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독학 파스타 - 남자, 면으로 요리를 깨치다
권은중 지음 / 바다출판사 / 2011년 8월
평점 :
품절
어린 시절 읽었던 <큰숲 작은 집>은 나한테 무척 매력적이었어. 그 책을 읽은 지 오래 되었어도 그 책 속, 버터를 만들던 장면, 사냥감을 훈제하여 햄으로 만들고 다락방에 저장하는 과정을 읽던 느낌을 떠올릴 때면 언제나 좋았어. 낭만적이었어. 그리고 음식 이야기를 생각하며 그 이유 하나를 더 알아냈어. 바로 디테일함이야. 음식 이야기는 무척이나 디테일할 수가 있어. 만드는 과정도 그렇고 음식 하나하나를 음미하는 과정도 그렇고 한 끼의 식사를 식탁에 차리기 위해 조리대에 올려야 하는 식재료들 하나하나도 그래.
파스타 요리법이 주구장창 소개된 이 책, 요리법만 알려 주는 책은 아니다. 요리를 둘러싼 다양한 이야기가 있어서 글쓴이의 에세이라고 하는 게 좋겠다. 기자 남자가 쓴 요리 에세이. 면 하나를 놓고도 다방면으로 뻗어나가는 생각들을 담았다. 식재료를 찾고 조리법을 시도하고 요리를 만들어 내고 손님들과 즐긴다. 레시피는 꼭 정리해 준다. 팁과 함께. 제목처럼, 파스타 만들기를 독학하고 부제처럼 파스타를 만들면서 요리를 알게 되었단다. 맛과 영양의 조화를 터득했단다. 그래서일 거다. 이 책을 읽으면서 음식에 대한 많은 이야기가 떠오른 것은. 삶이 요리와 함께 풍부해지는 느낌은. 글쓴이가 손님들에 맞추어 파스타와 샐러드를 준비하고 함께 식사하고 식재료를 손으로 만지고 다듬는 이야기를 읽으며, 나도 그처럼 나와 식사를 함께한 사람들을 떠올렸다.
모두 여섯 개의 장으로 나누어 파스타를 모으고 설명한다. 1장에서 기본적으로 올리오 알리오, 봉골레, 크림소스와 까르보나라 등을 설명한다. 2장은 여심을 사로잡는 파스타라 하여 고르곤졸라와 아라비아따 등을 소개한다. 보면서, ‘아, 여심은 이렇게 잡히는구나.’ 하였다. 3장은 식구들이 좋아할 친근한 맛의 파스타, 4장은 아저씨들을 위한 파스타, 5장은 궁극의 파스타라는 주제로, 6장은 파스타 손님상을 안내한다. 곁들여 좋은 주류와 함께.
자세하게, 맛깔나게. 그래서 어떤 건 목구멍으로 미끈거리는 면 가닥이 꿀떡꿀떡 넘어가는 느낌이 생생하다. 나는 식당에서 알리오 올리오를 자주 주문했는데, 뜻이나 조리법을 알아서는 아니고 발음이 재미있어서였다. 까르보나라를 안 먹은 지 꽤 되었는데, 그건 글쓴이처럼, 처음 맛은 황홀하되 먹을수록 견딜 수 없었던 느끼함 때문이었다. 재료에 따라 다를 수 있다는 생각은 안 해 보았다. 읽으면서 어디서 들어봤음직한, 그러니까 빵꾸난 지식 영역들을 메꾸어 줄 ‘그게 그런 거였구나.’ 하는 정보와 이야기들이 꽤 있었다. 국수를 좋아해서 그런지 드문드문 칼국수 얘기가 나오는 것도 반갑고, 와인 얘기도 재미있었다. 제일 먹고 싶은 건 치아바타와 포카치아였고 알리오 올리오는 제일 하고 싶은 파스타였다. 그보다 더 먹고 싶은 건 고량주였고 책을 읽은 뒤 며칠 지나지 않아 마시게 되었다. 스카브로 페어 얘기도 재미있었다. 노래 가사에서 파슬리, 로즈메리 등장하는 게 조금 의아했지만 그게 장날 노래인 줄은 몰랐다. 사라 브라이트만의 목소리에서, 청량한 멜로디에서 시장이 숨어 있는지 어떻게 알았겠어. 이 생각 저 생각 녹아든 것이 딱 에세이, 그래서 책을 읽다 ‘이거 해 먹고 싶다’는 생각만큼 손으로 식재료를 만지고 냄비에 익히고 먹던 기억들이 떠오르는 거다. 다채로운 재료와 재료를 다듬는 과정이, 그리고 손님을 초대하고 그들의 성향에 맞추어 음식을 준비하는 과정이 보기 좋아, 내게도 그 기억들을 떠오르게 한다.
장을 보러 가고 다 똑같을 버섯과 양파 앞에서 심사숙고하여 고르고 손으로 양상추를 찢고 칼등으로 마늘을 찧고 스파게티 면을 뚝뚝 분질러 냄비에 넣어 삶고 간장과 식초로 만든 새콤한 소스는 소면에 비벼 내 놓았다. 그리고 그보다 더 노련하게, 복잡한 과정을 거쳐 내게 맛있는 것을 해 주었던 이들과의 식사를 떠올린다. 내 삶에 지대한 영향을 준 심심한 마카로니 볶음과 남은 것으로 다음날 해 먹던 여전히 심심한 마카로니 달걀 부침, 정원에서 나누던 여름날의 근사한 점심, 러스크와 냄비에 끓인 까페 오 레의 소박한 아침 식사, 진한 고기 스튜와 주말의 오붓한 브런치, 해가 중천에 떠서야 일어난 게으름뱅이에게 만들어 준 샌드위치, 월남쌈, 친구가 만든 이상하지만 환장했던 무김치, 준비는 같이 하고 먹기는 나 혼자 했던 닭고기 요리, 크레페 준다던 친구 믿고 오후 네 시까지 쫄쫄 굶던 기억. 그러다 겨우 먹은 꿀 바른 크레페 한 장 따위. 그래도 우린 무어가 그리 재미있었는지 끊임없이 깔깔 웃었다. 실없는 농담에, 울면서 웃어 댔다. 손님이 되고 손님을 대접하던 식사의 기억은, 두고두고 떠올라 얼어붙을 것 같던 내 심장에 피를 돌게 했다. 그 식사의 따스함은. 음식을 나누고 웃음을 나누던 기억은.
행복, 희망 그런 추상적이고 좋기만 한 단어들이, 그리고 너무 변하기 쉬워 약해빠진 말들이 얄밉다. 좋은 단어들이라 맘 놓고 싫다는 말도 못한다. 그에 반해 요리는 구체적으로 해낼 무엇이었다. 손으로 만지고 가스불을 조절하고 도구들을 꺼내어 사용하며 끊임없이 나에 대한 위로와 즐거움을 찾던 시간 그리고 접시에 담겨지는 무언가, 내게 요리는 그런 디테일과 묵묵함과 책임의 과정이고 결과였다. 내가 만든 건 맛없어도 맛있었고 만드는 과정 자체가 맛있었다. 하나도 안 추상적이어서 사랑스러울 수밖에. 내가 집어넣는 대로 반응해 주니 내가 책임져줄 수밖에. 그리고 뭣 하나 제대로 할 줄 모르는 내가 그래도 처음부터 끝까지 해낸 것 중 하나가 파스타이니, 예뻐하고 또 해 먹을 수밖에. 파스타나 파스타와 관련된 재료들은 내게도 용케 좋은 기억을 많이 주었다. 즐거웠다. 파스타 책도, 식사 이야기도, 냉장고 뒤지다 발견한 근대를 넣고 해 먹은 이 저녁의 파스타도(아욱이었나), 파스타 이야기에서 시작된 나의 음식 이야기를 주욱 떠올려 보는 것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