에서 디지털화되어가던 90년대 초중반부터 자기계발서가 인기를 끌기 시작한 것을 보면, 가볍게 읽을 수 있는 자기계발서가 아날로그적 독서취향을 가진 내게 매력적이지 않았던 것이 이상한 현상은 아닐 거다.

<뉴욕 111번가의 목수>는 자기계발서다.​ 평소 같았으면 읽을 시도조차 하지 않았을 분야의 서적을 읽게 된 것은 시기적으로 마침 학기말의 폭풍과제와 진행하고 있는 여러 프로젝트로 몸과 마음이 완전히 녹초가 되었던 연말이라 가벼운 책으로 머리를 식히고 싶었던 탓이 컸다.  책에 대한 기대감 보다는 그냥 킬링타임으로 읽고, 공짜책 받고, 머리도 식히고 하는.

 

 

 

런 점에서 봤을 때 <뉴욕 111번가의 목수>는 내 예상과 딱 절반이 맞아 떨어졌다. 쉽고 가볍게 읽을 수 있는 동화같은 스토리가 그랬고, 반면 술술 읽히는 내용에도 불구하고 담겨진 메세지는 결코 쉽지 않다는 점에서 많은 숙제를 던지는 책이었다.

​"더 깊이 사랑하고,

더 크게 섬기고,

더 많이 보살피라"​

 

 

살면서 한번 쯤 이 말을 들어보지 않은 사람이 있을까. 누구나 들어봤다는 것은 그만큼 누구나 생각하기도, 말하기도 쉽다는 뜻이다. 사랑하고, 섬기고, 보살피는 것은 동서고금을 막론하고, 인간관계에서 가장 바람직하고 아름다운 것으로 추앙받아 왔으며, 앞으로도 그럴 것 또한 누구든 예상할 수 있을 정도로 자명한 사실이다.

그러나 "실천"의 단계로 들어가면 이 세가지 행위는 더 이상 쉬운 것이 아니라 가장 어려운 고난이도의 강령이 된다. 나와 다른 사람들을 사랑하는 것​. 더구나 지금 내가 어렵고 힘든 상황에 처해있다면, 사랑을 베풀기란 쉽지 않다. 물질, 심리, 건강, 관계 등 삶의 어떤 부분이라도 조금만 어긋나면, 그 어긋남에 집중하는 나머지 "사랑"이라는 가장 위대한 감정과 행위를 잊어버리곤 하는 것이 인간이기 때문이다.

사랑하기도 힘든데 섬기는 것이 쉬울리 없다. 남을 섬긴다는 것은 "자기 희생"이 필연적으로 수반되어야 한다. 타인의 필요(Needs)를 먼저 생각하고 배려하는 섬김은 자신을 타인보다 낮추는 "낮아짐"의 자세가 없이는 불가능하다. 인간의 이기심은 자기자신을 높이려는 본능적인 속성에서 비롯된 것인데, "섬김"은 이러한 인간의 속성을 전면적으로 거스르는 행위이기 때문에 개인의 엄청난 노력이 뒤따를 수 밖에 없다.

 

 

"장인은 다른 사람을 잡아먹으면서 성공하는 사람이 아니에요. 다른 사람과 경쟁하기보다 오직 자신의 완성을 위해 뛰죠. 그리고 실패할까봐 걱정하지 않아요. 애정을 담아 작품을 완성할 생각만 하죠. 자신의 일을 사랑하는 장인에겐 그 어떤 두려움도 힘을 쓰지 못해요. 그 덕분에 최선을 다해 작업할 수 있고, 최고의 작품을 창조해내요. 마이클, 당신도 스스로 장인이라고 생각한다고 분명히 이야기하지 않았나요?"

 

"저 역시 일할 땐 제가 아는 그 누구보다도 열심히 일한다고 자신합니다! 항상 더 나아지려고 노력하고, 무슨 일이든 최고로 잘하려고 하죠. 그런데... 그런데, 대체 뭐가 문제인거냐 이 말입니다."

 

그때 제이가 불쑥 질문을 던졌다. "하지만 사랑이 식어가고 있지 않나요?"  (P.90)

 

사랑과 섬김에 보살핌까지 더해진다면 난이도는 더욱 높아진다. 아무리 열심히 사랑하고 섬긴다 해도 그것이 내 입장에서 진행되는 것은 소용없다. 사랑과 섬김의 대상인 "상대"의 마음과 필요를 세세히 읽고, 그에 맞게 신경써주는 것이 보살핌이다. 때문에 보살피는 행위는 디테일하고 꼼꼼하게, 하나부터 열까지, 상대를 위해 모두 챙겨야 하는 번거로움을 감수해야 가능하다. 바쁘고 정신없는 현대 사회에서, 하나하나 챙겨야 하는 보살핌의 행위를 온전히 실천하는 것이 쉽지 않다는 것은 너무도 당연한 이야기다.

 

 

 

그런데 <뉴욕 111번가의 목수>에서 저자는 말한다. "더 깊이" 사랑하고, "더 크게" 섬기며, "더 많이" 보살피라고. 그냥 사랑하고 섬기고 보살피는 것도 이미 쉽지 않은데, "더" (More)라는 단어를 끊임없이 강조한다. 이 책이 누구나 쉽게 생각하고 말할 수 있는 내용을 다루고 있지만, 결코 쉽다고 말할 수 없는 이유가 여기에 있다.

​그래서 이 책은 진지했다. 동화같은 스토리, 너무도 뻔한 해피엔딩의 긍정적인 이야기지만, 이 책에서 스토리의 개연성, 기승전결의 완성도 등을 따지는 것은 무의미하다. 대부분의 자기계발서처럼, <뉴욕 111번가의 목수> 또한 뻔한 얘기를 쉽게 던지고 있긴 하지만, 기독교의 "예수"가 보여준 절대사랑, 절대희생(섬김), 절대보살핌(배려)의 정신에 바탕을 둔 스토리로 메시지의 무게감이 여느 자기계발서보다 훨씬 깊게 다가온다.

 

 

 

 

대부분의 자기계발서는 "성공"을 다룬다. <뉴욕 111번가의 목수> 또한 "성공"을 다루고 있다. 하지만 보통의 자기계발서가 "세상적인 성공"에 집중하고 있다면, <뉴욕 111번가의 목수>는 성경적 기준을 바탕으로 한 "세상을 초월한 성공", "인간으로서의 근본적인 성공"을 다루고 있다는 점에서 다르다.

 

 

"모든 고난과 모든 도전, 그리고 모든 실패는 바로 그 순간에 우리가 어떤 사람이며, 우리가 진정으로 되고자 하는 목표까지는 얼마나 더 가야 하는지 알려주려는 거예요. 우리가 얼마나 불완전하고, 얼마나 부족한 점이 많은지 확인시켜주죠. 우리는 아직 완성되지 않은 예술품이며, 사랑으로 우리를 만드신 창조주께서 아직 작업을 끝낸 게 아니라는 사실을 깨닫게 해주죠. 이렇게 깨닫고 나면 신이 우리를 창조할 때 계획했던 모습으로 변화해갈 수 있어요. 당신이 밖에 세운 계획은 완벽하게 실행되지 못할 수 있지만, 당신 안에서는 완벽한 계획이 진행중인 거죠." (P.165)

 

 

이 책은 어떻게 하면 돈을 많이 벌고, 어떻게 하면 부자가 될 수 있는지를 다루지 않는다. 물론 동화적인 구성에 따라 결말에 가서는 주인공의 물질적인 상황이 모두 대반전을 이루긴 하지만, 저자는 조금도 "그래서 주인공은 부자가 되었다"는 내용을 강조하지 않는다. 책 속의 주인공의 멘토이자 예수 그리스도를 모델로 하고 있는 등장인물 "뉴욕 111번가 목수" '제이'의 입을 통해, 저자 존 고든은 나눔과 섬김, 보살핌이라는 "사랑"의 정신을 반복적으로 강조하고 있다.

 

그와 함께 저자는 내가 뿌린 사랑과 섬김, 보살핌의 결실이 나타나는데에는 "시간"이 걸리므로 이것을 잘 실천하기 위해서는 "인내"가 필요하다고 말한다. 그런데 이 "인내"는 비단 타인을 사랑하기 위해서 뿐만 아니라, 결과적으로는 내 자신의 성공에도 가장 중요한 영향을 끼친다.

 

  • 우리가 즐겨 쇼핑하는 월마트의 설립자 샘 윌튼은 창업하고 7년이 지나서야 두 번째 매장을 열었다.
  • 지금은 전세계에 수천 개의 매장을 가진 스타벅스도 창업후 13년 동안 점포가 고작 네 개 뿐이었다.
  • 미국 역대 가장 위대한 농구감독 중 한명인 존 우든은  UCLA 감동으로 있는 동안, 무려 16시즌만에 전국 우승을 했다.
  • 월트 디즈니는 한 때 아이디어가 부족하다는 이유로 신문사에서 해고됐고, 그의 만화책을 처음 출간했던 출판사는 부도가 났다.
  • 스티브 잡스는 서른 살에 자신이 창업했던 애플사에서 해고를 당했다.
  • 오프라 윈프리는 뉴스 앵커자리에서 쫓겨날 때 텔레비전에 적합하지 않다는 평가를 받았었다.​    (P.161~163 사례들.)

 

 

​"위대한 것은 모두 시간이 걸린다."

(by 존 우든 미국 농구감독, p.162)

 

 

인내라는 단어는 "실패"를 전제하고 있다. 성공의 순간을 지나고 있는데 "인내한다"는 말을 쓰지는 않으니까. 힘들 때, 고통스러울 때, 피곤하고 지쳤을 때, 우리는 그 순간을 "인내한다"고 말한다. 내가 힘든 시간을 지나고 있다면 언젠가 찾아올 즐거운 날을 위해 인내할 것. 그렇게 훈련된 인내하는 마음이 있어야 타인을 사랑하고 섬기고 보살필 때 빛을 발하고, 또 타인을 섬기면서 길러온 인내력은 내가 힘든 시간을 견딜 수 있는 힘으로 작용한다.

 

그런점에서 본다면 결국 "타인을 사랑하는 것"은 "자신을 사랑하는 것"이다. 남을 사랑하고 섬기고 보살피는 것이 어렵고 힘든 일이지만, 동시에 그럼으로써 나 자신을 사랑하고 나의 고통을 견디고 나의 미래에 대해 소망을 잃지 않을 수 있다. 따라서 "사랑"을 많이 베풀면 베풀 수록, 그 사랑은 결국 나에게 그대로 돌아온다. 이기심으로 똘똘 뭉친 사람들이 있는 그룹이 날로 피폐해져가는 반면, 사랑을 베푸는 사람들이 모인 그룹이 날로 풍성해지는 것은 이와 같은 "사랑의 선순환 법칙" 때문일 것이다.

 

 

"실패는 인생이라는 여행에서 만나는 갈림길이에요. 우리가 가진 용기와 인내, 헌신들이 어느 정도인지 시험하는 거죠. 당신은 시련 앞에서 포기하는 사람인가요? 아니면 쓰러져도 다시 일어나는 진정한 도전자인가요? 당신 말대로 실패를 할 수도 있어요. 그럼 포기하겠어요? 아니면 더 깊이 파고들고, 더 많이 헌신하고, 더 열심히 노력해서 발전하겠어요?" (P.163)

"보통의 사람들은 일을 시작하는 그 순간부터 일이 끝나는 순간만을 기다립니다. 하지만 장인에게 시간은 상관이 없어요. 몸과 마음을 쏟아부어 무엇을 창조할 것인가를 고민할 뿐이죠.... (중략) 지금 이 세상은 뭐든 가장 빨리, 가장 저렴한 비용으로 해내는 사람들로 가득하죠. 하지만 그러면 그럴수록 더 많은 예술가와 장인을 필요로 한다는 것 또한 진실이지 않을까요?" (p.50-51)

"누구나 장인이 될 수 있음에도 불구하고 거의 대부분은 장인이 되기를 포기하죠. 단지 위대한 인물들이 현재 누리는 것들을 똑같이 경험하고싶어 하 뿐, 그들이 위대해지기까지 지나온 과정을 그대로 겪으려는 사람은 드문 게 현실이에요." (p.54)

 

 

​사랑하면 섬김과 보살핌은 자연히 뒤따른다. 그리고 타인을 사랑하면, 그것은 나 자신에게 그대로 돌아온다. 그 과정에서 때로는 힘들고 어려울 때도 있지만 인내하고 시간이 필요함을 인정하는 자세가 필요하며, 그럴 때 나는 별볼일없는 사람으로 머무는 것이 아니라 내 삶을 예술작품으로 만드는 "장인"으로 올라갈 수 있다.

 

뻔한 내용임에도 저자는 반복적으로 이 메시지를, 제법 힘있게 전달하는데 성공했다. 바쁜 현대 사회에 맞게 저비용 고효율의 "비법"을 알려주기 바쁜 여느 자기계발서들과는 확실히 달랐다. 세상의 흐름과는 반대지점에 위치한 "절대 사랑"의 중요함과 "인내", "희생", "헌신", "용기" 등 (모두가 마땅히 추구해야 함에도) 이제는 많이 사라져가는 단어들을 전면에 내세운 것이 고마웠다.

 

아무리 바쁘고 정신없는 삶을 살고 있더라도 인간이라면 이런 단어들을 추구하기 마련이다. 다만 환경의 여러 제약들 때문에 본연의 모습을 잊고 있을 뿐. 그래서 작가는 잃어버린 이런 덕목들을 다시 생활 속에 적용하기 위해, 자기 내면의 소리를 듣기보다 자신이 직접 내면에 이야기하라고 말한다.

 

 

"나는 내 내면의 소리를 듣는 대신에 내가 직접 내면에 이야기하는 법을 배웠습니다. 내면의 소리에 귀를 기울이면 온갖 부정적인 생각과 불만, 갖가지 두려움과 의심, 그리고 경기를 마치지 못할 수 밖에 없는 수많은 이유들이 들려요. 하지만 내가 내면에 이야기를 하면 경기를 완주하는 데 필요한 격려의 말들로 내 자신을 채울 수 있죠." (p.68-69)

 

 

내면의 소리에 귀기울이자는 것이 대세처럼 여겨지고 있는 현대 사회에서, 내면의 소리를 듣기 보다 내면에 직접 이야기하라는 저자의 말이 신선했다. 혹시라도 나는 부정적인 생각들만 하고 있던 건 아니었는지. 살기가 힘들다고, 세상을 원망하고 환경탓만 하는 사람들이 가득한 세상이다. 나 또한 그런 분위기에 일부 동조한 점이 있었음을 인정하기에, 이 부분을 읽으면서 부끄러움도 일었다.

 

"힘내자, 할 수 있다"는 긍정의 말들이 아무리 뻔하더라도, "못 살겠다, 이놈의 세상"이라는 말과는 영향력 면에서 비교가 되지 않는다. 타인을 비판하고 판단하기 전에, 자신을 긍정의 말로 채우는 것. 그것이 저자가 내내 강조했던 사랑과 섬김과 보살핌의 삶을 살 수 있는 기본이자, 실패를 인내할 수 있는 원동력임은 너무도 분명하지만 한동안 그걸 잊고 있었다.

 

모처럼 읽은 자기계발서는 제법 만족스러웠다. 가볍게 읽혔지만 결코 가볍게 볼  수만은 없는 책. 스토리도 술술 읽히고 중간중간 들어가있는 삽화도 동화책처럼 따뜻한 느낌을 더해준다.

 

<뉴욕 111번가의 목수>. 읽기를 잘했다.^^ 

 

 

 

 

* 위 리뷰와 더 많은 리뷰를 보시려면 저의 네이버 블로그(http://jhwhjn.blog.me/)를 방문해주세요.^^

"나는 내 내면의 소리를 듣는 대신에 내가 직접 내면에 이야기하는 법을 배웠습니다. 내면의 소리에 귀를 기울이면 온갖 부정적인 생각과 불만, 갖가지 두려움과 의심, 그리고 경기를 마치지 못할 수 밖에 없는 수많은 이유들이 들려요. 하지만 내가 내면에 이야기를 하면 경기를 완주하는 데 필요한 격려의 말들로 내 자신을 채울 수 있죠." (p.68-69)

"누구나 장인이 될 수 있음에도 불구하고 거의 대부분은 장인이 되기를 포기하죠. 단지 위대한 인물들이 현재 누리는 것들을 똑같이 경험하고싶어 하 뿐, 그들이 위대해지기까지 지나온 과정을 그대로 겪으려는 사람은 드문 게 현실이에요." (p.54)​

"보통의 사람들은 일을 시작하는 그 순간부터 일이 끝나는 순간만을 기다립니다. 하지만 장인에게 시간은 상관이 없어요. 몸과 마음을 쏟아부어 무엇을 창조할 것인가를 고민할 뿐이죠." (p.50)

"실패는 인생이라는 여행에서 만나는 갈림길이에요. 우리가 가진 용기와 인내, 헌신들이 어느 정도인지 시험하는 거죠. 당신은 시련 앞에서 포기하는 사람인가요? 아니면 쓰러져도 다시 일어나는 진정한 도전자인가요?" (P.163)

"장인은 다른 사람을 잡아먹으면서 성공하는 사람이 아니에요. 다른 사람과 경쟁하기보다 오직 자신의 완성을 위해 뛰죠. 그리고 실패할까봐 걱정하지 않아요. 애정을 담아 작품을 완성할 생각만 하죠. 자신의 일을 사랑하는 장인에겐 그 어떤 두려움도 힘을 쓰지 못해요." (P.9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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원더보이
김연수 지음 / 문학동네 / 2012년 2월
평점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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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연수. 이 시대에 가장 좋아하는 한국작가를 꼽으라고 할 때 문학팬들이 반드시 언급하는 작가 중 한 이 김연수일 것이다. 김영하와 더불어 다작을 하기로 유명하지만, 다작을 하는데도 결코 가볍지 않은 글을 쓰는 사람. 소설가이지만 시처럼 아름다운 문체를 쓰는 작가. 그럼에도 간질간질한 미사여구만을 나열하는 것이 아니라 문장 하나하나에 깊은 통찰과 사색을 담아놓은 작가.

하지만 다작을 하는 작가임에도 내가 김연수를 처음 만난 건 2년전 막 발간되었던 그의 신작 <파도가 바다의 일이라면>으로였다. 그 책을 읽으며 나는 김연수라는 작가의 글에 푹 빠져들었지만 팬이 되었다고 할 순 없었다. 팬이 되기에는 그의 작품을 읽은 것이 딱 한 권 뿐이었으니까.

 

 

 

 

이상하게도 나의 독서목록에서 김연수 작가의 소설은 자꾸 뒤로 밀렸다. 너무 맛있는 음식은 아껴먹고 싶은 마음에서였을까. 정확하지는 않아도 이와 비슷한 심리였을 거다. <파도가 바다의 일이라면>에 반해, 당시 김연수 작가의 책을 몇 권 더 샀는데도, 다시 그의 소설을 읽기까지는 1년 이상의 시간이 걸렸다. 이번에 읽은 책은 <원더보이>.

결론부터 말하자면, 나는 이제 "김연수 작가의 팬"이 되겠다고 감히 결심할 수 있게 되었다. 뛰어난 가독성과 재미, 하지만 여러가지 곱씹어 보게되는 문장들과 소설의 주제, 마지막 장을 덮고 난 후 시간이 지날수록 오히려 더 커지는 여운까지. 김연수라는 작가와 동시대를 살고 있는 것은 문학을 좋아하는 입장에서 분명 행운이다.

 

 


 

"나는 고아가 됐다. 이제 내 운명은 스스로 결정해야만 했다."  - p.30

 

 

소설 <원더보이>는 주인공인 15살 소년 정훈이 뜻하지 않은 사고 후 병원에서 깨어나는 장면으로 시작한다. 아빠 트럭을 타고 집으로 돌아오던 길, 무장간첩이 몰던 차와 부딪히는 사고로 정훈은 유일한 가족인 아빠를 잃었다. 엄마는 정훈을 낳다가 돌아가셨다고 했다. 15살의 어린 소년은 너무도 갑작스럽게 고아가 되었다. 일가친척도 하나 없는 완전한 고아.

<원더보이>의 배경은 민주화 운동이 한창이던 1984~7년이다. 당연히 시대적인 배경이 갖는 아픔과 사건들로부터 등장인물들은 자유로울 수 없다. 하지만 흔히 1980년대를 다룬 소설에서 보여지는 우울함이나 처절함은 없다. 그렇다고 가벼운 것도 아니다. 김연수라는 작가의 어조가 갖는 특징 상, 소설의 전체적인 분위기는 오히려 "아름답다"고 할 수 있다. 고통의 시간 또는 존재론적인 고민을 시처럼, 별처럼 아름답게 풀어낼 수 있는 작가는 김연수 뿐이리라.

재밌게도 고아가 된 정훈은 사고를 통해 "다른 사람의 마음을 읽는" 초능력을 갖게 되었다. 사고 순간 보았던 강렬한 빛. 80년대에 한창 인기있었던 외국의 초능력 마술사 '유리겔러'의 내한 이후, 전국의 많은 아이들이 숟가락 부러뜨리기에 도전했던 것처럼, 어린 정훈은 사고가 나던 순간, 손가락으로 열심히 숟가락을 문지르고 있었다. 그리고 마찰 때문에 드디어 숟가락이 딱 부러지던 그때 사고가 났고 아버지는 돌아가셨다.

큰 일이 벌어지던 그 순간 했던 일이 고작 숟가락 따위나 문지르는 일이었다니. 아빠의 마지막 얼굴을 보지도 못했다니. 정훈은 심하게 자책한다. 그 죄책감은 분명 15살 소년이 감당하기엔 너무 컸기 때문에, 정훈은 사고를 낸 무장간첩을 원망할 생각도 못했다. 아빠보다 숟가락에 집중하고 있던 자신의 한심함에 다른 이들을 생각할 여유는 없다.

 

 

 

 

그런데 하필 이 지점에서 정훈은 초능력이 생겼으니 아이러니할 수 밖에 없다. 자신에게 너무 집중한 나머지 타인에 대한 관심을 갖지 "않는" ("못하는"이 아니다) 것은 80년대나 지금이나 별반 차이가 없다. 우리 모두는 자신이 겪는 고통이 가장 아프다고 생각한 나머지, 타인의 마음을 헤아리지 않는 경우가 많다. 서로가 서로의 마음을 이해해주려 하기보다는 내가 남에게 "이해받고 싶어"할 뿐이다. 현대사회로 접어들면서 사람들은 점점 이기적이 되어간다고 하지만, 사실 인간의 이기적인 본성은 역사 속에서 시대를 막론하고 대세를 형성했었다.

작가는 인간의 이러한 이기주의 경향을 부드럽지만 분명하게 건드린다. 자책감으로 외부세계와 고립되기 쉽상인 정훈(게다가 하필 정서적으로 가장 불안정한 사춘기에 접어들었다)은​, 그러나 뜻하지 않게 얻게된 초능력 덕분에 거의 "반 강제적으로" 타인과의 소통을 시작한다. 상대방이 말하지 않아도 그 사람의 본심과 생각이 들리는데다, 상대방이 겪고 있을 감정도 선명하게 느낄 수 있다.

상대의 생각을 알고 감정을 공유할 때, 우리는 그것을 "상대에 대한 이해"라고 부른다. 그렇다면 "상대를 이해하는 것"을 과연 초능력이라고 부를 수 있을까. 이건 사회적 동물로서의 인간이 반드시 지향해야 할 부분이다. 그럼에도 작가는 이것을 "초능력"이라고 불렀다. 다시 말해, 상대를 이해하지 못하고, 이해하려는 노력도 않는, 그래서 결국엔 상대를 이해할 수 없게 되어버린 현대인들에게 경종을 울리고 있는 것이다.

 

 

소설 <원더보이>의 시대적 배경이었던 1980년대의 한국은 민주화 운동으로 시끄러웠다. 1980년에 들어선 신군부정권 치하의 시대는 암울했다는 것을 우리 모두는 알고 있다. 하지만 흔히 말하듯 정치적 자유의 억압를 직접적으로 표현하는 대신, 김연수 작가는 영리하게도 '소통'을 잃어버린 개개인에 집중함으로써 시대의 아픔까지 아우르는 전략을 택했다.

서로의 생각을 읽지 못하는 사람들 사이에서 "원더보이" 정훈이 보여주는 초능력은 놀랍다. 정훈이 초능력을 가진 사람들이 출연하는 연말 특집쇼에 초대되서 자신의 이야기를 전할 때, 정훈의 초능력에 압도된 관객과 시청자들은 그 순간 정훈과 똑같은 감정을 공유했다. 사회자의 마음을 읽은 정훈과, 정훈의 이야기를 통해 정훈의 마음을 그대로 전달받은 관객들. 서로 교감하는 과정을 "초능력"이라고 묘사하면서, 작가는 "소통"이라는 본질적인 문제를 독자에게 전한다.

​시대상과 현대인들의 속성, 두 가지를 모두 한꺼번에 풍자하고 있는 이 절묘한 상징은 쉽게 쓸 수 있는 부분이 아니다. 다작을 하는 작가임에도 김연수의 소설들은 결코 가볍지 않다. 쓸데없이 감성적이거나 너무 진지해서 무겁지도 않은데다, 문장 하나하나를 많이 고민하며 쓴 티가 역력하다. 많은 이들이 <원더보이>를 살짝 어렵게 느끼는 이유도 이 때문이지 않을까. 전체 스토리가 툭툭 끊어지는 듯 보여 단번에 스토리가 전하는 메세지를 찾기란 쉽지 않지만, 그렇기 때문에 책을 다 읽고 나서도 사고의 과정은 계속될 수 밖에 없다.

사실 김연수 작가의 이러한 특징은 <원더보이> 이후에 나온 <파도가 바다의 일이라면>에서 더 강해져서, 그 소설에서는 화자, 시점, 스토리가 각 챕터마다 바뀌기 때문에 전체적인 스토리가 더 툭툭 끊어지는 듯한 인상을 남긴다. 후자를 먼저 읽은 덕분인지, 다행히 나는 <원더보이>가 상대적으로 덜 어렵게 느껴졌지만, 다른 소설에 비해 스토리에 감춰진 작가의 의도, 다시말해 작가가 이 책에 일부러 담지 않은 (그러나 말하고 싶었을) 말에 대해 고민해보는 과정은 훨씬 길었다.

"천재적으로 책을 읽으려면 작가가 쓰지 않은 글을 읽어야만 해. 썼다가 지웠다거나, 쓰려고 했지만 역부족으로 쓰지 못했다거나, 처음부터 아예 쓰지 않으려고 제외시킨 것들 말이지. 그것까지 모두 읽고 나면 비로소 독서가 끝나는 거야."  - p. 234

 

 

​<원더보이>에서 작가가 하고 싶은 말은 무엇이었을까. 아직도 이 질문에 대한 답은 고민 중이다. 하지만 어렴풋이 짐작할 수 있는 건, 80년대에 청춘의 시절을 살아왔을 작가로서 그 시대적인 슬픔에 대해 말하고 싶지 않았을까. 이는 작가라면 누구나 갖는 "시대상황에 대한 고민"일 테니까 말이다.

"원더보이" 정훈의 초능력은 전국적으로 알려진다. 운이 나빠 사고를 당했지만, 상대가 무장간첩이었다는 이유로 정훈의 아버지는 나라를 위해 멋지게 전사한 "애국자"라 칭송받게 되었고, "초능력"을 가진 정훈은 그 능력을 국가를 위해 쓰라고 강요받는다. 전형적인 군부정권의 '앞잡이' 또는 출세를 위한 '기회주의'로 묘사되는 "권대령"은 <원더보이>에 등장하는 유일한 '악역'인데, 이는 그가 어떤 나쁜 행동을 해서가 아니라 (물론 정훈에게 국가가 지급한 위로금을 가로챈 건 있지만), 권대령이 군사정권에 아부해서 높은 자리로 승진했다는 설정 때문이다. 소설 상에선 "권대령"이 나쁘다고 직접적으로 언급된 부분은 없다. 그저 시대상을 고려했을 때, 독자들이 "악역"이라고 판단하도록 유도하는 것 뿐.

권대령은 정훈의 초능력을 이용하여, 데모 (오늘날 기준으로 '민주화운동') 주동자들을 색출한다. 정치 싸움같은 것엔 관심도 없던 어린 소년은 순진하게 자신의 초능력을 사용했다. 하지만 권대령이 내미는 사람들의 소지품을 만지면서 그들이 느꼈을 고통이나 감정을 전해준 것은 의도치않게 국가가 사람들을 잡아들이는 증거로 사용되었다. 즉, 정작 국민과의 소통은 거부했던 국가는, 소통을 요구하는 국민을 억압하는 도구로 되려 '소통'을 이용하고 있는 셈이었다. 작가는 당시의 시대상황과 관련하여, 권대령을 통해 "쓰지 않은 이야기", 즉, 소통이 억압되었던 시대의 아픔과 부조리를 말하고 있다.

 

 

 

 

정훈이 이 상황을 깨닫는데는 오랜 시간이 걸리지 않았다. 의도치 않게 자신의 초능력이 사람들을 잡아들이는데 쓰이고 있다는 것을 알고서 정훈은 토악질을 하다가 이내 기관을 탈출한다. '국가'를 상징하는 권대령은 모든 개인을 국가의 부속물로 보았다. 80년대의 한국 사회에서 일어났던 대규모 투쟁은 이에 대한 국민들의 반발이었다.

국가와 개인 중 누가 우선하느냐는 질문에 우리는 대부분 '개인이 우선이다'라고 대답하지만, 의외로 국가를 위해 개인의 희생을 요구했던 사례는 역사 속에서 많이 볼 수 있다. 다만 이러한 관점이 전근대 시대에는 통했을지 몰라도, 신분제가 없어지고 민주제도가 도입된 광복 이후의 사회에서는 더이상 받아들여질 수 없는 관점이 되었다.

다시 말해, 1980년대의 대한민국 정부는 이러한 시대의 흐름을 역행한 시대착오적인 모순에 빠져있었고, 국민들은 1990년대 이후에야 비로소 안정적으로 정착할 수 있던 민주적 가치를 시대를 앞서서 주장했다. 너무 구시대적이고 너무 진보적인 두 세력이 맞붙었던 그 시대는 아팠고 우울했다. 안타깝게도 이런 모습은 현대 사회도 다르지 않다. 충돌의 도구로 "물리적 폭력" 대신 "언어적 폭력"이 주로 쓰인다는 점만 바꼈을 뿐이다.

정훈은 투쟁에 참여하지 않았지만, ​권대령으로부터 탈출함으로써 국가에 간접적으로 항거한다. 하지만 권대령은 초능력 대회의 또 다른 참가자였던 '이만기'와 쌍둥이들을 내세워 계속해서 정훈을 쫓는다. 결국엔 실패하지만. (이는 '정훈'으로 대변되는 소통을 중시하는 국민이 결국 '권대령'으로 대변되는 국가를 이긴 역사적 결과를 상징한다고 볼 수 있다.)

권대령에게서 탈출한 정훈은 '강토 형'을 만난다. 하지만 강토형은 사실 '희선'이라는 이름을 가진 여자였다. 정훈은 강토형이 희선씨라는 것을 알고 난 후, 그녀를 좋아하게 되었다. 그런데 희선씨를 좋아하면서 정훈의 초능력은 반대로 사라지기 시작했다.

누군가를 좋아한다는 것은, 그 자체로 "누군가와 소통하고 싶다"는 뜻이다. 하늘의 별을 보며 자신이 왜 태어났는지에 대한 존재론적 고민을 이어가던 원더보이는, 희선씨를 사랑하게 되면서 비로소 초능력에 의한 타의적으로가 아닌, 자의적으로 다른 사람과의 소통을 꿈꾸게 되었다.

이는 정훈을 쫓아다니던 이만기도 마찬가지였다. 권대령 혹은 국가에게 절대 충성하던 만기는 같이 다니던 이란성 쌍둥이의 여자아이를 좋아하게 되면서 역시 초능력을 잃어버렸다. 초능력을 잃어버린 아이들은 더 이상 국가에 쓸모가 없었다. 권대령은 "사랑은 국력의 엄청난 손실"이라고까지 말한다.

만기는 초능력을 잃어버리고 나서야 (다시 말해, 누군가를 좋아하게 되면서) 정훈과 화해했고, 정훈은 그런 만기에게 자신이 예전에 권대령에게 했던 말을 전수해준다. "인구를 늘리는 것으로 국가에 보답하겠습니다."라고. (이 부분에서 피식, 웃음이 나올 수 밖에 없었다. 김연수 작가는 '유머감각'도 뛰어나다!)

​"토요일의 종각역 부근은 언제나 인산인해였으니까. 우리는 떨어지지 않으려고 서로의 손을 잡고 인파를 헤치며 나갔지. 넌 사랑이 뭐라고 생각하니? 그때 사람들 사이를 빠져나가며 우리가 맞잡은 두 손. 놓치지 않으려고 힘을 주던 그 뼈와 근육과 핏줄 들이 내가 아는 사랑의 거의 전부야. 그것 말고 또 무슨 사랑이 있을까?" 

​-P.280~281.

국가와 개인은 역사 속에서 늘 상호 공존해야 하는 관계였지만, 방식은 과거와 달라져야 한다. 더이상 억압하는 국가는 존재할 수 없다. 개개인의 행복을 보장하고, 개개인이 서로 사랑하고 소통하는 것에서 행복을 느끼게 되면​, 그들이 결국 국가의 든든한 기둥이 되는 것이니까. 메세지는 너무도 평범하지만, 이것을 풀어가는 방식에서 김연수 작가는 매우 탁월하다. <원더보이>를 읽는 내내, 이 평범하다 못해 진부한 메세지는 인간의 기본적 특성인 "소통"을 "초능력"으로 설정한 역설을 통해 도리어 신선하게 다가왔다.

정훈의 첫사랑이었던 희선씨가 강토라는 이름으로 남장행세를 한 것은 자신의 연인이었던 이수형이 국가로부터 모진 고문을 받아 죽고 난 다음부터였다. 이수형은 모든 것을 "기억하는" 능력을 갖고 있었다. 우리는 3.14까지만 기억하고 있는 원주율을 숫자에 자기만의 암호를 붙여 무한대로 외우고, 1980년의 종로일대의 모습을 토씨하나 안 빼놓고 기억하지만, 결국 수형은 그 "기억 능력" 때문에 결국 목숨을 잃는다.

 

작가는 결코 잊을 수 없는, 하지만 너무 고통스러워서 잊고 싶은 그 시절을 수형을 통해 말하고 싶었던 게 아니었을까. 자신의 능력 때문에 사람들이 고문당하고 힘들어하는 것을 보면서 수형은 어떠한 기억도 하지 않기로 결심했었다. 하지만 그럼에도 유일하게 그의 기억의 방을 차지하고 있던 희선과 재회하게 되면서, 수형은 다시 "기억하기"를 시작했다. 희선과 함께하고 있는 이 시간. 희선과 함께 걷는 이 거리. 희선과 만난 오늘의 날씨 등. 이전에는 국가의 도구일 뿐이었던 수형의 "기억능력"은 이제는 사랑하는 사람과의 추억을 만들기 위한 도구가 되었다. 그러면서 수형은 "기억하는 것"이 행복하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하지만 거기까지였다.

정훈과 수형을 통해 작가는 말한다. 타인과 소통하는 것, 순간 순간을 기억함으로써 아름다운 추억을 만드는 것. 소박하면서도 인간이라면 누구나 누릴 수 있고, 마땅히 노력해야 하는 이것이 통용되지 않는 시대가 있었다고. 그리고 지금도 어쩌면 계속되고 있다고. 예전에는 국가라는 거대한 실체가 억압적으로 그랬다면, 지금은 우리 스스로 이것을 구속하고 있을 지도 모른다고. 때문에 그 시절을 잊지 말라고. 이 가장 기본적인 것을 얻으려고 희생했던 사람들이 있었던 시대를 기억해야 한다고 말이다.

​"1천억 개의 별들이 있는 1천억 개의 은하가 우리 머리 위에 떠 있는 광경을 상상해보세요. 아빠가 살았던 42년은 너무나 짧은 시간이죠. 별들의 숫자에 비하면 그건 없는 것이나 마찬가지예요. 하지만 상상해보세요. 그 빛들을 나눠서 쪼일 수 있었다면 아빠는 평생 매초당 7조5499억5047만2325개의 별빛을 받으면서 살았던 것이예요. 그렇다면 그건 정말 대단한 1초였을 거예요. 그렇게 대단한 1초라는 걸 알았다면 아빠는 울지도 않았을 텐데요. 아빠 인생의 1초가 그렇게 많은 빛으로 가득했다는 걸 알았더라면 말이죠."  - p. 36~41.

 

 

소설 <원더보이>에는 "별"과 "우주"에 대한 이야기가 많이 나온다. 정훈의 입을 빌려 작가는, 광활한 우주에 총 몇 개의 별이 있는지 아냐고 독자에게 직접, 반복해서 묻는다. 도저히 헤아릴 수 없는 광대한 우주, 그리고 역시 헤아릴 수 없는 수많은 별. 하지만 우리 눈에 보이는 별들은 이미 수억 광년 전에 존재했던 별들이다. 지구로부터 수억 광년 멀리 떨어진 별들이 지구를 통과해 우리 눈에 보이기 까지 걸리는 수억 광년의 시간들. 이 마저도 빛의 속도로 계산했을 때의 시간이니, 우주의 광대함은 우리의 언어와 사고로 규정할 수 없다. 별도 마찬가지다.

하지만 "시간이 멈춘다면" 가능할 지도 모른다. 정훈이 초능력이든 사랑이든, 타인과의 소통을 시작했을 때, 작가는 "시간이 멈췄다"고 표현했다. 멈춘 시간은 정훈이 내면적으로 성장, 즉 소통을 통해 타인을 이해하는데 필요한 시간이다. 그 시간 동안 정훈은 자신의 존재를 이해하고, 아빠의 마음을 이해하고, 희선씨와 수형을 비롯한 타인을 이해하는 법을 배워간다.

너무 많아서 오히려 없는 거나 다름 없는 우주의 별들이, 너무 많아서 특별한 것이라고 발전하는 정훈의 사고는 그의 성장을 전적으로 보여준다. 수많은 별빛을 1초씩만 받는다 해도 우리의 인생은 너무 짧은데, 42살이라는 젊은 나이에 사고로 돌아간 아빠의 삶은 얼마나 안타까운가를 생각하다가, 그렇기 때문에 더욱 소중하고 특별한 삶이었다고 규정하는 부분에서 전율이 일었다.

충격적인 사건 앞에서 한없이 부정적이고 우울한 감정으로 치닫는 것이 아니라, 도리어 그 아픔을 딛고 긍정적인 결론을 도출하는 정훈은 실제 나이 15살보다 어른스럽다. 그리고 정훈의 이런 모습은 그 시절의 아픔을 이겨내고 다시 사랑을 시작한 소설 속 희선씨 및 현실의 모든 한국 사람들을 바라보는 작가의 시선이기도 했다. ​

 

​"저는 이새인이라고 합니다. 독특한 이름이죠. 새처럼 자유로운 영혼으로 살아가라고 아버지가 지어주신 이름입니다. 기억하시나요? 막내딸이 당신의 뒤를 이어서 새를 연구한다는 사실을 알았다면 아버지는 자랑스러우셨을까요? 제가 서럼 자유롭다면 그 새들을 따라 휴전선 너머로 날아갔겠죠. 당장 아버지를 찾아가 그 품에 안겨서 울었겠죠." ​ -p.294~296. 

 

   

 

타인과의 소통을 배우며 성장한 정훈은 다시 본인에 대한 존재론적 질문으로 돌아간다. 하지만 소통을 통한 성장을 경험했기에, 자신에게 집중하는 정훈은 더 이상 이기적이지 않다. 정훈은 얼굴도 본 적 없는 엄마에 대한 그리움과 아빠와 엄마가 서로에 대해 느꼈을 감정이 궁금해졌다. 자신은 어떻게 태어났을까. 나를 낳아준 엄마의 이름은 무엇일까. 엄마와 아빠는 어떻게 만났을까.

아빠의 유물인 수첩을 읽었을 때는 아빠와 엄마가 조류 밀렵꾼인 줄로만 알았다. 하지만 "쓰여지지 않은 내용을 읽어내기" 과정을 통해, 엄마는 조류도감을 만들기 위해 아빠와 일하게 되었다는 것을 알게 된다. 엄마를 사랑한 아빠는 밀렵을 그만두었고, 대학생이었던 엄마는 밀렵꾼인 아빠의 사랑에 화답했다. 자신이 태어나게 된 것은 "서로를 사랑하고 이해함에 따른 소통", 그것이었음을 정훈은 다시 한번 확인했던 것이다.

​뜻하지 않게도 정훈은 이 과정에서 엄마가 남겼다는 편지까지 받게 되는 행운을 얻는다. 북쪽에 계신 아버지를 향해 엄마가 그리움을 담아 쓴 편지. 그 안에는 곧 태어날 정훈에 대한 이야기도 있었다. 놀라운 것이, 김연수 작가는 1980년대의 시대상만 그리는 것이 아니라, 분단으로 인한 이산가족의 아픔까지 다루면서 한국 현대사 전체를 다루는 시도를 하고 있다.

그럼에도 산만하다거나 오버했다는 느낌은 들지 않는다. 과하지 않지만 임팩트를 남기는 선에서, 작가는 "가족의 해체"라는 공통 요소를 통해 분단과 1980년대의 시대적 아픔을 아우르는데 성공했다. 그리고 이것은 텍스트 밖에서 2000년대를 살아가는 현재 사회까지도 포괄하고 있다.

"​매일 밤 우리는 들판으로 산책을 나가 별들을 올려다봤습니다. 그 별들을 보면서 우리는 번갈아 소원을 말했어요. 내년 봄이면 우리 사이에 아이가 태어날 거예요. 이 아이가 살아갈 세상에서는 아버지와 딸이 이렇게 가까이 살면서도 편지조차 주고 받을 수 없는 일이란 절대로 있을 수 없을 거예요. 이 아이가 자라날 1970년대는 완전히 다른 세상이 되기를 간절히 바랍니다. 아버지, 사랑합니다." ​- p.298. 

 

 

 

정훈의 엄마 '이새인'이 1969년에 북에 있는 아버지에게 남긴 편지는 1986년이 되었을 때, 그녀의 아들인 정훈이 읽게 되었다. 가족을 그리워하는 것도 유전이 된 걸까. 분단이라는 시대적 상황 때문에 아버지와 헤어진 엄마는 아들이 자라날 세상은 달라져있길 그토록 바랐다. 하지만 아들이 자라고 있는 세상은 그 나름의 시대적 아픔이 있었다. 그리고 소설에는 나와있지 않지만 정훈의 자녀는 1990년대 후반에 촉발된 경제위기 여파로 2000년대의 '88세대'의 고통을 겪고 있을 것이다. 그렇다면 과연 누구의 세상이 더 고통스러울까.

세상은 조금씩 변해왔다. 새인의 바람처럼 부모와 자녀가 생이별을 하는 세상은 적어도 1980년대엔 덜했다. 정훈은 사고로 아빠를 잃긴 했지만, 그것은 분단시대의 잔재인 '무장간첩' 때문이었지, 80년대의 상황 때문은 아니었다.​ 새인의 바람처럼, 정훈도 새로운 세상을 꿈꿀 것이다. 그것은 90년대를 지나 21세기를 살고 있는 우리들이 누리고 있는 혜택이 아닐까. 그리고 우리 또한 앞으로의 세상은 나아지기를 꿈꾼다.

인간은 동시대의 사람들과만 소통하지 않는다. 세대와 세대가, 각각의 시대를 지나오면서 소통한다. 자신의 소망이 반영된 세상을 다음 세대에게 물려주고, 물려받은 그 세상에 또 다른 소망을 담아 다음 세대에 물려준다. 이것이 세대를 초월하여 소통하는 인간의 방식이다.

​"1987년 여름이 되자, 베드로의 집에서 국영수를 가르치던 형들이 우리에게 말했다. 이제 우리가 살아갈 세상은 완전히 다를 거라고. 만약 누군가 그런 짓을 하려고 든다면, 우리가 가만히 있지 않을 것이라고. 뭐라도 할 것이라고. 우린 혼자가 아니라고." - p.319

<원더보이>를 읽는 내내 아련한 감정이 속에서 꿈틀거렸다. 난 1980년대의 시대적 상황을 직접적으로 경험한 세대는 아니다. 너무 어렸던 시절이라 그 때에 대한 기억은 동네에서 아이들과 뛰어놀았던 기억밖에 없다. 하지만 성인이 되어 21세기를 살아가는 지금, 책을 통해 30년도 더 된 시절의 사람들과 소통하고 있다는 것은 놀라운 일이다.

 



 

우리는 어둠의 시대라고 회고하는 시절을 다루고 있음에도, 소설 <원더보이>에 흐르는 분위기는 밝다 못해 별처럼 반짝반짝 빛난다. 쓰라린 아픔을 이겨낸 덕분에 더 반짝이는 느낌이랄까. 담담하게 풀어가는 작가의 어조도 이러한 분위기를 거든다. 작가는 시대적 상황과 '고아'라는 개인적 상황 속에서 15살 소년이 어떻게 성장하는지를 그저 담담한 어조로 풀어낸다. 그에 대한 고민은 철저히 독자의 몫으로 남겨둔 채로.

김연수의 대개의 작품들이 그렇듯​<원더보이>는 수많은 상징과 은유를 내포하고 있는 소설이다. 작가는 아무래도 독자가 "천재적 책읽기"를 하기를 원하는 것 같다. 대부분의 문학들이 그렇겠지만, 유독 김연수의 소설은 책장을 덮고 나서도 독서가 끝나지 않았다는 느낌을 갖게 한다.

<원더보이>를 읽은지 1주일이 훌쩍 지났다. 그럼에도 <원더보이>에 대한 나의 독서는 끝나지 않았다. 읽으면 읽을수록 작가가 감춰놓은 새로운 내용들을 더 많이 발견하게 되겠지. 그래서 김연수의 작품은 언제나 강한 여운을 남긴다. 한번 그의 작품을 읽고 나면, 한동안은 계속해서 그의 책만 읽고 싶​어지는 것은 어쩌면 김연수 소설이 낳은 부작용인지도 모르겠다. <파도가 바다의 일이라면> 이후 다시 <원더보이>를 잡기까지 시간이 걸린 것도 이러한 부작용을 이겨보려 했던 부질없는 노력이었으니까. 그럼에도 이제는 "김연수 부작용"을 이기지 못할 것 같다는 생각이 든다.

"우리의 밤이 어두운 까닭은 우리의 우주가 아직은 젊고 여전히 성장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 p.314

 

* 위 리뷰와 더 많은 리뷰를 보시려면 저의 네이버 블로그(http://jhwhjn.blog.me/)를 방문해주세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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호빗 (반양장)
존 로날드 로웰 톨킨 지음, 이미애 옮김 / 씨앗을뿌리는사람 / 2007년 5월
평점 :
절판


지난 연말, 피터 잭슨의 호빗 시리즈 2인 <스마우그의 폐허>를 보았다. 굳이 톨킨을 존경한다는 것을 언급하지 않아도, 톨킨옹의 불후의 명작 <반지의 제왕> 시리즈가 영화로 나온 이후부터는, 전세계의 수많은 사람들이 톨킨의 작품이 영화로 개봉되면 "일단 본다." 톨킨의 팬도, 감독인 피터 잭슨의 팬도, 판타지 문학 팬들도, 아니면 평범한 보통사람들도 모두 큰 기대를 품게되는 현상. <호빗> 시리즈가 영화화되었을때 그래서 사람들은 열광했고, 톨킨의 원작도 다시 팔려나갔다. 단언컨대, 이보다 더 문학과 영화의 환상적인 시너지 효과를 보여주는 사례는 없을 것이며, 톨킨과 잭슨의 시대를 초월한 창조-재창조의 협력을 뛰어넘는 사례도 없을 것이다.  

 

귀차니즘으로 영화리뷰는 쓰지 못했다. 대신 8년전부터 책장에 고이 묵혀두고 있었던 책을 꺼내들었다. 반지의 제왕 시리즈와 같이 샀던 원서인데, 반지시리즈와는 달리 당시 호빗은 영화화되기 이전이라 표지에는 마틴프리먼 대신 샤이어로 떠나는 간달프의 삽화가 채워져 있는 책이다. 반지 시리즈에 비해 동화적인 느낌이 강한 책답게, 동화적인 느낌이 나면서도 모험을 떠나는 이미지를  잘 반영한 표지디자인이 아닌가 싶다. 덕분에 책 표지를 볼 때마다 본문의 스토리가 전하는 흥미진진한 앞으로의 이야기를 더욱 기대하곤 했다. 어린 시절, 동화책을 읽을때의 느낌처럼 말이다. 

 

 

 

 

톨킨의 위대함은 굳이 말하지 말자. 문학 역사 속 수많은 거장들이 그렇듯, 소설의 구조가 어떻고, 스토리 개연성이 어떻고 하는 평가는 톨킨 위치에서는 더이상 통하지 않을 듯 싶다. 물론 거장들이라고 해서 - 톨킨도 마찬가지로- 그들의 작품이 무조건 완벽하다고 하기는 어렵겠지만 (그들 또한 인간이기에. 인류의 문화예술 유산이나 역사에서 완벽한 것은 없으니까.), '거장'이라는 타이틀이 아무에게나 붙여지지 않음을 고려할 때, 인간이 창작할 수 있는 최고 수준의 작품을 창작한 것이라고 봐야 핥니까 말이다.

 

톨킨은 그 중에서도 판타지를 순수문학을 넘어 "예술"의 경지로 승화시킨 전무후무한 작가임에는 반론의 여지가 없기에, 그의 저서를 평가하는 것은 어쩌면 톨킨의 또 다른 작품들과의 상대적 비교 정도로만 가능할지도 모르겠다. 다른 작가와의 비교는 톨킨에게도, 다른 작가에게도, 모두 감당할 수 없는 충격이 될 테니까. ("나니아 연대기"를 쓴 또 다른 거장 C.S. 루이스와는 긍정적 의미로 비교가 어렵다. 톨킨의 작품은 세속문학에 가깝고, 루이스의 작품은 좀더 신앙서적에 가깝다. 물론 둘 다 문학과 신앙의 양면을 충분히 갖고 있으며, 은유와 상징이 직간접적으로 풍부하게 사용되었다는 공통점이 있지만 말이다.) 

 

 

많이 알려져있는 대로, <호빗>은 톨킨의 또 다른 대표작 <반지의 제왕> 시리즈의 프리퀄격인 작품이다. 때문에 어쩔 수 없이 독자들은 <호빗>을 읽으면서 자동적으로 <반지의 제왕>과 비교를 할 수 밖에 없다. 톨킨은 다양한 종족과 매력적인 캐릭터들을 의도적이고도 효과적으로 배치했지만, 그러면서도 두 작품의 메인 주인공으로는 모두 "호빗" 을 선택했다. 엘프, 드워프, 마법사, 오크, 골룸, 트롤, 고블린, 와르그(Warg) 등 수많은 종족들은 모두 톨킨의 손에서 창조되었지만 고대 서양신화에서 계승되어온 이미지들이 약간은 바탕이 되었을 것이다.  

 

그러나 "호빗" 족속은 온전히 톨킨의 창조다. 어쩌면 이런 이유로 톨킨은 호빗을 이 거대 서사 스토리의 메인 주인공으로 내세웠는지도 모른다. 또는 다른 종족에 비해 특별히 내세울 것이 없는, 보잘 것 없고 연약한 점이 오히려 톨킨의 선택을 이끌었을 수도 있다. 스토리의 장대함을 이끄는 주체가 지극히 작고 연약한 호빗이 될 때, 그 간극에서 오는 카타르시스와 감동은 더 크게 다가오기 때문이다.  영화 <호빗1: 뜻밖의 여정>에서 간달프는 왜 호빗을 선택했냐고 묻는 하이엘프 엘론드왕에게 이렇게 말한다. "사루만은 사악한 어둠을 이기려면 위대한 영웅이 필요하다고 생각하지만, 난 그렇지 않다네. 어쩌면 평범하고 연약한 보통의 인물이 오히려 더 큰 일을 이룰 수 있다고 믿지." (정확한 대사는 기억이 안 나지만, 대충 이런 뉘앙스였다.)  

 

간달프의 이 대사는 <호빗>과 <반지> 시리즈 전체를 통괄하는 톨킨의 핵심주제이다. 피터 잭슨은 톨킨 광팬답게 이러한 톨킨의 의도를 정확히 간파했고, 간달프의 대사를 통해 톨킨의 의도를 직접적으로 전달하는데 성공했다. (원작 소설에서는 이런 대사가 없다. 아마도 톨킨은 직접적인 표현보다, 스토리 상에서 묻어나는 호빗의 활약을 통해 자신의 의도를 간접적으로 전하려고 한 것으로 보인다.) 

 

 

 

 

 

'호빗'은 난장이들보다 작은 종족으로, 평화를 사랑하고 조용히 지내는 것을 좋아한다. 난장이들과 달리 기계를 다루는 것에는 관심이 없지만 도구를 사용하는 것은 나름 잘하는 편이다. 부지런하지만 서두르는 것은 싫어하는 여유로운 성격에, 유달리 귀가 커서 소리에 민감하고 눈도 밝아서 관찰력이 좋다. (하지만 엘프와는 비교불가!) 여유롭고 느긋한 성격 탓에 대부분의 호빗들이 살찐 경우가 많으며, 밝고 컬러풀한 색상의 옷을 입는 것을 좋아한다. 또한 유달리 발이 크고 발바닥이 인간보다 거친 편이며 털도 많아서 신발을 신지 않는다. 먹는 것을 좋아하고, 파티를 즐기는 것은 드와프와 비슷하고, 손님이 찾아오면 극진히 접대하는 것을 중요시하는 사교적인 종족이다. 그들이 거주하는 "샤이어"는 중간계의 브랜디와인 강(River Brandywine)과 파 다운스(Far Downs) 사이에 위치한 땅으로, 평화롭고 조용하고 아름다운 곳이다.

 

<호빗>의 주인공은 <반지의 제왕>의 주인공이었던 프로도의 삼촌, '빌보 배긴스'다. 프로도가 반지를 없애기 위해 여정을 떠났던 때로부터 약 60여년 전, 그의 외삼촌 빌보는 드와프들과 간달프의 반강요에 떠밀려 뜻밖의 여정을 떠났다. 1년간의 여정에서 빌보는 트롤, 자이언트 스톤, 고블린, 골룸, 와르그, 대형 독거미, 스마우그 등 강력한 적들을 만나며 각종 위험에 처한다. 때로는 목숨을 위협받고, 때로는 배고픔과 추위로 힘들어하고, 때로는 드와프들과 갈등하고, 때로는 자기자신의 나약함에 좌절하면서, 빌보는 모험을 이어간다. 자신의 아늑했던 집과 풍요로운 식탁을 그리워한 것이 수십번이지만, 빌보는 모험을 중단하지 않는다. 하나의 고비를 넘으면 더 큰 어려움이 찾아오지만, 시간이 지나면서 빌보는 그것들을 피하기보다 맞서싸우는데 익숙해지고 그러면서 조금씩 성장해간다. 

 

 

 

 

<호빗>은 총 19장의 챕터로 되어 있다. 영화 <호빗:뜻밖의 여정>은 이중 챕터 6장까지를, <호빗:스마우그의 폐허>는 챕터 12장까지를 다뤘다. 영화의 기준으로 말하자면, 빌보가 간달프와 드와프들과 함께 여정을 떠나서 트롤과 고블린의 습격을 피해 달아나다가 와르그 (Wargs: the evil wolves - 사악한 늑대들)를 만나 위험에 처하고, 그때 마침 다행히도 독수리의 왕이 빌보일행을 발견하여 독수리의 도움으로 와그르떼에서 벗어나는 부분까지가 제 1막에 해당한다. (그리고 영화는 그들이 바라보는 외로운산 'the lonely mountain' 아래에서 자고 있는 용 스마우그가 눈을 뜨면서 끝난다.)  물론 그 과정에서 빌보가  <반지의 제왕>과 가장 큰 연결고리가 되는 '절대반지'를 골룸과의 수수께끼 대결을 통해 얻게 되는 과정이 나온다. 

 

영화만큼이나 소설에서도 이 부분이 굉장히 인상적이었는데, 단지 <반지의 제왕>과의 연결고리 때문만이 아니라 <호빗>의 전체 구조상에서 골룸과의 대결부분이 갖는 독특서 때문이었다. 드워프들의 잃어버린 왕국 '에레보르'를 되찾기 위해 에레보르가 있었던 외로운 산으로 가는 과정에서 겪는 모험이 스토리의 전반적인 내용인데 반해, 골룸이 등장하는 부분은 보다 독립적인 스토리로 다가온다. 에레보르로 가는 과정속에서 겪은 무용담이지만, '필연적'으로 만나게 되는 위험이 아니라 '운명적'으로 만나게 된 운명이라고나 할까. 다른 적들(foes)은 스토리 구조상 빌보일행이 반드시 맞닥뜨려야 하는 적들이었다.  

 

하지만 골룸은 어디까지나 빌보의 '운'에 의해 만난 적이었고, 절대반지 또한 마찬가지였다. 빌보는 조금씩 반지에 매혹되어가지만, <호빗>에서 반지의 역할은 <반지의 제왕> 시리즈와는 비교할 수 없을 정도로 미미하다. 반지의 용도는 어디까지나 투명마법의 용도, 그 이상도 이하도 아니다. 해리포터의 투명망토 수준이라고나 해야 할까. 다시 말해, 간달프의 마법처럼, 빌보가 부릴 수 있는 트릭 또는 마법 수준일 뿐이다. 때문에 반지가 빌보 일행의 여정에서 절대적인 영향력을 끼치진 못한다. 원작에서 심지어 빌보는 드워프들에게 골룸과의 내기를 통해 반지를 얻었다며 반지의 투명마법을 알려준다. 하지만 <반지>시리즈의 인물드과 달리, <호빗>의 인물들은 반지에 매혹되거나 욕심을 내지 않는다. 아직 절대반지의 힘을 몰라서일 수도 있지만, <호빗> 이야기에서는 반지 스토리는 이야기 속의 이야기인 '액자구성'에 가깝게 다가온다.  

 

그럼에도 골룸과의 장면은 굉장한 긴장감을 불러온다. 골룸과 빌보가 주고받는 수수께끼 내기에서 긴장하지 않는 독자가 있을까. 보일행이 처한 다른 대규모 위험보다도, 심지어 후반부에 나오는 '다섯 군대의 전투' (the Battle of Five Armies)보다도, 골룸과의 내기 장면에서 긴장감이 더 크다. 개인적으로 이 장면은 원작과 영화 모두, 가장 맘에 드는 장면이었다.

 

절대반지의 영향력이 미미한 대신, <호빗>에서 <반지>시리즈의 절대반지의 역할을 감당하는 것은 '외로운 산'에 파묻힌 보물들이었다. 고대 드워프 왕국의 보물이었지만 현재는 스마우그(smaug)에게 뺏긴 후다. 소린과 드워프들은 자신들의 왕국과 보물을 되찾기 위해 여행을 떠났지만, 점차 그들은 잃어버린 '왕국'보다 잃어버린 '보물'에 더 집착한다. 드워프 종족 자체가 보물을 좋아하긴 하지만, <호빗>에서의 드워프들은 점차 보물에 이성을 빼앗긴다. 그 중 가장 심한 것은 드워프의 왕 '소린(Thorine)'이었다. 

 

처음부터 광기(내 기준으로는 '똘끼' 혹은 '객기')가 있다고 묘사된 소린이었지만, 여정 과정에서 그가 보여준 모습은 꽤 괜찮은 리더였다. 물론 고집불통에 까칠하기가 그지없어서 오히려 고생을 자처하는 경우도 있지만 (가령 어둠의 숲 요정의 왕인 '스란두일' 앞에서 하는 행동은 그냥 똥고집에 가까운 객기이 뿐이다), 전체적으로는 화통하고 카리스마있는 리더의 모습을 보여준다. 그러나 소리은 조금씩 미쳐가고 있었다.  

 

소린의 광기는 스마우그가 빼앗았던 보물을 다시 보는 순간 소린의 변화는 가속을 달린다. 스마우그가 죽은 후 바르드(Bard)와 스란두일이 찾아왔을 때에 그가 보여준 행동은 안타까울 정도이다. 소린의 모습은 반지에 집착하는 골룸의 모습을 닮기도 했고, 권력에 집착하던 곤도르의 국왕 '데네소르'를 닮기도 했다. 권력, 혹은 물질에 집착하는 현대인의 모습과 그 집착의 정도를 톨킨은 이들 캐릭터를 통해 단계별로 보여주는 것만 같다. 

 

다행히 소린은 골룸이나 데네소르와는 달리 마지막까지 미치진 않는다. 여전히 그의 광기는 남아있지만 (이것은 권력과 물질에 집착하는 인간의 근본적인 악한 본성을 상징한다), 소린은 동시에 리더로서의 자신의 본분과 자신의 또다른 면인 선한 성품을 놓지 않았다. 덕분에 안타까운 최후에도 불구하고 소린은 빌보와 화해하는 결말을 이끌어낼 수 있었다. 

 

 

 

 

<호빗> 원작을 읽을 때 그 스토리만큼이나 많은 이들이 재미를 느끼느 것이 영화와의 비교이다. 이미 워낙 많이 알려졌지만, <뜻밖의 여정>에 나오는 오크왕 '아조그'나 리벤델에서 있었던 마법사들의 회의 장면, <스마우그의 폐허>에 나오는 레골라스나 타우리엘은 원작에 등장하지 않는다. 아조그와 마법사들 회의 장면은 한줄 설명으로 나올 뿐이고, 레골라스는 언급조차 없으며, 타우리엘은 피터잭슨 감독이 창조한 캐릭터이다. 당연히 타우리엘과 드워프 킬리와의 로맨스도 원작엔 아예 없다. (이 부분은 더는 언급하고 싶지 않다. 뜬금없는 로맨스라니ㅠㅠ)

 

세부적으로 들어가면 원작과 다른 점들은 더욱 많다. 가령 베오론과 만나는 장면, 와르그떼에 쫓기는 빌보일행을 독수리왕이 구해주게 되는 계기, 고블린 왕국에서 빌보가 탈출할 때의 장면, 스마우그와 드와프들 (원작에서는 드워프들은 아예 스마우그와 대면하지도 않는다. 빌보만 잠깐 만났다가 스마우그가 빌보일행을 찾으러 마을로 내려가고, 바르드에게 죽는다. 소린은 한게 없다. ㅠㅠ) 등은 영화와 원작이 아예 다르다.

 

하지만 빌보의 존재감은 원작이나 영화나 같다. 특히 원작에서 빌보의 존재감은 상당하다. 특별한 재능도 없고 뛰어난 영웅도 아닌 캐릭터가 이토록 큰 공감을 이끌어 내는 이유는, 빌보가 우리의 모습과 너무도 닮아서, 빌보처럼 당장 나도 모험을 떠날 용기는 아직도 없지만, 그럼에도 빌보가 성장할 때마다 '나도 할 수 있겠지?'하는 희망을 조금이라도 꿈꿀 수 있기 때문이 아닐까.

 

빌보는 끊임없이 성장한다. 지치지도 않고 위험이 계속 다가오지만 어쨌든 이겨낸다. 주인공이기 때문에 죽지 않는 것이라고 쳐도, 소설 속 빌보는 자신이 주인공인 것을 모르기 때문에 끊임없이 죽음의 공포와 맞닥뜨려야 한다. 다리가 떨리고 입이 얼어붙지만, 주저하다간 죽을 수 밖에 없다. 용기에 의해서였든 어쩔 수 없어서였든, 빌보는 싸우고 또 싸운다. 그 과정에서 빌보는 잊고 있었던 도전정신과 용기를 발견하며, 위험 가운데서도 동료들을 위해 기꺼이 앞장서는 희생정신도 보여준다. 나중에는 자신을 죽이려한 소린과도 화해하며, 소린과 바르드 사이의 평화를 위해 자신이 갖고 있던 아르켄스톤(Arkenstone)을 기꺼이 내어주기도 한다.

 

우리와 똑같았던 빌보는 후반부로 갈수록 우리 모두가 잊고 있던, 또는 우리 모두가 이상적이라고만 여기며 배척하고 있었던 아름다운 윤리들을 온전히 회복한다. '성장'이라는 코드는 <호빗>과 <반지의 제왕> 시리즈에서 톨킨이 일관되게 보여주는 교훈 중 하나인데, 특히 톨킨은 인물이 성장하게 되는 근간을 '희생'과 '신뢰'라고 본 것 같다. 샘이 프로도를 위해 희생했고, 반지 원정대들이 서로를 온전히 신뢰했듯이, 빌보는 드워프들을 위해 기꺼이 희생했으며, 투덜거리길 좋아하는 드워프들은 시간이 지날 수록 빌보와 깊은 우정을 나눈다. 골룸, 오크, 와르그 등 악한 무리들을 이겨내기에 그들은 힘으로도, 숫자로도 절대적으로 불리했지만, 서로에 대한 신뢰로 이겨낸다. 그리고 이들의 신뢰를 이끌어내는 것은 빌보의 자기희생과 동료애였다. 여정을 마치고 집으로 돌아오는 길에서 간달프는 빌보에게 말한다.

 

"You are not the hobbit that you were."

넌 예전의 네가 아니구나, 빌보!

 

<반지의 제왕>이 대서사시이고, <실마릴리온>이 신화라면, <호빗>은 동화에 가깝다. 하지만 어린이들이 읽는 이야기라고 치부하기엔 톨킨이 담고 있는 메세지는 상당히 묵직하다. 모험을 밝고 유쾌하게 그려내고 있어서 그렇지, <호빗>이 전하는 메세지의 무게는 <반지의 제왕>에 절대 뒤지지 않는다. 어느 작품이 더 좋은가는 어디까지나 취향의 차이일 뿐.

 

톨킨의 언어를 좀더 느끼고 싶어 원서로 읽었다. 언어학자였던 톨킨답게, 사용하는 언어도 왜 그리 다양한지. 까마귀(Crow)와 갈까마귀(Raven) 등, 디테일한 단어들이 마구마구 튀어나온다. 때문에 원서로 읽는다면, 나니아나 해리포터보다 어렵게 느껴지는 것이 톨킨이다. 하지만 확실히 <반지의 제왕> 시리즈보다는 쉽게 읽힌다. 수많은 다양한 단어(특히 명사ㅠㅠ 과장하자면, 사전에 있는 단어를 다 갖다 썼나 할 정도로 다양하다)의 습격으로 한글버전보다 시간이 두배는 걸렸지만, 익숙해지고 나니 뒤로 갈수록 읽는 속도도 빨라졌다. 약 2주간에 걸쳐서 읽었지만, 덕분에 2주동안 중간계 세계에 온전히 빠질 수 있어서 행복했다. 조금 쉬었다가 <실마릴리온>에도 도전해 보련다! ^^

 

* 위 리뷰와 더 많은 리뷰를 보시려면 저의 네이버 블로그(http://jhwhjn.blog.me/)를 방문해주세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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