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꿈의 공장 - 김한용사진연구소
김한용 지음 / 눈빛 / 2011년 4월
평점 :
품절


  

88세에 펴낸 사진집
  
 
"청춘은 희망에 살고, 백발은 추억에 산다"라는 말이 있다. 이 말은 "청춘은 희망이 있기에, 백발은 추억이 있기에 아름답다"라고 내 나름대로 풀이해 본다. 그런데 나는 아직도 희망(꿈)을, 벌써 숱한 추억을 지닌 채 살고 있으니, 어찌 보면 내 삶은 축복이기도 하고, 주책이기도 하다.

시각예술도서 전문출판사 '눈빛'의 <꿈의 공장> 사진집 책장을 넘기며 아련한 추억의 시간에 빠졌다. 

이 책은 올해 미수(米壽, 88세)를 맞은 한국 광고사진계의 대부이며, 영원한 현역 김한용 선생이 지난 60여 년간 작업해 온 인물사진과 광고사진을 한 권에 모았다. 책의 날개 면에는 고바우 모자를 쓴 김한용 선생의 깨끔한 모습을 그분의 손자 김주식씨가 렌즈에 담아 실었다. 

"1924년 평남 성천에서 태어나 1947년 국제보도연맹 소속 보도사진가로 사진에 입문하였다. 1950년 한국전쟁 중에는 … "
 
나는 이 대목에서 잠시 눈을 감고 김한용 선생의 생애에 경의를 드렸다. 우리나라 사람들의 평균수명이 늘어났다고 하지만 88세까지 몸과 마음이 건강하면서 입때까지 현역에서 일한다는 것은 대단한 축복이다. 더욱이 60년 넘게 외길로 한 분야(더욱이 춥고 배고픈 예술계)에서 일한다는 것은 삶 자체가 명장의 길로 아름답고, 한 생활인으로서 귀감이기 때문이다.
 
자, 이제 본론으로 들어가자. 

어린 시절의 추억

<꿈의 공장>은 한국 광고사진의 대부 김한용 선생이 지난 60년이 넘는 세월 동안 작업해 온 인물사진과 광고사진을 집대성한 사진집이다. 최은희, 신성일, 엄앵란, 윤정희 등 광고사진 속의 모델이 된 추억의 스타들과 그 당시 최첨단 유행을 창조했던 광고사진, 달력 사진, 각종 잡지 및 사보의 표지 사진 등, 270여 점이 컬러로 수록되어 있다.

5장과 6장에 수록된 130여 점 흑백사진은 당대 스타들과 사회 각계각층 인물들을 촬영한 사진들로, 김한용 선생의 면모를 잘 보여준다. 특히 소설가 박인환, 전 국회위원 김두한, 부산 피난 시절의 화가 이중섭의 포트레이트는 이 책에서 최초로 공개되는 희귀한 사진이다.   - 출판사제공 책 소개 요약 -

나는 앞부분 컬러사진보다 뒷부분 흑백사진에 더 눈길이 갔다. 여기에는 추억의 정감어린 얼굴들이 더 많았기 때문이다. 복혜숙, 조미령, 주증녀, 최은희, 김지미… 등의 여우와 김승호, 최남현, 황해, 주선태, 김진규, 최무룡 … 등 남우의 젊은 날 모습을 만났기 때문이다.
 

내 어린 시절 고향(경북 구미)에는 영화관이 없었다. 일주일에 한 번꼴로 영화가 들어오면 의용소방대 창고에서 상영했다. 영화가 상영한 날이면 확성기를 단 지프차가 마을을 돌면서 촌사람들을 유혹했다.

"문화와 예술을 사람하시는 구미면민 여러분, 오늘 저녁에 여러분을 모실 영화는 돈에 속고, 사랑에 우는, 눈물 없이 보지 못할 순애보로…."

그 확성기 소리를 들은 우리 악동들은 돈이 없으면 부모 몰래 뒤주의 쌀이라도 배지기하여 십리 길을 걸어 영화가 상영하는 면사무소 옆 소방대 창고로 갔다. 의자도 없는, 가마니를 깐 바닥에 앉아 영화 한 편을 감상하려면 필름이 최소한 네댓 번은 끊겼고, 화면에서는 줄곧 비가 주룩주룩 내렸다. 위의 배우들은 그때 스크린을 주름잡았던 분들이다. 픽션과 논픽션도 제대로 구별 못하는 유치한 우리 악동들은 영화를 본 다음날 악역을 맡은 배우 포스터 사진에 흠을 냈다. 그 무렵 가장 악역을 많이 맡은 배우는 이예춘, 최남현, 황해, 주선태, 복혜숙… 등이었다.

최은희와 김지미

어느 날 갑자기 '김지미'라는 배우가 혜성처럼 영화계에 데뷔했다. 그가 어찌나 아름다웠는지 그 무렵 '김지미'는 미녀의 대명사였다. 어린 눈에도 그를 보면 졸음이 달아날 정도로 예뻤다. 선배 최은희와 신인 김지미의 미모와 인기는 그 무렵 촉새들의 최대 관심거리였던바, 영화계는 이를 놓치지 않고 <춘향전>으로 일대 격돌했다.
 
신상옥 감독은 최은희, 김진규를 내세워 <성춘향>을, 홍성기 감독은 김지미, 신귀식을 내세워 <춘향전>을 만들었다. 두 작품은 희대의 라이벌 전으로 장안에 화제였다. 두 작품이 한 고전소설 <춘향전>을 각색한 한국 최초 총천연색 시네마스코프인 데다가 홍성기, 신상옥 두 감독은 당대 최고로 촉망받는 감독이었기 때문이었다.

더욱이 <춘향전>의 주인공은 20대의 새롭게 떠오르는 스타 김지미였고, <성춘향>의 타이틀롤은 그 시절 최고의 스타로 한창 연기에 물오른 30대 최은희였기에 더욱 비상한 관심을 불러일으켰다. 두 배우는 공교롭게도 각 감독의 부인으로 그야말로 물러설 수 없는 한판 자존심 대결이었다.

두 감독은 사생결단 작품에 전력투구했다. 제작비가 바닥이 난 신상옥 감독은 부인 최은희의 패물까지 팔아 충당했고, 그래도 모자라 스탭들의 밥은 외상전표로 먹었다고 한다.

1961년 정초, 영화팬들의 눈과 귀는 온통 두 영화의 운명적인 대결에 쏠렸다. 두 편 <춘향전>이 잇달아 개봉한 까닭이었다. 그해 1월 18일 국제극장에서 먼저 홍성기 감독의 <춘향전>이 개봉했고, 열흘 뒤 1월 28일 명보극장에서 신상옥 감독의 <성춘향>이 개봉됐다.

이 극적 라이벌 전에서 운명의 여신은 신상옥․최은희 부부의 손을 들어주었다. 이 영화는 당시 한 극장에서 74일이라는 기록적인 상영 끝에 서울에서만 36만 명의 관객을 동원했다.

이 명승부 결과 <성춘향>의 신상옥 감독은 '신필름' 전성시대를 구가했고, <춘향전>의 홍성기 감독은 막대한 제작비 손실에, 부인 김지미씨와 헤어지는 이중의 아픔을 겪었다. 그때 두 배우를 렌즈에 담은 김한용 선생의 후일담(작가의 말)에 그 무렵 최은희씨의 일화를 들려주고 있다.

하루는 OB 맥주 달력 1월 달용 사진 촬영을 위해 최은희 씨가 (내 스튜디오에) 왔다. 그는 맥주잔을 들고 촬영을 해야 하는 사진이었는데, "못 들겠다. 내가 기생이냐"라며 끝끝내 거부해 촬영에 실패하고 다른 연기자로 대체했다.
- <꿈의 공장> 448쪽

돈 앞에서도 당대 최고 배우로서의 자존심과 긍지를 잃지 않은 당당한 최은희씨였다. 그는 이 일화를 통해 우리에게 '최고는 뭔가 다르다'는 것을 일깨워주고 있다. 오늘의 연예인들이 본받아야 할 얘기가 아닐까. 

그 시절에 봤던 <사랑손님과 어머니>에서 어머니 역을, 그리고 <상록수>에서 채영신 역을 맡은 최은희씨의 열연은 지금도 머리속에 삼삼하다. 대붕의 연기와 프라이드를 어찌 뱁새들이 따르겠는가. 최은희 - 그는 당대, 아니 20세기 최고의 배우였다.

비운의 대통령 후보 해공 신익희 선생

이밖에도 이 사진집에는 그리운 얼굴들이 많다. 대한민국 제3대 대통령선거에 민주당 후보로 입후보하여 한강 백사장 유세장에서 청중 30만 명을 동원한 해공 신익희 선생의 사진은 지금 봐도 가슴이 아프다. 
 
우리나라 헌정 사상 처음으로 평화적 정권교체할 수 있었던 대망의 대통령선거를 열흘 앞두고, 갑작스럽게 호남선 열차에서 뇌일혈로 돌아가셨기 때문이다. 해공 선생에 대한 애도 탓인지, 그 무렵 발표된 '비 내리는 호남선'이 애창곡으로 전국방방곡곡에서 백성들의 심금을 울렸다.

<꿈의 공장>에는 연예인 외에도 김동리(소설가), 김백봉(무용가), 박목월(시인), 곽상훈(정치가), 김경승(조각가), 김광주(소설가), 김기창(화가), 김영주(삽화가), 박인환(시인), 박태준(기업인), 변관식(화가), 손원일(군인), 안익태(작곡가), 유일환(기업인), 유진오(법학자), 윤보선(정치인), 김영삼(정치인), 이승만(정치인), 이병철(기업인), 임화수(영화인), 장택상(정치인), 조병옥(정치인), 정비석(소설가), 조병화(시인), 천경자(화가), 이봉구(소설가) 등 그 시절 각계 명사들의 모습이 담겨 있었다.

이분들 가운데 나는 고교 신문배달 시절 거의 매일 만났던 '여인과 꽃과 뱀의 화가' 천경자 선생과 '명동 백작' 소설가 이봉구 선생이 가장 반가웠다. 천경자 선생은 종로구 누하동에서, 이봉구 선생은 종로구 계동에서 사셨다. 두 분 다 그때는 매우 가난한 예술가였다. 대학시절에 총장으로 뵌 유진오 박사님의 인자한 모습도 마치 어제 뵌 듯하다.

나는 밤이 깊도록 책장을 넘기며 지난 추억을 더듬었다. 누군가 그랬다. 꿈이 많은 사람은, 추억이 많은 사람은 행복하다고. 나는 가진 것은 적지만 뿌듯한 행복감을 느끼면서 450쪽이 넘는 두툼한 <꿈의 공장> 사진집을 덮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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情이란 무엇인가 - 한국인의 마음, 그 몹쓸 사랑
정운현 지음, 김선규 사진 / 책으로보는세상(책보세) / 2011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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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느 날 백수가 된 가장 

대한민국 보통 가장(家長) 49세는 허리가 휘어질 나이다. 자녀들이 고교생 아니면 대학생으로, 그야말로 '돈 먹는 하마'들이다. 정운현, 그는 2008년 10월 마지막 날, 대학생 자녀를 둘이나 둔 만 49세 가장으로 갑자기 직장(한국언론재단 이사)에서 쫓겨났다. 본인의 잘못이 아닌, 단지 지난 정권에서 임명되었다는 점 때문이었다. 
 
이즈음은 '남성수난 시대'로, 솔직히 직장에서 잘 나가는 이도 가장노릇이 힘든 세상인데, 경제력을 상실한 가장으로 사는 게 얼마나 힘들지는 나는 당해보지 않아서 모르겠다. 어느 날 갑자기 백수가 된 남편과 아버지를 날마다 바라보는 가족들의 충격 역시 제3자는 미처 헤아리지 못할 것이다.

지난해 2월 22일, 오마이뉴스 창간 10주년 기념일에 초대를 받았다. 강원도 시골사람이 그새 뽕나무 밭이 바다로 변한 듯한 상암동 누리꿈스퀘어 비즈니스타워 빌딩을 '남대문 김 서방집 찾듯이' 헤매며 찾아가자 먼저 온 그가 자리에서 일어나며 반갑게 맞았다. 본 행사가 끝난 뒤 뒤풀이 장소에서 그는 나에게 근황과 함께 새로 만든 명함을 건넸다.

나는 반가운 마음으로 명함을 받아 살폈는데 새 직장이 그의 지난 삶과는 전혀 엉뚱한 길인지라, 새 출발한 그의 앞날을 축하하려는 마음보다는 울컥한 아픔이 앞섰다. 그런 탓인지 나는 의례적으로 해야 할 "축하합니다"라는 말도 하지 않았다. 이는 '정운현'이라는 한 개인을 떠나 대한민국의 비극이요, 불행이기 때문이었다. 

한 인물이 10~20년 만에 길러지는 건 아니다. 예로부터 '교육은 백년대계'라고 하지 않는가. 사실 정운현 그만큼 친일문제에 천착해온 언론인도 드물 것이다. 제대로 돌아가는 사회라면 그가 걸어온 인생역정으로 볼 때, 그는 이즈음에 메이저 언론사에서 데스크를 지키며 후배를 지도하거나, 논설위원으로 파사현정(破邪顯正)의 곧은 필봉을 휘둘러 우리 사회가 나아가야 할 바른 길을 비추는 향도등(嚮導燈)의 역할을 해야 할 사람이다. 

나는 그를 1999년 8월 하순, 성균관대학 600주년 기념관 장세윤 박사 연구실에서 만났다. 만남의 실마리가 된 것은 1942년 8월 3일, 33세의 젊은 나이로 북만주 헤이룽장 성 깊은 산 골짜기에서 위만군(괴뢰만주군)의 총탄에 불꽃처럼 산화한 한 파르티잔(동북항일연군 제3로군 총참모장 허형식 장군) 때문이었다. 그 파르티잔을 우리나라 학술지에 처음 소개한 이가 장세윤 박사(현 동북아재단 연구위원)였고, 처음으로 국내신문에 보도한 이가 대한매일(현 서울신문) 정운현 기자였다. 또 그 인물에 매료된 나머지 그 달 봉급의 반을 뚝 잘라 홀로 북만주 대평원을 헤맨 끝에 그의 비석에 대한민국 국적으로 처음 들꽃을 바친 사람은 나였다. 한 거룩하고 순결한 파르티잔이 우리 세 사람을 인연으로 맺어주었던 것이다.

그 인연의 끈은 계속 이어져 기자와 작가로, 그 뒤는 편집국장과 시민기자로, 한때는 그의 딸을 교단에서 가르친 학부모와 교사로 명주실처럼 이어졌다. 올 1월 하순 함박눈이 펑펑 쏟아진 날, 서울 나들이 길에 그의 아픔을 조금이라도 나누고자 다이얼을 눌러 우리는 인사동 한 주점에서 만났다.
 

"올 봄에 <정이란 무엇인가>라는 책이 나올 예정입니다."
"축하합니다. 다산(茶山)도 유배시절에 유독 책을 많이 썼습니다. 그 책 서평은 내가 쓰지요."

지난 정 때문에 무의식중 불쑥 나온 말이었다.

부부, 형제, 연인, 친구... 정(情)이란 무엇인가
 

지난해 작품 취재 차 오른 귀향길에서 죽마고우를 만났다. 친구는 상전벽해가 된 고향 시가지를 바라보며 어린 시절 이야기를 꺼냈다.

"그 시절에는 세 끼 밥 먹는 게 소원이었다 아이가. 날마다 호롱불 밑에서 공부하면서 언제면 나도 밝은 전깃불 밑에서 공부해 보느냐고, 장터에 사는 아이를 마이 부러워했고, 서울로 가는 기차를 바라보면서 나도 저 기차를 타고서 서울 한번 가보는 게 꿈이었다 아이가."

그 꿈은 진작 다 이루어졌다. 그 시절 태어나 혼인 전까지 쌀 한 가마니도 못 먹고 시집간다 했지만, 요즘은 쌀밥 대신 다이어트로 그 시절 지겨웠던 나물죽이나 호박범벅을 찾고, 서울은 이제 당일치기로 다녀올 수 있게 됐다. 해외에 가기 위해 월남 전쟁터도 마다하지 않던 시골사람들도 이제는 해외여행 한두 번 다녀오지 않은 사람이 드물 정도다. 그 시절에는 자전거조차도 드물었지만, 이제는 도시, 시골 할 것 없이 집집마다 자동차를 한두 대 굴릴 정도로 물질의 풍요 속에 살고 있다.

그런데도 현대인들은 행복해 하지 않고, 우울증 환자나 자살자가 물질의 풍요에 비례해 부쩍 늘고 있다. 그 까닭은 무엇일까? 이 분야 전문가들은 그 이유를 사람과 사람 간의 정(情)이 메마른 데 있다고 진단한다. 저자는 이 책 서문에서 "사람이 좋고, 사람이 귀한 세상을 만들기 위해서는 우리 사회에 메말라가는 정을 되찾아야 한다"고, 이 책을 쓰게 된 계기를 밝히고 있다.

요즘 사람들은 말합니다. 세상인심이 각박해지고 사람 사는 게 힘들어졌다고. 세상은 하루가 다르게 변하고 남을 돌아다 볼 마음의 여유가 없는 것도 사실입니다. 그러나 세상이 아무리 변했다고 해도 변하지 않는 것도 많습니다. 사람의 근본과 성품은 쉬 변하지 않습니다. 한국인의 가슴속에는 따사로운 인정미가 여전히 살아 숨 쉬고 있습니다. 세상살이가 어려울수록 정(情)을 되찾아야 합니다. 사람이 좋고, 사람이 귀한 그런 세상으로 가꾸어 가야 합니다. 이 책이 그런 세상을 만드는 데 작은 불씨가 되기를 기대합니다.

이 책은 모두 여섯 장이다. 첫째 장 : 정(情)이란 무엇인가, 둘째 장 : 부부 간의 정, 셋째 장 : 형제 간의 정, 넷째 장 : 남녀 간의 정, 다섯째 장 : 친구 간의 정, 여섯째 장 : 사물을 사랑하는 물정(物情)으로, 이 세상에서 일어날 수 있는 모든 정을 분류하여 저자의 해박한 지식과 동서고금의 일화를 곁들여 서술하고 있다.

첫째 장 '정(情)이란 무엇인가'에서 저자는 정은 온후하고, 은근하며, 타산적이지 않고, 항시적이며, 서로 주고받는 쌍방향성이라고 풀이한다. 이와 아울러 정이 생겨나는 과정과 정에 살고, 정에 울며, 정을 노래한 한국인의 독특한 정 문화를 유려한 필치로 고금의 예화를 들어 사실감 있게 그린다. 그러면서 정의 승화는 '용서'라고 말하고 있다.

 
장 마다 소개되는 '동서고금' 일화와 아름다운 사진들

둘째 장 '부부 간의 정'에서는 먼저 부부의 의미를 말하고 있다. 40년 가까이 부부생활을 해온 나로서도 새삼 크게 감탄한 대목이 있기에 몇 구절 뽑아본다.

애초에 부부는 서로 남남이었다. 서로 전혀 모르는 사이였다. 각자 다른 집안에서 태어나 다른 환경에서 성장하였다. 각자의 개성과 다른 가치관을 가진 인격체였다. 인연이 없어서 만나지 않았다면 서로 모른 채로 살다가 죽을 것이다. 그런 사람들이 만나 부부의 연을 맺으면 그때부터는 '한 몸'이 되는 것이 부부다. … 부부의 만남은 서로 다름(차이)을 전제로 하고 있다. 결혼생활은 서로의 다름을 부각시켜 갈등관계를 촉발하는 사이가 아니라 오히려 그 반대다. 서로의 다름을 파악해 상대방을 이해하고 또 존중하게 되는 것이 부부다.

이 장에서는 저자가 직접 본 리영희 선생 부부, 칼릴 지브란의 결혼에 대한 경구, 400년 전 안동 고성 이씨 집안 청상(靑孀)이 자기 머리칼로 미투리를 삼은 이야기, 유배지에서 추사(秋史)가 먼저 간 아내를 그리며 쓴 통곡시, <접시꽃 당신>의 도종환 시인의 이야기, 삼학사 오달제, 다산 정약용의 애절한 사연을 소개하고 있다. 행여 부부생활로 갈등을 겪는 이가 이 대목을 읽는다면 부부 사이 상처의 골을 능히 메울 수 있으리라.

셋째 장 '형제 간의 정'에서는 고금의 우애를 그린 바, 여러 일화 가운데 고려 말 이조년의 '형제투금(兄弟投金)' 고사가 나에게 가장 큰 감동을 주었다. 형제가 길을 가다가 동생이 금덩이를 두 개 주워 형제가 나누어 갖고는, 잠시 후 행여 금덩이로 형을 싫어하는 마음이 생길까 두려워하여 강물에다 이를 던져버리는 대목은, 물질에 사로잡혀 골육상쟁을 벌이는 이들에게 꼭 들려주고픈 이야기다.

넷째 장 '남녀 간의 정'에서는 고려가요 <만전춘별사>, 황진이의 <상사몽>에서부터 황순원의 <소나기>, 고종석의 '가시내'와 풋사랑에 이르기까지 뜨겁고도 애달픈 사연, 그리움과 정염의 아픔, 첫사랑의 설렘 등을 그리고 있다. 이 가운데 고려가요 <만전춘별사> 5연 가운데 제1연 '내 마음은(述歌)'만 소개해 본다.

十月層氷上  층층이 언 시월 얼음장 위에
寒凝竹葉栖  찬 기운 서린 댓잎을 깔았네
興君寧凍死  차라리 그대와 함께 얼어 죽을지언정
遮莫五更鷄  새벽닭 목 비틀어 울지 못하게 하리라

다섯째 장  '친구 간의 정'에서도 숱한 고금 일화를 얘기하고 있다. 그 가운데 세대와 지위, 지역을 초월한 영남 퇴계 이황과 호남 고봉 기대승의 도타운 우정은 500년이 지난 지금 들어도 아름답다. 오늘의 호·영남인들이 이를 귀감으로 삼아야 할 고사다. 

여섯째 장은 '사물을 사랑하는 물정(物情)'으로, 고산 윤선도의 <오우가>에서 김삿갓의 <요강>, 벤저민 프랭클린의 '귀한 벗' 이야기까지 동서고금의 일화를 섭렵하고 있다. 이 장을 읽으면서 나는 문득 지난 6년간 길렀던 고양이 카사가 내내 눈앞에 어른거렸다. 

사실 사람과 동물, 아니 식물, 무생물에 이르기까지 이 세상 삼라만상은 모두가 하늘의 피조물로 사랑스럽지 않은 게 없다. 그래서 고국을, 고향을 떠난 사람들이 정든 고국이나 고향산천을 보고도 눈물을 흘리고, 죽어서 넋이라도 고국에, 고향 땅에 돌아가고자 하나 보다. 

300쪽이 넘는 본문 곳곳에는 문화일보 김선규 사진부장의 작품들이 마치 '비단에 수를 놓듯' 자리하고서는 읽는 이의 눈을 즐겁게 해주고 잠시 쉬며 책장을 넘기게 한다. 

폭거 인내하며 주옥같은 글 담은 저자, 정운현

한 역사학자는 "조선왕조가 많은 내부 모순과 부조리를 지녔으면서도, 500여 년을 유지해 온 것은 선비들이 죽음을 무릅쓴 대간(臺諫) 때문이었다"고 말했다. 현대 민주국가에서 그 대간 역할을 하는 것이 언론인이다. 
  

시속 300킬로미터로 달리는 KTX 열차에 제어장치가 없다면 얼마나 큰 재앙이 닥치겠는가. 언론의 비판은 이 고속열차의 제어장치와 같은 것이다. 나라 일에 시시비비를 가리는 일은 언론인의 기본 책무로, 이 나라와 사회의 부정과 부패를 방지하는 소금의 역할과 같다. 그런데 현 정권이 들어선 뒤 역사의 진실을 밝히고, 바른 소리를 하는 언론인을 일방으로 '네 편' '내 편'으로 갈랐다. 그런 뒤 완장부대를 앞장세워 '네 편'은 졸렬하게도 언론 광장에서 쫓아버리는 진시황의 분서갱유에 버금갈 짓을 서슴지 않았다. 역사의 정의로 볼 때 이 정권이 끝나면 이에 대한 비판과 응징이 따를 것이다.

그가  해직된 후 어느 날, 나는 저자에게 강제 해직을 '전화위복'의 계기로 삼으라고 말했다. 하지만 그에게는 오늘날 삶의 현실을 모르는 공허한 말로 비쳤을 지도 모른다. 솔직히 제3자는 어느 날 갑자기 낭떠러지에서 떨어진 그 심경을 도저히 헤아릴 수 없을 것이다. 그것도 승복할 수 없는 자에게 당한 적반하장임에야. 

자신에게 닥친 폭거를 인내로, 내공의 기회로 삼으면서, 못내 가슴 아픔을 내색치 않고, 주옥같은 글을 묵묵히 쏟아놓은 저자의 고결한 인품에 고개 숙이며 나는 마지막 책장을 덮었다. 솔직히 나는 이 책이 많이 나가기를 빈다. 그리하여 우리 사회에 정이 메마르지 않았다고, 그가 자신이 걸어온 길과 외곬의 신념이 옳았다는 자부심을 가지며 아울러 가장으로서 체면을 되찾았으면 좋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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