위대한 왕
니콜라이 바이코프 지음, 김소라 옮김, 서경식 발문 / 아모르문디 / 2007년 8월
평점 :
구판절판


계몽산가 어딘가에서 나온 50권짜리 아동문학 전집, 열 권짜리 안데르센 동화 전집, 열두 권짜리였던 무지개마을 한 질과 역시 열 권인가 열두 권짜리였던 위인전 전집...... 니들이 공부만 하겠다고 한다면 붕어빵 장사를 해서라도 끝까지 시키겠다고 노래부르셨던 엄마 덕분에, 어릴 때부터 책꽂이에는 우리가 읽을 책이 빼곡했었다. 당시로서는 흔하지도 쉽지도 않은 일이었던 걸로 기억한다. 그래도 두어 달 지나면 모두 이미 읽은 책이 되어버렸고, 나는 한 반 친구집이나 이웃집을 돌아다니며, 다른 출판사에서 나온 또 다른 50권짜리 아동문학 전집에서 한두 권씩 빌려다 읽고 돌려주곤 했었다.

좋아했던 책도 많았고 아직까지도 제법 구체적으로 기억하는 이야기도 적지 않지만, 그 가운데서도 유난히 독특한 그리움으로 오랫동안 남아있던 책 두 가지가 있었다. <양자강의 소년>과 <위대한 왕>. 그 나이에도 다른 이야기들과는 좀 다른 데가 있다는 걸 어렴풋이 느꼈기 때문이었던 것 같고, 그 시절에 좋아했던 대부분의 이야기들과는 달리, 다시 한번 찾아 읽으려 해도 이제는 다시 만날 수 없을 거라는 안타까움 때문이기도 했다.

그 중에서 <위대한 왕>. 어렴풋한 기억에, 이 책은 호랑이 이야기였고, 동시에 어느 노인의 현명함과 용기에 대한 이야기였고, 호랑이와 노인 사이에 침묵으로 이어진 우정 이야기였다. 구체적으로 어떤 결말이었는지 기억하지 못하는 채로 묵직한 슬픔의 인상이 남아있었고, 성장기 동안 나는, '용기'라는 말을 생각할 때마다 호랑이와 노인이 만나는 장면을 머릿속에 떠올리곤 했었다. 그러면서 혼자서 경구도 만들어냈다. 두려워하지 않으면 두려워할 일은 생기지 않는다.

<위대한 왕>이 성인용으로 출간될 예정이라는 소식을 듣고 무조건 기뻤다. 한참 지나 책이 손에 들어왔고, 선거와 관련된 무성한 정보와 토론과 미리 실망으로 어수선하던 한 열흘을 나는 만주 밀림 속에서 호랑이와 살았다. 다시 읽어보니 이 이야기의 고갱이는 노인과 호랑이의 우정이 아니었다. 이 책은 현대문명에 밀려난 야생의 삶에 바치는 만가(輓歌)였다. 잃어버린 원시시대를 그리워하는 성향은 아니지만, 어린 호랑이의 충만한 성장과 풍요로운 일상을 지켜보고 있던 나는, 갑작스러운 상황 변화에 좀 어리둥절했다. 그리고 곧이어 쓸쓸해졌다. 마침 대선 결과가 확정되어 가는 동안, 나와 왕은 대단원을 향해가고 있었다.

처음 이 이야기를 읽었을 때와는 달리 머릿속이 많이 번잡해진 지금의 눈으로 다시 보니 거슬리는 부분도 종종 띈다. 암호랑이의 짝인 숫호랑이를 '주인'으로 표현한다든가. 역시 자연은 있는 그대로 관찰하는 게 아니라 인간의 눈으로 해석한다는 말이 맞는 게야. 왕의 '지배'와 '존엄'을 되풀이 강조한다든가. 이거, 저자가 러시아 백군 출신이라더니 그런 이데올로기 아냐? 이 이야기를 경험하는 데 별 도움이 되지 않을 의심을 굳이 갖다대보기도 했다.

그래도 왕을 다시 만나 함께 보낸 시간은 즐거웠다. 까탈을 부려보기도 했지만 대체로 호랑이의 관점을 잘 살렸다. 야생의 세계에서 인간은 만물의 영장이 아니다. 옛사람들이 자연에 신성을 부여한 이유가 무엇이었는지 체감할 수 있는 공간은 이제 거의 남아있지 않다. 이 이야기가 그 희미한 흔적을 보여준다. 현대문명이 잃어버린 세계가 무엇인지 청소년들이 생각해보게 만들고 싶다면 권할 만한 책이라고 생각한다.
어릴 때부터 유난히 호랑이, 그중에서도 특히 백두산 호랑이에 집착했었는데, 이 이야기의 영향이 무의식에 남아 있었기 때문이 아닐까, 책을 덮으며 처음으로 떠올렸다.

 

후기: 책을 읽기 전에 띠지를 벗겨 던져놓는 습관대로, 이번에도 맨들맨들한 표지로 만들어 읽은 후 독후감까지 내쳐 쓴 참이었다. 두어주가 지나 책장 한 구석에 처박혀 있는 이 책의 띠지가 눈에 들어왔는데, "원시의 대자연을 향한 만가"라는 문장이 대문짝만 하게 박혀 있는 것 아닌가. 윽, 무의식적 표절이란 게 이렇게 생겨나는 거구나, 어쩐지 만나본 지 언제였던지 기억도 안 나는 '만가'라는 낱말이 그리도 쉽게 떠오른다 스스로 대견하더라니. 그러나 대단한 글도 아닌 혼잣말이니 고치지 않고 내버려두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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