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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토리 자매
요시모토 바나나 지음, 김난주 옮김 / 민음사 / 2014년 3월
평점 :
품절

‘도토리 자매’
이 동그랗고 앙증맞은 제목 자체에서 오는 즐거움은 책을 받은 순간 마치 봄을 건네받은 듯한 향긋함에 한동안 표지를 뚫어지게 바라보게 만들었다. 인디핑크로 물들인 바탕에 만발한 색색의 꽃들, 그 아래 도토리에 창을 낸 집에서 신비로운 얼굴을 내민 여인의 일러스트. 과연 요시모토 바나나가 들려줄 이야기는 어떤 것일까. 설레는 마음을 더욱 재촉하게 만드는 묘한 느낌의 일러스트라 책에 대한 기대와 호기심은 삽시간에 한층 더 커지고 말았다.
한국인이 가장 사랑하는 일본 작가 중 한 명인 ‘요시모토 바나나’
사실 요시모토 바나나의 책은 늘 장맛비가 끊이지 않고 내리는 여름날 같다는 생각이 든다. 무더운 초여름의 내리쬐는 햇볕의 정열은 젊음의 치열함과 아련한 그리움을 동반하여 작가 특유의 섬세함을 자아낸다. 그리고 그의 작품에서 끊임없이 묻어나는 생과 사의 오묘한 어울림은 추적추적 끈적이며 내리는 무더움과 서늘함을 교차하는 장맛비 같다.
‘도토리자매’는 역시나 ‘요시모토 바나나’ 다운 작품이긴 하지만, 개인적으로 그의 작품 중에 가장 따듯하고 대중적인 작품이 아닌가 생각한다.
읽는 내내 마음 언저리를 차분하게 매만져 주는 작가의 마음이 느껴졌다.
햇볕이 잘 드는 안뜰에서 평온한 공기 속에 살랑살랑 불어오는 가벼운 바람을 맞으며 행복한 미소를 머금고 그네를 타고 있는 그런 기분이라고 할까. 책을 읽는 내내 내가 느낀 감흥은 그런 소소한 행복감이었다.
도토리 자매는 홈페이지를 개설하고 불특정 다수에게 메일을 받고 있다. 그리고 그들에게 간략한 답장을 보낸다. 물론 이건 영리적 목적은 전혀 없는 일종의 ‘봉사’의 마인드로 시작한 일이다. 누구나 나를 모르는 상대에게 아무렇지 않은 일상의 사소한 이야기나 잔잔한 감정들을 표현하고 싶다는 생각이 들 때가 있다. 하지만 크게 어려워 보이지 않는 이러한 일련의 대화와 행동은 사실 가장 성취되기 어려운 욕망들인지도 모른다. 그러한 사소한 것들이 마음 안에 쌓여가면 사람이 느끼는 인생의 무게는 몇 겹은 더 무거워지는 것이 아닐까.
가족을 잃은 사람들, 이별을 한 사람들, 각자의 상처와 고통 그리고 고독들을 지닌 이들이 도토리 자매에게 메일들을 보내오고, 두 자매도 자신의 삶에 대해 이야기하기 시작한다.
언니 ‘돈코’와 동생 ‘구리코’의 첫 번째 상실은 부모의 죽음이었다. 갑작스러운 사고사로 부모를 잃게 되자 그들은 친척 집을 전전하게 된다. 삼촌에 이어 탐탁지 않았던 이모를 거쳐서 친 할아버지를 모시게 되면서, 자매는 상처와 시간의 흐름 안에서 자신들의 본연의 정체성을 깨달아 간다.
할아버지가 세상을 떠난 뒤, 유산으로 상속받게 된 집에서 언니와 새로운 살림을 꾸려가는 동생은 자신만의 특별한 체험을 하게 되면서 첫사랑이었던 ‘무기’의 죽음을 인지하게 되고, 그를 추모하는 과정에서 스스로의 내면의 상처를 치유해 나간다.
언니 또한 새로운 연애와 동생과 시작한 ‘도토리자매’ 프로젝트를 진행하며 자신만의 세계관을 확립해 간다.
사랑하는 사람을 잃는 상실과 죽음은 이 소설의 중심을 이루는 축이 되면서, 동시에 살아있는 ‘생’을 더욱 명료하고 빛이 나게 만드는 묘한 코드이다.
어쩌면 이 반대의 명제들이 새로운 걸음을 내디뎌 살아가는 힘을 주는 것일지도 모르겠다. 도코와 구리코에게, 그리고 자매에게 메일을 보내온 이들에게도.
이 책을 덮을 때 즈음, 독자는 느끼게 된다.
삶이란 참으로 신비하다. 나를 넘어서 누군가의 삶에 잠시라도 집중할 때, 어느덧 내 삶의 문제들이 해결되는 경우가 있다. 때론 문제가 해결되지 않아도 받아들이는 나 자신이 넓어지는 것을 경험하기도 한다.
그리고 무언가를 잃고 난 뒤에 더욱 황폐해졌을 법한 마음이 뭔가 특별한 변화와 성장을 경험하게 되기도 한다.
도토리 자매는 그런 인생의 맛을 체험하고 그런 인생의 멋을 실천하고 있다. 사실 이 여정은 타인을 위한 것으로 시작되었지만, 실상은 자신을 위한 것이기도 하다.
어딘가 그들에게 메일을 보내면, 실제로 답장을 받을 수 있을 것 같은 재미난 착각이 든다.
이 봄이 다 가기 전에, 누군가에게 선물하고픈 책이었다.
이 예쁘고 앙증맞은 책이 담고 있는 삶의 신비로움과 힘을 소중한 마음을 담아 전하고 싶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