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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의 모험 - 수학공부가 즐거워지는 20가지 이야기
안나 체라솔리 지음, 구현숙 옮김, 주소연 감수 / 북로드 / 2005년 4월
평점 :
구판절판
어젠가 그저껜가 한겨레신문 기사에서, 수학 기초가 약한 아이들에게는 개념부터 이해하도록 도와주라는 말을 읽었다. 좋은 말이다. 도대체 왜 그렇게 되는지, 애시당초 무슨 쓸모가 있는 건지 모르는 채로 미적분 공식을 외우고, 어느 문제에 어느 공식을 대입해서 풀어야하는지 끙끙거려야 했던 수학은, 나에게는 고문과 마찬가지였으므로. 그때 예상했던 대로 나는 학교에서 배운 수학은, 더하기 빼기 곱하기 나누기 외엔 깡그리 잊어버렸고 일상생활에 쓸 일도 없다.
올해 중학교에 들어간 조카가 있다. (내눈에는) 아직 덜 여문 손으로 연필을 쥐고 끙끙거리며 수학문제를 풀다가 도저히 해결을 못하면, 이 문제는 어떻게 풀어야 하는 거냐고 가끔 묻곤 한다. 보통은 문제를 '독해'하지 못한 경우라 대답하기 쉽다. 문장으로 길게 써놓은 문제를 조근조근 설명해주기만 하면 되니까.
그런데 가끔, 문제를 어떻게 풀어야 하는 건지를 이해하지 못해 물을 때가 있다. 이럴 때가 난감하다. 수학의 기본 개념을 이해하도록 도와주라는 말이 당연히 매우 타당한 말인지는 알고 있으나, 문제는 나도 수학의 기본개념을 제대로 이해하고 있는 게 별로 없다는 사실이다. 내가 모르는 걸 아이에게 설명하고 이해시킬 재주가 있나. 그렇다고 내가 끔찍하게도 싫어했던 방법대로, 이런 유형의 문제엔 이런 공식, 하며 들입다 외우는 방식으로 공부하라고 시키긴 싫고, 이럴 땐 어떻게 해결해야 하나.
"수의 모험"은 우연히 얻은 책이다. 조카 이야기를 하도 떠들고 다녔더니 누가 조카 갖다주라며 책을 줬다. 내가 보지 않은 책은 조카에게 넘기기 전에 대충이라도 내가 먼저 본다(심의절차라고나 할까...)는 노선이라, 그리고 그다지 어렵지도 두껍지도 않은 책이라, 잠자기 전에 짬짬이 대략 일주일 동안 읽었다.
수학 선생님이었던 할아버지가 일상생활에서 계기를 끄집어내 어린 손자에게 수학의 기본개념을 설명하는 구성인데, 이런 픽션의 형식을 빌리는 글에서 가끔 볼 수 있는, 어설프고 딱딱한 문체가 전혀 아니라 우선 편했다. 아이는 아이답게 묻고 대답하고 트집도 잡고 떼도 쓰고, 할아버지는 할아버지대로 이 상황을 어떻게 수학 이야기로 끌고 갈 수 있을까 호시탐탐 노린다.
그냥 아직 어린 학생들이 읽도록 쓴 책이니까 조금 덜 어려운, 그러나 역시 조금은 지루한 수학책이려니 생각하며 건성으로 읽다가 처음 놀란 것은, 사람들이 일상적으로 쓰는 숫자체계가 왜 십진법이냐를 설명하는 대목에서였다. 십진법 체계에 너무나 익숙하게 길들어 있어, 한번도 '왜'일지 궁금히 여겨본 일이 없었는데, 그렇군, 왜 십진법 체계인지 이해하는 게 수학을 이해하기 위한 첫걸음이란 말이지?
아라비아 숫자, 십진법, 0(영), 이런 아주 그야말로 기초적인 이야기를 늘어놓는 동안에는, 뭐 이러다 좀 난이도 높은 수학개념은 시작도 못하고 책이 끝나는 게 아닌가 싶더니, 웬걸, 할아버지의 수학이야기는 무리수, 방정식, 닮은꼴, 이런 이야기를 거쳐 어느새 확률, 원주율, 좌표 등등의 문제에까지 나아가 있었다. 이 정도면 내가 기억하는, 중학교 수준의 웬만한 수학개념은 포괄하는 게 아닌가 싶은데.
그 지긋지긋한 미적분 이야기도 어디에선가 나왔다. 지금이라면 도대체 어떻게 읽어야 되는지도 모르는 복잡한 공식이 아니라, 어떤 때에 미분과 적분이라는 방법을 써야할 필요가 있는 것인지 간단히 설명하는 정도로.
정말 궁금하다. 미적분이 이럴 때 필요하다는 걸 수학교사나 누군가가 이 정도로만 간단히 설명해 줬더라면 나도 훨씬 재미있게 수학에 달려들었을지도 모를 일인데, 내가 고등학교를 다닐 때는 모든 선생님들이, 모름지기 공부는 이해할 수도 실생활에 적용할 수도 없는 일로 만들어야 한다는, 거기다 가능한 한 어렵게 배우도록 가르쳐야 한다는 사명감에 불타고 있었기라도 한 걸까?
중간중간에 들어간 삽화도 꽤나 느낌이 좋아서, 미학적 완성도를 기준으로 책을 고르는 나에게 이 점에서도 통과다.
다만 아쉬운 점. 번역서라 어쩔 수 없는 문제인데, 개념을 쉽게 설명하기 위해 할아버지는 내내 어원을 설명한다. 그런데 그게 전부 외국어 개념의 어원 설명이니 한글로 수학을 공부해야 하는 아이들에게는 별로 쓸모가 없겠다. 이 문제를 해결하려면 한국어를 쓰는 필자가 이런 책을 쓸 수밖에 없으려나? 아니면 '기하' 같은 이상한 한자개념이 많은 한국어 수학개념은, 한국어로 책을 쓴다한들 어원을 설명한다는 게 별 도움이 안 되는 일로 만들어버리려나?
아, 맞다. 아직도 남아 있는 문제 한 가지. 그런데 글자 많은 책이라면 무조건 도망부터 치고 보는 조카놈한테 어떻게 해야 이 책을 읽히지? 지네 아빠가 사 준 '수학귀신'도, 내가 알기론 아직도 처음 몇장만 뒤적거리다 그대로 책꽂이에 꽂아뒀을 텐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